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년 국정연설의 전통과 가치마저 퇴색시킨 트럼프 [카테고리 설정이 아직되어 있지 않습니다.]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24일 미국 의회 의사당 하원 본회의장에서 열린 상·하원 합동회의에서 집권 2기 첫 국정연설(State of the Union address)을 하고 있다. 2026.2.24.로이터 연합뉴스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은 현지 시각 2월 24일에 2026년 신년 국정연설을 했다. 연방 의회 상·하원이 한자리에서 모인 가운데 한 이 연설은 사상 최장인 1시간 48분 이어졌다. 트럼프는 이날 미국 정치의 중요한 전통과 가치를 퇴색시켰다.
신년 국정연설은 행정부 수장이 입법부를 통해 미국인들에게 현재 상황을 전하고 더불어 국가의 미래를 생각하는 자리이다. 미연방 헌법이 명시한 의무 조항이다. 대통령은 수시로 의회에 국정 현황에 대한 정보를 제공하고, 필요하고 적절하다고 판단되는 조치를 의회가 고려하도록 권고해야 한다 고 되어있다.
[President] shall from time to time give to the Congress Information of the State of the Union, and recommend to their Consideration such Measures as he shall judge necessary and expedient.
미연방 헌법의 구조를 보면 입법부가 국가 운영의 엔진이다. 의회의 기능이 헌법 제1조에 명시된 이유이다. 행정부는 운전대이다. 입법부가 제공한 동력으로 국가가 움직일 때 행정부는 방향을 잡아주어야 한다. 거꾸로 말하면 운전대가 돌려지는 방향으로 동력이 제공되어야 한다.
사법부는 변속기와 브레이크 역할을 한다. 국가가 위험한 질주를 하면 속도를 줄이거나 차를 멈추게 해야 한다. 따라서 국가 입법, 행정, 사법부가 국정연설장에 다 모인다. 텔레비전 카메라는 이 견제와 균형(checks and balance)의 현장을 비추어 250년 이어온 역사의 지속성을 자랑한다.
초대 대통령 조지 워싱턴이 미 역사상 처음으로 신년 국정연설을 한 뉴욕 맨해튼에 있는 Federal Hall. 국부로 추앙받는 워싱턴을 기념하는 행사 장면 (National Park Service)
초대 대통령 조시 워싱턴은 1790년 1월 8일 역사상 첫 번째 신년 상·하원 합동 국정연설을 했다. 이 연설을 트럼프가 깊이 새겨야 한다. 워싱턴은 신생국 미국이 나가야 할 방향을 자신 있게 제시했다. 물론 독립을 확보한 지 7년도 안 된 나라에 국경의 신성함을 지키는 일이 제일 시급했다.
이를 위해 세 가지 방법을 의회에 주문했다. 전쟁의 가능성에 대비하는 것이 가장 효과적인 평화유지책이란 표현이 이때 그에게서 나왔다. (To be prepared for war is one of the most effectual means of preserving peace.)
국방력 향상책으로 단련된 시민들의 총기 소지 보장과 정당한 대접을 받는 정규군, 국가 차원의 군사적 보급 능력을 꼽았다. 외교관의 육성과 지원도 안보와 연계시켰다. 워싱턴은 광활한 미국의 개척지 보호를 위해 공격적인 원주민과의 대립을 피하지 않겠다고 했다. 여기까지는 워싱턴과 트럼프의 사고가 일치하는 부분이 있다.
하지만, 워싱턴은 강한 안보를 위해 넓게 열린 사회의 필요성을 말했다. 첫째가 포용성 있는 이민정책이다. 이민을 통해 시민이 되는 길이 넓게 열려있어야 한다고 했다.
외국인이 시민의 권리를 누릴 수 있는 조건은 통일된 귀화 규정을 통해 신속하게 확정되어야 한다 (the terms on which foreigners may be admitted to the rights of citizens should be speedily ascertained by a uniform rule of naturalization.) 그의 지론이었다.
둘째, 다른 나라의 기술을 받아들여 미국의 생산성을 높이는 방법이다. 외국의 새롭고 유용한 발명품들을 미국으로 들여와 이들을 국내에서 생산할 수 있도록 기술과 능력을 갖추자고 했다. ( …introduction of new and useful inventions from abroad as to the exertions of skill and genius in producing them at home… )
모방 생산을 통해 창조 경제를 육성하겠다는 비전이었다. 미국이 그렇게 했다. 산업 혁명은 유럽에서 시작되었지만, 산업 혁명의 생산품들은 미국이란 큰 시장에서 널리 사용되면서 질의 향상과 대량 생산을 가져오고, 결국 세계 시장을 제패하는 선순환이 이루어졌다.
유럽 국가들은 식민지 시장을 확장해야 했지만, 미국은 국내 시장이 경제를 견인했다. 국내 시장 형성에 이민 정책이 결정적 역할을 했다. 개척지”는 이민자 사회였고, 이는 시장 확장과 동일어이다.
트럼프의 통치술을 정리하면 ‘좋은 미국인’과 ‘나쁜 미국인’을 갈라서 전자가 후자를 통해 위기의식을 느껴 대립하게 하는 전략이다. 이민자 사회를 ‘나쁜 사회’로 간주하고 사회를 나쁘게 하는 요소들을 색출한다며 폭력적인 공권력에 의지하고 있다.
조지 워싱턴의 1790년 첫 신년 국정 연설문. 그는 상·하원들 앞에서 이 연설문을 읽었다. 이 전통이 250녀 가까이 이어져 내려온다. (George Washington s Mount Vernon)
거의 250년 전 워싱턴은 이미 트럼프식 갈라치기를 경계했다. 그의 첫 국정연설의 결론이 큰 감동을 준다.
우리나라의 복지는 우리가 관심을 기울이고 노력해야 할 가장 중요한 목표입니다. 자유롭고 효율적이며 평등한 정부로부터 우리 국민이 마땅히 누려야 할 축복을 보장하는, 기쁘지만 힘든 과업에 여러분과 협력할 수 있다면 나는 큰 보람을 느낄 것입니다.”
The welfare of our country is the great object to which our cares and efforts ought to be directed, and I shall derive great satisfaction from a cooperation with you in the pleasing though arduous task of insuring to our fellow citizens the blessings which they have a right to expect from a free, efficient, and equal government.
트럼프 행정부는 과연 워싱턴이 꿈꾼 자유, 효율, 평등의 정부인지부터 의심스럽고, 정부의 기능이 미국의 공동체 구성원 모두가 마땅히 보장받아야 할 ‘행복 추구의 권리’를 지켜주고 있는지 회의할 수밖에 없다.
워싱턴은 건강한 국가의 조건으로 깨어있는 의식을 꼽았다. 사회 구성원들의 합리적 자신감, 시민의 권리를 강조하는 교육의 필요성을 역설했다. 이를 통해 권력에 의해 권리가 침해당하고 억압받을 때 이를 분별하고 반응할 수 있는 시민 정신을 강조했다.
사회 구성원들이 삶의 ”편의를 무시한 데서 비롯된 부담과 사회의 불가피한 요구에 따른 부담을 구별하고…자유를 소중히 여기고 방종을 피하는” 사회가 그의 이상향이었다. 워싱턴은 자유 침해에 대한 신속하지만 절제된 경계”와 동시에 법에 대한 불가침의 존중”이 있는 사회 건설이 정부의 역할이라고 믿었다. 의회가 받아들이지 않았지만, 이런 시민 의식을 심어주기 위해 평생 군인으로 살았던 워싱턴은 국립대학 설립을 제안하기도 했다. 트럼프에게서는 기대할 수 없는 앞서가는 의식을 발견한다.
상·하원을 다 한자리에 모아 놓고 대통령이 연설하는 것은 민주주의 정신에 어긋난다며 토머스 제퍼슨은 신년 국정연설 대신 연설문을 의회에 제출했다. 사진은 프린트된 그의 1802년 연설문. ( Brunk Auction)
대통령의 신년 상·하원 합동 국정연설의 전통은 제3대 토머스 제퍼슨 대통령 임기 8년 동안 중단됐었다. 그는 임기중인 1801년부터 1808년까지 연설문 제출로 대체했다. 신년 국정 연설이 행정부 수장이 의회 위에 군림하는 모습으로 비칠 것을 우려했다. 민주주의 정신에 어긋난다며 상하 의원을 다 모아놓고 하는 합동 연설을 피했다.
제퍼슨이 목소리가 작아 미국의 최고 지도자들이 한 데 모인 장소에서 연설하기를 꺼렸다는 추측도 있었다. 하지만, 독립선언서 초안을 쓴 당시 미국의 최고 지성이며 문장가인 제퍼슨이 의회 의원들에게 기가 질려 연설을 피했을 것으로 상상하기 어렵다. 그의 임기 중에 이루어진 ‘루이지애나 매입’ 등 미국의 운명을 바꾸는 중차대한 정책을 추진하면서 자신의 비전을 몇 마디 말로 전하기 어렵다고 판단했을 가능성이 높다. 제퍼슨의 힘은 말 대신 글이었다.
제퍼슨 외에도 신년 국정연설을 건너뛴 경우가 있지만 대통령은 대부분 신년 초에 의회로 왔다. 국가 운영 책임자들이 다 모이고, 미국을 넘어 세계가 주시하는 새해 국정 연설이 역사를 만들었다.
링컨이 첫 상·하원 합동 국정연설을 한 1861년 말 당시 링컨의 모습 (National Humanities Center)
제 16대 대통령 에이브러햄 링컨의 첫 상·하원 합동 국정연설은 1862년 벽두가 아니라 1861년 끝자락, 12월 3일에 있었다. 새해가 오기 전에 했다. 모두 60만의 생명이 사라질 남북전쟁이 그 해 시작됐다. 링컨은 국정 연설의 대부분을 전쟁과, 또한 전쟁 중에 등한시할 수 있는 외교 문제에 할애했다.
이 연설 마지막에 링컨의 노동 우위론이 나온다. 링컨은 미국을 살리는 힘이 자본이 아니라 노동이란 주장을 펼쳤다. 노동과 자본은 공존하지만, 자본의 시작은 노동이다. 자본은 오직 노동의 산물이며, 노동이 먼저 존재하지 않았다면 자본 또한 결코 존재할 수 없었을 것이다. (Capital is only the fruit of labor, and could never have existed if labor had not first existed.)” 링컨은 그의 첫 국정연설에서 노동의 착취가 아니라 노동의 생산성을 통한 건강한 자본주의 건설론을 펼쳤다. 자본도 보호받아야 하지만 노동이 더 높은 차원의 보호가 요구된다.
세상의 신중하고 무일푼인 초보자는 임금을 받으며 일하고, 여유 자금을 모아 도구나 땅을 구매한 후, 또 한동안 자립하여 일하다가 마침내 또 다른 [생산 수단이 없는 기초 단계의 노동자]를 고용하여 도움을 받습니다. 이것이 바로 모두에게 길을 열어주고, 희망을 주고, 결과적으로 모두에게 활력과 발전, 그리고 삶의 질 향상을 가져다주는 정의롭고 관대하며 번영하는 시스템입니다.”
The prudent, penniless beginner in the world labors for wages awhile, saves a surplus with which to buy tools or land for himself, then labors on his own account another while, and at length hires another new beginner to help him. This is the just and generous and prosperous system which opens the way to all, gives hope to all, and consequent energy and progress and improvement of condition to all.
링컨은 이 노동 우위론을 노예 해방과 접목했다. 노예에게 자유롭게 노동할 수 있는 권리를 주면, 개인도 사회도 부유하고 건강해 진다. 남북 전쟁을 노예 해방이 아니라 노동 해방을 위한 투쟁이라 평가하는 이유이다.
억압받지 않는 자유로운 노동자가 링컨에게 인민(People)이었다. 인민의, 인민을 위한, 인민을 위한 국가를 수십만 생명을 던져 지킬만한 가치가 있는 최고의 공동체 모델로 제시했다. 자본을 노동의 피를 빠는 흡혈귀로 본 마르크스주의의 대안이라 할 수 있다.
제1차 세계대전의 종전을 준비하는 차원에서 우드로 윌슨이 14개조 평화 원칙을 발표한 1918년 신년 국정 연설 장면. (Public Domain)
1918년 1월 8일 제28대 대통령 우드로 윌슨의 신년 국정연설은 한민족과 떼어낼 수 없는 역사의 연계성을 갖고 있다. 이 연설에서 윌슨은 제1차 세계 대전 종전 협상의 기초로서 14개조 평화 원칙을 제시했다. 전쟁 후 미국이 주도할 세계 공동체의 기본 틀로서의 의미도 있었다.
1914년 발발한 제1차 세계 대전에 1917년 미국이 개입했고 이로써 독일 제국을 중심으로 한 동맹국들이 고전하기 시작했다. 깊은 기독교 신앙의 소유자 윌슨은 전쟁이 끝나면 미국의 지도력 아래 새 하늘 새 땅이 세워져야 한다는 꿈을 갖고 있었다.
윌슨은 세계 평화를 위해 비밀 외교의 중단, 자유롭고 동등한 교역 체계, 군사력 축소를 언급했다. 이어 식민지 소유권 조절과 유럽 내 국경을 다시 긋고, 신생국을 탄생시키는 과정과 관련해 하나의 원칙을 내놓았다. 역사의 전환점이라 부를만한 새로운 비전이었다.
식민지의 주인이 바뀌고, 국토가 달라지며, 전에 없던 나라가 생겨나는 과정에 지켜야 할 원칙이 있었다. 이 공간 속의 사람들은 자신이 속한 공동체의 운명을 스스로 결정할 수 있어야 한다는 민족자결주의였다. 이 원칙은 피지배, 약소민족에 희망이었다. 더욱이 제14번 조항은 국제연맹 창설 제안이다. 국제적 폭력, 분쟁, 억압 사태를 평화적으로 해결할 기구가 상정됐다.
1919년 3월 1일 민족자결주의에 고양된 조선 민중이 독립을 선언했다. 윌슨의 이상을 조선에 현실화하기 위한 결단이었다. 기미년 독립선언서가 新天地(신천지)가 眼前(안전)에 展開(전개)되도다. 威力(위력)의 時代(시대)가 去(거)하고 道義(도의)의 시대(時代)가 來(내)하도다”고 외친 이유이다.
독립선언서가 全世界氣運(전세계기운)”이라 믿었던 민족자결주의는 승자들의 유럽 중심 사고와 그들이 원했던 안정적 전후 관리 매뉴얼에 지나지 않았다. 피지배 약소민족에 대한 고려와 배려는 없었다. 이런 측면에서 윌슨의 1918년 신년 의회 연설은 새 하늘 새 땅은 고사하고 기존의 땅과 하늘에 비탄이 넘치게했다.
1941년 1월 신년 국정연설에서 루스벨트는 미국은 인류를 위해 네개의 보편적 자유를 지켜야 한다고 주장했다. 위 왼쪽에서부터 시계방향으로 언론과 표현의 자유,” ”신앙의 자유,” 공포로부터의 자유” 궁핍으로부터의 자유. 유명 삽화가 노먼 록크웰의 작품이다. (Public Domain)
1941년 1월 6일. 역사에 기록되는 날이다. 이날 프랭클린 루스벨트 대통령은 신년 국정연설을 했다. 네 개의 자유 (Four Freedoms)”로 알려진 연설이다.
1939년 9월 나치스 독일의 폴란드 침공으로 시작된 제2차 세계대전에서 미국은 1년 넘게 친(親) 영국이었지만 그렇다고 딱히 반(反) 독일도 아니었다. 미국 내 반전 정서도 무시할 수준이 아니었다.
이 전쟁은 세계 인구의 25%가량을 통치하는 영국의 제국주의 역사가 잉태한 고질적인 유럽의 공간 다툼이란 시각도 있었다. 히틀러를 위대한 영도자, 나치스를 승자의 욕심만을 채운 1919년 파리강화조약으로 파괴된 독일의 재건과 부흥을 가져올 희망으로 보기도 했다. 미국 내 반유대인 정서도 고립주의를 부추겼다. 미국의 입장은 영국에 총을 주지만 독일에 총을 쏘지는 않겠다였다.
1941년 1월 6일, 신년 국정연설을 통해 인류 전체를 위해 미국이 기본적 네 개의 자유를 지켜야 한다고 말하는 루스벨트. (Franklin D. Roosevelt Presidential Library and Museum)
이때 루스벨트가 강력하게 미국의 정체성을 정리하고 전체주의가 미국의 존재 가치와 대립함을 말했다. 독일의 전체주의는 인간의 기본적 자유를 위협하고 파괴하기 때문이다. 언론과 표현의 자유,” ”신앙의 자유,” 궁핍으로부터의 자유, 공포로부터의 자유”이다. 루스벨트는 신년 연설에서 네 개의 자유를 인류 모두가 누리도록 해야 한다고 말했다. 윌슨이 제창한 미국은 자유의 세계적 수호신이란 주장을 루스벨트가 완성했다.
전체주의 세력, 특히 추축국 일본은 이런 미국을 불구대천지수로 보았고 그해 12월 진주만을 공격했다. 독일이 미국에 선전포고했고, 미국은 연합국의 지도자가 되어 제2차대전의 승리를 이끄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신년 상·하원 합동 국정연설은 이런 힘을 발휘한다. 역사의 전환점을 가져올 기회를 트럼프가 놓쳤다. 극히 단순한 표현과 일방적 주장으로 채우고, 공포심을 조성하며, 자신을 치켜세우면서 미국 사회를 갈라놓았다. 이 과정에서 상대 당 의원들에게 극한 비난과 야유를 던졌다. 신년 국정연설의 전통과 정신을 그가 손상했다. 역사의 퇴보는 이럴 때 쓰는 말이다.
트럼프의 신년 국정연설 중 기립 박수하는 사진 뒤쪽 공화당 의원들과 자리에 앉아 불편한 마음을 드러내고 있는 사진 앞쪽의 민주당 의원들. 트럼프의 갈라치기 정치가 만들어낸 장면이다. (PBS News 갈무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