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응조치 없이 돈부터 내라는 동맹은 동맹이 아니다 [카테고리 설정이 아직되어 있지 않습니다.] 한미 공동 팩트시트는 일방적인 굴복의 결과문서다. 어차피 관세협상이라는 것의 본질이 그러했다. 한국은 미국에 막대한 투자와 조선 협력을 약속했다. 대신 미국이 내놓은 것이라곤 한국의 핵추진잠수함과 농축·재처리 문제에 협력하겠다는 말뿐이었다. 우리의 요구를 수용한다는 약속이 아니라 ‘협력’이 전부였던 것이다. 더군다나 한국이 내놓은 것은 이미 숫자와 제도로 굳어지고 있는데 미국이 내놓은 것은 여전히 문장과 절차에 머물러 있다. 한국은 돈과 법으로 묶였지만 미국은 말과 방향으로 약속만 했다. 이 불균형이 지금 한미관계의 민낯이다.
동맹은 침묵을 미덕으로 삼는 관계 아니다
한국의 대미투자와 미국의 핵잠, 농축·재처리 협력은 따로 떼어 볼 사안이 아니다. 애초에 하나의 교환 패키지로 제시됐다. 그렇다면 한국이 3500억 달러라는 거액을 사실상 선납하듯 내놓는 동안 미국도 그에 상응하는 조치를 내놓아야 하는 것이 상식이다. 그런데 지금까지 미국이 보여준 것은 검토하겠다”, 범정부적으로 절차를 진행 중이다”라는 말뿐이다. 핵잠 연료를 어떻게 줄 것인지, 농축과 재처리를 어떻게 허용할 것인지, 한국이 실제로 손에 쥘 수 있는 것은 아직 아무것도 없다. 그런데도 우리는 특별법까지 만들어 먼저 길을 닦아주었다.
당초 미국의 무기였던 상호관세는 위법 판결이 났다. 그렇다면 한국 정부는 기존 협상 틀을 다시 점검하겠다고 나섰어야 했다. 그런데 우리는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협상 결과를 그대로 떠안고 있다. 우리에게는 전혀 이득이 안 되는 한미 FTA도 다시 끌려나와 미국식 계산법 속에 편입됐다. 유럽은 합의 이행을 조건부로 묶고 안전장치를 넣는 방식으로 재검토하고 있다. 말레이시아는 미국의 새 관세 조치와 기존 합의 조항을 다시 따져 보는 단계다. 미국이 지금 보편관세를 부과하고 한국을 상대로 301조 조사까지 진행하는데도 서울은 좀처럼 목소리를 높이지 않는다. 동맹이라서? 동맹은 침묵을 미덕으로 삼는 관계가 아니다.
제27차 한미 통합국방협의체 회의가 열리는 23일 서울 용산구 국방부 인근에서 자주통일평화연대와 전국민중행동 회원들이 한미 동맹 현대화 반대 기자회견을 하며 반대 스티커를 붙이는 퍼포먼스를 벌이고 있다. 2025.9.23 연합뉴스
대미투자특별법도 다시 봐야 한다. 상업적 합리성을 우리가 어떻게 가려낼 것인지, 미국이 약속을 이행하지 않을 때 어떻게 대미투자를 처리할 것인지 전혀 언급이 없다. 시행령에서라도 분명히 해야 한다. 첫째, 투자사업의 수익성과 위험을 우리 기준으로 엄격히 검증하는 절차를 넣어야 한다. 둘째, 미국이 추가 관세를 부과하거나 301조 조사 결과로 한국을 압박할 경우 투자 집행을 자동 재검토하는 조항이 있어야 한다. 셋째, 안보·원자력 분야의 미국 의무 이행이 확인되지 않으면 투자 승인도 보류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
대미투자와 이에 대한 미국의 의무는 반드시 연계돼야
더구나 이번 3500억 달러는 일본이나 유럽의 합의와 비교해도 미국에게는 그야말로 ‘봉’을 잡은 결과다. 액수만 놓고 단순 비교할 일이 아니다. 일본의 5500억 달러는 거의 다가 대출과 보증이다. 유럽의 6000억 달러는 유럽 기업들에 대한 정책적 권고에 불과하다. 더군다나 유럽은 그나마도 재검토하는 중이다. 반면 한국의 약속은 ‘말’이 아니라 ‘구속력 있는 설계’다.
27일 일본경제신문과의 인터뷰에서 일본의 5500억 달러 대미투자에 관한 질문에 대답하는 하워드 러트닉 미국 상무장관. 일본경제신문 2025년 10월 27일자
그렇다면 미국의 약속도 같은 수준이어야 한다. 그런데 지금 미국이 한국에 내놓는 것은 여전히 애매한 표현들뿐이다. 특히 농축·재처리 문제에서 그 과정으로 이어지는 절차를 지지한다”는 식의 문구는 외교 수사로는 그럴듯해도 정책 보장으로는 턱없이 부족하다. 한국이 받아내야 할 것은 모호한 절차 지원이 아니라 포괄적 사전동의다.
핵잠도 마찬가지다. 정치적 승인 문구가 중요한 것이 아니다. 핵잠에서 결정적인 것은 연료다. 이재명 대통령은 우리가 원하는 것이 연료임을 분명히 했다. 우리는 미국에게 핵잠을 건설할 기술을 달라고 말한 적이 없다. 이를 미국으로부터 승인받을 일도 아니다. 그러니 연료 공급에 관한 확실한 약속 없이 건조를 승인했다”는 말만 반복하는 것은 우리에 대한 모욕일 뿐이다. 미국은 핵잠 연료를 공급한다는 약속만 하면 그만이다.
대미투자와 미국의 의무는 반드시 연계돼야 한다. 농축·재처리에 대한 포괄적 사전동의, 핵잠용 고농축우라늄 제공에 관한 분명한 약속, 그리고 그 이행 일정이 확인되기 전까지 한국의 대미투자는 단계적으로만 집행돼야 한다. 이것은 무리한 요구가 아니다. 거래를 거래답게 하자는 요구다.
정부는 또 하나를 분명히 해야 한다. 미국이 301조 조사 결과를 빌미로 한국에 고율관세를 매긴다면 3500억 달러 투자도 정상적으로 굴러갈 수 없다는 점이다. 상대가 관세를 무기로 압박하면서 동시에 투자를 요구한다면 투자 환경의 전제 자체가 무너진다. 그런데도 돈부터 보내겠다는 것은 협상이 아니라 자진 헌납이다. 한국은 최소한 추가 관세와 투자 확대는 양립할 수 없다”는 원칙 정도는 선명하게 밝혀야 한다. 그래야 미국도 한국을 만만한 상대가 아니라 협상 상대로 본다.
멈춰 세우고 협상할 것이냐, 굴복하고 더 많이 내놓을 것이냐
늘 나오는 반론이 있다. 미국을 자극하면 더 큰 보복이 온다는 것이다. 현실을 알수록 이런 식의 선제 굴종이 얼마나 위험한지 보인다. 국제관계에서 한 번 밀리면 다음 요구는 늘 더 세게 돌아오는 법이다. 이번에는 투자였고, 다음에는 방위비일 수 있고, 그 다음은 주한미군 기지의 소유권일 수 있다. 이미 트럼프는 한국의 대이란 자세를 공개적으로 비난하면서 필요하면 관세를 더 올리겠다는 식의 협박을 서슴지 않는다. 이런 압박 앞에서 어쩔 수 없다”고 물러서기 시작하면 그때부터는 끝이 없다. 외교는 상대가 넘지 못할 선을 만드는 기술이다.
무엇보다 한국에는 카드가 있다. 3500억 달러 투자 카드가 있고, 주한미군 문제를 둘러싼 전략적 선택지도 있다. 주한미군 철수나 감축을 당장 주장하자는 얘기가 아니다. 그런 문제조차 협상의 언어로 다룰 수 있어야 한다는 뜻이다. 미국이 모든 사안을 거래의 언어로 풀겠다면 한국도 국익의 언어로 응답하면 된다. 전략적 자율성은 구호가 아니다. 필요할 때 꺼내 쓰지 못하면 없는 것과 같다.
미국 이민 단속 당국이 홈페이지를 통해 지난 4일(현지시간) 조지아주 현대차그룹-LG에너지솔루션의 합작 배터리 공장 건설현장에서 벌인 불법체류·고용 단속 현장 영상을 홈페이지를 통해 공개했다. 2025.9.6 [ICE 홈페이지 영상 캡쳐. 연합뉴스
이제는 선을 그어야 한다. 미국의 약속은 아직 선언 단계에 있고, 한국의 약속은 이미 입법 단계를 거쳤다. 이 비정상을 바로잡지 못하면 이번 한미 거래는 협력이 아니라 선납으로 남을 것이다. 작년 9월 조지아주 한국인 구금사태 직후 약속했던 비자문제 해결도 감감 무소식이다. 돈을 먼저 내고 약속은 나중에 받겠다는 식의 동맹은 오래가지 못한다. 동맹은 신뢰 위에 서야 하지만, 그 신뢰는 문장이 아니라 상호 이행으로 증명된다. 지금 한국에 필요한 것은 더 많은 양보가 아니다. 먼저 내놓은 것을 멈춰 세우고 받아낼 것을 분명히 받아내겠다는 의지다. 돈부터 내라는 동맹은 동맹이 아니다. 그저 비싼 청구서일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