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생의 비수기에 ‘두 번째 계절’이 온다면 [카테고리 설정이 아직되어 있지 않습니다.] 오동진 영화평론가
비수기 해변에서는 어떤 ‘프랑스적’ 러브스토리가 이루어질까?
전혀 엉뚱한 얘기지만 프랑스 영화 은 장폴 뒤부아의 소설 제목 『프랑스적인 삶』을 떠올리게 한다. ‘프랑스적’이라는 것은 무엇인가. ‘프랑스적’인 영화는 어떠한 것인가. 다소 수다스럽고(아무래도 언어가 갖는 리듬 때문에?) 우스꽝스러울 만큼 냉소적이지만 반면에 감당할 수 없을 만큼 개방적이라는 얘기일까? 어쨌든 ‘프랑스적’의 본질은 사랑이나, 사랑의 관계를 바라보는 시선의 차이에서 나오는 것일 수 있다. 그건 할리우드가 만들어 낸 에릭 시걸의 (1970)나 베트남전 시대의 로맨스를 그린, 피터 폰다와 린제이 와그너 주연의 (1973)의 전형성과는 그 아우라가 다르다. 한마디로 프랑스는 사랑이 다르다. 프랑스 영화의 남녀는 만나는 부분에서가 아니라 헤어지는 부분에서 ‘프랑스적’이다. 영화 은 오랜만에 만나는 ‘프랑스적’인 러브스토리이다.
이 영화의 원제는 사뭇 다르다. 원제가 내용에 한결 충실해 보인다. ‘오흐쎄종(Hors-saison)’, 곧 ‘비수기’라는 뜻이다. 영화는 시종일관 비수기의 해변을 보여 준다. 프랑스 북서부 해안 지역인 브르타뉴의 모르비앙이라는 곳이다. 만(灣)이다. 사람들이 많이 알고 있는 몽생미셸, 에트르타, 도빌 같은 노르망디 지역보다 해안 라인을 타고 더, 더, 더 서쪽 끝으로 가면 된다. 한번 비가 오면 넉 달간 내리는 곳이다. 영화의 여주인공은 남자에게 전화로 내일 만나지 않을래? 라고 말하면서 내일은 30분만 비가 그친대. 그러니 그때 보자는 식으로 말한다. 두 남녀는 ‘비수기’의 해안에서 ‘비수기’의 인생 시기에 ‘비수기’에나 할 법한 데이트와 연애 관계를 나눈다. 짧은 며칠이다. 그러나 인생 전반에 걸쳐 가장 애틋하며, 죽을 때까지 간직할 사랑일 것이다.
해안 마을에 도피성 호화여행 온 쇠락기 톱스타
살아가면서 진짜 사고와 사건은 대체로 인생 2막에서 벌어진다. 중요한 것은 1막 때와는 달리 2막에서는 그것을 보다 현명하고 부드럽게 해결해 나간다는 것이다. 여자는 남자에게 15년 전에 당신이 떠났고 또 이렇게 15년 만에 나타났지만 앞으로 다시는 돌아오지 말라고 말한다. 둘은 그게 현명한 일이라는 것을 안다. 그럴 나이가 됐기 때문이며 현실을 바꾸기에는 치러야 할 것이 너무 많다는 것을 잘 알기 때문이다.
프랑스에서 당대 스타인 마티유(기욤 카네)는 현재 번 아웃 상태다. (안성기처럼) 국민배우이고 (역시 안성기가 그랬던 것처럼) 출연한 대다수 영화는 좋았지만 최근 나온 두 편은 별로 안 좋은 상태이며 앞으로 점점 그렇게 될 것 같은 느낌을 준다. (해안가의 한 레스토랑에서 중년의 웨이터는 바로 그 점을 정확하게 지적한다) 그걸 만회하고자 마티유는 연극무대에 서려 했다. 그러나 정확하게 공연 4주를 앞두고 모든 걸 다 내던진 채, 모르비앙 해변 호텔로 도망을 온다. 연기에 자신감이 떨어졌고 모든 걸 회복시키기보다는 더 큰 실패가 눈에 보였기 때문이다. 그는 홀로 호텔에 와 스타답게 프레스티지 등급인 ‘호라이즌 스피릿 스위트 룸’에 머물기로 한다. 호텔리어의 말로는 바다 전망이 끝내 주는 곳이다. 마티유는 ‘웰빙 플러스 패키지’로 6박 7일을 예약했고 마사지 2회와 해초 목욕이 포함되어 있다. 파리와 멀리 떨어진 북서부 해안 마을에 처박혀서 모든 것을 다 잊고 지낼 참이다.
죽고 싶을 때 다시 찾아온 15년 전의 옛사랑
그러나 시작부터 그런 자신의 의도가 얼마나 허황한 것이었나를 알게 된다. 호텔리어부터 모시게 돼 영광이며 모든 출연 영화를 다 봤다고 말한다. 마사지사는 그가 옷을 벗고 누웠을 때 괜찮으면 사진을 찍자고 한다. 모든 사람이 그를 알아보고 그와 인사하고 그와 사진을 찍는다. 영혼을 쉬게 하려고 이곳에 왔지만 마티유의 도피 같은 휴가는 꽤 번잡하다. 영화의 앞부분은 이런저런 에피소드로 다소 코믹하다. 슬랩스틱의 전조 같은 느낌을 준다. ‘프랑스적’이다. 사람들에게 이렇게 저렇게 휘둘리면서도 마티유는 외롭다. 홀로 밥을 먹고 홀로 누워 지낸다. 그는 한바탕 울기도 한다. 그의 머릿속에는 스위스로 가서 조력자살을 벌이고 싶은 생각으로 가득 차 있다. 그러기 전에 여기 해안 도시로 쉬러 온 것이었다.
혼란스러운 2, 3일을 보낸 후 마티유는 15년 전에 헤어진 여자 알리스(알바 로르와커)에게서 온 메시지를 받는다. 알리스는 해안 도시 근처 어디선가 의사 남편과 살아가는 중이다. 15살 된 딸이 있다. 남편 자비에르(샤리프 안두라)는 좋은 사람이고 아내가 자신을 만나기 전 남자에게 차여 한동안 엉망으로 지냈다는 걸 안다. 다만 그 남자가 당대 스타인 마티유였다는 건 알지 못한다. 게다가 자비에르는 배우 마티유를 그다지 좋아하지도 않는다. 알리스는 그런 남편 몰래 마티유와 짧은 만남을 이어가기 시작한다.
가슴 속에 오래 숨겨놓았던 정염과 욕망, 혹은 정체성
에서는 인상적인 롱테이크 장면이 두 번 나온다. 하나는 알리스가 곧 결혼할 친구와 나눈 대화를 인터뷰처럼 찍은 동영상이다. 알리스의 친구는 78세이다. 그녀는 18살에 결혼해 22살에 세 아이의 엄마가 됐다. 남편은 자상했지만 그녀의 스타일은 아니었다. 그녀는 남편이 자기 몸을 만지는 게 좋거나 기다려지지는 않았지만 그게 부부간의 의무라고 생각했고 그래서 잠자리를 종종 가졌다. 남편은 58살에 병으로 죽었고 여자는 오랜 고민 끝에 자기 생각과 욕망을 감추지 않기로 했다. 여자는 질베르트라는 이름의 또 다른 여자를 만났고 그제야 진정한 사랑을 깨달았다. 둘은 곧 결혼식을 올리려 한다. 이 할머니와의 인터뷰는 영화 중반 8분가량 이어진다. 가슴 한구석을 치고 들어온다.
이 롱테이크 원 쇼트 인터뷰 장면은 마티유와 알리스가 해안 절벽에서의 절경을 구경한 뒤 카페에서 대화를 나누는 또 다른 롱테이크와 대구를 이룬다. 알리스는 마티유에게 자신이 작곡한 피아노곡을 휴대폰으로 들려준다. 마티유는 곡이 아주 좋다고 말하지만 알리스는 우울한 표정이 된다. 그녀는 자신의 곡을 휴대폰에만 넣어 놨으며 머릿속에만 저장해 놨고 악보로만 존재한다며, 그렇게 ‘마음 한구석에만’ 숨겨놨다고 말한다. 그걸로 끝이었다고 말한다. 그건 자신 탓이라고 말한다. 마음 한구석에 숨겨 놓은 것이 마티유와의 오래전 사랑인지, 아니면 그 같은 정염과 욕망인지, 그것도 아니면 본래의 자기 자신이 지닌 정체성 같은 것인지, 알리스도 잘 알지 못한다. 분명한 것은 레즈비언 할머니처럼 자신은 그것, 곧 자신의 마음속 욕망을 용기 있게 드러내지 못했다는 것이다. 이 두 개의 에피소드는 영화의 중반 이후 진행되는 서사의 분위기를 매우 고급스럽게 만든다.
사랑은 꼭 붙어 있어야 완성되는 건 아니지 않나?
사랑은 자신의 정체성을 확인하는 행위 중 하나이다. 정체성이 불안하거나 분열돼있는 사람은 거꾸로 말하면 사랑을 할 수가 없다. 알리스는 그 불안증에 시달리고 있고 마티유 역시 배우로서 한계를 느끼며 자아가 심각하게 분열되는 중이다. 마티유와 알리스의 사랑은 따라서, 자신을 새롭게 찾아 나서는 것으로 시작되어야 한다. 둘의 사랑은 어쩔 수 없는, 그렇고 그런 불륜이어서 끝이 예정돼 있는 것이 아니다. 사랑은 꼭, 늘, 같이 있고 붙어 있다고 해서 완성되지 않는다. 마티유와 알리스는 떨어짐으로써, 헤어짐의 진정한 의미를 깨달음으로써 성숙한 사랑의 관계로 남는다. 알리스가 마티유에게 마지막으로 하는 말 한마디에는 실로 많은 의미가 담겨 있다. 사랑하기 때문에 헤어진다는 신파의 수사는 의 마지막 장면에 붙여져야 한다.
같은 굵직한 영화를 만들어 온 스테판 브리제 감독이 만들었다. 단순한 멜로영화같지만 중견의 기량으로 서정의 분위기를 톡톡히 담아내게 됐다. 모르비앙 해변의 치명적으로 아름다운 풍광은 지속적인 풀 쇼트와 무엇보다 드론을 이용한 부감 쇼트를 빈번하게 사용함으로써 결말이 어찌 됐든 이 둘의 사랑이 지극히 아름다운 것임을 표현해내려 했고, 그 의도는 상당 부분 성공했다.
인생의 두 번째 계절을 맞는 중장년들이 좋아 할 사랑이야기
영화를 본 사람들 대다수는 아마도 모르비앙에 가는 것을 버킷 리스트로 뽑아 놓고 순번을 기다리게 될 것이다. 지난해 8월 베니스 영화제에 출품됐다. 동생인 감독 알리체 로르와커( 등)와 함께 배우로서 그만큼 유명세를 지닌 알바 로르와커의 우아하면서도 서글픈 자태가 기억에 남는 작품이다. 남자 배우 기욤 카네는 역시, 연기력 면에서 현재 프랑스에서는 최고급 배우임을 보여준다. 지난 28일 개봉했다. 몇 개의 예술전용관에서 집중적으로 상영된다. 이런 영화의 경우 관객 수가 엄청나지는 않지만, 중장년층 시네필들에게 크게 어필할 것이다. 당신이 지금 인생의 비수기에 있다면, 그리하여 두 번째 계절을 맞는 중이라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