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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보 바로가기 : 4살 때 기마자세 체벌 …24시간 방에 가둬 벽만 보게도

4살 때 기마자세 체벌 …24시간 방에 가둬 벽만 보게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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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2월 26일 오전 11시, 충무로의 진실 화해를 위한 과거사정리위원회(진화위) 앞 인도에 서른 명 남짓의 사람들이 모여 들었다. 이날은 진화위 3기가 출범하는 날이었다. 고아수용시설 피해생존자 단체와 회원들이 진화위 앞에서 기자회견을 가졌다. 시설폭력은 국가폭력이다.” 기자회견이 끝난 뒤 피해자들은 곧바로 진화위 사무실에 진실규명 신청서를 제출했다. 세 명의 청년도 국가를 향해 첫 문서를 내밀었다. 그것은 한 장의 서류이기도 했지만, 아직 끝나지 않은 이야기의 첫 문장이었다. 그들은 충북 제천영육아원 출신의 세 사람이었다. 백송이, 백용한, 백성빈(가명). 1990년대 후반 출생의 29 ~ 30세의 젊은 청년들이다. 신청서를 제출하고 내려온 그들과 근처에서 인터뷰를 가졌다. 그동안 기자가 인터뷰해 온 고아시설피해 생존자들은 대부분 50대 이상이었다. 신림원, 오류마을, 선감학원, 시립아동보호소 등을 경험한 중장년들이었다. 세월이 그만큼 흘렀으니 시설에서 벌어진 물리적 폭력의 강도 역시, 과거보다 약해졌을 것이라는 작은 희망도 있었다. 그러나 인터뷰 시작부터 그같은 기대가 무너졌다. 이야기가 시작되자 공기가 서서히 무거워졌다. 그들의 말은 특별히 과장된 어조도, 분노에 찬 목소리도 아니었다. 오히려 너무 담담해서 더 참혹했다. 시설 폭력은 어떤 시대의 과거가 아닌 현재진행형이었다.   진실화해위원회 3기가 출범하던 2월 26일, 고아시설피해생존자 관련 단체 회원들이 진화위 앞에서 기자회견을 갖고 있다. 충북 제천에서는 조금 특별한 성씨가 하나 등장한다. 제천 백(白)씨. 이 성씨의 시작은 한 미국인 선교사에게서 비롯된다. ‘제인 화이트’. 한국 이름 백제인. 그녀는 전쟁과 가난으로 버려진 아이들을 거두기 위해 1963년 ‘제천영육아원’을 설립했다. 부모도, 집도, 이름도 없이 떠돌던 아이들에게 새로운 삶을 주겠다는 신념에서였다. 그녀는 1981년 국민훈장모란장을, 2004년 아산사회봉사상을 수상하기도 했다. 이야기는 여기까지만 보면 아름답다. 전쟁고아를 돌본 선교사. 그녀가 아이들에게 자신의 성을 나누어 주었다는 이야기. 그래서 제천영육아원의 아이들 가운데 90% 이상이 ‘백씨’가 되었다는 사실. 백송이, 백용한, 백성빈…. 그 이름들은 한 가족처럼 보였다. 하지만 이름이 가족을 만들어 주지는 않는다. 아이들이 처음 시설에 들어올 때 남겨진 기록은 한 장의 메모지로 출발한다. 신분의 기록조차 희미한 아이들이다. 백송이 : 제천 영육아원 앞에 유기됨 백용한 : 남당초 앞에서 우유 배달부가 발견 백성빈 : 친삼촌에 의해 맡겨짐 그렇게 아이들은 모두 같은 성을 가진 형제자매가 되었다. 겉으로 보면 하나의 큰 가족이었다. 선교사의 사랑이 만든 공동체처럼 보였다. 그러나 이번에 만난 세 명의 젊은이는 그 이야기의 다른 장을 들려주었다. 그들의 이야기는 아름다운 전설과는 전혀 다른 곳에서 시작된다. 시설 안에서 벌어진 관리자들의 폭력, 통제와 체벌이라는 이름으로 반복되던 각종 금지 조항과 단체기합, 그들은 그것을 ‘훈육’이라고 배웠다. 어렸을 땐 같이 사니까 처음에는 가족인 줄 알았죠.” 잠시 침묵이 흘렀다. 그리고 이어진 말은 짧았다. 그런데, 가족은 그렇게 때리지 않잖아요.” 제천에서 시작된 한 선교사의 이야기는 전설이 되어 있다. 하지만 그 전설의 뒤편에는 같은 성을 가진 아이들이 겪어야 했던 다른 기억들이 남아 있다. 백이라는 성씨 아래 모였던 아이들. 그 성씨가 누군가에게는 보호였을지 몰라도, 누군가에게는 지워지지 않는 감금장치이며 고아라는 낙인이었다. 교실에서 이름을 부르는 순서는 특별할 때가 있었어요. 평소에는 출석부 순이었지만, 누군가의 물건이 도난당하는 날이면 순서가 달라집니다. 그런 날은 교실에서 가장 먼저 의심받는 이들이 언제나 백씨였어요. 교실의 다른 아이들은 이미 알고 있었죠. 백씨가 제천영육아원 출신이라는 사실은 비밀이 아니었습니다. 필기구, 현금, 체육복 등이 사라지는 날이면 교실의 공기는 묘하게 흘러갑니다. 선생님들은 이미 결론을 내려놓은 것 같은 목소리와 행동을 이어갔어요. 때로는 학교에서도 체벌이 있었습니다. 백씨 성을 가진 고아들은 의심받고 맞아야 했습니다. 이유는 ‘고아’였기 때문이지요.”   제천 영육아원 출신 백용한씨의 아동기록카드 시설 안에서는 그 차별이 더 노골적이었다. 시설에는 두 부류의 아이들이 있었다. 부모가 잠시 맡긴 위탁아동과 완전히 버려진 유기아동. 둘 사이에는 보이지 않는 선이 있었다. 유기아동들은 같은 백씨 성을 지녔다. 그 선은 식당에서도, 방에서도, 체벌이 내려지는 순간에도 존재했다. 같은 시설인데도 우리는 다른 애들 같았어요.” 그 ‘다른 애들’이라는 말에는 긴 설명이 필요하지 않았다. 부모가 있는 아이들과 부모가 없는 아이들. 그 차이는 희미하지만 분명하게 존재했다. 교실에서도 시설에서도 백씨는 먼저 의심받는 표식이었다. 시설 안에는 아이들이 지켜야 할 규칙이 많았습니다. 그 규칙에는 이름이 붙어 있었어요. 밥금지, 문화체험금지, 외출금지, 잠금지, 전부금지 등등. 처음 듣는 사람에게는 낯선 말들이겠지만, 우리에게 그 의미는 분명했어요. 하루 이상의 삶이 통째로 체벌이 되는 시간입니다. 그중에서도 가장 두려운 것은 전부금지였어요. 전부금지를 받으면 방 안에 감금됐는데, 식사금지는 물론이고 심지어 유치원이나 학교도 못 가게 했어요. 그저 벽만 바라보게 했어요. 뒤를 돌아볼 수도 없었어요. 체벌은 밤에도 계속되었어요. 다른 아이들이 잠잘 때에도 벽만 보고 있어야 했습니다. 작은 몸이 흔들리기라도 하면 뒤에서 날카로운 목소리와 함께 주먹이 날아왔습니다.” 보통 사람들의 첫 기억은 유치원 운동회나 엄마 손을 잡고 간 소풍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 젊은 친구들의 첫 기억은 다르다. 맞은 기억, 기합을 받던 기억, 배고픔에 울던 기억, 그리고 또 다시 체벌의 기억. 네 살 무렵이었습니다. 아이들은 오토바이 자세, 어른들은 기마자세라고 부르는 자세로 서 있었던 게 인생 최초의 기억입니다. 두 다리를 벌리고 무릎을 깊게 굽힌 채, 앞으로 뻗은 팔위에 책이 올려 집니다. 그 책은 돌처럼 무거웠어요. 책이 떨어지면 바로 주먹이 날아옵니다. 허벅지가 마비되는 느낌에, 몸이 흔들리는데, 네 살짜리 몸이 그 무게를 버틸 수가 없죠.” 어떤 날은 운동장으로 끌려 나갔다. 아이들은 주먹을 쥐고 바닥에 엎드렸다. 거친 아스팔트가 주먹 마디를 눌렀다. 몸의 무게가 그대로 손가락에 실렸다. 다른 날에는 손을 돌려 깍지를 끼고 엎드려뻗쳐 자세를 취했다. 어깨가 비틀어질 듯 아팠다. 몸이 조금만 흔들려도 발길질이나 주먹이 날아왔다. 아이들은 울음을 참았다. 울면 더 맞는다는 것을 이미 알고 있었다. 아직 유치원생이었을 무렵, 세상은 원래 이런 곳이라고 믿기 쉬운 나이였다. 그래서 이렇게 말했다. 그때는 원래 아이들이 다 이렇게 사는 줄 알았어요.” 유치원 다닐 때, 그들은 처음으로 고아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운동회 때 부모가 와서 손을 잡고 함께 웃으며 도시락을 먹던 다른 아이들의 모습을 보며, 보통의 아이들에게는 부모라는 존재가 있고, 함께 웃으며 행복할 수 있다는 매우 생소하고 이질적인 느낌을 설명하기도 했다. 백성빈 씨의 기억이다. 시설에는 뚱뚱한 아이가 없이 다 말랐어요. 항상 배가 고팠죠. 아이들은 식판을 아주 깨끗하게 비웠어요. 남기는 아이가 없었습니다. 애초에 밥을 많이 주지 않기 때문이겠죠. 지금 생각해 보면 다들 만성 영양부족이었던 것 같아요. 어릴 때 꿈이 요리사였어요. 음식을 원 없이 먹어보고 싶었거든요. 맛있는 요리를 하고 싶어서가 아니라, 너무 허기지고 먹고 싶은 게 많아서 생긴 꿈이었습니다. 제대로만 먹었어도 저는 지금보다 훨씬 키와 체격이 컸을 겁니다.” 백송이 씨의 기억도 가슴 아프다. 어릴 때는 부모가 너무 미웠어요. 왜 나를 버렸을까. 시설에서의 삶이 힘들어질 때마다 원망은 더 커졌습니다. 밤에 울다가 잠들던 날들, 맞고 돌아와 이불 속에서 몸을 웅크리던 날들마다 마음속에 같은 생각이 떠올랐습니다. 솔직히 죽이고 싶을 만큼 미웠어요. 내가 이렇게 사는 이유가 그 사람들 때문이라고 생각했거든요. 부모를 한 번도 만나 본 적 없는 내가 부모를 원망하며 자랐습니다. 그 감정은 어린 아이에게는 너무 큰 기억이었습니다.” 백용한 씨의 목소리도 차분했지만 거칠었다. 가해자들이 너무 미웠어요. 시설 안에서 아이들을 때리던 사람들, 기합을 주고, 체벌을 하던 사람들, 관리자들이 다 한통속이었어요. 나중에 생각해 보니 누군가 한 명의 문제가 아니라 여러 사람이 함께 움직이는 구조처럼 느껴졌습니다. 그 사람들이 사회복지사입니다. 사회복지 시설 종사자라는 게 지금 생각해도 좀 어처구니가 없어요. 아이들을 보호해야 할 사람들이 아이들을 때리고 있었다는 사실, 그 모순은 아직도 이해되지 않습니다.” 세 사람의 이야기는 조금씩 달랐다. 배고픔을 기억했고, 버려짐을 기억했고, 폭력을 기억했다. 그러나 세 기억은 결국 같은 곳에서 만났다. 시설에는 가끔 낯선 어른들이 찾아왔다. 어떤 날은 그림을 그리게 했고, 어떤 날은 색연필과 종이를 나눠 주고 마음을 표현해 보라고 했다. 그것을 심리치료라고 불렀다. 대상은 정해져 있었다. 자주 울거나, 말이 없거나, 문제 행동을 보이는 아이들, 그런 식으로 징후가 있는 원생들이 따로 골라졌다. 치료는 대부분 외부에서 온 선생님들이 진행했다. 그 시간이 끝나면 아이들의 삶은 다시 돌아갔다. 벽을 보고 서 있던 벌, 잠을 허락받지 못하던 밤, 주먹과 체벌이 이어지던 일상, 심리치료는 그 세계를 바꾸지 못했다. 치료가 있는 날에는 언제나 아이들의 모습을 찍었다. 그 사진들은 나중에 한 권의 홍보 책자가 되었다. 제목이 오히려 낯설었다. 〈꿈과 사랑이 자라는 곳〉. 책자 속 아이들은 언제나 환하게 웃어야 했다. 그 책자는 후원자들에게 보내졌다. 그리고 후원금이 들어왔다. 하지만 사진 속에 없던 장면들이 있다. 그림을 그리던 아이가 그날 밤 기합을 받는 장면, 웃으며 사진을 찍던 아이가 다음 날 구타를 당하는 장면, 그 장면들은 어디에도 실리지 않았다. 아이들은 그저 후원금을 받기위한 홍보의 도구였을 뿐이었다. 홍보 책자에는 늘 같은 이야기, 의미 없는 단어가 반복되었다. ‘꿈, 사랑, 희망, 미래’. 그 때는 알지 못했다. 누가 후원하고, 돈을 보내고, 옷을 보내고, 간식을 보내고 있는지 아이들은 전혀 듣지 못했다. 그저 가끔 옷이 생기고, 갑자기 간식이 나오는 정도로만 느꼈다. 그래서 어느 날 창고 문이 열렸을 때, 눈을 의심했다. 창고 안에는 상자들이 수북이 쌓여 있었다. 각종 먹거리, 옷가지, 장난감, 인형…. 아이들이 평소에 TV에서만 보던 것들이었다. 하지만 그 물건들이 아이들 소유가 되는 일은 없었다. 갖고 싶다고 가질 수 있는 물건도 아니었다. 소유가 되는 일은 없었다. 갖고 싶다고 가질 수 있는 물건도 아니었다.   제천 영육아원의 생일파티 모습. 파티는 사진 찍는 용도였을뿐 아이들에게 케이크가 돌아가지는 않았다. 토요일에 간식이 나왔어요. 아이들은 그날을 기다렸습니다. 그러나 간식이 공평하게 돌아간 것은 아니었습니다. 예쁜 애들 위주로 줬어요. 외모가 눈에 띄는 아이들, 말 잘 듣는 아이들 위주로 먼저 간식이 돌아갔습니다. 모자란 날도 많았어요. 심지어 어떤 관리자는 원생들에게 나눠줘야 할 떠먹는 요플레를 자신이 건더기(딸기)만 꺼내먹고 아이들에게 주기도 했습니다. 한 달에 한 번, 시설에서는 생일잔치가 열리는데, 그달 생일이 있는 아이들을 한꺼번에 모아서 케이크에 촛불을 켜고 노래를 부르고 사진을 찍어요. 하지만 사진촬영이 끝나면 케이크를 바로 치워버립니다. 그러니 케이크를 먹어본 적이 있겠어요? 그래서 아이들이 몰래 케이크를 훔쳐 먹기도 했어요. 훔쳐 먹을 수밖에 없었던 상황도 황당하고 아이들의 생일잔치용 케이크를 정작 당사자인 아이들에게 먹지 못하게 하는 것도 이해가 안 돼요.” 시설에서 아이들의 하루는 철저히 통제된 규칙 속에서 흘러갔다. 먹는 것뿐 아니라 물을 마시는 일도 마음대로 할 수 없었다. 밤에는 목이 말라도 허락이 없으면 마실 수 없었다. 정해진 시간과 순서 외에는 화장실도 갈 수 없었다. 아이들은 저녁이 되면 자연스럽게 몸을 긴장시켰다. 맘대로 화장실을 가지 못하게 했기 때문이다. 소변이 마려워도 참아야 했다. 누군가 몰래 화장실에 가다 들키기라도 하면 무서운 벌이 기다리고 있었다. 어떤 아이는 결국 견디지 못하고 이불에 소변을 지리기도 했다. 다음날 아침은 늘 같은 방식으로 시작됐다. 이불을 적신 아이를 앞으로 불러 큰 소리로 외치게 했다. 나는 오줌싸개입니다.” 그 말은 벌이자 낙인이었다. 아이는 원생들 앞에서 같은 말을 몇 번이고 반복했다. 어린 얼굴에는 수치심과 공포가 뒤섞였다. 그 장면을 지켜보던 아이들은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다음 차례가 자신이 될 수도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밤이 오면 아이들은 물 마시는 걸 불안해했다. 화장실보다 두려움을 먼저 배우는 밤이었다. ②부로 계속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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