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션토피아] ㉘가슴지느러미가 너덜너덜 찢겼다는 건 [카테고리 설정이 아직되어 있지 않습니다.] 피해자의 절규.
[폭로]
-혹시... 진료소는 처음이십니까?
-부서... 졌어요.
-네?
-치료가 되지 않을 것 같아요...
-아픈 부위를 자세히 말씀해주시죠.
-이제... 그 이전으로 돌아갈 수 없는데 치료가 무슨 소용일까요...
-여기에 오신 이유가 있을 텐데요. 마음 편안히 털어놓으세요.
-제가 여기에 온 걸 비밀로 해주실 수 있나요.
-용궁까지 묻고 가겠다고 맹세하지요.
-그 자리보다 높은 자리가 있나요?
-그 무슨 말인지?
-그래야만 단죄할 수 있어요.
-무슨 말인지...
-제가 제대로 찾아온 거였으면... 좋겠어요.
마지막 장면에선 긴 침묵이 공백을 휘감는 것이 느껴졌다. 절망에 흐느끼는 홍가오리의 모습은 보는 물살이들을 분노에 차오르게 했다. [장수일보]에서 공개한 영상의 조회 수는 하늘 무서운 줄 모르고 치솟았다. 퍼 나르는 속도만큼이나 댓글도 순식간에 불어났다.
-그 자리보다 높은 자리-> 대왕 자리 말하는 거 아님?
-두 말하면 주둥이 아픔. 이건 백 퍼 성폭행임. 가슴지느러미가 너덜너덜 찢긴 채로 죽어있었으니 이보다 확실한 증거는 없음.
-모르긴 몰라도 한두 번 당한 게 아니었을 거임. 이렇게 살다간 죽을 것 같아서 진료소 찾아간 듯.
-영상 위에 표기된 촬영날짜를 보면 [난파당]과 [의원당] 합당 전임. 다시 말해 개복치 의원은 홍가오리의 SOS를 무시하고 합당한 거.
-완전 해양 쓰레기네. 어떻게 그런 사실을 알고도 대왕과 지느러미 잡을 수 있음?
-이번 일로 개복치 후보 민낯이 드러남. 권력을 잡기 위해서라면 뭐든 할 놈임.
-대선 후보 사퇴는 물론이고, 단죄까지 해야 함.
-누가 이렇게 소설을 쓰나. 왜 죄 없는 개복치 후보님을 물고 늘어짐?
-죄가 없다고? 이게 죄가 아니면 뭐가 죄임?
-홍가오리 그 년이 성폭행을 당했는지, 지가 꼬리를 쳐서 즐겼는지 어떻게 앎?
-하긴, 얌전한 척하는 것들이 뒤에서 호박씨 잘 깜.
-알다시피 홍가오리는 200볼트의 전기를 일으킬 수 있는 괴력을 가지고 있음. 그러니 대왕의 부름에 거절할 수도 있었을 거임. 그런데 응했다? 이건 권력자 옆에 빌붙고 싶어서 교태를 부렸다고 밖에 해석이 안 됨.
-맙소사, 자살한 홍가오리에게 어떻게 그런 막말을 퍼부을 수가 있음? 이건 2차 가해임.
-실컷 즐기다가 대왕 죽으니까 후환 두려워서 자살한 거임. AI대왕을 조종하는 백합조개가 눈 시퍼렇게 뜨고 있으니 얼마나 쫄았겠음.
-그러고 보면 백합조개도 피해자임.
-별로. CEO 되고 싶어서 무늬만 혼인했던 거 모름?
-자, 다시 본론으로 돌아와서 개복치 의원은 잘못 없음. 죄라면 꼬리친 년 이야기를 들어준 것 뿐.
-미친놈들 뚫린 주둥이라고 마구 내뱉어도 되는 줄 아나. 서식처 구석탱이에서 지느러미로 홍가오리 두 번 죽인 살인자들아, 천벌 받을 거다.
-미안하지만 용왕님이 지켜주심.
대선을 코앞에 두고 연일 자극적인 기사와 폭로가 쏟아졌다. 가장 뜨거운 감자는 홍가오리의 자살이었다. 이는 풍기문란 혹은 특효성분이라는 단어까지도 완벽히 지울 만큼 회오리바람을 몰고 왔다.
은빛연어는 불가살이로부터 문제의 볼펜을 건네받았을 때 신기함을 넘어서 기이하기까지 했다. 이렇게 작은 카메라가 존재한다는 사실보다도 얇은 물건 속에 감쪽같이 숨겨진다는 게 더 놀라웠다. 볼펜에 담긴 영상을 만천하에 공개하자 곧 개복치 후보는 나락으로 떨어졌다. 얼마 후 [오션일보]에 개복치 후보의 변명이 실렸다.
-본래 호랑이 잡으려면 호랑이 굴에 들어가야, 합당 후 진상규명 위해 대왕 만나려 했지만 난파궁에서 나오지 않아 번번이 실패, 골든타임 놓친 홍가오리 사건 안타깝게 생각해
하지만 그 뒤에도 여론은 가라앉지 않았다. 심지어 백합조개마저 고춧가루를 뿌렸다. 그녀는 긴급 기자 회견을 열곤 참담한 표정으로 읍소했다.
존경하는 물살이 여러분. 대왕의 아내 되는 저는 전부터 홍가오리로 인해 극도의 스트레스를 받아 껍질이 갈라지는 등 혼수상태를 여러 번 겪었습니다. 사실 저는 알고 있었습니다. 홍가오리가 주군을 여러 번 유혹했다는 것을요... 하지만 이 해역의 안정과 평화를 위해 저 하나만 눈 멀고 입 다물면 될 일이었습니다. 그런데 이렇게 까발려지자 수치심이 온 몸을 옭죄었습니다. 생을 마감할 결심도 해보았습니다. 하지만 제가 죽으면 AI대왕님은 누가 만든단 말입니까? 그 분의 뜻과 메시지는 누가 전달한단 말입니까? 저는 남은 생을 AI대왕님의 업을 이어나가는 일에만 전념하기로 마음먹었습니다. 아내, 그리고 CEO의 역할 역시 충실히 수행해 나갈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백합조개가 왈칵 울음을 터뜨리자 듣고 있던 물살이들도 눈물바다가 되었다.
*
‘인간이 달에 착륙했을 때 이런 기분이었을까?’
C와 정면으로 마주친 두 물살이는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어미 크랩이 가르쳐준 방향대로 따라온 결과, 커다란 무언가가 떡하니 버티고 서 있었다. 상대를 압도할만한 네모난 덩치에 비해 새끼 크랩 말처럼 움직임이 굼뜬 게 그나마 다행이었다. 물결을 따라 이따금 몸을 들썩거리는 걸 보니 파래나 미역처럼 자의에 의해 움직이지 못하는 종 같았다. 찬 기운이 뿜어져 나오는 게 느껴졌는데 C를 이루고 있는 외피가 금속이기 때문인 듯했다. 장수거북은 물살이의 형질이 금속일 수 있나 하는 의구심이 들었지만 지금은 그런 걸 따질 때가 아니라고 생각했다. 거대한 직사각형처럼 생긴 C는 어찌 보면 뾰족한 뿔이 달린 심해어 같기도 했다. 하지만 문제는 이곳은 심해가 아니었다. 몸의 중간엔 아가미 모양으로 생긴 홈이 파여 있었는데 색이 바래 있었다.
은폐된 근원.
여기 문신이 새겨져 있어요.”
폼폼크랩이 낮게 외쳤다. C의 움직임이 없단 것을 확인한 장수거북은 홈 주변으로 다가갔다. 배운 적 없는 문자 ‘Collection’이 입 밖으로 발음될 리 없었다.
한글에 가끔 섞여서 본 듯도 한데...”
뜻도 알 수가 없으니 원.”
코레크티온...?”
심오한... 뜻이겠죠?”
그런데 보면 볼수록 낙서 같았다. 그러니까 몸에 새긴 문자가 아닌, 고철 위에다 누군가 그어놓은 장난처럼 보였다. 만약 이것이 생물이 아니라면 접근 방식을 달리 해야 할 것이었다. 하지만 경계의 고삐를 늦출 수 없었기에 좀 더 잠복하여 살피기로 했다.
*
개복치 후보는 살면서 지금처럼 진퇴양난을 겪은 적이 없었다. 백합조개가 눈물샘을 쥐어짠 이후로 자신에 대한 지지율은 더욱 곤두박질쳤다. 홍가오리의 호소를 묵인한 비양심적인 놈이라는 욕설이 난파선 미역 문양을 타고 심심찮게 들려왔다. 그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 날 홍가오리는 감정에 못 이겨 호흡조차 고르지 못했어. 그런데 그 현장을 몰래 담고 있었다? 정말이지 난 년이 아닐 수 없군.’
자신을 곤경에 빠뜨린 문제의 영상은 날이 갈수록 고공행진하고 있었다.
하지만 이 또한 잠재울 방법이 있지. C가 있는 한 해역은 내 편일 테니까.”
C가 누구예요?”
개복치 후보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리본장어가 저 편에서 휴대기기를 점검하다 말고 쏜살같이 달려왔다. 얼마 전, 기사가 수정되어 C에 대한 언급이 삭제되었다는 것을 리본장어는 알고 있었다. 그건 자신이 한 일이 아니었다. 또 다른 누군가가 자신의 자리를 넘볼지도 모른다는 위기감은 리본장어의 몸통을 비비꼬게 만들었다.
C가 누군지 저에게 알려주실 수 있나요? 그래야 도와드리지요. 헤헤.”
리 주필은 신경 쓰지 않아도 되는 문제야. 것보다도 분산되고 있는 표를 모으는 게 급선무 아닌가? 백합조개는 어디 있나?”
난파궁이요. 곧 나올 시간이네요.”
난파궁 앞에서 대기하고 있다가 백합조개가 나오면 이리로 오라 전해. 비장의 무기를 쓸 때가 됐거든.”
리본장어는 더 이상 질척대지 않았다. 이럴 땐 깔끔한 모습을 보여줄 필요가 있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리본장어가 백합조개를 데리고 오자 개복치 후보는 기기를 충전 중인 모든 전기가오리들에게 나가있을 것을 명했다. 리본장어 역시 눈치껏 나갔다. 두 물살이가 함께 있었던 시간은 길지 않았다. 무슨 말이 오갔는지 알 수 없지만 다음 날 백합조개는 기자회견에서 깜짝 발표를 했다.
존경하는 물살이 여러분, 저는 이번 대선에서 사퇴할 것을 공식선언하는 바입니다.”
백합조개는 담담하게 말을 이어나갔지만 자신의 위태함을 숨기려 한다는 인상을 지울 수 없었다.
어제 AI대왕님과 의논한 결과 개복치 후보에게 힘을 실어주자는 쪽으로 결정이 났습니다. 하지만 슬퍼 마십시오. 여러분의 가슴 속엔 영원히 AI대왕님이 살아 숨 쉬고 있으니까요. 우린 이제 죽어도 죽은 게 아닌 세상에서 살고 있습니다. AI대왕님 만세삼창 외치며 마무리하겠습니다.”
만세소리가 난파선 인근을 가득 울려 퍼지자 대기하고 있던 개복치 후보가 백합조개에게로 다가갔다. 그는 백합조개를 자신의 이마 위로 올렸다. 웃는 백합조개의 입가가 살짝 떨렸다.
확실히 묻어두는 거죠?”
한 주둥이로 두 말하는 물살이 아닙니다.”
개복치 후보는 평소의 정갈함을 머금은 채 답했다. 단일화 선언으로 인해 또 한 번 여론이 뒤집히자 물살이들은 갈팡질팡했다.
며칠 전만 해도 즙 짜면서 뽑아달라고 하지 않았어?”
정신이 오락가락하나 봐.”
원래 제정신은 아니었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