식물 제도 된 지방자치 직접민주주의 어떻게 살릴까 [카테고리 설정이 아직되어 있지 않습니다.] 무늬만 직접민주주의인 20년의 허상
많은 정치인과 학자, 활동가들은 제왕적 대통령제를 타파하고 국민주권을 실현하기 위해 국민발안권과 국민소환권을 포함한 직접민주주의 개헌이 필요하다고 주장한다. 지당한 말씀이다. 하지만 이 거창한 구호 뒤에는 불편한 진실이 숨어 있다. 우리에게는 이미 지방자치 차원에서 이러한 직접민주주의 제도가 도입된 지 20년이 넘었다는 사실이다.
1999년 주민조례발안제가 도입되었고, 2004년 주민투표법, 2007년 주민소환법이 제정되면서 형식적으로는 풀뿌리 직접민주주의의 틀이 완성되었다. 그러나 지난 20년을 되돌아보자. 그동안 주민소환 투표용지에 도장을 찍어본 적이 있는가? 혹은 주민발안 조례안이 주민투표를 통해 통과되는 효능감을 맛본 적이 있는가? 거의 없을 것이다. 제도는 있으되 쓸 수 없는 식물 제도이자, 주민에게 권력을 주는 척하는 민주주의 장식품에 지나지 않기 때문이다.
제8회 전국동시지방선거 사전투표 이틀째인 28일 서울 용산구의회에 마련된 사전투표소에서 관계자들이 관내 투표함에 봉인지를 부착하고 있다. 2022.5.28 연합뉴스
주민소환제: 15% 서명의 벽을 넘어도 ‘33.3% 투표율’에 좌절한다
주민소환제는 선출직 공직자가 독선과 부패에 빠졌을 때 임기 중이라도 주민이 직접 파면할 수 있는 강력한 통제 수단이다. 하지만 법적 장벽이 너무 높다. 우선 소환 청구를 위한 서명부터가 난관이다. 시도지사는 유권자의 10%, 시장·군수는 15%, 지방의원은 무려 20%의 서명을 받아야 한다. 게다가 임기 시작 후 1년, 임기 만료 전 1년, 소환 부결 후 1년 내에는 청구조차 할 수 없다.
이 모든 난관을 뚫고 투표까지 가더라도 결정적인 장애물인 ‘33.3% 룰’이 기다린다. 유권자 3분의 1 이상이 투표하지 않으면 개표조차 하지 않고 자동 부결되는 이 조항 때문에 소환 대상자는 투표장에 가지 말라”고 독려하는 투표거부 운동만으로 자리를 보전한다. 실제로 2007년 제도 도입 이후 120건이 넘는 시도가 있었지만, 실제 투표가 성립되어 파면된 사례는 경기 하남시의원 2명이 유일하다. 김황식 하남시장(31.1%), 김성환 노원구청장(32.7%), 홍준표 경남지사(서명 단계 각하) 등 수많은 사례가 민심의 법정이 아닌 ‘투표율 미달’이라는 절차적 이유로 투표함도 열어보지 못하고 면죄부를 받았다.
주민투표제: 주민에겐 ‘거부권’이 없고 단체장에겐 ‘면피권’만 있다
주민투표제 역시 사정은 마찬가지다. 본래 주민투표는 대의기관의 잘못된 결정을 주민이 거부하거나 중요한 정책을 직접 결정하는 수단이어야 한다. 미국이나 스위스에서는 의회가 법을 만들면 주민들이 일정기간 내에 서명을 모아 효력을 정지시키고 투표로 폐기할 수 있는 국민거부권이 일상화되어 있다. 그러나 우리 주민투표법에는 이런 ‘거부권’ 조항이 없다. 게다가 주민의 삶과 직결된 예산, 세금, 수수료 등의 문제는 아예 투표 대상에서 제외된다.
이렇다 보니 주민투표는 주민이 의회나 단체장을 견제하는 수단이 아니라 단체장이 자신의 정책에 정당성을 부여하거나 골치 아픈 국책사업의 책임을 떠넘기는 단체장의 관제 신임투표(plebiscite, 플레비사이트) 수단으로 변질되었다. 주민이 청구해도 최종 발의권한은 단체장에게 있고 그마저도 ‘33.3% 개표 요건’이 존재해 어느 한쪽이 보이콧하면 결론을 낼 수 없는 구조다. 주민을 위한 방패가 아니라 기득권을 위한 요식행위가 된 것이다.
주민조례발안제: 1년을 기다려도 의회가 뭉개면 그만인 ‘간접 민주주의’
그나마 주민참여가 가장 활발한 영역은 주민조례발안이다. 전국으로 퍼진 친환경 무상급식 조례나 농민수당 조례 등은 주민들이 직접 입법을 주도해낸 빛나는 성과다. 그러나 이 제도 역시 ‘간접 발안제’라는 치명적인 한계를 안고 있다. 주민이 직접 조례안을 제출해도 곧바로 주민투표로 확정되는 것이 아니라 지방의회의 심의, 의결을 받아야 한다.
현행법상 지방의회는 수리된 날로부터 1년(연장 시 2년) 이내에만 의결하면 된다. 즉, 주민이 힘들게 요건을 갖춰 청구해도 의회가 1년 넘게 뭉개거나, 내용을 누더기로 수정해 통과시키거나, 아예 부결시켜 버려도 주민은 막을 방법이 없다. 최근 보수 종교단체들이 주도하는 학생인권조례 폐지청구처럼 제도가 악용되는 사례까지 나오지만 이를 최종적으로 걸러낼 권한이 주민에게는 없다. 입법청구권만 있을 뿐, 입법결정권은 여전히 의회가 독점하고 있기 때문이다.
개선 방향: 세 가지 족쇄를 풀어야 한다
지방자치의 직접민주주의가 식물상태에서 벗어나려면 국회는 당장 다음의 세 가지 법 개정에 착수해야 한다.
첫째, 주민소환과 주민투표의 33.3% 개표 요건을 철폐해야 한다. 이 독소조항은 투표거부를 정치적 전술로 정당화하고 민심의 확인 자체를 봉쇄한다. 스위스나 캘리포니아 주가 그렇듯이 유효투표 다수결 원칙으로 전환하거나, 최소한 투표율 문턱을 현실적인 수준(예컨대 15%)으로 대폭 낮춰야 한다. 그래야 선출직 공직자들이 주민 무서운 줄 알게 된다.
둘째, 간접 주민발안제를 직접 주민발안제로 전환해야 한다. 주민조례발안법을 개정하여 주민이 청구한 조례안을 지방의회를 거치지 않고 직접 주민투표에 부쳐 주민이 최종 결정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 의회의 심의권이 걱정된다면 의회가 반대의견을 붙이거나 대안(수정안)을 함께 주민투표에 붙여 주민이 양자택일하게 하면 된다.
셋째, 주민거부권을 신설해야 한다. 현재 제외된 예산이나 조례에 대해서도 의회의 결정이나 단체장의 처분이 있은 후 일정 기간(예: 90일) 내에 일정한 비율의 주민들이 서명하면 그 효력을 정지시키고 주민투표로 폐기할 수 있는 진정한 의미의 ‘거부권(Veto)’을 법에 명시해야 한다.
지방을 바꾸면 중앙이 바뀐다
국회의원들이 지방자치 수준의 직접민주주의가 가진 제도적 결함을 모를 리 없다. 알면서도 방치하는 것이다. 지방의원과 지자체장은 국회의원들의 지역조직을 관리하는 수족이나 다름없는데, 이들이 수시로 주민에 의해 소환되거나 견제 받는 상황을 원치 않는 기득권 카르텔이 작동하고 있기 때문이다. 나아가서 풀뿌리 직접민주주의가 체감효과를 발휘할 경우 그 칼날이 결국 국회의원을 향하게 된다는 사실도 잘 알기 때문이다.
이제 직접민주주의자들은 전략을 수정해야 한다. 실현 가능성이 요원한 개헌 논의에만 매달려서는 안 된다. 민주당의 국회 과반수 의석만 가동돼도 당장 고칠 수 있는 지방자치 관련법률 개정투쟁에 화력을 집중해야 한다. 지방에서부터 주민이 직접 조례를 만들고 부패한 공직자를 끌어내리는 효능감을 느끼면 국민들이 자연스레 중앙정치의 변화에도 힘을 싣게 될 것이다. 지금의 녹슨 칼을 갈아 주민의 예리한 보검으로 만드는 일, 이것이 대한민국을 진정한 주권자 공화국으로 만드는 첫걸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