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국의 고집쟁이 마을 뉴억-온-트렌트가 낳은 인물들 [카테고리 설정이 아직되어 있지 않습니다.] 영국 노팅엄셔 주(州), 트렌트 강변에 조용히 자리 잡은 뉴억-온-트렌트(Newark-on-Trent)라는 마을이 있다. 인구 약 3만 명. 런던에서 기차로 75분이면 닿는 이 소읍(小邑)은, 처음 보면 그냥 오래된 시골장터 마을이다. 그런데 들여다볼수록 이상하다. 왕이 여기서 복숭아를 많이 먹다 죽었고, 영국내란 때 세 번이나 공격받고도 끝까지 버텼으며, 지금도 유럽 최대 규모의 골동품 장마당이 열린다. 이쯤 되면 그냥 지나칠 수 없지 않은가.
뉴억-온-트렌트 장터.(위키피디아)
복숭아 한 접시가 바꾼 역사, 1216년, 뉴억 성(城)
뉴억 성은 1133년 링컨 주교 알렉산더(일명 위대한 알렉산더 )가 돌로 다시 쌓은 성채로, 가장 유명한 사건은 1216년 10월 19일 잉글랜드 왕 존(John, 재위 1199~1216)이 이곳에서 숨진 일이다. 사인은 복숭아 과식 이었다고 전해진다.
잠깐. 마그나 카르타 를 강제로 서명하게 만든 그 폭군 존 왕이, 귀족들의 반란에 쫓겨 도망 다니다 뉴억에 들렀고, 거기서 복숭아를 실컷 먹고 배탈로 세상을 떴다는 것이다. 역사는 이를 두고 복숭아 과식 (surfeit of peaches)이라 기록했다. 독재자가 피 흘리며 쓰러지지 않고, 과일 한 접시에 퇴장한 셈이다. 풍자소설 같은 결말이지만 사실이다.
한국의 권력자들도 이 대목에서 교훈을 얻어야 할지 모른다. 민심을 잃고 도망 다니다 결국 과식(過食)으로 막을 내린 왕의 이야기는, 권력은 반드시 끝이 있다 는 역사의 오래된 농담이다. 그 농담이 뉴억 강변에 조용히 새겨져 있다.
뉴억 성.(위키피디아)
로마 길목에 들어선 새 성곽 마을 , 기원과 이름
뉴억이라는 이름 자체가 새 성곽(New Work, 혹은 New Weorc) 에서 왔다. 이 마을은 고대 로마 도로인 포스 웨이(Fosse Way)와 대(大)북부 도로(Great North Road)가 만나는 지점에 자리하며, 로마시대부터 중요한 교통 요지였다. 로마인들이 길을 닦고 지나간 자리에, 색슨족이 정착했고, 노르만족이 성을 쌓았다.
1055년에는 고다이바(Godiva) 와 그녀의 남편 레오프릭(Leofric) 백작이 이 땅을 소유했으며, 1092년 이후로는 링컨 주교들의 영지가 되었다. 그 고다이바 가 맞다. 알몸으로 말을 타고 마을을 달렸다는 전설의 고다이바 백작 부인이다. 뉴억이 그녀의 소유였다니, 알고 보면 역사란 이렇게 얽혀 있다.
1377년 무렵에는 인구기록상 성인 주민이 1178명으로, 거지와 성직자를 제외하고도 잉글랜드에서 가장 큰 도시 25곳 안에 들었다. 중세 영국의 대도시 가 고작 1200명이었다는 사실은 오늘날 우리에게 기이하게 들리지만, 당시 뉴억은 양모(羊毛) 무역의 중심지로 번성했다.
말을 타고 알몸으로 마을을 달렸다는 전설의 고다이바 백작 부인 그림 앞에서 김성수 시민기자.
세 번 공격받고도 항복 안 한 마을, 청교도내란(1642~1646)
뉴억의 자존심이 가장 빛난 순간은 17세기 잉글랜드 내란 때다. 내란 당시 뉴억은 국왕 찰스 1세(Charles I, 재위 1625~1649)의 편에 섰고, 의회파 군대에게 세 차례나 포위 공격을 받았다. 뉴억은 남북을 잇는 주요 통로를 장악한 전략 요충지였기에, 의회파는 이 성을 반드시 빼앗아야 했다. 그러나 뉴억 수비대는 1646년 찰스 1세가 직접 항복을 명령하고 나서야 비로소 성문을 열었다.
왕이 먼저 항복하고 나서야 마을이 따라 항복했다는 이 이야기. 충성이라면 충성이고, 완고함이라면 완고함이다. 그런데 이 완고함에는 나름의 원칙이 있었다. 왕의 명령 없이는 적에게 굴복하지 않겠다는 것. 한국현대사에도 윗선의 명령을 기다리다 늦게 무너진 조직들 이 있었는데, 방향에 따라 그것이 절개(節槪)가 되기도 하고 비극이 되기도 한다는 걸 뉴억은 보여준다.
내란 이후 의회파는 성을 허물라고 명령했다. 그런데 뜻밖에도 뉴억에 흑사병이 창궐하는 바람에 철거 작업이 중단됐고, 성의 일부가 오늘날까지 남게 됐다. 역병이 역설적으로 문화재를 지킨 셈이다. 자연이 건축물의 보호자가 된 이 황당한 사연을 뉴억 사람들은 지금도 은근히 자랑스럽게 이야기한다.
뉴억의 모의 재판소가 자리했던 건물 (위키피디아)
뉴억의 명소들, 성터에서 골동품 장까지
뉴억 성(Newark Castle): 1068년부터 자리를 지켜온 이 성은, 현재 남아있는 12세기 유적이 강변 위에 당당히 서 있다. 1887년 성터 주변이 공원으로 정비됐으며 입장료 없이 누구나 들를 수 있다.
성 마리아 막달레나 성당(St Mary Magdalene Church): 뾰족탑 높이 71미터(232피트)로 노팅엄셔 주에서 가장 높은 교회 건물이며, 마을 어디서나 눈에 들어오는 경계표다.
국립 내란 박물관(National Civil War Centre): 옛 매그너스 건물을 새로 단장하여 만든 이 박물관은 내란 당시의 유물과 영상자료를 갖추고 있으며, 뉴억이 그 전쟁에서 어떤 역할을 했는지를 생생히 전한다.
국제 골동품 장: 뉴억은 유럽 최대 규모의 골동품 장이 1년에 여섯 차례 열리는 곳으로, 4000개 좌판에 전 세계 수집가들이 몰려든다. 버려지고 묵혀진 것들에 다시 가치를 매기는 이 장터야말로 뉴억 정신의 은유가 아닐까. 낡은 것을 쉽게 버리지 않는 마을.
뉴억의 성 마리아 막달레나 성당.(위키피디아)
뉴억 출신 인물들. 작곡가에서 배우까지
존 블로(John Blow, 1649~1708): 영국 바로크 음악의 대가이자 오르간 연주자. 그의 제자가 바로 헨리 퍼셀(Henry Purcell)이다. 스승보다 제자가 더 유명해진 사례지만, 그렇다고 스승의 공이 사라지지는 않는다. 오늘날도 학교에서 이름 없이 제자를 키우는 선생들에게 바치고 싶은 이름이다.
노먼 페이스(Norman Pace, 1953~ ): 배우이자 코미디언으로, 1980년대 영국을 풍미한 희극 이인조 헤일 앤 페이스 (Hale and Pace)의 한 축이다.
토비 케벨(Toby Kebbell, 1982~ ): 뉴억의 그로브 학교를 나온 배우로, 할리우드 영화 여러 편에 출연했다.
제이 맥기니스(Jay McGuiness, 1990~ ): 영국 남성 보컬 그룹 더 원티드 (The Wanted)의 멤버로, 뉴억 출신임을 당당히 내세운다.
뉴억이 낳은 인물들을 보면 대통령이나 재벌은 없다. 음악가, 배우, 운동선수. 권력보다 문화와 예술, 몸으로 하는 일에서 사람들이 빛났다. 이 또한 하나의 메시지다.
뉴억 출신의 존 블로, 영국 바로크 음악의 대가이자 오르간 연주자.(위키피디아)
한국에 주는 시사점, 폐허도 자원이 된다
뉴억을 들여다보며 자꾸 한국이 겹쳐 보이는 건 이상한 일이 아니다.
첫째, 패배한 역사를 숨기지 않는다. 뉴억은 내란에서 결국 진 쪽이다. 왕당파로 싸웠고, 결국 왕도 처형당했다. 그런데 마을은 이 역사를 박물관으로 만들어 관광자원으로 삼았다. 한국은 아직도 일제강점기, 한국전쟁, 광주항쟁 같은 아픈 역사를 놓고 편을 가르며 싸운다. 뉴억처럼 우리가 그때 이랬다 고 담담히 전시하는 성숙함이 필요하다.
둘째, 낡은 것이 곧 자산이다. 성터를 허물지 않고, 골동품 장을 키우고, 오래된 건물을 박물관으로 바꿨다. 한국은 재개발이라는 이름으로 수십 년 된 동네를 쉽게 밀어버린다. 용산, 세운상가, 수많은 골목들. 뉴억은 낡음 을 팔아 먹고 산다. 한국의 지방 소도시들도 지금 당장 자기 마을의 낡은 것 목록 을 작성해야 할지 모른다.
셋째, 왕이 복숭아 먹다 죽을 수 있다. 이것이 가장 중요한 교훈이다. 어떤 권력도 영원하지 않고, 그 끝은 종종 어이없이 초라하다. 2025년 대한민국도 헌법재판소의 결정과 탄핵 정국을 거치며 권력의 덧없음 을 다시 확인했다. 존 왕의 복숭아처럼, 권력은 탐욕에 스스로 무너진다.
마지막으로, 뉴억은 지금도 조용하다. 런던의 소란에 휩쓸리지 않고, 트렌트 강변에서 장을 열고, 성터를 가꾸고, 옛 물건에 새 값을 매긴다. 요란하지 않아도 800년을 버텨왔다. 한국사회가 자꾸 목소리 큰 쪽으로 쏠리는 지금, 뉴억의 이 조용한 고집이 때로는 도리어 급진적으로 느껴진다.
뉴억의 한 건물 앞에 선 김성수 시민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