칸트의 규칙적인 보폭 위에 세워진 철학 [카테고리 설정이 아직되어 있지 않습니다.] 1. 매일 같은 시간, 같은 길을 걷다
칸트에게 걷기는 사유의 폭발이 아니라 사유를 가능하게 하는 조건이었다. 니체가 걷는 동안 사유를 쏟아냈다면, 칸트는 걷기를 통해 사유를 정돈했다. 니체의 사유가 번개처럼 내리치고 균열을 만들었다면, 칸트의 사유는 규칙적인 보폭처럼 한 걸음씩 세계를 재단했다. 그의 철학은 격렬하지 않고, 조용하지만 단단하다. 그것은 감정의 분출이 아니라 판단의 훈련이며, 영감의 순간이 아니라 지속 가능한 사유의 구조였다. 이 차이는 단지 철학적 기질의 차이가 아니라 걷기의 방식, 더 나아가 삶을 조직하는 방식에서 비롯된다.
칸트는 걷는 동안 새로운 사상을 만들어내기보다 이미 떠올린 생각들을 가다듬고, 균형을 맞추며, 스스로를 점검했다. 걷기는 그의 사유를 자극하는 외부의 충격이 아니라 사유가 흔들리지 않도록 받쳐주는 내부의 질서였다. 그래서 그의 산책은 즉흥적이지 않았고, 방황도 아니었다. 정해진 시간, 정해진 길, 정해진 속도. 그 반복 속에서 사유는 흩어지지 않고 축적되었으며, 감정은 넘치지 않고 가라앉았다. 걷기는 사유의 무대가 아니라 사유가 무너지지 않도록 하는 바닥이었다.
칸트는 인간을 이성적 존재로 규정했지만, 그 이성은 결코 몸과 분리된 것이 아니었다. 오히려 그는 이성이 제대로 작동하기 위해서는 몸과 삶 전체가 정돈되어야 한다고 보았다. 과도한 자극, 불규칙한 생활, 방종은 판단력을 흐리게 만들고, 사유를 감정의 소음 속에 빠뜨린다. 이성은 자유롭지만, 그 자유는 무질서 속에서 작동하지 않는다. 자유로운 판단을 위해서는 오히려 일정한 제약과 반복, 절제가 필요하다고 그는 믿었다.
그래서 칸트는 자신의 삶을 철저히 관리했다. 기상 시간, 식사 시간, 강의 시간, 산책 시간까지 거의 분 단위로 유지되었다고 전해진다. 이는 강박이나 기벽이 아니라 이성을 지키기 위한 실천이었다. 걷기는 그 관리의 핵심에 있었다. 매일 같은 시간에 걷는다는 것은 단순한 건강 습관이 아니라 몸의 리듬을 일정하게 유지하는 일이었고, 그 리듬 위에서 이성은 안정적으로 작동할 수 있었다. 몸이 흔들리지 않을 때, 판단도 흔들리지 않는다. 칸트에게 걷기는 사유를 낳는 사건이 아니라 사유를 가능하게 하는 조건, 다시 말해 철학의 인프라였다.
그의 걷기는 사색의 자유를 위해 감각을 최대한 절제하는 방식이었다. 풍경에 취하지도 않았고, 감정에 빠져들지도 않았다. 오히려 그는 걷는 동안 자신을 세계로부터 일정한 거리만큼 떼어놓았다. 그 거리는 냉담이 아니라 공정함이었고, 무관심이 아니라 판단의 여유였다. 그렇게 확보된 거리 속에서 그는 인간의 인식이 어디까지 가능하며, 어디에서 멈추어야 하는지를 묻는다. 걷는 몸이 균형을 잃지 않듯, 사유 역시 넘어서서는 안 될 경계를 넘지 않도록 스스로를 통제한다.
칼리닌그라드 대학 앞에 있는 임마누엘 칸트 동상
2. 규칙은 억압이 아니라 자유였다
결국 칸트의 걷기는 사유의 확장이 아니라 사유의 정초(定礎)였다. 그는 걸으면서 세계를 해체하지 않았고, 자신을 흔들지도 않았다. 대신 그는 반복되는 보폭 속에 이성이 설 수 있는 단단한 땅을 다졌다. 그래서 그의 철학은 혁명적이면서도 질서정연하고, 급진적이면서도 신중하다. 그것은 길 위에서 번뜩인 영감의 기록이 아니라 매일 같은 길을 걸으며 다져진 판단의 결정체였다.
니체의 철학이 고산의 돌풍 속에서 태어났다면, 칸트의 철학은 평탄한 길 위의 규칙적인 발걸음에서 태어났다. 그 길은 눈에 띄지 않지만 무너지지 않고, 화려하지 않지만 오래 남는다. 칸트에게 걷기란 결국, 사유가 스스로를 잃지 않도록 붙들어주는 가장 일상적이면서도 가장 철학적인 행위였다.
칸트의 걷기는 느렸지만, 흐트러지지 않았다. 그는 목적 없이 배회하지 않았다. 그렇다고 걷기를 단순한 신체 단련이나 건강 관리로만 여기지도 않았다. 그의 걸음에는 늘 일정한 방향과 리듬이 있었고, 그 리듬은 삶 전체를 관통하는 질서의 일부였다. 걷는 동안 그는 사유에 잠긴 채로 자신을 세계에서 떼어놓지 않았다. 오히려 그는 걷기를 통해 세계 속에 머물렀다. 도시의 골목과 거리, 집들의 배열과 창문의 빛, 지나가는 사람들의 걸음걸이와 표정. 그 모든 것은 철학의 바깥이 아니라 철학이 뿌리내리는 현실이었다.
칸트는 걷는 동안 도시를 관찰했고, 계절의 변화를 느꼈으며, 사람들의 움직임을 살폈다. 눈에 띄는 사건이나 극적인 장면이 아니라, 반복되는 일상 속의 미세한 차이를 그는 놓치지 않았다. 오늘의 공기는 어제와 어떻게 다른가, 사람들의 발걸음은 왜 조금 더 빠른가, 해가 지는 각도는 어떻게 달라졌는가. 이런 소소한 관찰은 그의 인간학 강의와 윤리학 사유 속으로 스며들었다. 칸트에게 인간은 추상적인 개념이나 가설 속의 존재가 아니었다. 인간은 매일 같은 길을 걷고, 같은 시간에 집을 나서며, 반복 속에서 자신을 유지하거나 무너뜨리는 존재였다.
그래서 그의 윤리학은 흔히 ‘의무의 철학’으로 오해받는다. 마치 칸트가 인간에게 냉혹한 규칙을 들이밀며 감정과 삶을 억압한 사상가였던 것처럼 읽히기도 한다. 그러나 칸트가 말한 의무는 외부에서 강요된 명령이 아니었다. 그것은 타인의 시선이나 권위에 복종하는 태도가 아니라, 스스로 세운 원칙에 스스로 책임지는 자세에 가까웠다. 그는 인간을 복종하는 존재가 아니라, 스스로에게 법을 부여할 수 있는 존재로 이해했다.
칸트는 매일 오후 정확히 같은 시간에 집을 나서 같은 길을 걸었다. 너무나 규칙적이어서, 동네 사람들은 칸트가 지나가면 시계를 맞춰도 된다”고 할 정도였다고 전해진다. 이 일화는 단순한 괴짜 이야기로 소비되지만, 실제로는 이성이 작동하기 위한 생활의 질서를 상징하는 장면이다. 그의 걷기는 즉흥이 아니라, 판단을 안정시키는 리듬이었다.
칸트는 비가 오거나 바람이 불어도 웬만하면 산책을 거르지 않았다. 건강이 극도로 나빠진 말년을 제외하면, 기분이나 외부 조건 때문에 걷기를 포기하는 일은 거의 없었다고 한다. 이것은 하고 싶을 때만 한다”는 자유가 아니라, 스스로 세운 원칙을 지켜내는 자유를 보여주는 예화로 자주 인용된다. 그는 산책 중에 지인을 만나 인사를 나누는 일은 있었지만, 긴 대화로 산책의 리듬이 깨지는 것은 피했다고 한다. 걷기는 사교의 시간이 아니라, 자기 점검의 시간이었기 때문이다. 이것은 그가 인간을 싫어해서가 아니라, 각 행위에 고유한 자리를 부여했기 때문이다. 강의는 강의로, 대화는 대화로, 걷기는 걷기로.
그가 자주 걷던 길은 훗날 ‘칸트의 산책로’로 불리게 되었다. 하지만 칸트 자신은 그 길에 특별한 의미를 부여하지 않았다. 중요한 것은 길의 상징성이 아니라, 매일 그 길을 걷는 반복 그 자체였기 때문이다. 철학은 장소에서 태어난 것이 아니라, 습관에서 형성되었다는 점을 잘 보여준다. 칸트의 인간학 강의에는 추상적 인간이 아니라, 습관·기질·생활 리듬 속의 인간이 등장한다. 학자들은 그의 이런 시선이 책상 위의 사유만이 아니라, 산책 중의 관찰에서 길러졌을 가능성을 자주 지적한다. 걷는 동안 본 인간은 개념이 아니라 살아 있는 존재였기 때문이다.
임마누엘 칸트의 친필
3. 반복 속에서 자유는 단단해진다
칸트에게 걷기는 거창한 결단이 아니라 반복되는 자기 약속이었다. 오늘도 걷는다, 어제와 다르지 않게. 그 단순한 반복 속에서 그는 자신이 세운 규칙을 스스로 지켜내는 인간의 가능성을 확인했다. 그렇게 길 위에서 훈련된 자유는 강의실에서의 윤리학으로, 책상 위에서의 철학으로 이어졌다. 그의 도덕법칙은 추상적인 선언이 아니라 이미 삶 속에서 검증된 태도의 언어였다.
칸트는 자신의 걷기를 특별하게 여기지 않았다. 그는 그것을 철학적 실험으로 포장하지 않았고, 제자들에게 따라 하라고 권유하지도 않았다. 자신의 생활을 본보기로 삼아 철학을 증명하려는 태도 역시 경계했다. 다만 그는 알고 있었다. 삶이 흐트러지면 생각도 흐트러진다는 것을. 몸의 리듬이 깨지면 판단의 균형도 무너진다는 것을. 걷지 않는 날이 늘어나면, 감각은 둔해지고, 세계를 향한 주의력은 느슨해진다는 것을.
그래서 그는 거의 예외 없이 길 위에 섰다. 그것은 매번 새로이 결심한 의지의 산물이 아니었다. 오히려 의지에 기대지 않아도 되는 상태, 곧 습관의 힘이었다. 칸트에게 가장 신뢰할 수 있는 것은 결심보다 습관이었고, 열정보다 반복이었다. 그 반복 속에서 그는 자신을 지켰고, 이성을 보호했으며, 사유가 무너지지 않도록 삶을 단단히 붙들었다.
결국 칸트의 걷기는 철학의 은유가 아니라 철학의 토대였다. 그는 걷는 삶을 통해 인간이 어떻게 자유로울 수 있는지, 어떻게 스스로에게 책임질 수 있는지를 몸으로 증명했다. 매일 같은 길을 걷는 그 조용한 발걸음 속에, 그의 윤리학 전체가 이미 들어 있었다.
이 점에서 칸트의 걷기는 현대인에게 매우 중요한 메시지를 던진다. 우리는 흔히 삶을 바꾸기 위해 큰 결단이나 극적인 변화를 기대한다. 어느 날 갑자기 모든 것을 내려놓거나 완전히 다른 삶으로 도약하기를 꿈꾼다. 그러나 그런 변화는 대개 순간의 열정에 머물고, 일상의 무게 앞에 쉽게 소진된다. 칸트는 그런 기대와는 전혀 다른 방식으로 삶을 보여준다. 그는 말없이, 그러나 일관되게 증명한다.
삶을 지탱하는 것은 거창한 결심이 아니라, 매일 반복되는 작은 실천이라는 사실을. 걷기는 바로 그런 실천이다. 눈에 띄지 않고, 성취로 기록되지도 않지만, 지속될 때 삶의 구조 자체를 서서히 바꾼다. 그는 삶을 극적으로 전환하려 하지 않았고, 삶이 무너지지 않도록 지탱하는 데 집중했다. 그 지탱의 힘이 결국 가장 깊은 변화를 만든다.
칸트가 산책을 나올 때 사람들이 시계를 맞췄다고 하는 쾨니히스베르크 다리 중 하나. 이 도시에는 일곱 개의 다리가 있었다고 전해진다. 프로이센 공국의 수도였던 이 도시는 독일 땅 너머 폴란드와 리투아니아 사이에 갇혀 있었다가 2차 세계대전 때 무참한 공습으로 파괴되고 35만 명이던 주민이 5만 명으로 줄어든 상태에서 러시아에 양도돼 지금은 칼리닌그라드로 불린다.
4. 삶의 일상에서 칸트적 걷기
오늘날 우리는 니체적 걷기에 더 쉽게 매혹된다. 자유로운 방랑, 즉흥적인 사유, 길 위에서의 해방감. 정해진 목적과 규칙을 벗어나 자신을 던지는 경험은 분명 매력적이다. 특히 억압과 과로에 익숙한 현대인에게 그런 이미지는 강한 유혹이 된다. 그러나 모든 사람이 그런 걷기를 감당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많은 사람들에게 니체적 걷기는 또 하나의 피로가 되기도 한다.
반면 칸트적 걷기는 훨씬 조용하고, 그래서 더 현실적이다. 정해진 시간에, 정해진 길을, 큰 기대 없이 걷는 것. 무엇을 깨닫겠다는 욕심도, 자신을 바꾸겠다는 선언도 없이 그저 걷는 것. 그 반복 속에서 삶은 서서히 안정되고, 생각은 과도한 흥분에서 벗어나 조금씩 깊어진다.
한국 사회는 오랫동안 불규칙한 삶을 정상으로 여겨왔다. 야근과 불면, 과로와 긴장은 성실함의 증표처럼 취급되었고, 규칙적인 생활은 오히려 여유롭거나 나태한 태도로 오해받기도 했다. 몸의 한계를 넘어서 일하는 것이 미덕이 되었고, 리듬이 무너진 삶이 일상이 되었다. 그 결과 우리는 많은 성과를 이루었지만, 삶의 균형을 잃었다. 감정은 쉽게 흔들리고, 생각은 쉽게 극단으로 치닫는다. 이런 사회에서 칸트의 걷기는 낯설면서도 꼭 필요한 제안이 된다. 매일 같은 시간, 같은 길을 걷는다는 단순한 행위가 삶을 다시 세울 수 있다는 제안이다. 거창한 처방이 아니라, 너무 평범해서 오히려 무시해 왔던 방식으로 말이다.
실제로 일상 속 걷기를 꾸준히 실천하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들어보면, 그 변화는 결코 극적이지 않다. 인생이 단번에 달라지지도 않고, 문제들이 사라지지도 않는다. 그러나 분명한 차이는 있다. 하루가 덜 흔들리고, 감정의 기복이 완만해지며, 생각이 불필요하게 과열되지 않는다.
걷기는 문제를 해결해주지 않을 수도 있다. 그러나 문제 앞에서 무너지지 않도록 몸과 마음을 지탱해준다. 그것만으로도 충분히 큰 역할이다. 칸트가 걷기를 통해 지키고자 했던 것도 바로 그런 상태였다. 문제 없는 삶이 아니라, 판단이 흐려지지 않는 삶, 이성이 자기 자리를 잃지 않는 삶이었다.
임마누엘 칸트 우표
칸트는 혁명가가 아니었다. 그는 급진적인 행동을 하지 않았고, 거리에서 외치지 않았다. 시대를 흔들어 깨우는 몸짓보다는, 사유가 오래 지속될 수 있는 토대를 만드는 데 관심을 기울였다. 그럼에도 그의 철학은 오늘날까지 인간의 존엄과 자유를 사유하는 기준으로 남아 있다. 그 단단함의 바탕에는 규칙적인 삶, 그리고 매일 반복된 걷기가 있었다. 그는 몸을 극한으로 몰아붙이지 않았지만, 몸을 방치하지도 않았다. 감각을 억누르지도, 쾌락에 맡기지도 않았다. 그 절제된 균형 속에 그의 사유는 쉽게 소진되지 않았고, 오랜 시간 견딜 수 있었다.
니체의 걷기가 폭풍 같았다면, 칸트의 걷기는 시계추와 같다. 크게 흔들리지 않지만, 한 번도 멈추지 않는다. 그 꾸준한 왕복이 시간을 만들고, 하루를 하루답게 이어준다. 삶도 마찬가지다. 우리는 때때로 거대한 전환을 꿈꾸지만, 대부분의 삶은 반복 속에서 이루어진다. 중요한 것은 그 반복을 어떻게 살아낼 것인가이다. 우리를 소모시키는 반복인가, 아니면 우리를 지탱하는 반복인가. 칸트의 걷기는 그 질문에 대한 하나의 조용하지만 단단한 대답이다. 매일 같은 길을 걷는 그 단순한 행위에 삶을 오래 견디는 지혜가 담겨 있다.
이 연재가 보여주고자 하는 걷기는 하나의 정답이나 단일한 모델이 아니다. 걷기에는 표준도 없고, 따라야 할 규범도 없다. 니체의 걷기와 칸트의 걷기는 분명 서로 다르다. 한쪽은 길 위에서 사유를 폭발시키고, 다른 쪽은 같은 길 위에서 사유를 가다듬는다. 니체의 걸음이 경계를 넘는 몸짓이었다면, 칸트의 걸음은 경계를 지키는 훈련이었다. 그러나 이 두 방식은 서로 대립하기보다, 삶과 사유를 다시 연결한다는 점에서 같은 방향을 향한다. 생각이 몸에서 떨어져 나가지 않도록, 사유가 추상 속에, 공중에 떠 있지 않도록, 두 사람은 각자의 방식으로 길 위에 섰다.
어떤 이는 걷는 동안 자신을 해체하고, 어떤 이는 같은 길을 반복하며 자신을 지켜낸다. 어떤 이는 길 위에서 세계를 향해 외치고, 어떤 이는 말없이 균형을 회복한다. 그 차이는 중요하다. 그러나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은 걷는다는 사실 그 자체다. 몸을 움직이며 세계와 다시 접촉하는 일, 생각을 머릿속에만 두지 않고 발걸음 속에 실어 보내는 일. 걷기는 그 자체로 삶과 사유를 다시 연결하는 가장 오래된 방식이다.
이 연재가 주목하는 것도 바로 그 지점이다. 걷기를 통해 위대한 사상이 탄생했다는 사실이 아니라, 사유가 언제나 몸과 함께 움직여왔다는 사실. 걷기는 철학의 배경이 아니라, 철학이 숨 쉬는 조건이었다. 길 위에서 사유는 흔들리고, 다듬어지고, 때로는 저항의 언어가 되었다.
다음 회에서는 칸트와는 또 다른 방향으로 걷기를 실천한 인물을 만날 것이다. 자연 속으로 들어가 문명의 속도와 규범을 비판했던 사상가, 걷기를 개인적 수양을 넘어 사회적 실천으로 확장했던 헨리 데이비드 소로다. 그의 걷기는 고요한 산책이 아니라, 체제와 가치에 대한 질문이었고, 숲으로 향한 발걸음은 하나의 선언이었다. 소로의 길을 따라가며, 걷기가 어떻게 저항이 되고, 어떻게 삶의 태도가 되는지를 살펴보고자 한다.
우리는 계속 걷는다. 이번에는 도시를 벗어나, 숲을 향해.
걷기에 도움이 되는 책
틱낫한 타인이라는 여행 (알에이치코리아) : 이 저작은 인간관계를 이해해야 할 문제가 아니라 천천히 걸어가야 할 길 로 바라보게 만든다. 타인은 설명의 대상이 아니라 침묵과 경청으로 다가가야 할 하나의 세계라는 통찰이 잔잔하게 스며든다. 이 책에서 소통은 기술이 아니라 수행이며, 관계는 설득이 아니라 공존의 연습이다. 읽다 보면 타인을 이해하려 애쓰던 마음이 어느새 자신을 다정히 바라보는 자리로 옮겨간다. 관계에 지친 이들에게, 이 책은 해결책보다 숨을 고르는 법을 먼저 건네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