예루살렘을 보며 눈물 흘린 예수 [카테고리 설정이 아직되어 있지 않습니다.] 김근수 해방신학연구소장
절, 교회, 성당에 다니지 않더라도, 이웃 사랑이라는 말뜻을 모르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이웃 사랑을 싫어하거나 반대할 사람이 누가 있을까. 이웃 사랑을 강조하지 않은 문화, 철학, 민족이 인류 역사에 있었을까.
이웃은 누구이고, 사랑은 무엇일까. 이웃을 네 자신처럼 사랑하라” 계명에서 ‘너 자신처럼’은 어떤 의미일까. 자신을 사랑하라는 말은 오늘도 종교나 사회 일각에서 부정적으로 평가되기도 한다.
자기 사랑 없는 이웃 사랑은 없다
‘너 자신처럼’ 표현을 루터는 자신에 대한 사랑을 죄 많은 인간의 처신이라고 말했고, 칸트는 교만이라고 해석했다. 키에르케고르는 이웃 사랑을 자기 자신에 대한 부정으로 간주했다. 자기 사랑에 대한 부정적인 해석은 오래 되었다.
20세기에 들어, 심리학과 여성신학은 자기 사랑에 대한 부정적인 평가에 저항하기 시작했다. 에리히 프롬은 자기 삶, 정서, 성숙, 자유에 대한 열망은 인간의 바람직한 사랑에 속하고, 소유욕 가득한 자신에 대한 사랑은 욕심이라고 해석했다. 여성의 죄는 교만에 있지 않고, 자기 자신을 긍정하는 능력이 부족한 탓이라고 여성신학은 온당하게 주장했다.
자기 사랑 없이 이웃 사랑은 불가능하다. 자기 자신도 받아들이지 못하면서 어떻게 남을 받아들이겠는가. 자기 사랑은 쉽지만 또한 어렵기도 하다. 자기 자신을 혐오하는 사람이 얼마나 많은가. 자기 피부 밖으로 탈출하고 싶은 사람이 얼마나 많은가. 자기 사랑 없는 이웃 사랑은 없다. 자기 사랑을 부정적으로 이해한 경우는 유다교에 없었다.
이웃은 누구일까
유다인에게 이웃은 동족 유다인만 가리켰다. ”너에게 몸붙여 사는 외국인을 네 나라 사람처럼 대접하고, 네 몸처럼 아껴라 (레위 19,34) 구절이 나중에 추가되었다. 유다교에 호의를 가진 외국인이 이웃 개념에 또한 포함되었다.
예수 믿는 사람만 이웃이라고 생각하는 그리스도인은 오늘도 없지는 않다. 그러나, 이웃은 모든 고통받는 사람을 가리킨다.(마태 22,39) 그리스도교는 이웃을 모든 인간과 연결하고, 이웃 사랑을 모든 인간 사랑에 연결했다.
내 이웃을 내가 고르는 것은 아니다. 누가 내 이웃이고 이웃이 아닌지 내가 결정하는 것이 아니다. 내 도움이 필요한 사람이 나를 이웃으로 선택한다. 나를 도와줄 사람이 내게 이웃이 아니라, 내 도움이 필요한 사람이 내게 이웃이다. 누가 내 이웃이냐가 아니라, 나는 누구에게 이웃인가, 이다. 내가 만나는 누구나 내 이웃이 될 수 있다. 이웃은 가족, 인종, 종교, 민족, 이해관계를 뛰어넘는다.
이웃 사랑이란 무엇일까
이웃 사랑은 무엇일까. 예수는 사회적 약자에 대한 유다교 계명을 공부하고 인용했다. 남의 물건을 훔치지 않고, 동족끼리 속이지 않고, 하느님 이름으로 맹세하지 않고, 이웃을 착취하지 않고, 품삯을 다음날 아침까지 미루지 않고, 불공정한 재판을 하지 않고, 세력 있는 사람을 봐주지 않고, 형제자매를 미워하지 않고, 원수를 갚지 않는 행동이 곧 이웃 사랑이다.(레위 19,11-18) 사회적이고 구체적인 사랑이 진정한 이웃 사랑이다.
하느님에 대한 사랑과 이웃에 대한 사랑은 분리할 수 없이 연결된다고 그리스도교는 가르쳤다. 하느님에 대한 사랑은 하느님 뜻을 따르는 이웃 사랑에 달려 있다. 자기 사랑 없는 이웃 사랑은 없고, 이웃 사랑 없는 하느님 사랑은 없다. 자기 자신을 사랑하는 것처럼 이웃을 사랑하라.
하느님 사랑과 이웃 사랑이라는 예수의 계명은 유다교 계명에 비교하면 전혀 새로운 사상인가. 19세기 그리스도교 성서학자들은 그렇게 말했지만, 최근 성서학계에서 그런 주장은 크게 줄어들었다. 사랑의 이중 계명은 유다교에 이미 있었다.
침략 전쟁을 하지 않는 것이 이웃 사랑
영원한 생명이라는 주제는 1세기 유다교에서 뜨겁게 논의되었다. 영원한 생명이 정말 있느냐보다 어떻게 하면 영원한 생명을 얻을 수 있느냐에 유다인들은 더 집중했다. 하느님의 계명을 잘 지키면 영원한 생명을 얻을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실천하지 않는 계명은 연주되지 않은 악보처럼 공허하다. 하느님 사랑과 이웃 사랑을 오늘 가장 널리 실천하는 일은 침략 전쟁을 일으키지 않는 것이다. 침략전쟁은 생명을 창조하고 보존하는 하느님을 정면으로 부정하는 짓이다.
침략 전쟁을 일으키는 사람들은 교황청을 폭격이라도 하고 싶고, 하늘에 올라가 하느님과 겨루고 싶겠지만, 그들은 지옥으로 추락하고 만다. 모든 침략전쟁은 실패하고, 모든 폭군은 버림 받는다. 전쟁으로 흥한 나라는 전쟁으로 망한다. 역사의 교훈이 그렇다.
‘평화의 도시’에 내린 ‘하느님의 선물’이 이런 건가
이웃 사랑을 강조해온 이스라엘이 요즘 왜 그럴까. 그리스도교에게 오래 박해받아온 탓일까. 박해의 악순환을 끊어버릴 품위와 존엄을 이스라엘은 갖고 있지 않은가. 박해받아온 이스라엘이기에, 더 많은 용서와 사랑을 이웃 민족에게 베풀 수 있지 않은가.
히브리어 이름 네타냐후는 ‘하느님의 선물’이라는 뜻이다. 네타냐후는 정말로 하느님의 선물일까. 히브리어 예루살렘은 ‘평화의 도시’를 뜻한다. 예수는 예루살렘을 바라보며 오늘 네가 평화의 길을 알았더라면 얼마나 좋았을까!” 탄식하며 눈물을 흘렸다.(누가 19,41-42) 착한 이스라엘 사람들도 예수와 똑같은 심정일 것이다.
최근 이스라엘 병사들이 레바논 남부 마론파 기독교도 마을 데벨 시의 한 가정집 마당에서 예수 조각상을 훼손하고 있다. X(옛 트위터) 사진 갈무리. 연합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