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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보 바로가기 : [다석의 한글철학 ㉙]길(道), 하늘땅이 돌아가는 빛숨

[다석의 한글철학 ㉙]길(道), 하늘땅이 돌아가는 빛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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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석 류영모는 도(道)를 ‘길’이라 했다. 길은 고정된 허깨비가 아니라, 늘 가고 흐르며 움직이는 알맹이다. 머리는 하늘(ㄱ)로 비우고 몸은 꼿꼿이(ㅣ) 세워서 쉬엄쉬엄 가는(ㄹ) 삶의 알맞이다. 막힌 곳은 뚫고, 없는 곳으로 나아가며, 잘몬(萬物)은 내고 낳고 기르되 갖지 않는 우주 어머니, 그이가 곧 우리가 걸어야 할 ‘길’이다. 열쇠말: 길-늘길-없비롯-어머니-밝돌 #1. 길(道), 이고 밟으며 가는 삶 도(道)가 아니고, 길 흔히 갈 길을 잃었다”, 바른길을 가라”고 말한다. 노자 『도덕경』의 첫 글자 ‘도(道)’를 만날 때는, 한자에만 매달리지 말고 ‘길’은 떠올려야 한다. 다석 류영모는 이 ‘도(道)’를 쉽고 깊은 우리말 ‘길’로 되살려냈다. 그에게 ‘길’은 단순한 이동로가 아니다. 우주의 핏줄이요, 산알 생명의 숨결이며, 마땅히 걸어가야 할 ‘삶 철학’ 그 자체다. 서양인들은 ‘로고스(말씀)’라 하고, 인도인들은 ‘다르마(法)’라 했지만, 우리 겨레는 예부터 진리를 ‘길’이라 불렀다. 진리는 참 올발라 올바른 ‘참올(眞理)’이다. 이미 있는 길은 옳고 그름에 빠졌고, 아직 없는 길은 막막해서 갈 수 없다. 있고 없는 길은 갈 수 없다. 길이 막히면 죽는다. 길은 생명줄이므로. 노자 ‘늙은이(老子)’는 허깨비 ‘도(道)’가 아니라, 펄펄 뛰는 생명의 ‘길’을 뚫는다. 길에 ‘늘’을 닦아야 ‘있없’에 빠지지 않는다.   작가를 알 수 없는 옛 민화 ‘운룡도(雲龍圖)’이다.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길’은 우주 핏줄이자 생명 숨결로 굽이굽이 흐르는 ‘ㄹ’ 움직임이다. 구름 사이를 뚫고 벼락처럼 솟구치는 용은 하늘(ㄱ) 땅(ㄴ) 사이를 잇는 ‘숨길’과 ‘빛숨’의 환빛 소용돌이를 잘 보여준다. ‘길’에 숨은 비밀. ㄱ, ㅣ, ㄹ ‘길’이란 글자는 뜻꼴 모음이다. 그 속에 숨은 우주를 찾자. 첫째, 기윽 ‘ㄱ’은 하늘(天)이다. 하늘이 땅 그리워 내린다. 가로획(ㅡ)은 땅이고, 세로획(ㅣ)은 하늘 땅 잇는 숨길이다. 훈민정음은 ‘ㄱ’을 나무(木)라 했고, 다석은 하늘로 보았다. 땅 딛고 하늘 향해 뻗은 나무처럼, 머리는 항상 하늘로 열려 있어야 한다. 둘째, 이 ‘ㅣ’는 사람이다. 하늘(ㄱ) 땅(ㄴ) 사이를 이어 뚫고 꼿꼿하게 선 사람이다. 억지힘에 굴하지 않고, 욕망에 무릎 꿇지 않으며, 땅하늘의 뜻을 받들어 당당하게 선 사람, 바로 그이가 ‘선비(士)’다. 하나(ㅡ)로 다 열린(+) 이다. 셋째, 리을 ‘ㄹ’은 쉬지않는 흐름이다. 굽이굽이 흐르는 물(水)처럼 나아가는 움직임이다. 꼿꼿한 사람은 굽어서 곧다. 그이는 물 흐르듯 쉬엄쉬엄(辶) 앞으로 나아간다. 이 셋을 더하면 ‘길’이다. 즉, 하늘 뜻(ㄱ)을 머리로 하고, 꼿꼿하게 선 사람(ㅣ)이, 쉬엄쉬엄 가는(ㄹ) 것”이 바로 길이다. 몸으로 가는 길 이번엔 ‘도(道)’를 보자. ‘머리 수(首)’에 ‘쉬엄쉬엄 갈 착(辶)’이다. 머리(생각) 가는 곳이 길이라는 뜻이다. 여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가야 한다. 머리는 진짜 길이 아니다. 머리는 하늘로 열려 있어야 하지만(首), 발은 땅을 딛고 뚜벅뚜벅 걸어가야 한다(辶). 길은 ‘앎(머리)’에만 있지 않다. ‘삶(발)’을 따라야 한다. 다석은 (길을) 몸에 닦아서 그 속알이 이에 참ᄒᆞ고”(54월)라고 했다. 책으로 배우는 길은 반쪽짜리다. 시장통에서, 일터에서, 가정에서 부대끼며 온몸으로 뚫고 가는 길이 진짜다. 땀을 흘리고, 눈물을 흘리고, 때로는 넘어지면서 익힌 길이라야 영근다. 길은 닦여져 있지 않다. 걸어가야 뒤가 열린다. 앞으로 열린 뒷길을 보라. ‘앞길’은 몸이 앞섰으나, ‘뒷길’은 텅 비어서 환하다. 길은 빔(虛)이다 길은 비어 있다. 꽉 막힌 곳은 길이 아니다. 산속 오솔길도, 도시의 대로도 비어 있어서 다닐 수 있다. 다석은 길은 고루 뚤렷(沖) ᄒᆞㅣ, 씨우오라”(4월)고 했다. 그릇이 비어야 물을 담고, 방이 비어야 사람이 살 듯, 길도 비어야 잘몬(萬物)이 그 속을 오간다. 마음길도 마찬가지다. 꽉 막혀 있으면 참(眞理)이 들어올 틈이 없다. 저절로 텅 비워질 때, 그때가 길을 몸에 닦는 순간이다. 11월에 서른 낯 살대가 한 수레 통에 몷겼으니, 수레의 쓸 수 있음은 그 없 는 구석 이 맞아서라.”라고 했다. 굴통이 비어 있어야 굴대를 꽂아 수레가 굴러가듯, 마음이 비어 있어야 우주 수레바퀴가 돌아간다. 그런데 마음은 비울 수 있다고 비워지는 게 아니다. 길을 가 움직이면 저절로 텅 비워진다. 길 가 움직여 보라. 길만 남을 때까지 길을 걸으면 오직 ‘길’만 남는다. 나는 없다. ‘나없’ 그대로 가는 길이 곧 ‘무아지경(無我之境)’이다. 내가 가는 게 아니다. 길이 나를 데리고 간다. 강은 흐르면서 내가 간다”고 하지 않는다. 그저 흐를 뿐이다. 그저 흘러야 ‘나’라는 작은 껍데기가 벗겨진다. 우주라는 큰 흐름에 온전히 맡길 때 비로소 자유로워진다. 예수는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라 했다. 그이가 걸어간 길은 곧 ‘참나’ 스스로였다. 그이는 ‘저절로’를 따랐다. 그리 살아야 한다. 삶이 곧 길이 되고, 발자국이 곧 진리가 되는 삶. 뒷사람이 앞사람의 발자국을 보고 아, 저기로 가면 되겠구나” 하고 따라갈 수 있는 그런 저절로의 길. 이제 신발 끈을 동여매야 한다. 하늘을 이고 땅을 밟으며, 끝없는 ‘길’ 위를 흐르자. #2. 늘길(常道), 이제로 흐르는 끝없의 오늘 옳단 길이 늘길 아니고 노자 늙은이의 첫 글월은 천둥이다. 도가도비상도(道可道非常道).” 다석은 이를 길 옳단 길(可道)이 늘길(常道) 아니고,”(1월)라 풀었다. 저마다 자기 길이 옳다고 우긴다. 이것이 바른길”이요, 저것이 성공한 길”이라며 팻말을 세우고 말길로 우격다짐한다. 그러나 다석은 사람들이 옳다(可)”고 포장한 길은 진짜 길이 아니라고 힘준다. 그것은 시대가 바뀌고 유행이 변하면 금세 뒤집어질 ‘가짜 길’이다. 진짜 길은 이름 붙일 수 없다. ‘옳고 그르다’고 따질 수도 없다. 그저 어제도 그랬고 오늘도 그러하며 하제도 그러할, 저절로의 흐름일 뿐이다. 그것이 바로 ‘늘길(常道)’이다. 있다가 뒤바뀌어 사라질 ‘옳단 길(可道)’은 좇지 말아야 한다. 저절로 흐르기만 할 뿐인 ‘늘길’에 눈떠야 한다. ‘옳단 길’은 아닌 길이다.   까를로 로제티가 1902년에 찍은 무신도(巫神圖)이다. 아마도 산신(山神)이었으리라. 까를로 로제티는 이탈리아 외교관으로 1902년에 7개월 가량 조선에 머물렀다. 이탈리아로 돌아간 그는 그가 수집한 자료를 책으로 묶었다. 『꼬레아 에 꼬레아니』가 그것이다. 신령과 호랑이가 함께 있는 산신도는 자연의 바탕올(原理)과 하나 된 ‘늘길(常道)’을 보여준다. 하늘을 이고 땅을 밟으며 끝없는 길 위로 흐르는 이가 바로 그이다. 특히 호랑이는 ‘나’라는 껍데기가 벗겨지고 우주와 하나 된 ‘늘나(常我)’의 기백이기도 하다. ‘늘’은 살아 있다 ‘늘’은 상(常)의 우리말이다. ‘항상’, ‘언제나’라는 뜻. ‘늘’은 단순히 ‘오래 흐른다’는 뜻도 아니다. 죽어서 박제된 영원 따위는 더더욱 아니다. ‘늘’은 살아서 펄펄 뛰는 지금이다. 이제다. 보라! 해는 늘 동쪽에서 떠서 서쪽으로 지고, 물은 늘 위에서 아래로 흐르고, 계절은 늘 봄 여름 가을 겨울로 돌아간다. 겉은 매일매일 달라진다. 그렇지만 그 달라짐을 이끄는 ‘바탕올(原理)’은 한 번도 바뀐 적이 없다. 이 바뀌지 않는 바탕올, 멈추지 않는 생명 율동이 바로 ‘늘’이다. 모든 것은 낡고 병들고 사라진다. 그러나 이 ‘늘’만은 있는 그대로다. 늙지도 낡지도 않는다. 55월에 늘을 앎이 밝(知常曰明)”이라 했다. 바뀌지 않는 것들 속에서 끊임없이 새로 뒤바뀌어 가는 이 ‘늘’을 꿰뚫는 눈을 떠야 한다. 그것이 진정한 ‘밝(智慧)’이다. 찰나에 입맞춤한 영원 다석은 ‘늘’을 삶으로 끌어들였다. 바로 ‘오늘’이다. 그이는 ‘오늘’을 오! 늘”이라고 풀었다. 감탄사 ‘오!’와 영원 ‘늘’의 만남이다. 흔히 영원을, 죽은 다음에나 갈 수 있는 저 먼 먼 먼 세상의 어디쯤으로 생각한다. 하지만 영원은 지금 여기, 바로 ‘오늘’에 있다. 저 먼데 있지 않다. 숨 쉬고 밥 먹고 일하는 이 순간이 곧 영원이다. 지나간 과거는 붙들지 말자. 아직 오지 않은 미래도 걱정하지 말자. ‘늘길’을 타고 가는 이는 오직 ‘오늘’을 살 뿐이다. 이제살이, 오늘살이, 하루살이다. 오늘 하루가 영원이다. 다석은 그리 살았다. 매 순간 ‘늘’을 타고 가면서 살아야 한다. 오늘 속에 영원이 있다. 그러니 ‘늘길’ 가는 이가 영원이지 않은가! 늘나(常我) 찾아라 길이 ‘늘길’이면, 그 길을 걷는 나도 ‘늘나’다. 늘(常)은 늘로써 숨돌리니 결코 나죽지 않는다. 우리 몸뚱이 ‘제나’는 늘 ‘하고잡(欲心)’에 흔들린다. 그러다 늙고 병들어 결국 죽는다. 제나에 매달려 사는 이는 ‘늘길’을 탈 수 없다. 그는 가다가 지치고, 지친 채로 걷다가 쓰러진다. 내 안의 얼은, 그러니까 ‘하나’에 이어진 산알의 ‘얼나’는 나죽지 않는다. 이 얼나가 바로 ‘늘나(常我)’다. ‘늘길’을 타고 가는 흐름은 ‘늘나’를 숨돌리는 일이다. 그렇게 숨돌리면 변덕스런 욕망 따위는 시나브로 고요해진다. 그렇게 숨돌리면 양심이 크게 깨이고, 얼이 크게 밝는다. 52월에 이 일러 푹늘(襲常)”이라 했다. 이제로 영원한 ‘늘’에 푹 잠겨 보라. 하나에 다다른다. 땅에 발붙이고 꿀렁꿀렁 살아가면 마음은 ‘늘’을 타고 가면서 고이 노닐리라. 나날(日常)이 곧 늘길 ‘늘길’은 산속에도 있고 지루한 나날(日常)에도 있다. 일어나 세수하고, 일어나 일하고, 일어나 누굴 만나고, 일어나 잠드는 그 평범한 나날이 영원한 ‘늘길’이다. 다석은 하루 한 끼를 먹었고, 늘 제자리에 앉아 글을 쓰고 기도했다. 이 삶이 단조롭고 고루해 보일지라도, 그이는 돌아가는 나날에서 우주의 ‘늘’과 하나로 숨돌렸다. 특별한 사건 따위, 대단한 성취 따위를 좇아가는 것은 ‘옳단 길(可道)’이다. 그러나 묵묵히 제 자리에서 자기 일을 하면서 하루하루 채우고 비우는 것은 ‘늘길(常道)’이다. 그저 밥 먹는 게 길이요, 그저 잠자는 게 길이다. 평범에 비범이 있고, 찰나에 늘이 있다. 오늘 걷는 평범한 출근길, 산책길이 우주 핏줄의 ‘늘길’이다. 길에서 오! 늘” 하자. 기! 뿜”으로 기뻐하자. #3. 없비롯(無始), 텅 빈 없에 솟구친 우주 길이 비롯한 하나 길은 어디서 비롯될까? 대문 앞일까? 아니면 큰길가에서 비롯되는 것일까? 그러나 눈에 보이는 길은 이미 만들어진 결과물일 뿐이다. 길이 생겨나기 앞, 아직 아무것도 없던 그 까마득의 첫 자리가 길의 비롯이다. 노자 늙은이는 도덕경 1월에 이름 없에 하늘 땅이 비롯고, 이름 있에 잘몬의 어머니”라고 했다. ‘이름 없’ 그 자리에 하늘땅이 비롯한다. ‘없’ 자리다. 이를 줄여 ‘없비롯’이라 한다. ‘없비롯’이란 ‘없에 비롯한다’는 뜻이다. 다석이 『천부경』을 풀 때는 너나․없:비롯(始無始)”이라 했다. ‘너와 나’가 아닌 한꼴의 ‘너나’는 쪼개지지 않았다. 하나다. 그 하나가 곧 ‘없’이다. 걸어가는 ‘늘길’은 스스로 일어나는 비롯이다. 텅 빈 허공, 그 ‘없’ 자리에 저절로 솟아 하늘땅을 열고 펼치는 우주 사건이다. 그러니 길을 알려면 먼저 이 ‘없’ 자리를 알아차려야 한다. 없(無), 텅 빈 충만 ‘없(無)’을 말하면, 다들 아무것도 없는 텅 빈 상태를 떠올린다. ‘없’은 그런 어이없는 허무가 아니다. 그 자리는 ‘없이 계시는 님’의 자리요, 온갖 ‘있(有)’이 쏟아져 드나드는 오래(門)다. 마르지 않는 샘이다. 52월 풀이에서 다석은 셰상 있비롯을 가지고, 셰상 어머니 삼음.”이라고 했다. ‘없비롯(無始)’이 길의 하늘바탈(天性)이라면, ‘있비롯(有始)’은 길의 속알바탈(德性)이다. ‘없비롯’은 길의 본래 성품이요, 하늘의 성질 그 자체다. 비어 있어야 담을 수 있듯, 우주도 텅 빈 ‘없’이기에 하늘 땅이라는 거대한 ‘있’을 담을 수 있다. 다석은 이 자리를 ‘빈탕한데’라고 했다. 텅 비어(빈) 없이 트인 곳(탕), 그 광활한 ‘한데(우주)’가 길의 고향이다. 길은 이 빈탕한데서 ‘없’에 솟아오른 생명의 벼리다.   작가를 알 수 없다. 경복궁 사정전의 ‘일월오봉도(日月五峰圖)’이다. ‘없비롯’은 캄캄한 없에 문득 빛이 터져 나와 우주가 된 사건이다. 해와 달, 다섯 봉우리가 대칭을 이루는 이 그림은 하늘땅의 질서가 바로서는 ‘천지비롯’의 장엄을 담고 있다. ‘없’이라는 빈탕에 ‘있’이라는 잘몬이 쏟아져 나오는 우주 ‘밝돌’을 상징이리라. ‘있비롯’과 ‘없비롯’ ‘없비롯’은 홀로가 아니다. ‘있비롯’에 하나로 짝하여 돌아간다. 길의 참바탈(眞性)은 ‘없비롯’에 ‘있비롯’이 솟는 그 앞자리다. 아무것도 없는 고요한 ‘없’에 문득 한 ‘있’이 일어난다. 캄캄한 ‘없’에 문득 빛이 터져 나온다. 이처럼 ‘없’은 아무가 아니라, ‘있’이 나고 낳는 빛숨 씨알이다. 빛, 숨, 씨알, 가없이 너른 바다다. 반짝 반짝 반짝하는 윤슬 은하수다. 빅뱅 앞은 무엇이었을까? 늙은이는 그것을 ‘없(無)’이라 했다. 그 ‘없’ 자리에 수많은 윤슬이 하나로 크게 날벼락 번개로 ‘반짝’ 하더니 텅 빈 빈탕의 ‘있’이 가없이 끝없이 밑없이 터져 우주가 되었다. 이것이 ‘없비롯’에 ‘있비롯’의 사건이다. ‘없비롯’에 ‘있’이요, ‘있비롯’에 온갖 ‘산알’이 비롯한다. 그러므로 길 가는 이는 눈에 보이는 ‘있비롯’에 매달리지 말고, 그 앞의 아무를 틔우는 ‘없비롯’에 늘 깨어야 한다. 그 앞자리 보라 늘 ‘있는 아무’에 팔려 산다. 돈이 있고, 집이 있고, ‘있자리(地位)’가 있어야 안심이다. 그러나 늘 생각나기 앞의 그 없 앞자리를 꿰뚫어 보라. 없 앞자리 ‘맨’. 생각의 벼락 사슴뿔이 솟기 전, 감정이 요동치기 전, 너와 나로 갈라지기 전, 그 태초의 움숙 고요한 자리. 그 ‘앞자리’가 바로 온뿌리제꼴의 본래면목(本來面目)이다. 그 자리는 태어나기 앞에도 있었다. 모두가 목숨 돌려 돌아갈 자리이기도 하다. 텅 비어서 걸릴 게 없는 자리요, 맑고 깨끗해서 티끌 하나 없는 자리다. 이 ‘없비롯’을 아는 이는 삶의 부침에도 꿈쩍 하지 않는다. ‘있’은 구름처럼 모였다 흩어지는 헛꼴이다. 잃어버려도 슬퍼하지 말고 얻어도 교만하지 않아야 한다. 마음은 늘 ‘없’ 자리에 닻을 내려야 든든하다. ‘빈탕’에 든 사람, 그가 길 가진 이다. 빔으로 돌아가는 길 ‘길을 간다’는 일은 ‘없’에 돌아가는 길이다. 16월에 뿌리로 돌아ᄀᆞ서 고요 ᄒᆞ다 ᄒᆞ고”라고 했듯이, 온갖 ‘있’의 옷을 하나하나 벗어버리고, 맨 처음의 그 꾸밈없는 ‘없’에 놓인 숨빛의 텅 빈 바탕, 그 ‘빈탕’의 마음으로 돌아가는 길이다. 그 길이 바로 쪼개 가른 헛짓 마주를 뚝 끊고 곧장 그 너머로 선 ‘늘’이다. 분별과 욕망을 끊어내고 텅 빈 충만의 자리로 돌아가는 것, 그것이 ‘없비롯’에 사는 길이다. 오늘 하루, 하던 일을 멈추고 감은 눈에 속눈 떠 안팎을 뚫어 보라. 내 안의 소란스러운 생각들이 가라앉으리라. 그 고요한 침묵의 끝에, 그 텅 빈 그 자리에 무언가 꿈틀거리며 솟아오르리라. 그것이 참나의 길이다. 길은 ‘없’에 비롯하여 ‘없’으로 다 이루는 돌아감이다.   작가를 알 수 없다. 감로탱(甘露幁)의 부분이다. 비단에 채색, 188.5×198.0cm, 18세기,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길은 만물을 내고 기르는 ‘따뜻한 어머니’다. 말씀은 단 이슬처럼 흐르는 ‘말숨’의 샘이다. 아귀에게 감로(단 이슬)를 베풀어 구제하는 장면은 가장 낮은 곳에서 오물을 닦아내며 생명을 살려내는 ‘어머니 길’과 ‘골검(谷神)’의 자비로움을 잘 보여준다. #4. 어미(母), 잘몬을 내고 낳고 기르는 품 길은 따뜻한 어머니다 흔히 ‘법칙’이라고 하면 차갑고 엄격하다. 그것은 마치 빈틈없이 돌아가는 우주의 기계 질서처럼 느껴진다. 그런데 노자 늙은이는 길을 ‘어머니’라고 불렀다. 1월에 이름 없에 잘몬의 어머니”라 했고, 25월에서는 셰상 어머니ㄹ 삼을만ᄒᆞ고나”라고 했다. 다석은 이 ‘어머니’의 따뜻한 품을 우리말로 생생하게 살려냈다. 길은 심판하는 재판관이 아니다. 길은 내고 낳고 먹이고 입히고 길러내는 어머니다. 갓난아기가 엄마 품에서 젖을 빨며 생명을 얻듯이 모든 생명(잘몬)은 이 거대한 ‘길’이라는 어머니 품에서 숨쉬고 살아간다. 그러니 길을 알아가는 일은 딱딱한 이론이 아니라, 잃어버린 품으로 안기는 일이다. 있비롯, 있에 깃든 어머니 힘 앞서, 길은 ‘없비롯(無始)’에서 비롯됨을 알았다. 길은 텅 빈 ‘없’의 자리다. 그런데 이 ‘없’이 그대로 있으면 아무것도 나지 않는다. 움숙 고요에 불숙 움직여 ‘없’에 ‘있’이 솟아야 잘몬이 생긴다. 다석은 이 ‘있비롯(有始)’이 바로 세상의 어머니라고 풀었다. 그래서 ‘없비롯’이 길의 하늘바탈(天性)이요, ‘있비롯’은 길의 속알바탈(德性)이다. ‘숳’은 늘 씨를 뿌리고, ‘암ㅎ’은 늘 그 씨로 ‘살몸’을 만든다. 이처럼 ‘있비롯’은 텅 빈 하늘의 뜻을 받아 ‘꼴몬’을 빚는 산파다. 해가 뜨고, 비가 내리고, 꽃이 피고, 열매 맺는 이 모든 ‘있꼴’의 움직임이 어머니 길이다. 길이 차린 꽃밭이다. 내고 갖지 않는 감ᄋᆞᆫ속알(玄德) 어머니 길은 위대한 ‘사랑’이다. 그 사랑은 좁은 사랑이 아니다. 51월에 늙은이는 이렇게 노래한다. 길이 내고, 치고, 키우고, 길으고, 꿋꿋이, 여믈게 먹이고, 덮어서라. 내고도 가지지 않고, ᄒᆞ고도 절믿거라 않고, 길어나 챌잡을라 않으니, 이 일러, 감ᄋᆞᆫ속알.” 세상 부모에게 자식은 종종 소유물이다. 그들 뜻대로 좌지우지하려고 한다. 그러나 우주 어머니 길은 온갖 만물을 내고 낳아도 내 것”이라고 내세우지 않는다. 해는 대가를 바라지 않고, 땅도 생색내지 않는다. 다석은 이를 ‘감ᄋᆞᆫ속알(玄德)’이라 했다. 가마득하고 까마득하여서 알 수 없는 속알이다. 내고 낳고 기르되 쿨하게 내보내는 사랑, 자유롭게 놓아주는 사랑, 이것이 어머니 길의 마음이다. 골검, 죽지 않는 골짜기 어머니 길은 스스로를 높이지 않는다. 늘 저절로 낮춤이다. 6월에 골검(谷神)은 죽지 않ᄋᆞ. 이 일러 감ᄒᆞᆫ 암ㅎ(玄牝).”이라 했다. ‘골검’은 골짜기 신이다. 골짜기는 움푹 파인 곳이다. 그렇기에 모든 물이 그리로 모여든다. 어머니 길은 스스로를 낮추어 세상 온갖 것의 더러움을 받아낸다. 78월에 나라의 더런 때를 받음. 이 일러 흙낟알 님자라. ᄒᆞ고.”라고 했듯이, 어머니는 가장 낮은 곳에서 생명을 살려낸다. ‘감ᄒᆞᆫ 암ㅎ’은 감아 돌아가는 신비로운 어머니라는 뜻이다. ‘숳’(하늘/아버지)은 씨를 뿌리고, ‘암ㅎ’(땅/어머니)은 받아서 내고 낳는다. 이 ‘암ㅎ’의 입이야말로 하늘땅의 뿌리다. 다들 힘세고 드센 ‘높임’을 숭상하지만, 정작 생명은 ‘낮춤’의 부들무릇한 어머니 골짜기에서 나온다. 어머니 지키자 모두는 어머니 길에서 나왔다. 그러니 우리는 길의 딸아들이다. 52월에 이젠 그아ᄃᆞᆯ을 아니, 다시 그어머니 직히ᄌᆞ”라고 했다. 잎이 무성하다고 뿌리를 잊으면 죽는다. 화려함에 취해 길을 잊어버리면 삶은 시들어 버린다. ‘어머니를 지킨다’는 것은, 생명의 탯줄이 어디서 왔는지 늘 기억하는 일이다. 지칠 때는 억지로 무언가를 하려 들지 말고 어머니의 거대한 품인 ‘빈탕’에 안겨야 한다. 그리고 어머니 말숨을 먹어야 한다. 어머니는 묻지도 않고 따지지도 않고 모두를 살려내실 것이다. 몸이 빠지도록 나죽지 않으리라.” 했다. 어머니 품은 늘 안전하다. 이것이 길을 ‘어머니’라 부르는 까닭이다.   단원 김홍도가 그린 ‘새참’이다. 종이에 연한 색으로 그랬다. 27.0×22.7cm,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농부들이 털썩 주저앉아 밥을 먹는 낮은 땅바닥은 ‘골검’ 즉, 골짜기 신의 자리와 닮아 있다. 어머니 길은 산봉우리처럼 높이 솟아 군림하는 것이 아니라, 가장 낮은 곳에서 세상의 고단함을 받아내며 생명을 살려낸다. 빙 둘러앉아 밥을 먹는 평범한 이 나날(日常)의 풍경이야말로 우주 핏줄이 흐르는 ‘늘길(常道)’의 한 장면이다. #5. 밝돌(衆妙之門), 뭇 산알 생명의 환빛 문 야믈어가는 야믊의 오래 노자 늙은이는 1월의 마지막을 이 둘은 한끠 나와서 달리 이르(브르)니, 한끠 일러 감ᄋᆞ, 감ᄋᆞ 또 감ᄋᆞᆷ이 뭇 야믊의 오래러라.”고 맺는다. ‘오래’는 문의 옛말이다. 사람들은 이 문을 신비롭게 본다. 무언가 알 수 없는 ‘비밀의 문’으로 여긴다. 다석은 ‘묘(妙)’를 단순히 ‘묘하다’는 형용사가 아니라, 생명이 자라는 동사로 보았다. 바로 ‘야물다(영글다)’이다. 그래서 ‘중묘(衆妙)’를 뭇 야믊”이라 했다. 곡식이 햇볕을 받아 알알이 야물어가듯, 우주의 텅 빈 자궁 속에서 온갖 생명이 영글어가는 모습이 바로 ‘묘(妙)’다. 그러니 이 문은 닫혀 있는 비밀의 문이 아니라, 생명이 무르익어 세상 안밖으로 터지는 ‘나남(生産)의 문’이요, ‘짓비롯(創造)의 문’이다. 그래서 뭇 야믊의 오래러라”고 노래했다. 휘몰아치는 산알 울돌목 다석은 문(門)을 ‘오래’로 풀었다. ‘오래’는 19세기까지 쓴 우리말이다. 옛 가야 사람들은 ‘돌’로 불렀다. ‘오래’는 안팎을 잇는 길이다. 전라남도 해남과 진도 사이의 거센 물살이 회오리치는 바다를 ‘울돌목’이라 부른다. 여기서 ‘울’은 물살이 우는 소리요, ‘돌’은 바로 문(門)이다. 바닷물이 좁은 길목(돌)을 통과하며 거세게 휘돌아치듯, 우주의 기운(얼)도 이 ‘돌’을 지날 때 강력한 회오리를 일으킨다. 블랙홀과 화이트홀이 맞물려 돌아가는 웜홀처럼, ‘없∞있’이 하나로 꼬리를 물고 회오리치며 새로운 차원을 여는 구멍, 그것이 바로 ‘돌(門)’이다. 몸맘도 늘 이 ‘울돌목’으로 있어야 한다. 고여 썩는 물이 아니라, 하늘의 뜻과 땅의 기운이 맹렬하게 휘돌아 솟구치는 생명의 소용돌이로 솟구쳐야 한다. 밝돌, 어둠 뚫고 솟는 빛 구멍 소용돌이 ‘돌(門)’은 캄캄하지 않다. 씨알 튼 밝돌이다. ‘밝돌’은 ‘밝은 돌(門)’, 즉 빛이 쏟아져 드나드는 문이다. 씨앗을 보라. 땅속 어둠에 묻혀 있지만, 그 속에서는 생명이 야물어간다. 때가 되면 껍질을 ‘탁’ 하고 터뜨린다. 그 순간, 씨앗의 문이 열리며 싹이 트고 빛을 만난다. 이것이 ‘씨알 튼’이다. 길(道)을 가는 것은 이 ‘밝돌’을 지나는 일이다. 어두운 제나의 껍질을 깨고, 찬란한 얼나의 빛으로 나아가는 일이다. 47월에 지게문을 나지 않고 셰상을 알며,”라고 했다. 밖으로 나가는 문이 아니라, 안 깊은 곳(빈탕)으로 뚫린 문, 그곳에 우주 빛을 만나는 문이 있다.   사자 모양 ‘업경대’이다. 높이 98.2cm, 길이 36.4cm.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이 업경대는 불법(佛法)을 수호한다는 사자 모양의 받침대와 불꽃 무늬 조각으로 둘러싸인 업경으로 이루어졌다. 업경 중심의 둥근 청동 판은 없어졌는데 뒷면에는 인도 고대 범자(梵字)의 기본 글자인 옴자가 그려져 있다. ‘돌(門)’을 블랙홀과 화이트홀이 만나는 ‘울돌목’이자 새로운 차원을 여는 구멍이다. 불화에 등장하는 업경대는 자신의 본모습을 비추는 거울이자 저승의 문턱을 상징하는데, 그 둥근 테두리와 타오르는 불꽃 문양은 ‘없∞있’이 꼬리를 물고 회오리치는 우주의 입구와 흡사하다. 뭇 야믊의 소용돌이 문은 닫혀 있지 않고 열려 있지도 않다. 늙은이는 이를 하늘 궁ㄱ을 열고 닫는데, 숳 않되고 암ㅎ될 수여.”(10월)라고 했다. 열림에 닫힘이요(여닫음), 들숨에 날숨이요(드나듦), 밤에 낮이요(밤낮없), 삶에 죽음(나죽음)이다. 끊임없이 갈마들면서 엇갈리는 한꼴이다. 들숨으로 하늘을 받아들이고(닫힘/저장), 날숨으로 생명을 내뿜는다(열림/창조). 이 숨짓이 멈추지 않기에 생명은 ‘야물어(영글어)’ 간다. ‘밝돌’은 우주 심장이 뛰는 소용돌이다. 이곳을 통해 ‘없’은 ‘있’으로 나오고, ‘있’은 다시 ‘없’으로 돌아간다. 너나는 모두 이 문 앞에 서 있다. 세상의 온갖 욕망 따위는 버려 두고 ‘맨몸’으로 익고 영근 ‘속알’ 하나 들고서 뛰어들어야 하리라. 그 문은 바로 ‘나’ 문은 따로 있지 않다. 내가 곧 문이다. 마음이 꽉 막히면 벽이요, 마음이 텅 비이면 문이다. 몸이 곧 우주가 드나드는 ‘밝돌’이다. 눈이 빛 보는 문이요, 귀가 소리 듣는 문이요, 숨구멍이 하늘 마시는 문이다. 깨끗이 깨면 온몸의 털구멍 하나하나가 다 ‘밝돌’이다. 뚫린 우주다. ‘길’은 지금 여기, 숨쉬고 있는 몸에서, ‘없있’이 돌아가고 ‘얼몸’이 춤추는 싱싱한 숨빛이다. 이제 ‘참’을 알고, ‘알’을 품고, ‘줄’을 잡고, ‘말숨’을 쉬어, 마침내 ‘밝돌’로 솟구치라. 솟구치는 순간 ‘빈탕한데’가 펼쳐지리라. 그곳이 ‘늘길’이리라. 자, 이제 환빛의 소용돌이 속으로 텀벙 뛰어들자.   ⚫ [부록] 다석 류영모의 우리말 철학 용어 풀이 길: 도(道)의 우리말. 하늘 뜻을 머리에 이고(ㄱ) 꼿꼿이 선 사람(ㅣ)이 쉬엄쉬엄 나아가는(ㄹ) 삶의 역동적인 움직임이자 생명줄. 늘길: 상도(常道)의 우리말. 어제도 오늘도 내일도 저절로 흐르는 ‘짓됨(變化)’이야 말로 바뀌지 않는 우주의 참된 올. 늘이름: 상명(常名)의 우리말. 이를 만한 잠깐의 이름이 아니라, 늘 바뀌고 뒤바뀌는 가운데에 늘 ‘가온찌기’로 있는 실체 본연의 이름. 없비롯: 무시(無始)의 우리말. 텅 빈 ‘없(無)’ 자리에 우주가 비롯되었음을 뜻하며, 잘몬(萬物)이 쏟아져 나오는 태초의 텅 빈 아무. 있비롯: 유시(유始)의 우리말. 꼴몸의 잘몬이 나타난 자리로, ‘없비롯’에 짝을 이루어 돌아가는 산알의 숨. 씨알 튼 밝돌: 중묘지문(衆妙之門)의 풀이. 빛이 쏟아져 드나드는 문이며, 뭇 생명이 야물어 돌아가는 강력한 우주 회오리의 구멍. 잘몬: 만물(萬物)의 우리말. 먼지(몬)처럼 작고 하찮은 것들이 모여 이루어진 온 세상의 모든 ‘있’의 존재들. 야믊: 묘(妙)를 동사로 풀이한 말. 곡식이 익듯 생명이 텅 빈 우주 속에서 야무지게 영글어가는 꼴짓 상태. 오래: 문의 우리말. 안팎을 이어주는 길이며, 생명이 드나드는 신성한 우주의 통로. 돌(門): 문의 옛말이자 가야어. 바닷물이 휘돌아치는 ‘울돌목’처럼 우주의 기운이 강력하게 회오리치며 새로운 차원을 여는 문. 빛숨: 항성처럼 스스로 숨을 내는 빛. 우주의 기운인 ‘얼’이 빛으로 숨 쉬는 생명력의 본질. 한끠(同): 함께의 옛말. ‘없’과 ‘있’으로 쪼개지지 않고 한 자리에서 동시에 일어나 맞물려 돌아가는 하나. 감ᄋᆞ(玄): 현(玄)의 우리말 풀이. 스스로 감아 돌면서, 또 저절로 감고 감아 돌아가는 볼텍스 운동의 우주 하늘을 이름. 감아 감아 돌아가면서 아득하니, 까마득이라 함. 산알(生靈): 살아 있는 생명의 알맹이. 하나 하실의 하늘 땅으로부터 받은 늘의 생명 씨앗. 나죽지 않는 산알의 씨알임. 늘나: 상아(常我)의 우리말 풀이. 죽고 사라지는 육신의 ‘제나’가 아니라, ‘늘’과 하나 된 불멸의 우주 자아. 씨우오라: 용(用)을 ‘쓰오라’로 푼 말. 텅 빈 가온(중심)을 돌려 우주의 빈 자리를 자유자재로 쓰고 부리며 베푸는 신령한 작용. 긋/극: 극(極)의 우리말. 생명의 맨 끝단이자 우주의 맨 중심. ‘없극(無極)’과 ‘큰극(太極)’으로 쓰임. ‘없긋’이나 ‘큰긋’으로도 풀림. 길날: 도기(道紀)의 우리말 풀이. 길의 벼리 혹은 줄잡기. 우주의 근본 원리를 꿰뚫어 잡는 정신 서슬. 어머니(母): 만물을 내고, 낳고, 기르는 우주의 자애로운 품. 낮은 곳에서 생명을 살려내는 길의 오롯한 밑바탈(本性). 나날(日常): 일상의 우리말. 매 순간 우주의 ‘늘’과 하나 되어 숨 쉬는 거룩한 ‘오늘살이’의 삶 살이. 온통: 전체(全)의 우리말. 쪼개지지 않은 하나의 상태이자 우주 만물이 서로 이어져 있는 거대한 그물코. 말머리(主題): 주제의 우리말. [글이나 생각의 핵심이 되는 머리마디. 씻어난이: 성인(聖人)의 우리말 풀이. 제나의 욕망과 때를 말끔히 씻어내고 얼나로 거듭나 우주 질서에 반짝이며 사는 이. 귀뚫이: 말귀가 뚫린 이. 세상의 소리가 아니라, 하늘 말씀(말숨)을 알아차리는 얼의 귀를 가진 이. 빈탕(太虛): 허공의 본체. 아무것도 없으나 모든 생명을 내놓을 수 있는 신령한 비움의 자리. 가온찍기(ᄀᆞᆫ): 인생의 핵심이자 진리를 깨닫는 찰나의 순간. 하늘(ㄱ) 땅(ㄴ)이 마주 보는 한복판에 하느님의 생명인 ‘나(ㆍ)’라는 점을 탁 찍어 우주와 내가 하나가 되는 일. 말숨: 말씀을 숨 쉬는 것. 참의 말씀을 호흡하듯 들이마셔 내 안의 얼을 깨우고 우주 기운과 소통하는 독서법이자 수행법. 30. 오늘살이: 하루의 온통을 사는 것. 어제나 내일이 아닌, 지금 이 순간(오! 늘)을 영원으로 여기며 매일매일 거듭나는 부활의 삶으로 사는 살이. 31. 감ᄋᆞᆫ속알: 현덕(玄德)의 우리말 풀이. 잘몬을 내고 기르되 소유하려 하지 않고, 공을 이루고도 그 자리에 머물지 않는 우주 어머니의 그윽하고 가마득한 사랑. 천(우주/신): 늘길, 없비롯, 있비롯, 밝돌, 감으, 빈탕, 긋 지(자연/원리): 길, 오래, 돌, 한피, 잘몬, 어미, 길날, 씨우오라 인(수행/삶): 늘나, 야믊, 빛숨, 산알, 나날, 씻어난이, 귀뚫이, 온통, 말머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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