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무현의 꿈과 좌절이 남긴 유산 [사람들] 노무현 전 대통령은 한국 사회의 진보와 개혁을 고민하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피할 수 없는 큰 산이라고 할 수 있다. 한국인이 가장 좋아하는 역대 대통령 조사에서 항상 1위를 차지하고 있기 때문만은 아니다. 노무현 집권 당시에는 그에게 비판적이던 진보적 정치인이나 활동가들도 지금은 노무현이 남긴 유산에 대해 언급하는 상황이다.
긍정적이든, 부정적이든 노무현이 남긴 유산을 어떻게 평가하고 넘어서느냐가 한국 사회의 진보와 개혁을 위한 고민에서 빼놓을 수 없는 문제가 돼 있다. 역설적이지만, 노무현 집권 당시에는 부정적 평가가 더 많았다. 2007년 초 갤럽 여론조사에서는 2002년에 노무현에게 투표한 것을 후회한다 는 사람이 61퍼센트였다.
진보와 개혁을 지지하는 사람들 속에서 오히려 여론이 더 안 좋았다. 거기에는 이라크 파병과 한미 FTA 체결 같은 문제가 크게 작용했다. 이런 정책은 오히려 조중동과 한나라당 등의 적극적 지지 속에서 추진됐다. 반대로 노무현 정부의 등장에 큰 기대와 희망을 걸었던 박노자 교수는 당시에 이렇게 실망감을 토로한 바가 있다.
2002년 벽두에, 저는 노무현을 대통령으로 만든 대한민국이 무한히 자랑스러웠습니다. … 그러나 그 뒤로는 가슴 아픈 일이 하도 많아 ‘그때 그 감동’은 결국 여지없이 사라지고 말았습니다. 이라크 파병과 김선일의 죽음 이후에는 제게 ‘노무현’이란 더 이상 그 어떤 ‘의미 있는’ 존재는 아니었습니다.
노무현도 나중에 확실하게 저한테 속았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아마 이라크 파병할 때 그렇게 느꼈을 것입니다 라고 말했다. 이런 과정 등을 거치며 노무현 정권의 지지기반은 해체됐고, 이명박이 당선하면서 보수가 다시 집권하는 일이 벌어졌다. 왜 노무현은 지지층의 기대를 저버리고, 보수적 기득권 세력이 환영할만한 정책들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는가?
노무현, 『진보의 미래 - 다음 세대를 위한 민주주의 교과서』, 돌배게
노무현의 친필 원고와 육성 기록들로 만들어진 『진보의 미래 - 다음 세대를 위한 민주주의 교과서』는 이 과정을 돌아보며 교훈을 끌어내기 위해서 다시 읽어볼 가치가 있는 책이다. 이 책의 구상과 집필은 특히 노무현이 이명박 정권과 언론에 의해 집중적인 마녀사냥을 당하는 동안에 이루어졌다. 그래서 더 짙은 아쉬움과 후회, 고민이 담겨 있다.
나는 분배는 제대로 해 보지도 못하고 분배 정부라고 몰매만 맞았던 불행한 대통령이다. 그러다 언론과 대중적 분위기 같은 거 눈치 살피려고 [기업들] 세금이나 깎아주고 , 우리를 지지하는 많은 사람들은 신자유주의 하면 이를 가는데, 김대중·노무현이는 수용해 버렸다 이겁니다 , 우리가 진짜 무너진 건, 그 핵심은 노동이에요. 핵심적으로 아주 중요한 벽이 무너진 것은 노동의 유연성을, 우리가 정리해고를 받아들인 것이에요.
IMF 위기 속에서 김대중 정부가 채택한 정책들과 노무현 정부로 이어진 유사한 정책들이 어떤 결과를 낳았는지 노무현은 잘 알고 있었다. 빈부 격차의 원인을 우리나라에서 얘기하면 노동의 유연화라는 게 굉장히 크게 작용하고 있거든요. 정규직 일자리 점점 줄이고 해고하고, 그렇게 해서 임시직으로 일용직으로 점차 비정규직으로 떨어지니까 … 빈부 격차가 생기는
실제로 김대중, 노무현 정부를 거치면서 빈부격차와 사회적 양극화는 계속 늘어났다. 김대중, 노무현 정부는 왜 이런 선택을 할 수밖에 없었을까? 노무현은 김대중·노무현이 진보주의를 배신했다면 배신할 수밖에 없었던 환경이 있었던 것 아니냐 라고 말한다. 난 대통령이 혼자서 하는 게 아니란 얘길 해주고 싶어요. 변명을 하자는 것이 아니라 그 시대 사람들의 보편적인 생각이 정책에 미치는 영향이 크다는 얘길 하고 싶은 것이죠.
민주주의나 사회 정의보다는 경제 성장 만 강조하는 주류 언론과 그것에 휘둘리는 다수 여론에 대한 지적이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그것만으로는 설명이 되지 않는다. 사람들이 민주주의와 사회 정의보다 경제 성장만 관심 있었다면 2002년 대선에서 노무현 당선도 없었을 것이다. 2004년 기득권 세력의 노무현 탄핵 시도에 수십만 명이 거리로 쏟아져 나오지도 않았을 것이다.
2009년 5월 25일 한명숙 전 국무총리가 송민순 전 외교통상부 장관 등 참여정부 시절 외교안보 관련 인사들과 함께 고 노무현 전 대통령 분향소가 차려진 서울 역사박물관에 영정을 봉안하고 있다. 2009.5.25. 연합뉴스 자료사진
탄핵의 후폭풍 속에서 치러진 2004년 17대 총선에서 사람들은 변화와 개혁을 추진하라고 노무현의 열린우리당에게 국회 과반 의석을 선물했다. 하지만, 그 이후에도 노무현 정부와 열린우리당은 과감한 개혁을 추진하지 못하고 거듭 장벽에 부딪혔다. 그것은 선출되지 않은 진정한 권력자인 재벌, 고위 관료, 족벌 언론들이 계속 압박하고 막아섰기 때문이다.
특히, 국가 고위 관료들은 대개 정권을 뛰어넘어서 권력을 유지한다. 직업이 장·차관 이라고 할만큼 정권을 뛰어넘어서 주요 요직을 차지하며 주요한 결정권과 영향력을 행사하는 국가 고위 관료들은 노무현 정부로 하여금 재벌과 기업주들을 위한 정책을 받아들이도록 압박을 가했다. 이 책에서 노무현은 그 과정을 자세히 설명하고 있다.
정리해고? 그게 무슨 소리야. 정리해고 안 돼. 이러면 그게 어찌 말이 되느냐, 그럼 회사가 부도나는데? 이렇게 됩니다. 인수위(대통령직 인수위원회) 때 처음에 아 우리 자본이 빠져나가면 큰일인데, 외국 자본 빠져나가면 큰일인데 이래서 날 암참(주한미국상공회의소) 데리고 간 거 아니오? … 노동의 유연화, 가서 얘기하라고 써놨더구만요. 거기 가서 한 게 노사분규 없도록 하겠다. 규제를 최대한 줄이겠다. 또 기업하기 좋은 나라 만들겠다. 그런 얘기했죠? … 그 뒤에도 이제 법인세 감세했거든요? 관료들이 감세안을 가지고 와서 밀어붙였는데 청와대에서도 국회에서도 아무도 방어해 주는 사람이 없었어요.
곽정수 기자도 이렇게 회고한 적이 있다. 한 기자가 재정경제부(현 기획재정부) 고위 관료에게 은근한 말투로 물었다. 개혁성향의 노무현 정부가 들어섰으니 이제 (관료들) 좋은 시절도 다 지나간 것 같은데…. 하지만 다음 순간 돌아온 답변에 기자는 말문이 막힐 수밖에 없었다. 걱정 말어. 우리는 민주노동당이 집권해도 다 적응할 수 있으니. 아마 6개월 뒤에는 우리 세상이 돼 있을걸.
여기서 노무현을 압박한 관료들의 논리는 의미심장하다. 우리 자본이 빠져나가면 큰일인데, 외국 자본 빠져나가면 큰일인데 . 그리고 바로 이것은 고위 관료들과 함께 노무현을 압박한 재벌과 족벌 언론들의 논리이자 행동이었다. 사회학자 이종보는 김대중, 노무현 정부 모두 집권 초기에 재벌들의 설비투자가 줄어들었던 사실을 제시한다.
이재명 대통령 부부, 권양숙 여사와 장남 건호 씨, 문재인 전 대통령 부부가 23일 경남 김해 봉하마을에서 열린 고 노무현 전 대통령 서거 17주기 추도식에서 국화를 들고 헌화대로 향하고 있다. 2026.5.23 [청와대통신사진기자단] 연합뉴스
재벌들이 재벌개혁을 표방한 정부의 집권 초기에 설비투자를 줄여 놓다가 재벌 정책의 완화를 지켜보면서 설비투자를 늘린 것은 우연이 아니 라는 말이다. 재벌들이 자본 파업 을 통해 개혁을 표방한 정부를 압박하고 길들였다는 지적과 분석이다(이종보, , 2010).
노무현 정부도 초기부터 재벌들의 집요한 공격을 받았다. 전경련 상무 김석중은 노무현의 인수위원회 시절에 와 인터뷰에서 그들[노무현 정부]의 목표는 사회주의적이다. 우리는 그것에 대해 우려하고 있다 라고 말하며 새 정부를 공격했다. 한나라당과 조중동같은 족벌 언론들은 그런 압박을 거들었다.
재벌과 고위 관료, 기득권 우파들의 이런 압박 속에서 노무현 정부가 원래 내세웠던 변화와 개혁의 약속은 점차 사라졌고 반면에 재벌과 기득권 세력들이 환영할만한 정책들이 우선 채택되고 추진되기 시작했다. 이처럼 개혁을 약속하며 선출된 정부가 선출되지 않은 권력자들의 압박에 포위되는 과정은 국제적으로나 역사적으로도 흔하다.
1964년에 집권한 영국 노동당의 해럴드 윌슨 총리가 영국은행 총재의 공공지출 삭감 요구에 굴복한 사례는 유명하다. 윌슨은 당시 상황을 이렇게 묘사했다. 나는 총재에게 물었다. 그렇다면 어떠한 정부도 그 당의 이름이야 무엇이고 또 선거전에서 내세웠던 당의 강령이나 정책이 무엇이고 관계없이 즉각 보수당의 정책으로 전면 전환하지 않으면 살아남지 못한다는 뜻이냐고. (알렉스 캘리니코스, 『‘제3의 길’은 없다』)
이처럼, 『진보의 미래』에서 노무현은 진보적인 개혁이 어떻게 장벽에 부딪히고 좌절했는지 솔직하게 돌아보며 후회도 한다. 지금 생각해 보면, 그럴 거 없이 색연필 들고 쫙 그어 버렸으면 되는 건데 … 무슨 소리야 이거. 복지비 그냥 올해까지 30프로, 내년까지 40프로, 내후년까지 50프로 올려. 그냥 쫙 그어 버렸어야 되는데, 앉아서 이거 몇 프로 올랐어요? 했으니
하지만 분명한 대안을 찾아서 제시하지는 못하고 있다. 그러면서 우리 대답은 이거다 하고 나가야 되거든요. 그래야 되는데 신통한 게 없어요 라고 답답함을 고백한다. 이러한 답답함 속에서 대안을 찾아헤매던 시기에, 이명박 정부는 2008년 말부터 본격화된 박연차 게이트 수사로 노무현을 낭떠러지로 내몰았다.
노무현은 마지막으로 저는 이미 헤어날 수 없는 수렁에 빠져 있습니다. 여러분은 이 수렁에 함께 빠져서는 안 됩니다. 여러분은 저를 버리셔야 합니다 라는 글을 남겼다. 이어진 노무현의 비극적 죽음은 지못미 (지켜주지 못해서 미안해) 열풍을 일으켰다. 사람들은 이명박 정부가 온갖 악독한 정책들로 사람들을 괴롭힐 뿐만 아니라 노무현까지 죽였다는 것을 깨달았다.
노무현 전 대통령. 노무현 재단
무려 연인원 500만 명이 노무현을 조문했고 노제 때는 50만여 명이 모여서 눈물을 흘렸다. 거대한 추모 물결 속에는 이명박 정부에 대한 분노와 노무현의 스러진 꿈에 대한 슬픔이 담겨 있었다. 사람들은 그동안 너무 힘들었다. 앞으로 받을 고통도 헤아릴 수 없다 는 노무현의 유서를 통해 자신들의 고통스러운 삶을 돌아 봤다. 그리고 노무현의 꿈이 어떻게 산산조각났는지 곱씹어보기 시작했다.
바로 그런 분노, 자각, 고민들이 씨앗이 돼서 2016년 거대한 촛불혁명 과 박근혜 탄핵 투쟁으로 이어졌다고 볼 수 있다. 그 불씨는 2023년 윤석열의 12.3 쿠데타를 막아내고 탄핵과 정권 교체를 이루어낸 거대한 빛의 혁명’으로도 이어졌다. 그것은 바로 노무현도 강조해 온 깨어있는 시민들의 조직된 힘 이었다고 볼 수 있다.
2004년에 노무현이 우파들의 탄핵 시도에서 살아난 배경에도 바로 그 힘이 있었다. 하지만 그 힘은 아직 노무현이 고민하고 끝내 답을 찾지 못한 문제를 해결하지 못했다. 2016년 촛불혁명 이후에 등장한 문재인 정권도 코로나 팬데믹 등의 악조건 속에서도 의미있는 개혁의 성과들을 이루기도 했지만 재벌, 거대 언론, 관료 권력 등의 거듭되는 방해를 이겨내지 못했다.
부동산 폭등 속에 더 확대된 자산격차, 청년실업, 양극화는 좌절과 박탈감을 낳았고 결국, 윤석열 검찰 정권 탄생의 자양분이 됐다. 윤석열 정권은 내란을 일으켜 민주주의를 말살하며 영구집권을 하려고 시도했고, 우리는 가까스로 그것을 막아냈다. 그리고 이제 빛의 혁명 으로 다시 정치권력을 교체했지만, 사회경제적 토대에서 기존 구조는 아직 근본적으로 달라진 것이 아니다.
언론 권력, 재벌 권력, 검찰 권력, 사법 권력 등은 여전히 같은 세력이 움켜쥐고 있다. 추락하던 경제 지표들이 나아지고 있지만, 경제의 장기적 정체와 양극화의 흐름은 여전하고, 국내 극우세력과 연결된 트럼프 정권의 막무가내식 압박은 새 정부의 발목을 잡고 있다. 낡은 관행에 익숙하고 기득권과 이해관계를 공유하는 관료 사회는 이재명 정부의 방향에 순순히 따르지 않을 수 있다.
이재명 대통령도 이것을 인식하고 있다. 로보트 태권브이처럼 빨간색 지휘관을 머리로 꽂으면, 회색인 관료 조직은 발끝까지 빨간색을 만들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 … [하지만] 나중에 보니까 회색이 침투해서 거무튀튀하게 변해 있다. … 관료 조직에 들어가면 힘들다. 사상 투쟁도 해야 하고, 논리 투쟁도 해야 하고, 권력 투쟁도 해야 한다.
이런 상황에서 한국 사회의 더 철저한 진보와 개혁을 꿈꾸는 이들은 이재명 정부의 개혁이 이런 장벽에 가로막히는 것을 그냥 지켜봐야 할 것인가? 아니면 이재명 정부의 성공을 위해 무조건적 응원과 지지만 보내야 할까? 개혁의 성공을 위해서 민주당으로 힘을 집중해야 할까? 아니면 민주당을 넘어서는 정치적 대안이 필요한가? 『진보의 미래』를 다시 읽으면서 계속 답을 찾아야할 중요한 질문과 고민들이다.
전지윤 사회운동가·연구평론가 misotolenin@gmail.com전지윤 사회운동가·연구평론가 misotolenin@gmail.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