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유 의 이름으로 자유를 억압하는 극우집단 [사람들] 인류 문명을 움직여온 가장 강력한 힘은 무엇이었을까요. 전쟁이었을까요. 폭력이었을까요. 아니면 경쟁이었을까요. 인간의 역사는 분명 지배와 충돌의 역사이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인류학과 진화심리학 연구들은 오히려 인간 문명의 핵심 조건 가운데 하나로 협력(cooperation)을 지목해왔습니다. 인간은 혼자 살아남을 수 없는 존재였고, 서로 협력하고 지식을 공유하며 공동체를 조직하는 과정 속에서 문명을 발전시켜왔다는 것입니다(Henrich & Muthukrishna, The Origins and Psychology of Human Cooperation”, 2021).
인간은 혼자 살아갈 수 없는 존재였습니다. 그래서 공동체를 만들었고, 공동체는 다시 하나의 질문과 마주하게 됩니다. 우리는 어떻게 함께 살아갈 것인가.”인류가 발전시켜온 수많은 철학과 정치사상은 사실상 이 질문에 대한 답변의 역사였습니다.
존 로크(John Locke, 1632~1704)는 절대왕정의 폭력 속에서 자유를 고민했고, 장 자크 루소(Jean-Jacques Rousseau, 1712~1778)는 귀족 특권과 불평등 속에서 국민주권을 고민했습니다. 존 스튜어트 밀(John Stuart Mill, 1806~1873)은 산업화와 대중정치의 시대 속에서 자유와 공론장의 조건을 고민했고, 한나 아렌트(Hannah Arendt, 1906~1975)는 전체주의의 폐허 위에서 인간이 왜 서로를 파괴하게 되는지를 다시 질문했습니다. 그들의 사상은 지적 유희가 아니었습니다. 각 시대 사람들이 실제로 마주했던 위기를 해결하기 위한 치열한 고민이었습니다. 공동체는 왜 무너지는가. 인간은 왜 광기와 선동 속으로 빠져드는가. 자유는 어떻게 지켜질 수 있는가에 대한 문명적 질문이었습니다. 그러한 고민과 반성, 수정과 발전이 축적되며 오늘날 민주공화정이라는 질서가 형성되었습니다. 민주공화정은 단순한 정치기술이 아닙니다. 인간이 서로를 시민으로 인정하며, 공론과 숙의, 참여와 책임 속에서 공동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어렵게 발전시켜온 문명적 질서에 가깝습니다. 그런데 오늘날 세계 곳곳에서는 바로 이 질서 자체를 피곤해하는 정치가 다시 등장하고 있습니다.
생각하기보다 믿기를 원하고, 토론하기보다 충성하기를 원하며, 공존하기보다 적을 제거하기를 원하는 정치입니다. 복잡한 현실을 이해하기보다 단순한 적과 구호 속에서 안도감을 얻고, 스스로 판단하기보다 강한 지도자의 확신 속으로 숨어드는 정치입니다. 바로 오늘날 극우정치의 모습입니다. 극우는 끊임없이 자유를 말합니다. 표현의 자유를 주장하고, 자신들에 대한 비판을 검열과 독재라고 규정합니다. 그러나 정작 그들은 자유주의와 민주공화정이 유지되기 위한 조건 자체를 허물어갑니다. 그들은 상대를 설득하려 하지 않습니다. 사실과 논리로 토론하려 하지도 않습니다. 대신 조롱과 혐오, 밈과 짤, 음모론과 선동을 통해 공론장을 감정의 전시장으로 바꾸려 합니다.
오늘날 한국의 일부 극우 커뮤니티 문화는 이러한 특징을 선명하게 보여줍니다. 세월호 희생 학생들을 ‘어묵’이라는 표현으로 조롱하고, 노무현 전 대통령의 죽음을 ‘운지’와 ‘뉴턴’이라는 은어로 희화화하며, 5·18민주항쟁을 조롱과 왜곡의 대상으로 소비합니다. 일부 디시인사이드 극우 갤러리와 일베, 펨코(에펨코리아) 일부 극우 성향 게시판 등에서는 이러한 문화가 반복적으로 재생산되어 왔습니다(한겨레, 2013.5.23 / 경향신문, 2019.2.9 / 프레시안, 2021.1.28). 심지어 노무현 추도식 현장에 몰려가 자신들만의 은어와 상징을 남기고 이를 영상으로 유통하며 추모객들을 비웃는 행태까지 반복되어 왔습니다. 이것은 단순한 인터넷 일탈이 아닙니다. 극우는 공동체의 비극과 기억, 규범과 윤리 자체를 놀이화합니다. 시민들이 공동체 문제를 진지하게 바라보고 토론하기 시작하면 극단주의 정치는 힘을 잃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자신들만 이해할 수 있는 암호와 밈을 만들고, 그것을 공유하며 집단적 소속감을 확인합니다. 조롱은 놀이가 되고, 혐오는 공동체 의식이 됩니다. 그리고 그 순간 공론장은 흔들리기 시작합니다. 공론장은 상대방을 시민으로 인정할 때만 유지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상대를 조롱 가능한 대상으로 바꾸는 순간, 토론은 사라지고 적대만 남게 됩니다. 그래서 극우는 자유주의와 민주공화정 모두와 충돌할 수밖에 없습니다. 자유주의와 민주공화정은 애초 이성, 사실, 공론, 시민적 존중 위에서 성립한 질서였기 때문입니다.
자유주의는 왜 군중의 광기를 두려워했는가
오늘날 극우는 종종 자신들을 자유의 수호자인 것처럼 말합니다. 표현의 자유를 주장하고, 자신들에 대한 비판을 검열과 독재로 규정합니다. 그러나 자유주의 사상가들이 오래전부터 가장 경계했던 것 가운데 하나는 자의적 권력과 군중의 광기였습니다. 존 로크가 살았던 시대의 핵심 문제는 절대왕정이었습니다. 왕은 신의 이름으로 권력을 독점했고, 시민의 생명과 자유, 재산은 언제든 침해될 수 있었습니다.
로크는 『통치론(Two Treatises of Government, 1689)』에서 국가권력조차 시민의 동의 위에서만 정당성을 가질 수 있다고 주장했습니다. 시민의 권리를 파괴하는 권력은 정당성을 상실하며, 시민은 이에 저항할 권리를 가진다고 보았습니다(Stanford Encyclopedia of Philosophy, 「John Locke」). 로크에게 자유란 무엇이든 마음대로 할 수 있는 상태”가 아니었습니다. 인간이 자의적 권력에 지배당하지 않는 상태에 가까웠습니다. 자유주의는 애초 강한 권력을 어떻게 제한할 것인가”라는 질문 속에서 등장했습니다.
그러나 산업화와 대중사회가 등장하며 자유주의는 또 다른 위협과 마주하게 됩니다. 왕권은 약화됐지만, 대중언론과 선동정치, 군중심리가 사회 전체를 흔들기 시작한 것입니다. 이러한 시대적 충격 속에서 등장한 인물이 존 스튜어트 밀이었습니다. 밀은 『자유론(On Liberty, 1859)』에서 국가 검열만 우려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는 사회 전체가 감정적 여론과 집단심리 속으로 빨려 들어갈 경우 자유 자체가 무너질 수 있다고 보았습니다. 특히 그는 사회의 폭정(tyranny of society)”을 위험하게 생각했습니다. 국가권력뿐 아니라 사회 전체가 특정 개인을 공격하고 침묵시키기 시작할 때 인간은 더 이상 자유롭게 사고할 수 없게 된다는 것입니다.
오늘날 극우정치는 밀의 문제의식을 놀라울 정도로 현실적으로 보여줍니다.
오늘날 극우는 표현의 자유를 말하지만, 실제로는 온라인 린치와 신상털기, 좌표찍기, 혐오 선동과 음모론 유포를 통해 공론장 자체를 압박합니다. 특정 기자와 교사, 학자와 시민운동가들을 집단적으로 공격하며 침묵을 강요합니다. 국가 검열이 아니라 군중의 공격이 새로운 공포로 작동하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바로 이 지점에서 오늘날 극우는 자유주의의 수호자가 아니라, 오히려 자유주의 사상가들이 오래전부터 우려했던 또 다른 형태의 권력에 가까워집니다. 그것은 총칼을 든 국가권력만이 아니라, 군중의 분노와 혐오, 선동과 집단심리가 만들어내는 비이성적 지배입니다.
오늘날 극우정치는 단순한 의견 경쟁이 아니라 플랫폼과 감정동원을 통해 시민을 군중으로 전환시키는 방향으로 움직이기 시작했다.
오늘날 미국 MAGA 세력 역시 비슷한 흐름을 보여줍니다. 그들은 표현의 자유(free speech)”를 반복적으로 주장하지만, 실제로는 음모론과 허위정보, 선거불복 서사를 통해 민주주의 자체에 대한 신뢰를 흔들어왔습니다. 최근 외신들 역시 미국과 유럽의 극우세력이 ‘표현의 자유’를 정치적 무기로 사용하며 민주주의 제도와 공론장을 공격하는 현상을 반복해서 지적하고 있습니다(르몽드, 2025.1.20 / 가디언, 2025.2.21). 특히 가디언은 독일 극우정당 독일을 위한 대안(AfD)과 미국 부통령 J. D. 밴스(J. D. Vance, 1984~ )를 둘러싼 논쟁을 다루며 오늘날 민주주의가 직면한 핵심 질문을 이렇게 제기했습니다. 표현의 자유를 존중하면서도 민주주의를 파괴하는 극단주의를 어떻게 막을 것인가”(가디언, 2025.2.21). 결국 이것은 로크와 밀이 각자의 시대에서 던졌던 질문과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자유는 어떻게 지켜질 수 있는가. 그리고 자유를 파괴하는 권력은 과연 국가권력만인가. 민주주의를 무너뜨리는 것은 독재자만이 아니라, 군중의 광기와 선동일 수도 있다는 사실을 자유주의는 오래전부터 경고해왔던 것입니다.
인간은 왜 자유로부터 도피하는가
왜 어떤 사람들은 스스로 생각하고 토론하는 시민이 되기보다, 강한 지도자와 단순한 구호 속으로 빨려 들어가는 것일까요. 왜 복잡한 현실을 이해하려 하기보다 음모론과 혐오, 선동 속에서 더 큰 안도감을 느끼는 것일까요. 독일 출신 철학자이자 정신분석학자인 에리히 프롬(Erich Fromm, 1900~1980)은 바로 이 문제를 깊이 고민했던 인물입니다. 프롬은 나치즘이 성장하고 독일 사회가 히틀러에 열광하는 장면을 직접 목격했습니다. 그는 단순히 독재자가 나빴다” 수준으로 문제를 보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더 근본적인 질문을 던졌습니다. 왜 사람들은 스스로 자유를 포기하며 권위주의에 복종하려 하는가.” 프롬은 『자유로부터의 도피(Escape from Freedom, 1941)』에서 인간은 자유를 원하면서도 동시에 자유를 두려워한다고 분석했습니다. 자유란 단순한 해방이 아니라 책임이기 때문입니다. 자유로운 시민은 스스로 판단해야 하고, 공동체 문제를 고민해야 하며, 자신의 선택에 책임져야 합니다. 타인과 공존하는 법도 배워야 합니다. 그러나 이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닙니다. 불안하고 피곤한 일입니다. 그래서 어떤 인간들은 자유의 불안을 견디지 못하고 강한 권위 속으로 도피하려 한다는 것입니다. 프롬은 이러한 심리가 파시즘과 전체주의의 중요한 토대가 된다고 보았습니다.
오늘날 극우정치 역시 매우 비슷한 구조를 보입니다. 그들은 복잡한 현실을 단순한 적대 구도로 바꿉니다. 경제위기가 오면 이주민 때문이라고 말합니다. 사회갈등이 커지면 좌파 때문이라고 말합니다. 불안한 국제정세는 외부세력과 음모 때문이라고 말합니다. 그리고 강한 지도자에게 충성하면 모든 문제가 해결될 것처럼 주장합니다. 그 과정에서 시민은 점점 사라집니다. 대신 분노하는 군중, 충성하는 추종자, 선동되는 집단이 등장하기 시작합니다.
그러나 이러한 현상은 단순한 집단심리만으로 설명되지 않습니다. 오늘날 극우정치는 시민들의 불안과 분노를 조직적으로 동원하고 확대 재생산하는 정치적 구조와 결합해 움직입니다. 특정 정치세력과 미디어, 유튜브와 SNS 알고리즘, 온라인 커뮤니티와 이념조직들이 끊임없이 분노와 혐오를 증폭시키며 현실을 단순한 적대 구도로 몰아갑니다.
시민이 복잡한 현실을 숙고하고 토론하기 시작하면 극단주의 정치는 힘을 잃습니다. 반대로 분노와 공포, 피해의식 속에 놓인 군중은 훨씬 쉽게 동원됩니다. 그래서 오늘날 극우정치는 끊임없이 시민들을 불안하게 만들고, 공동체에 대한 불신을 확대하며, 공통의 현실 자체를 흔들려 합니다. 그것은 단순한 의견 표출이 아니라 인간의 판단능력과 공론장 자체를 피로하게 만드는 정치에 가깝습니다.
오늘날 미국 MAGA 정치가 보여주는 모습 역시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도널드 트럼프(Donald Trump, 1946~ )는 자신을 미국을 다시 구원할 강한 지도자”처럼 묘사하며 정치적 반대세력을 국가를 파괴하는 적으로 규정해왔습니다. 언론은 국민의 적(enemy of the people)”이 되고, 선거 결과는 음모가 되며, 사법기관과 행정기관은 딥스테이트(deep state)”로 불립니다.
그리고 지지자들은 점점 현실의 복잡한 구조보다 지도자의 확신과 감정에 의존하기 시작합니다. 2021년 1월 6일 미국 의회 난입 사태는 이러한 정치가 어디까지 갈 수 있는지를 보여준 대표적 장면이었습니다. 선거 결과를 인정하지 못한 군중이 의회를 직접 공격했고, 민주주의의 가장 기본적 절차 가운데 하나인 권력 이양 자체를 물리적으로 막으려 했습니다(브리태니커, 2025 / 뉴욕타임스, 2025.1.5).
한국 사회 역시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오늘날 일부 극우세력은 부정선거론, 중국 개입설, 헌법기관 불신, 법원 공격, 내란 동조 선동 등을 끊임없이 반복하고 있습니다. 일부 극우 유튜브와 온라인 커뮤니티는 정치와 사회문제를 사실과 분석으로 설명하기보다 음모론과 혐오, 공포와 피해의식으로 조직하고 있습니다. 이 과정에서 극우는 단순히 상대를 비판하는 데 그치지 않습니다. 공동체의 규범과 상식 자체를 희화화합니다. 세월호와 5·18, 노무현 전 대통령의 죽음 같은 공동체의 비극조차 조롱과 놀이의 대상으로 소비하며 시민적 공감과 윤리 자체를 무너뜨립니다. 이러한 희화화는 단순한 인터넷 장난이 아닙니다. 시민들이 공동체 문제를 이성과 토론으로 바라보지 못하게 만들고, 공론장 자체를 냉소와 조롱의 공간으로 전락시키는 정치적 행위에 가깝습니다. 공동체의 상식과 규범, 공적 기억 자체를 놀이화함으로써 시민들의 현실인식과 판단능력을 무력화하는 것입니다. 민주공화정은 애초 시민들이 최소한의 상식과 규범, 공통의 현실을 공유할 때만 유지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극우정치는 바로 그 기반 자체를 흔듭니다. 공동체의 비극을 조롱거리로 만들고, 역사적 기억을 희화화하며, 공적 질서 자체를 냉소의 대상으로 바꿉니다. 그렇게 되면 시민들은 더 이상 사회문제를 숙의와 토론의 대상으로 바라보지 않게 됩니다. 대신 분노와 혐오, 음모론과 적대 속에서 서로를 공격하는 군중으로 변하기 시작합니다.
바로 이 지점에서 극우정치는 현실인식 자체를 흔드는 일종의 인지전(cognitive warfare)의 성격을 띠게 됩니다. 공동체의 신뢰와 상식, 사실과 규범을 끊임없이 흔들어 시민들이 무엇이 진실인지 판단하지 못하게 만들고, 결국 강한 지도자와 단순한 확신 속으로 몰아가는 것입니다. 오늘날 세계 극우정치는 정치권력과 미디어 생태계, 플랫폼 알고리즘과 온라인 커뮤니티, 이념조직과 결합하며 시민들의 감정과 불안을 조직적으로 동원하고 있습니다. 혐오와 조롱, 음모론과 역사왜곡은 단순한 일탈이 아니라 공론장을 무력화하고 시민을 군중으로 전환시키기 위한 정치적 기술로 작동하기 시작한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날 민주공화정의 위기는 단순한 정당 경쟁의 문제가 아닙니다.
그것은 인간을 시민으로 바라볼 것인가, 아니면 동원 가능한 군중으로 바라볼 것인가의 문제에 가깝습니다. 민주공화정은 숙의와 참여, 책임과 공존을 전제로 움직입니다. 반대로 극우정치는 충성과 적대, 감정과 복종을 중심으로 움직입니다. 민주공화정은 시민을 요구하지만, 극우는 군중을 원합니다.
극우는 왜 공론장을 두려워하는가
독일 철학자 위르겐 하버마스(Jürgen Habermas, 1929~ )는 민주주의를 단순한 선거제도로 이해하지 않았습니다. 그에게 민주주의는 시민들이 서로 토론하고 설득하며 공동체 문제를 해결해가는 과정이었습니다. 하버마스는 특히 근대 민주주의 발전 과정에서 형성된 공론장(public sphere)의 중요성을 강조했습니다. 시민들은 광장과 카페, 신문과 토론 공간에서 사회문제를 논의했고, 권력을 비판하며 공공의 문제를 함께 고민했습니다. 민주주의는 단지 투표장에서만 움직이는 체제가 아니라, 시민들이 서로를 동등한 존재로 인정하며 대화할 수 있을 때 비로소 유지된다는 것입니다. 그는 『공론장의 구조변동(The Structural Transformation of the Public Sphere, 1962)』에서 공론장이 무너질 경우 민주주의 역시 껍데기만 남게 될 수 있다고 경고했습니다.
공론장은 서로를 시민으로 인정할 때만 유지될 수 있다. 혐오와 조롱이 정치가 되는 순간 민주주의는 내부에서부터 흔들리기 시작한다.
오늘날 극우정치는 바로 이 공론장 자체를 흔들고 있습니다. 극우는 토론을 피곤한 것으로 만들고, 사실보다 감정을 앞세우며, 숙의보다 즉각적 반응을 유도합니다. 시민들이 사회문제를 복잡하게 이해하려 하기보다 단순한 적과 음모론 속에서 움직이도록 몰아갑니다. 특히 오늘날 디지털 플랫폼 환경은 이러한 극우정치와 결합하며 훨씬 더 위험한 형태로 발전하고 있습니다. 유튜브와 SNS 알고리즘은 차분한 설명보다 자극적 감정에 더 강하게 반응합니다. 혐오와 분노, 충격과 공포가 더 많은 조회수와 확산을 만들어내기 때문입니다. 극우정치는 바로 이 구조를 적극적으로 활용합니다. 복잡한 현실은 사라지고, 짧고 자극적인 영상과 음모론, 분노의 언어가 공론장을 빠르게 잠식합니다. 오늘날 세계 극우세력은 더 이상 단순한 오프라인 정치조직만이 아닙니다. 유튜브 채널과 온라인 커뮤니티, SNS 계정과 알고리즘, 후원 플랫폼과 밈 문화까지 결합한 거대한 감정동원 체계에 가깝습니다.
이 과정에서 시민들은 점점 숙고하기보다 반응하게 됩니다. 긴 글과 토론을 읽기보다 짧은 영상과 강한 구호 속에서 현실을 판단하게 됩니다. 공론장은 시민적 토론 공간이 아니라 감정적 동원 공간으로 변질되기 시작합니다.
하버마스가 우려했던 것도 바로 이러한 상황이었습니다. 시민들이 더 이상 서로를 설득 가능한 존재로 바라보지 않게 되는 순간 민주주의는 점점 약화되기 시작한다는 것입니다. 오늘날 극우정치는 단지 특정 정책을 주장하는 정치가 아닙니다. 시민들이 함께 현실을 이해하고 토론할 수 있는 기반 자체를 흔드는 정치에 가깝습니다. 특히 극우는 공동체의 상식과 공적 기억 자체를 끊임없이 공격합니다. 언론은 거짓이라고 말하고, 학계는 좌파라고 공격하며, 선거제도는 음모라고 주장합니다. 역사적 비극은 희화화되고, 공동체의 윤리는 냉소의 대상이 됩니다.
결국 시민들은 무엇이 사실인지조차 확신하지 못하게 됩니다. 러시아 출신 언론인 피터 포메란체프(Peter Pomerantsev, 1977~ )는 이러한 현대 정치의 특징을 아무것도 진실이 아니고 모든 것이 가능하다(Nothing Is True and Everything Is Possible)”라는 표현으로 설명했습니다. 그는 현대 권위주의와 정보전이 단순히 거짓말을 퍼뜨리는 수준이 아니라, 시민들이 현실 자체를 신뢰하지 못하도록 만드는 방향으로 움직인다고 분석했습니다(Pomerantsev, 『Nothing Is True and Everything Is Possible』, 2014). 무엇이 진실인지 판단할 수 없게 되면 사람들은 결국 사실보다 감정에 의존하게 됩니다. 그리고 그 순간 강한 지도자와 단순한 확신, 적대와 혐오가 더 쉽게 힘을 얻게 됩니다. 바로 그렇기 때문에 오늘날 민주공화정의 위기는 단순한 정당 경쟁의 문제가 아닙니다. 시민들이 함께 현실을 이해하고 토론할 수 있는 공론장 자체가 흔들리고 있다는 점에 더 가까운 문제입니다.
자유는 왜 ‘비지배(non-domination)’여야 하는가
오늘날 극우는 끊임없이 자유를 말합니다. 국가의 규제를 비판하고, 검열 반대를 외치며, 표현의 자유를 주장합니다. 그러나 여기에는 매우 중요한 질문이 빠져 있습니다. 과연 자유란 무엇일까요. 단지 국가가 간섭하지 않는 상태가 자유일까요. 아니면 인간이 두려움과 압박, 자의적 권력으로부터 벗어나 시민으로 살아갈 수 있는 상태까지 포함하는 것일까요.
아일랜드 출신 정치철학자 필립 페팃(Philip Pettit, 1945~ )은 바로 이 문제를 깊이 고민했습니다. 페팃은 『공화주의(Republicanism, 1997)』에서 자유를 단순한 비간섭(non-interference)”으로만 이해해서는 안 된다고 주장했습니다. 예를 들어 노예 주인이 오늘은 간섭하지 않겠다”고 말한다고 해서 노예가 자유로운 존재가 되는 것은 아닙니다. 비록 당장 간섭받지 않더라도 언제든 지배당할 수 있는 위치 자체가 이미 자유롭지 못한 상태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페팃은 진정한 자유를 비지배(non-domination)”로 설명했습니다. 인간이 자의적 권력과 공포에 휘둘리지 않고 시민으로 살아갈 수 있는 상태 말입니다.
이 문제는 오늘날 민주주의 현실과도 깊이 연결됩니다. 형식적으로 표현의 자유가 존재하더라도, 시민들이 끊임없는 공격과 혐오, 낙인과 조롱 속에서 두려움을 느끼기 시작하면 실제 자유는 점점 무너지게 됩니다. 오늘날 극우세력은 표현의 자유를 주장하면서도 동시에 특정 시민들을 침묵시키는 분위기를 만들어갑니다. 기자와 교사, 학자와 시민운동가들을 집단 공격하고, 온라인 좌표찍기와 조롱, 혐오와 신상털기를 반복합니다. 그 결과 사람들은 점점 말을 아끼기 시작합니다. 공격받지 않기 위해 침묵하고, 갈등을 피하기 위해 자기검열을 하게 됩니다. 겉으로는 자유가 존재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공포와 압박이 시민들을 위축시키는 것입니다. 바로 이것이 페팃이 말한 비지배 자유”가 중요한 이유입니다. 민주공화정에서 자유란 단지 국가 간섭이 없는 상태가 아닙니다. 시민이 두려움 없이 말하고, 토론하고, 공적 문제에 참여할 수 있는 상태까지 포함합니다.
그리고 바로 이 지점에서 극우정치는 민주공화정과 충돌하게 됩니다. 극우는 표현의 자유를 말하지만 실제로는 공론장을 공포와 조롱, 혐오와 공격의 공간으로 바꾸려 합니다. 시민들이 서로를 신뢰하지 못하게 만들고, 공적 토론 자체를 피곤한 것으로 만듭니다. 결국 시민들은 점점 침묵하게 되고, 남는 것은 강한 목소리와 과격한 확신뿐이 됩니다. 민주공화정은 서로 다른 시민들이 공존하며 토론할 수 있어야 유지됩니다. 그러나 극우정치는 시민들을 끊임없이 적대와 불신 속으로 밀어넣습니다.
한나 아렌트가 전체주의를 두고 현실 자체를 파괴하는 정치”라고 분석했던 이유 역시 여기에 있습니다. 전체주의는 단지 독재체제가 아닙니다. 시민들이 공통의 현실을 공유하지 못하게 만들고, 공동체의 상식과 규범 자체를 무너뜨리는 정치입니다. 오늘날 극우 역시 비슷한 방식으로 움직입니다. 공동체의 비극을 희화화하고, 언론과 학문, 선거와 헌법기관까지 끊임없이 불신의 대상으로 만듭니다. 시민들이 더 이상 무엇이 사실인지 확신하지 못하게 만들고, 결국 분노와 감정 속에서만 반응하도록 몰아갑니다. 그리고 이러한 과정은 결코 자연발생적으로만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오늘날 극우정치는 특정 정치세력과 미디어, 알고리즘과 온라인 커뮤니티, 유튜브 생태계와 결합하며 조직적으로 움직입니다. 시민들의 불안과 분노를 확대 재생산하고, 공론장을 감정과 적대의 공간으로 바꾸며, 공동체의 현실인식 자체를 흔드는 것입니다. 그 결과 시민들은 점점 숙고와 토론보다 진영과 충성 속으로 밀려나게 됩니다. 민주공화정은 시민을 필요로 합니다. 그러나 극우정치는 끊임없이 시민을 군중으로 바꾸려 합니다. 그리고 바로 그 지점에서 민주공화정과 극우의 충돌은 피할 수 없는 문제가 됩니다.
민주공화정은 왜 스스로를 방어해야 하는가
독일 출신 법학자 카를 뢰벤슈타인(Karl Loewenstein, 1891~1973)은 바이마르공화국이 무너지는 과정을 직접 목격한 인물이었습니다. 그는 민주주의가 왜 스스로를 파괴하는 세력에게 무력했는지를 깊이 고민했습니다. 바이마르공화국은 당시 세계에서 가장 진보적 헌법 가운데 하나를 가진 국가였습니다. 보통선거와 기본권, 의회민주주의와 권력분립까지 갖추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결과적으로 그 민주주의는 히틀러와 나치에 의해 내부로부터 붕괴했습니다.
뢰벤슈타인은 여기서 중요한 질문을 던졌습니다.
민주주의는 민주주의를 파괴하려는 세력에게까지 무제한의 자유를 허용해야 하는가.”그는 1937년 논문 「전투적 민주주의와 기본권(Militant Democracy and Fundamental Rights)」에서 민주주의가 스스로를 방어하지 못하면 결국 전체주의에 먹힐 수밖에 없다고 경고했습니다. 민주주의는 관용과 자유를 기반으로 움직입니다. 그러나 민주주의를 파괴하려는 세력에게까지 무제한의 관용을 허용할 경우, 그 자유 자체가 민주주의의 자기파괴로 이어질 수 있다는 것입니다.
오늘날 극우정치 역시 매우 비슷한 구조를 보입니다. 오늘날 극우는 표현의 자유를 말합니다. 그러나 자신들과 다른 의견을 가진 시민들에게는 집단적 조롱과 혐오, 낙인과 공격을 가합니다. 선거의 자유를 말하지만 선거 결과를 부정하고, 법치를 말하지만 자신들에게 불리한 판결이 나오면 판사와 헌법기관 자체를 공격합니다. 민주주의 절차를 이용해 권력을 얻으려 하지만, 정작 권력을 잡은 뒤에는 민주주의의 규범과 공론장을 무너뜨리려 합니다. 바이마르공화국 역시 처음부터 탱크와 쿠데타로 무너진 것이 아니었습니다. 나치는 선거와 의회, 언론과 대중선동을 통해 민주주의 내부로 진입했습니다. 그리고 공포와 혐오, 음모론과 적대정치를 통해 시민사회를 분열시키며 민주주의를 내부에서 잠식해갔습니다.
뢰벤슈타인이 중요하게 본 것은 민주주의의 자기파괴성”이었습니다. 민주주의는 자유를 통해 성장하지만, 바로 그 자유 때문에 스스로 붕괴할 수도 있다는 역설 말입니다. 그래서 그는 민주주의가 단순한 중립적 절차에 머물러서는 안 된다고 보았습니다. 민주주의는 스스로를 지키기 위한 최소한의 자기방어 능력을 가져야 한다는 것입니다. 오늘날 독일이 극우세력에 대해 상대적으로 강한 대응체계를 갖는 이유 역시 이러한 역사적 경험과 무관하지 않습니다. 독일은 나치즘의 비극 이후 민주주의를 단순한 방임된 자유체제”로 이해하지 않았습니다. 독일 기본법은 자유민주적 기본질서(freiheitliche demokratische Grundordnung)를 파괴하려는 세력에 대해 국가가 적극적으로 대응할 수 있도록 설계되었습니다.
독일 헌법수호청(BfV)이 극단주의 세력을 감시하고, 반헌법적 정당에 대해 위헌정당 심판이 가능하도록 만든 이유도 여기에 있습니다. 민주주의가 스스로를 방어하지 못할 때 어떤 비극이 발생하는지를 독일 사회는 이미 역사적으로 경험했기 때문입니다. 물론 여기에는 어려운 긴장 역시 존재합니다. 민주주의의 자기방어가 자칫 권위주의적 통제로 변질될 위험 역시 존재하기 때문입니다. 실제로 냉전기 일부 국가들은 반공”과 질서수호”를 명분으로 민주주의를 억압하기도 했습니다. 따라서 중요한 것은 단순한 억압이 아닙니다. 민주공화정의 자기방어는 어디까지나 시민의 자유와 공론장을 지키기 위한 방향이어야 합니다. 민주주의의 자기방어는 민주주의를 포기하기 위한 논리가 아니라 민주주의를 유지하기 위한 최소한의 조건이어야 합니다.
오늘날 민주공화정은 새로운 위협과 마주하고 있습니다. 과거 전체주의는 군대와 검열, 일당독재를 중심으로 움직였습니다. 그러나 오늘날 극우정치는 훨씬 더 복잡한 방식으로 움직입니다. 혐오와 음모론, 알고리즘과 유튜브, 극우 커뮤니티와 감정동원이 결합하며 시민들의 현실인식과 공론장 자체를 흔들기 시작한 것입니다.
오늘날 민주공화정의 자기방어는 단지 군사적·물리적 차원의 문제가 아닙니다. 정보와 인식, 공론장과 시민적 신뢰를 어떻게 지켜낼 것인가의 문제이기도 합니다. 특히 오늘날 극우는 단지 특정 정책이나 정당을 공격하는 수준에 머물지 않습니다. 공통 현실과 공론장, 시민적 신뢰와 공동체 기억 자체를 침식합니다. 선거 결과를 불신하게 만들고, 언론 전체를 거짓으로 몰아가며, 역사적 기억과 민주주의의 비극까지 조롱과 희화화의 대상으로 소비합니다. 결국 이것은 민주공화정의 존재 조건 자체를 무너뜨리는 문제와 연결됩니다.민주공화정은 서로 다른 시민들이 최소한의 현실과 규범을 공유하며 공존하려는 질서입니다. 그러나 극우는 바로 그 공통 기반 자체를 붕괴시킵니다. 시민들을 더 이상 숙고하는 존재로 남겨두지 않고, 끊임없이 반응하고 흥분하며 적대를 소비하는 군중으로 전환시키려 합니다.
민주공화정의 위기는 단순한 정당 경쟁의 문제가 아니다. 그것은 인간을 시민으로 남겨둘 것인가, 아니면 동원 가능한 군중으로 바꿀 것인가의 문제기도 하다.
민주공화정은 시민을 요구합니다. 그러나 극우는 군중을 원합니다. 시민은 토론하고 숙고하며 공동체를 고민합니다. 반면 군중은 즉각적으로 반응하고, 단순한 확신 속에서 움직이며, 강한 지도자와 감정적 적대 속으로 쉽게 동원됩니다. 극우는 시민을 군중으로 바꾸려 하고, 민주공화정은 군중을 다시 시민으로 되돌리려 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극우와 민주공화정의 충돌은 단순한 정당 경쟁이나 보수·진보 갈등으로 축소될 수 없습니다. 그것은 인간을 시민으로 바라볼 것인가, 아니면 동원 가능한 군중으로 바라볼 것인가의 충돌에 가깝습니다. 그리고 바로 이 문제는 대한민국 현대사의 흐름과도 깊이 연결됩니다.
대한민국은 왜 민주공화정을 선택했는가
대한민국 임시정부는 1919년 임시헌장에서 대한민국은 민주공화제로 함”을 명시했습니다. 이것은 단순한 정치제도 선택이 아니었습니다. 조선왕조의 붕괴와 식민지배, 제국주의와 봉건질서의 실패를 경험한 뒤 새로운 국가를 시민의 주권 위에 세우겠다는 선언에 가까웠습니다. 특히 이것은 매우 이른 시기의 선언이기도 했습니다. 대한민국 임시정부는 여성에게도 참정권을 인정하는 보통선거 원칙을 포함했습니다. 미국의 여성참정권 보장(1920)보다 앞선 시기였습니다.
대한민국 민주공화정은 어느 날 갑자기 주어진 체제가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수많은 시민들의 희생과 저항, 참여와 연대 위에서 반복적으로 복원되고 확장되어온 질서였습니다. 3·1운동은 식민지 조선의 민중이 스스로 주권의 주체임을 선언한 사건이었습니다. 4·19혁명은 독재정권을 시민의 힘으로 무너뜨린 민주주의 혁명이었습니다. 5·18민주항쟁은 국가폭력 앞에서도 시민이 인간의 존엄과 공동체를 지켜낼 수 있음을 보여준 역사였습니다. 1987년 민주화운동은 직선제와 시민적 자유를 쟁취했고, 촛불혁명은 헌정질서를 시민의 힘으로 다시 복원한 경험이었습니다.
한국 현대사는 독재와 국가폭력, 냉전과 혐오정치의 역사이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동시에 시민들이 반복해서 민주공화정을 다시 일으켜 세운 역사이기도 했습니다. 권력을 시민 위에 두려는 시도에 맞서 다시 공론장과 헌법질서, 시민주권을 복원해온 역사였습니다. 바로 그렇기 때문에 오늘날 극우와 민주공화정의 충돌은 단순한 정치적 대립으로 축소될 수 없습니다. 오늘날 극우가 공격하는 것은 특정 정당만이 아닙니다. 언론과 역사교육, 헌법기관과 선거제도, 공론장과 시민적 기억 자체입니다. 5·18과 제주4·3을 왜곡하고, 부정선거 음모론을 반복하며, 법원과 헌법재판소를 공격하고, 공동체의 비극을 희화화하는 행태는 결국 대한민국 민주공화정의 기반 자체를 흔드는 문제와 연결됩니다.
민주공화정은 단지 권력을 선출하는 체제가 아닙니다. 서로 다른 시민들이 공통의 현실과 최소한의 규범을 공유하며 함께 살아가려는 질서입니다. 그래서 민주공화정은 자유만을 요구하지 않습니다. 시민적 책임과 공론, 타인에 대한 존중과 절제 역시 요구합니다. 자유는 무엇이든 마음대로 공격할 수 있는 권리가 아니라, 서로를 시민으로 인정하며 공존하기 위한 조건이기 때문입니다. 민주공화정은 피곤한 체제입니다. 토론은 느리고, 숙의는 번거롭고, 타협은 답답합니다. 그러나 인류는 수많은 비극 끝에 결국 다시 민주공화정으로 돌아왔습니다. 서로를 적으로 제거하는 체제보다, 불완전하더라도 시민으로 인정하며 공존하려는 체제가 인간다운 삶에 더 가까웠기 때문입니다. 극우는 끊임없이 단순한 확신과 적대, 강한 지도자를 약속합니다. 그러나 민주공화정은 다른 길을 제시합니다. 느리더라도 시민이 스스로 생각하고 토론하며 공동체를 만들어가는 길입니다. 공동체의 비극을 냉소와 조롱의 대상으로 소비하는 것이 아니라, 서로의 존엄과 공통의 현실을 지켜내려는 시민적 의지 말입니다. 민주공화정은 완성된 체제가 아닙니다. 시민들이 반복해서 다시 지켜내야 하는 질서입니다. 공론장이 무너질 때 다시 토론을 복원하고, 냉소가 공동체를 잠식할 때 다시 시민적 신뢰를 회복하며, 혐오와 적대가 인간을 군중으로 만들려 할 때 다시 서로를 시민으로 바라보려는 노력 말입니다. 그리고 바로 그 점 때문에 민주공화정은 여전히 인간이 도달한 가장 어렵고도 소중한 정치적 성취 가운데 하나로 남아 있는지도 모릅니다.이병권 인문연구가 lbkwon21@naver.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