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 부활절에 죄없이 죽어가는 사람들 [카테고리 설정이 아직되어 있지 않습니다.] 김근수 해방신학연구소장
예수를 죽이려는 악의 세력이 있었고, 이재명을 죽이려는 악의 세력이 있었다. 그런데, 예수는 죽었고, 이재명은 살았다. 예수는 왜 죽었고, 이재명은 왜 살았을까. 결정적인 차이가 하나 있다.
예수 곁에 촛불 시민이 없었고, 이재명 곁에 촛불 시민이 있었다. 촛불 시민이 없어서 예수는 죽었고, 촛불 시민이 있어서 이재명은 살았다. 예수는 억울하게 죽음 당한 뒤 부활되었고, 이재명은 억울한 죽음을 모면하고 죽기 전에 부활했다. 하느님이 예수를 부활시켰고, 이재명을 죽음 위기에서 구해주었다.
이 땅에 숱하게 벌어졌던 예수 같은 억울한 죽음들
예수 부활을 논하려면, 예수 죽음부터 말해야 한다. 예수는 병이나 사고나 노환으로 자연사 하지 않았다. 예수는 정치범으로 몰리고 사법 살인을 당한 국가폭력의 피해자였다. 예수 혼자만 사법 살인에 국가폭력을 당했는가.
사법 살인의 사례는 소크라테스에서, 국가폭력의 경우는 제주 4.3 항쟁과 5.18 광주민주화운동과 국민보도연맹 희생자들에서 우선 찾을 수 있다. 사법 살인과 국가폭력을 둘 다 고려한다면, 인혁당 희생자들의 죽음이 예수 죽음에 아주 가깝다. 죄 없는 인혁당 희생자들은 죄 없는 예수처럼 억울한 죽음을 당했다.
1975년 4월 9일 서대문구치소에 갇혀있던 인혁당 관련자 8명을 면회 갔다가 이미 사형이 집행됐다는 소식을 듣고 울부짖는 가족들. 나무위키
로마제국 총독 빌라도는 피식민지 청년 예수를 왕을 참칭하여 반역을 모의한 정치범으로 몰았다. 빌라도는 예수에게 사형 판결을 내렸고, 로마 군인들은 예수를 모욕한 후 십자가형에 처했다. 예수와 함께 독립투사 두 사람도 십자가형을 받았다.
하느님 자비와 분노의 경고 함께 담긴 부활
예수 부활은 이해하기 쉽지 않다. 죽은 다음 인간의 몸은 어떻게 변화하는가. 부활하면 우리는 죽음 이전의 몸으로 다시 태어나는가. 부활 후 가난한 사람은 다시 가난하게 사는가. 부활 후 보기 싫은 사람을 다시 보고 살아야 하는가. 호기심 가득한 이론적인 질문들이 끊임없이 잇따를 수 있다.
예수 부활의 메시지는 두 가지다. 첫째, 예수 삶은 옳았다는 하느님의 선언이다. 예수 부활은 억울한 예수 죽음에 대한 하느님의 자비로운 응답이다. 하느님은 억울한 죽음을 당한 사람들을 예수처럼 부활시키고 명예 회복을 해주실 것이다. 예수 부활은 예수의 시신이 의학적으로 어떻게 변화하는지 보라는 말이 아니다.
예수 부활은 억울한 죽음을 만든 세력에 대한 하느님의 무자비한 심판 경고이다. 하느님은 억울한 죽음을 낳은 사람들의 시체를 무덤에서 다시 일으켜 뜨거운 지옥불에 영원히 처벌하신다. 그러니 억울한 죽음을 만든 세력이 예수 부활을 믿거나 환영할 리 없다.
부활의 뜻 제대로 모르는 아편 같은 엉터리 설교
부활을 신학적으로 적절하게 설명하고 이해하는 것은 물론 중요하다. 그러나, 그리스도인과 교회가 부활을 제대로 살지 못하는 것이 진짜 문제다. 예수가 왜 죽었는지 모른 체 우리는 예수의 죽음을 추념하거나, 하느님이 왜 예수를 부활시키셨는지 모른 체, 부활을 기념할 수 있다. 더구나, 부활 믿음을 제대로 정확하게 해설하는 종교인은 드물다.
부활은 잘못 해설될 수 있다. 잘못된 부활 해설은 아편 역할을 할 수 있다. 부당한 고통도 인내하고 견뎌라, 현세의 고통은 부활 후 보상 받는다는 식의 엉터리 설교는 억울한 죽음을 낳는 세력에게 저항하지 못하는 수단으로 악용될 수 있다. 억울한 죽음을 생산하는 세력을 하느님은 무자비하게 심판한다는 사실을 망각하도록 우리를 유혹하고 속일 수 있다.
부활 사상을 올바로 설명하는 일 못지 않게 중요한 것은, 그리스도인들이 현세에서, 부활을 체험한 사람처럼 사는 일이다. 선이 악을 이긴다는 진실을, 정의가 불의를 이긴다는 진리를 앞장서 실천하여야 한다. 죽음 이후 삶을 운운하기 전에, 죽음 이전의 삶을 먼저 언급하라. 부활을 말하기 전에, 억울한 죽음을 낳는 세력에게 저항하라. 예수처럼 십자가에 매달리는 억울한 죽음이 다시는 없게 하라.
부활 사상 탄생한 이란에서 벌어지고 있는 억울한 죽음들
억울한 죽음을 당한 사람들의 운명은 어떻게 될까. 그 고뇌에서 부활 사상이 페르샤, 즉 오늘의 이란에서 수천 년전 탄생했다. 유다교는 부활 사상을 이란에서 수입했고, 예수운동은 부활 사상을 유다교에서 받아들였다. 억울한 죽음을 당한 사람들에게 연민을 느끼고 부활 사상을 만들고 믿어온 사람들이 서로를 죽이고 있다. 인류 문명은 발전했지만, 인간 하나하나의 품질은 전혀 나아지지 않았다고 괴테는 탄식했다.
인류 역사에서 진정한 승자는 누구인가. 침략 전쟁을 일으키는 로마제국 황제인가. 전쟁이 아니라 평화를 선포하는 예수인가. 우리는 어느 길을 따를 것인가. 예수는 억울한 죽음을 당했으나 하느님에 의해 부활했고, 억울한 죽음을 생산했던 로마제국은 몰락했다.
이란 영자신문 테헤란 타임스의 지난 9일 1면 지면. 샤자레 타이예베 초등학교가 토마호크 미사일에 무너져내려 이렇게 많은 무고한 아이들이 희생됐다며 100명의 어린이 얼굴 사진을 실었다. 제목은 트럼프, 그들을 똑바로 봐라 다. 부제는 수백 명의 이란 어린이가 숨졌지만 미국 대통령은 여전히 미나브 초등학교 폭격을 부인하고 있다
억울한 죽음을 만든 세력은 누구인가. 침략 전쟁을 일으키는 사람들, 가난한 사람들을 착취하는 사람들, 부정부패로 세상을 죄악으로 가득 채우는 사람들이다. 그 세력에 가담한 사람들과 그들의 경호원 노릇을 하는 어용 지식인들과 종교 사기꾼들도 하느님의 가혹한 심판을 기다려야 한다. 교황 레오 14세는 예수 부활절을 맞아 말했다. 피 묻은 손으로 바치는 기도를 하느님은 거절하십니다.”
역사의 예수를 믿는 사람의 관점에서 쓴 신학 다큐인 마가복음에서, 예수 부활 후 여인들이 무덤에서 들은 한 마디 말은 갈릴래아로 가시오” (마가 16,7)였다. 고난의 현장으로 다시 가라. 예수는 부활했지만 가난한 사람들은 아직 부활하지 않았다. 세월호 희생자도, 이태원 참사 희생자도, 아직 부활하지 않았다. 어두움 가득한 세상도 그대로다. 악의 세력이 버티는 한, 세상은 부활하지 못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