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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그림 파느니 차라리 굶어죽겠다 화가 퍼시 켈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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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국 북부 컴벌랜드주의 작은 항구도시 워킹턴. 제1차 세계대전의 포연이 채 가시지 않은 1918년, 한 아이가 태어났다. 칠남매 중 쌍둥이로 태어난 이 아이의 집안은 가난했고, 창밖으론 늘 공장의 검은 연기가 자욱했다. 하지만 두 살 때부터 분필을 쥐고 바닥에 그림을 그리던 이 아이는 훗날 영국 현대 미술사에서 가장 고독하고도 찬란한 이름 중 하나가 된다. 그의 이름은 퍼시 켈리(Percy Kelly, 1918~1993)다.   퍼시 켈리(UK 핀터레스트 닷컴) 전보배달부에서 처칠의 전우까지, 결핍이 낳은 예술혼 퍼시의 유년시절은 결핍 자체였다. 예술적 재능은 일찌감치 꽃을 피웠으나, 가난은 그를 미술학교가 아닌 우체국으로 등떠밀었다. 14살의 퍼시는 전보배달부로 사회생활을 시작했다. 첫 월급을 받자마자 그가 달려간 곳은 식당이 아닌 화방이었다. 빵 대신 물감을 샀던 소년의 고집은 평생을 관통하는 그의 정체성이 되었다. 1939년 발발한 제2차 세계대전은 그에게 예상치 못한 기회를 선사했다. 왕립 통신부대에 배속되어 런던 화이트홀 지하 작전실에서 상황지도를 그리던 중, 당대 최고 실권자 윈스턴 처칠(1874~1965)을 만난 것이다. 공습을 피해 나란히 앉은 총리와 병사는 밤새 미술을 논했다. 처칠은 퍼시의 지도 그리기 실력을 보고 자네는 반드시 국립미술관에 가야 하네 라며 그의 재능을 격려했다. 전쟁이라는 비극 속에서 퍼시는 자신의 예술가적 소명을 재확인했다.   젊은 시절의 퍼시(위키피디아) 전설적 감독 빌 섕클리와의 기묘한 조우 전쟁 후 고향으로 돌아온 퍼시는 낮에는 우체국 부국장으로 일하고, 밤에는 그림을 그렸다. 흥미로운 점은 이 시기 그가 축구선수로도 활동했다는 사실이다. 1950년대 중반, 그는 워킹턴 타운 축구클럽에서 뛰었는데 당시 감독은 훗날 리버풀의 전설이 된 빌 섕클리였다. 강인한 카리스마의 대명사인 섕클리와 예민한 감수성의 화가 퍼시. 진흙탕 위를 뒹구는 축구공과 섬세한 붓끝의 이질적인 조합은 퍼시의 삶이 얼마나 다양한 층위로 구성되어 있었는지를 보여준다. 기록에 따르면 그는 건장한 체격의 운동선수였으나, 그 내면에는 남몰래 여성용 실크 속옷을 수집하는 또 다른 자아가 자라나고 있었다.   퍼시의 그림(Kelly, Robert Percy, 1918–1994 | Art UK) 재거(Jaeger) 드레스가 불러온 파문과 도피 퍼시의 삶이 격랑에 휘말린 것은 그의 복장 도착  성향이 드러나면서였다. 첫 번째 아내 오드리 제임스는 어느 날 퇴근 후 집에서 자신의 값비싼 재거 브랜드 니트 드레스를 입고 있는 남편을 발견한다. 보수적인 시대에 용납될 수 없는 일이었고, 퍼시는 그 길로 집에서 쫓겨났다. 이후 그는 안과 주치의의 아내였던 크리스틴과 눈이 맞아 웨일스의 성 다비즈로 도망치듯 이주했다. 이곳에서 퍼시는 더 이상 자신을 숨기지 않았다. 그는 공공연히 치마를 입고 거리를 활보했다. 하지만 1970년대 웨일스의 작은 마을은 치마 입는 화가 에게 너그럽지 않았다. 이웃들의 냉대와 손가락질 속에 두 번째 아내마저 떠나갔고, 퍼시는 철저한 고립에로 침잠했다.   퍼시의 그림(Newlyn | Art UK) 로버타 페넬로페 켈리, 7년간의 나비가 된 시간 1985년, 67세의 노화가는 법적 절차를 거쳐 이름을 로버타 페넬로페 켈리 로 개명했다. 그는 생물학적 성전환 수술을 하지는 않았으나, 스스로 여성이 되어가고 있다는 확신 속에 살았다. 이 시기 그의 예술은 극적인 변화를 맞이한다. 칙칙한 산업풍경과 거친 기계 위주였던 화풍은 화사한 꽃과 자화상으로 옮겨갔다. 그는 독특한 이중생활을 영위했다. 왓턴(Watton)에서는 우아한 로버타로 장을 봤고, 이웃 마을 애틀버러에서는 다시 퍼시로 돌아가 일상을 보냈다. 이는 단순한 기행이 아니라, 사회의 편견으로부터 자신을 보호하면서도 내면의 정체성을 지켜내기 위한 처절한 생존전략이었다. 그는 친구 조앤 데이비드에게 보내는 편지 속에 자신의 진심을 담았다. 30쪽이 넘는 긴 편지들은 화려한 그림으로 장식되었고, 이는 훗날 그의 내면을 들여다보는 중요한 사료가 되었다.   퍼시의 그림(Houses near Rockland St Peter, Norfolk | Art UK) 단 한 점도 팔지 않겠다 고결한 굶주림 퍼시 켈리는 생전 그림을 팔지 않는 것으로 악명이 높았다. 마거릿 공주와 유명 화상들이 그의 작품을 사기 위해 줄을 섰지만, 그는 내 작품을 파느니 차라리 굶어 죽겠다 며 거절했다. 실제로 그에게 그림은 상품이 아니라 자신의 영혼 그 자체였다. 그는 사후에야 비로소 사람들이 이 진실한 아름다움 에 탄성을 지를 것임을 예견했다. 그의 예언은 적중했다. 1993년 그가 인후암으로 세상을 떠난 뒤, 아들 브라이언과 화상 크리스 와즈워스에 의해 세상에 나온 그의 그림들은 전시 시작 며칠 만에 완판되는 기염을 토했다. 현재 그의 작품은 경매시장에서 수백만 원에서 수천만 원을 호가하는 귀한 대접을 받고 있다.   퍼시의 그림(Tallentire, Cumberland | Art UK) 한국사회에 던지는 질문 로버트 퍼시 켈리의 이야기는 단순히 먼 나라 화가의 기행으로 치부하기엔 오늘날 한국사회와 맞닿은 대목이 너무나 많다. 첫째, 예술인 복지 의 역설이다. 퍼시는 재능이 있었음에도 사회보장 급여를 받기 위해 그림을 숨겨야 했다. 2026년의 한국도  예술인 복지법 이 시행 중이지만, 여전히 많은 예술가가 생계와 창작 사이를 오가며 갈등한다. 예술가의 재정적 궁핍이 창작의 동력이 된다는 낭만적 해석은 이제 끝내야 한다. 그들이 사후가 아니라 생전 에 정당한 평가와 보상을 받을 수 있는 제도가 절실하다. 둘째, 다양성 에 대한 우리의 온도계다. 퍼시가 치마를 입었다는 이유로 공동체에서 배척당했던 50년 전 영국의 모습은, 현재 성 소수자 담론을 대하는 한국사회의 경직된 시선과 겹친다. 공동체의 미풍양속 이라는 이름 아래 개인의 정체성을 억압하는 문화는 또 다른 퍼시 켈리들을 고립시키고 있는 것은 아닌가. 셋째, 장인정신의 가치다. 자본의 논리에 휘둘리지 않고 자신의 미학을 끝까지 밀고 나간 퍼시의 고집은, 모든 것이 상품화되는 디지털 시대에 경종을 울린다. 효율성과 수익성만 따지는 한국의 문화예술 생태계에서, 퍼시처럼 팔지 않겠다 고 선언할 수 있는 뚝심 있는 창작자가 과연 설 자리가 있는지를 물어야 한다. 넷째, 느린 소통 의 회복이다. 그가 평생 주고받았던 30쪽짜리 손편지는 인스턴트 식 소통이 지배하는 우리시대에 묵직한 울림을 준다. 화려한 이모티콘과 짧은 텍스트 대신, 직접 그린 그림과 정갈한 문장으로 누군가에게 가닿으려 했던 그 정성은 소외된 인간이 타인과 연결되고자 했던 가장 인간적인 몸부림이었다.   퍼시가 그린 손편지.(Mallard Illustrated Letter to Joan David, 25 September 1990 | Art UK) 텅 빈 풍경이 건네는 위로 퍼시 켈리의 그림 속에는 유독 사람이 없다. 텅 빈 길, 낡은 집, 고요한 항구만이 캔버스를 채우고 있다. 어쩌면 그는 자신을 거부했던 인간 세상을 그림 속에서 지워버림으로써 자신만의 평온한 왕국을 건설하려 했던 것일지도 모른다. 그는 너무 일찍 태어난 사람이었다. 만약 그가 지금 이 시대에 태어났다면, 그는 자신의 정체성을 당당히 드러내는 소셜미디어(SNS) 스타이자 세계적인 현대미술가로 칭송받았을 것이다. 하지만 그가 겪은 고독과 투쟁이 없었다면, 그토록 시리고도 아름다운 그의 화풍도 완성되지 못했을 것이다. 퍼시 켈리의 삶은 우리에게 묻는다. 당신은 당신의 진실을 위해 굶주릴 준비가 되어 있는가, 혹은 타인의 시선으로부터 자유로운 당신만의 치마 를 입을 용기가 있는가. 그의 그림 속 텅 빈 풍경은 결코 비어있지 않다. 그곳은 우리가 지워버린 누군가의 자리이며, 동시에 우리가 언젠가 도달해야 할 진정한 자아의 공간이다.   지난주 영국 북부 컴벌랜드의 영국인 집을 찾은 김성수 시민기자가 촬영한 퍼시의 그림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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