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통이 곧 인간 도스토옙스키 지금 여기를 말하다 [카테고리 설정이 아직되어 있지 않습니다.] 러시아 문학의 거인 표도르 미하일로비치 도스토옙스키(1821~1881). 이름부터 혀를 세 번은 꼬아야 나오는 이 사내가 세상을 떠난 지 140년이 훌쩍 넘었는데, 왜 여전히 서점 한 귀퉁이에서 버티고 있을까? 지금도 대학가 카페에서 누군가는 『죄와 벌』을 펼쳐 들고 심각한 표정을 짓고 있을까? 혹시 그 책이 단순한 고전 흉내가 아니라, 지금 이 시대를 가리키는 손가락인 건 아닐까?
도스토옙스키의 초상화 1872년경.(위키피디아)
사형대 위에서 시작된 인생
도스토옙스키는 1821년 11월 11일, 모스크바의 한 자선병원에서 태어났다. 아버지 미하일 안드레예비치 도스토옙스키(1789~1839)는 하급 귀족 출신의 군의관이었는데, 아내 마리야 표도로브나(1800~1837)가 젊은 나이에 세상을 떠난 뒤 술에 빠져들다 농노들에게 살해됐다는 설이 있다. 물론 공식 기록은 뇌졸중이다. 아버지의 죽음이 훗날 아들의 소설 속 부친 살해 모티프로 쓰이는 건 그저 우연일까? 인생은 참 성실한 복선을 깔아 놓는다.
도스토옙스키는 공병학교를 나와 하급관리로 일했지만, 적성에 맞지 않는 직업은 오래가지 못했다. 20대에 소설 『가난한 사람들』(1846)을 발표하며 평론가 비사리온 그리고리예비치 벨린스키(1811~1848)로부터 새로운 고골리가 나타났다! 는 극찬을 받았다. 니콜라이 바실리예비치 고골리(1809~1852)가 누구인가, 러시아 풍자문학의 아버지 아닌가. 그런데 그 칭찬이 채 식기도 전인 1849년, 그는 체제비판 독서모임에 참여했다는 이유로 체포돼 사형 선고를 받는다.
사형집행 당일, 그것도 실제로 총살대 앞에 세워진 뒤, 황제 니콜라이 1세(1796~1855)의 감형 명령이 도착한다. 극적 연출이 아니었다. 이 가짜 처형 은 처음부터 황제가 기획한 심리고문이었다. 사형선고를 4년 시베리아 유형으로 바꾸면서, 차르는 젊은 소설가의 정신에 지울 수 없는 낙인을 찍었다. 도스토옙스키는 이후 시베리아 옴스크 감옥에서 4년(1850~1854)을 보내고, 추가로 5년간 강제 군복무를 했다.
사형대 앞에서 살아 돌아온 인간. 그는 이후 완전히 다른 사람이 됐다. 아니, 어쩌면 비로소 그 자신이 됐다고 하는 게 맞을지도 모른다.
도프토옙스키의 어머니 마리야 표도로브나 초상화(위키피디아)
고통이라는 이름의 글쓰기 공장
시베리아에서 돌아온 뒤 도스토옙스키는 쉬지 않고 썼다. 아니, 쉬지 못했다. 도박 중독이 그를 빚더미에 올려놓았기 때문이다. 카지노 앞에서는 천재도 평등하다. 『죄와 벌』(1866), 『백치』(1869), 『악령』(1872), 『미성년』(1875), 그리고 생애 마지막 대작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1880), 이 걸작들이 상당부분 빚쟁이를 피해가며, 또는 빚을 갚기 위해 쓰였다는 사실은 문학사 최대의 역설 중 하나다. 고통이 작품을 낳고, 작품이 고통을 먹여 살렸다.
두 번째 아내 안나 그리고리예브나 스니트키나(1846~1918)는 그의 글쓰기를 보조하기 위해 속기를 배웠고, 결국 남편의 마지막 구원이 됐다. 도박 빚을 정리하고, 원고계약을 관리하고, 출판사와 협상했다. 문학사는 종종 천재의 뒤에 있는 실무자를 잊는다. 안나는 그 실무자이자 반려자였다.
도스토옙스키의 아버지 미하일 안드레예비치 도스토옙스키 초상화.(위키피디아)
인간의 내면을 해부한 의사
도스토옙스키가 위대한 까닭은 단순히 어둡고 무거운 소설을 많이 써서 가 아니다. 그는 인간의 내면을 해부하는 방식이 달랐다. 당대 러시아 지식인들은 인간을 환경의 산물로 보았다. 제대로 된 사회구조만 만들면 선량한 인간이 나온다는 낙관론. 도스토옙스키는 여기에 정면으로 반박했다.
아니, 인간이란 게 그렇게 간단하냐?
『죄와 벌』의 라스콜니코프는 나는 특별한 인간이므로 보잘것없는 악인을 제거할 권리가 있다 고 믿는다. 이 논리는 완벽하게 정교하다. 그런데 그가 실제로 도끼를 들고 나서자 어떻게 되는가? 논리는 산산이 부서지고 인간의 양심과 무의식이 그를 집어삼킨다. 도스토옙스키는 여기서 묻는다.
당신 머릿속의 그 멋진 이념, 그게 실제 피 앞에서도 작동하겠느냐?
『악령』은 더 직접적이다. 혁명적 이념에 사로잡힌 청년들이 조직을 위해 동료를 살해하는 과정을 그린 이 소설은, 1869년에 일어난 혁명가 세르게이 네차예프(1847~1882)의 동료 살해사건을 모티프로 했다. 도스토옙스키는 이념이 인간을 수단으로 삼는 순간 그 이념은 이미 썩었다고 봤다.
도스토옙스키, 1847년 초상화.(위키피디아)
지금 한국, 도스토옙스키를 다시 읽어야 할 이유
자, 이제 오늘날 서울로 오자. 왜 지금 도스토옙스키인가?
첫째, 나는 옳고 저들은 악하다 는 논리의 함정. 라스콜니코프 증후군이라고 불러도 좋겠다. 지금 한국의 정치지형을 보면, 저마다 우리는 역사의 올바른 편에 있다 고 확신한다. 도스토옙스키는 바로 그 확신이 가장 위험하다고 봤다. 자신의 정의로움에 대한 확신이 클수록, 타인에 대한 폭력에 무감각해진다. 이름이 무엇이든, 정의로운 목적 을 위해 수단을 정당화하는 논리가 활개 칠 때, 도스토옙스키의 경고는 유효하다.
둘째, 고통 받는 자를 외면하는 사회에 대한 물음. 『가난한 사람들』과 『상처받은 사람들』(1861)에서 그는 제도가 만들어내는 인간의 굴욕을 파고들었다. 지금 한국의 청년세대는 이생망 (이번 생은 망했다)이라는 말을 농담처럼 쓴다. 농담이지만 농담이 아니다. 집 한 채 가지려면 평생을 갚아야 하는 사회, 비정규직이 정규직보다 많은 노동시장, 경쟁에서 뒤처지면 사회 안전망이 아니라 절벽 앞에 서는 구조, 도스토옙스키라면 이 상황을 어떻게 묘사했을까? 아마 『가난한 사람들』 세 권쯤 되는 분량이 나왔을 것이다.
셋째, 이념보다 인간 개인이 먼저다. 도스토옙스키가 평생 싸운 건 인간을 이념의 부속물로 보는 시각이었다. 국가를 위해, 혁명을 위해, 성장을 위해, 안보를 위해, 어떤 이름이 붙든 개인이 도구화되는 순간을 그는 경계했다. 지금 한국에서 노동자, 농민, 세입자, 장애인들이 더 큰 가치 를 위해 얼마나 자주 뒷전으로 밀려나는가.
넷째, 도박중독자의 교훈. 이건 약간 다른 결이지만 빼놓을 수 없다. 도스토옙스키는 도박중독으로 인생의 상당부분을 탕진했다. 그런데도 그 경험을 소설 『도박사』(1866)로 승화시켰다. 지금 한국에서 가상화폐, 주식투자, 부동산 투기가 일종의 국민 도박이 된 현실, 한탕을 꿈꾸는 심리구조는 160년 전 도스토옙스키가 묘사한 것과 놀랍도록 닮았다. 우리는 『도박사』를 소설이 아니라 사회보고서로 읽어야 할지 모른다.
도스토옙스키, 파리에서, 1863년.(위키피디아)
마지막 소설, 마지막 질문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1880)에서 이반 카라마조프는 신에게 반기를 든다. 논리는 완벽하다.
단 한 명의 어린아이가 눈물 흘린다면, 그 어떤 조화(調和)도 나는 받아들이지 않겠다.
정의롭고 아름다운 반항이다. 그런데 도스토옙스키는 그 이반을 결국 파멸로 이끈다. 완벽한 논리는 인간을 구원하지 못한다는 것이다.
반면 막내 알료샤는 논리가 없다. 그저 사람 곁에 있고, 위로하고, 손을 잡는다. 도스토옙스키가 마지막으로 내놓은 답은 이것이다. 인간은 논증으로 살지 않고 온기로 산다.
이 소설을 탈고한 지 석 달 만에 도스토옙스키는 세상을 떠났다. 1881년 2월 9일, 그의 나이 59세였다. 장례식에는 수만 명이 몰렸다. 사형대에서 살아 돌아와, 시베리아를 견디고, 빚쟁이를 피해 글을 쓰고, 도박판을 전전하면서도 인간이라는 수수께끼를 놓지 않았던 사람의 마지막이었다.
바덴바덴에 있는 도스토예프스키 기념 명판.(위키피디아)
고통은 낭비되지 않는다
도스토옙스키의 삶과 문학이 주는 가장 큰 메시지는 역설적이게도 희망이다. 그것도 값싼 위로가 아닌, 고통을 통과한 희망. 지금 한국사회가 겪는 정치 혼란, 경제 불평등, 세대 단절, 이념 갈등, 이 모든 것은 결코 새로운 문제가 아니다. 도스토옙스키는 더 극단적인 시대를 살면서 인간에 대한 믿음을 끝내 포기하지 않았다.
물론 그는 도박 빚은 끝내 못 갚았다는 게 함정이지만.
고통을 예술로 만든 사내, 표도르 도스토옙스키. 그는 우리에게 말한다. 지금 이 엉망진창인 세상을, 그 안의 엉망진창인 인간을, 그래도 끝까지 바라보라고.
도스토옙스키 1879년.(위키피디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