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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보 바로가기 : 솔비투르 암불란도 걸으면 길 드러나 묵직한 깨달음

솔비투르 암불란도 걸으면 길 드러나 묵직한 깨달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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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팔 히말라야 산자락을 찾으면 흔히 볼 수 있는 모습. 이마에 광목천을 둘러 무거운 소쿠리를 받쳐 멘 짐꾼들이 짐을 나르고 있다. pixavay.com 1. 길 위에서 시작되는 사유 솔비투르 암불란도(Solvitur ambulando)” 이 라틴어 문장은 고대의 한 철학적 일화에서 비롯되었지만, 그 울림은 시대를 넘어 중세의 수도원과 오늘 우리의 삶에까지 이어진다. 걸으면 해결된다.” 이 간결한 표현은 단순한 생활의 지혜가 아니라, 인간 존재와 인식, 그리고 영적 수행의 본질을 가리키는 깊은 문장이다. 중세의 수도사들은 이 문장을 직접 인용하지는 않았을지라도, 그 정신을 온몸으로 살아냈다. 그들의 하루는 단순히 앉아서 기도하고 사색하는 시간으로만 채워져 있지 않았다. 그들은 일하고, 기도하고, 그리고 끊임없이 움직이며 깨어 있으려 했다. 수도원 안의 회랑을 천천히 걷거나, 들판과 숲길을 오가며 노동과 묵상을 이어가는 그들의 삶 속에서 ‘걷기’는 단순한 이동이 아니라 하나의 영적 훈련이었다. 베네딕도회 전통에서 강조되는 기도하고 일하라”는 원칙은 사실상 정적인 수행과 동적인 수행의 균형을 의미한다. 그러나 이 균형 속에는 더 미묘한 리듬이 있다. 그것은 바로 기도가 걸음 속으로 스며들고, 걸음이 다시 기도로 변하는 순환이다. 수도사들은 시편을 암송하며 회랑을 걸었고, 일정한 호흡과 발걸음의 리듬 속에서 마음을 가다듬었다. 이때 걷기는 단순한 배경이 아니라, 기도를 가능하게 하는 방식이었다. 이러한 전통은 동방의 수도적 삶에서도 유사하게 발견된다. 초기 사막 교부들은 광야를 떠돌며 자신의 내면과 싸웠다. 그들에게 걷는다는 것은 세상으로부터의 도피가 아니라, 오히려 자기 자신을 더 깊이 마주하는 과정이었다. 한 자리에 머물러 있으면 생각은 점점 더 자신을 속이기 쉽지만, 움직임 속에서는 숨길 수 없는 것들이 드러난다. 몸이 피로해지고 호흡이 가빠지는 순간, 인간은 더 이상 가식적인 자기 이해에 머물 수 없게 된다. 이처럼 중세 수도사들의 삶 속에서 ‘걷기’는 단순한 습관이 아니라, 존재를 통합하는 수행이었다. 인간은 쉽게 분열된다. 생각은 생각대로 흘러가고, 감정은 감정대로 흔들리며, 몸은 또 다른 리듬을 따른다. 이 분열 속에서 우리는 자신을 잃는다. 수도사들은 이 분열을 극복하기 위해 몸과 마음을 하나의 리듬으로 묶으려 했다. 그 리듬이 바로 걷기였다. 발걸음 하나하나에 호흡을 맞추고, 호흡 속에 기도를 담으며, 기도를 통해 의식을 집중시키는 과정 속에서 그들은 점차 하나의 중심으로 모여들었다. 이 지점에서 Solvitur ambulando”는 단순한 격언을 넘어선다. 이 문장은 이렇게 다시 읽힌다.   네팔 포카라에서 안나푸르나를 향해 걷다 보면 만나는 마차푸차레의 위용 pixavay.com 문제는 생각 속에서가 아니라, 삶의 리듬 속에서 풀린다.” 고대의 철학자 디오게네스가 운동의 불가능성을 논박하기 위해 걸음을 내디뎠을 때, 그는 단순히 상대의 논리를 반박한 것이 아니었다. 그는 진리가 어디에서 드러나는지를 보여주었다. 진리는 설명 속에 머무르지 않는다. 그것은 행위 속에서, 경험 속에서, 살아지는 과정 속에서 드러난다. 중세 수도사들도 같은 사실을 알고 있었다. 인간의 문제는 단순히 생각의 오류에서 비롯되지 않는다. 그것은 삶 전체의 불균형에서 생긴다. 말과 행동이 어긋나고, 믿음과 실천이 분리되며, 몸과 마음이 따로 놀 때 우리는 혼란에 빠진다. 그래서 그들은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더 많은 이론을 쌓기보다, 삶의 방식 자체를 바꾸려 했다. 그리고 그 변화의 중심에는 ‘걷기’라는 단순하지만 깊은 행위가 놓여 있었다. 오늘을 사는 우리는 이와는 전혀 다른 환경에 놓여 있다. 우리는 대부분의 시간을 앉아서 보낸다. 생각은 빠르게 흐르고 정보는 넘쳐나지만, 몸은 점점 더 정지 상태에 머문다. 이 정지 상태 속에서 우리의 사고는 오히려 과잉으로 치닫는다. 우리는 끊임없이 분석하고 비교하며 판단하지만, 그 과정에서 오히려 더 큰 혼란에 빠지기도 한다. 바로 이때, 이 오래된 문장이 다시 우리를 부른다. 일어나 걸어라. 그러면 길이 보일 것이다.” 걷는다는 것은 단순히 장소를 옮기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존재의 모드를 전환하는 행위이다. 앉아 있을 때 우리는 머리 중심의 존재가 된다. 생각이 모든 것을 지배하고, 세계는 개념으로 환원된다. 그러나 걷기 시작하는 순간 우리는 다시 몸 중심의 존재로 돌아간다. 세계는 더 이상 개념이 아니라 감각으로 다가온다. 공기의 흐름, 빛의 변화, 소리의 울림이 우리의 몸을 통과한다. 이 변화는 단순해 보이지만, 매우 근본적이다. 왜냐하면 인간의 많은 문제들이 바로 이 단절, 즉 생각과 몸, 개념과 경험 사이의 분리에서 비롯되기 때문이다. 우리는 삶을 이해하려 하지만, 실제로는 삶과 접촉하지 못한 채 머리 속에서만 맴돌기도 한다. 걷기는 이 단절을 끊어내고, 우리를 다시 현실로 돌려보낸다. 수도사들이 회랑을 반복해서 걸었던 이유도 여기에 있다. 반복은 단조로움을 낳기도 하지만, 동시에 깊이를 만든다. 같은 길을 반복해서 걸으면서, 그들은 점점 더 미세한 변화들을 감지하게 된다. 처음에는 보이지 않던 것들이 보이고, 들리지 않던 것들이 들리며, 느껴지지 않던 것들이 느껴진다. 이 과정에 의식은 점점 더 섬세해지고, 존재는 점점 더 깨어난다. 우리의 삶에서도 마찬가지다. 우리는 종종 큰 변화만을 기대하지만, 실제로 우리를 바꾸는 것은 작은 반복이다. 매일의 걸음, 반복되는 움직임, 그 속에서 우리는 조금씩 변한다. 그리고 그 변화는 어느 순간, 우리가 전혀 다른 시선으로 세계를 바라보게 만든다. 또한 걷기는 시간을 새롭게 경험하게 한다. 우리는 보통 시간을 과거와 미래로 나누어 생각한다. 이미 지나간 것에 대한 후회와 아직 오지 않은 것에 대한 불안이 우리의 현재를 잠식한다. 그러나 걷는 순간, 우리는 현재로 돌아온다. 발걸음은 언제나 지금 이 순간에 존재하기 때문이다. 한 걸음, 또 한 걸음. 그 리듬 속에서 우리는 시간의 압박에서 벗어나, 시간과 함께 흐르기 시작한다. 이 흐름 속에서 생각도 변한다. 멈춰 있을 때 생각은 쉽게 고착된다. 같은 문제를 반복해서 떠올리고, 같은 결론에 도달하며, 그 안에서 점점 더 깊이 갇힌다. 그러나 걸을 때 생각은 움직인다. 시선이 바뀌고, 호흡이 바뀌며, 리듬이 생긴다. 그 결과, 같은 문제도 다른 각도에서 보이기 시작한다. 그래서 Solvitur ambulando”는 단순히 행동을 촉구하는 말이 아니다. 그것은 이렇게 말한다.   사진=pixavay.com 움직임 속에서 생각은 다시 살아난다.” 중요한 것은, 이 문장이 약속하는 ‘해결’이 완전한 결론을 의미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걷는다고 해서 모든 문제가 즉시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걷는 동안 우리는 문제와 맺는 관계가 변한다. 문제는 더 이상 우리를 압도하는 벽이 아니라, 우리가 지나가는 풍경이 된다. 우리는 그 풍경 속에서 배우고, 이해하고, 조금씩 변화된다. 수도사들이 평생 반복했던 걸음은 바로 이 변화를 위한 것이었다. 그들은 거대한 깨달음을 한 번에 얻으려 하지 않았다. 대신 하루하루, 한 걸음 한 걸음 속에서 자신을 다듬어 갔다. 그리고 그 느린 축적 속에서, 삶은 조용히 그러나 분명하게 변해 갔다. 이것이 바로 Solvitur ambulando”의 깊은 의미이다. 삶은 멈춰서 완성되는 것이 아니라, 걸어가며 형성되는 것이다. 오늘 당신이 어떤 문제 앞에 서 있든, 어떤 고민 속에 머물러 있든, 이 오래된 수도적 지혜를 한 번 떠올려 보라. 그리고 가능하다면 자리에서 일어나 천천히 걸어보라. 멀리 갈 필요도 없고, 빠르게 걸을 필요도 없다. 중요한 것은 단 하나, 멈춤에서 벗어나는 것이다. 그 첫 걸음 속에서, 당신은 이미 변화의 시작에 서 있다. 그리고 그 변화 속에서, 당신은 언젠가 알게 될 것이다. 왜 이 오래된 문장이 지금까지도 살아 있는지. 왜 수많은 사람들이 이 단순한 진리를 반복해 왔는지. Solvitur ambulando.” 걸으면 해결된다. 2. 길은 걸을 때만 존재한다 길은 이미 있는가, 아니면 만들어지는가.” 이 질문은 단순해 보이지만, 삶을 대하는 우리의 태도를 근본적으로 갈라놓는다. 우리는 흔히 길이 어딘가에 이미 존재한다고 믿는다. 그래서 더 정확한 지도, 더 확실한 정보, 더 안전한 선택을 찾으려 애쓴다. 그러나 실제의 삶은 그렇게 정직하게 우리 앞에 길을 펼쳐 보이지 않는다. 길은 찾는 것이 아니라, 걸어가며 드러나는 것이다. 중세 수도사들의 삶을 다시 떠올려 보자. 그들은 외부 세계의 화려한 길을 버리고 수도원의 좁은 회랑과 들판, 그리고 반복되는 일상의 동선을 택했다. 겉으로 보면 그들의 삶은 단조롭고, 이미 정해진 길 위를 맴도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그들에게 그 길은 결코 고정된 것이 아니었다. 같은 회랑을 수없이 걸어도, 그 길은 매번 새롭게 열렸다. 왜 그랬을까.   사진=pixavay.com 그 이유는 길이 외부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 걷는 사람의 내면에서 함께 생성되기 때문이다. 수도사에게 길은 단순한 공간이 아니라, 자신을 변화시키는 과정이었다. 같은 길을 반복해서 걷는 동안, 그는 어제의 자신과 다른 사람이 된다. 어제는 보이지 않던 것이 오늘은 보이고, 어제는 붙잡고 있던 생각을 오늘은 내려놓는다. 길은 그대로인데, 걷는 사람이 변한다. 그리고 바로 그 변화 속에서, 길은 전혀 다른 의미를 갖게 된다. 이것이 길은 걸을 때만 존재한다”는 말의 첫 번째 깊이다. 길은 고정된 대상이 아니라, 관계적 사건이다. 걷는 존재와 세계가 만나는 순간, 그 사이에서 길이 발생한다. 우리는 흔히 길을 선택의 문제로 이해한다. 어느 쪽으로 가야 하는가, 어떤 방향이 더 옳은가를 고민한다. 그러나 수도적 전통은 이 질문을 조금 다르게 바꾼다. 어느 길이 옳은가”보다 먼저, 너는 지금 걷고 있는가”를 묻는다. 이 질문은 우리의 우선순위를 바꾼다. 우리는 올바른 길을 찾기 위해 멈춰 있지만, 사실 멈춰 있는 상태에서는 어떤 길도 드러나지 않는다. 길은 정지 상태에서 관찰되는 대상이 아니라, 움직임 속에서 경험되는 현실이다. 여기서 우리는 하나의 중요한 역설과 마주한다. 우리는 확신이 있어야 움직이려 하지만, 실제로는 움직여야 확신이 생긴다. 수도사들은 이 역설을 삶으로 받아들였다. 그들은 완전한 확신을 기다리지 않았다. 오히려 불완전한 상태에서 반복적으로 걸으며, 그 속에서 점점 더 깊은 확신에 도달했다. 그 확신은 이론적 확신이 아니라, 살아낸 확신이었다. 몸이 알고 있는 확신, 존재가 기억하는 확신이다. 이 점에서 Solvitur ambulando”는 단순한 실용적 지혜가 아니라, 인식론적 전환을 요구한다. 우리는 앎을 생각의 결과로 보지만, 이 문장은 앎을 경험의 결과로 본다. 알기 때문에 걷는 것이 아니라, 걸으면서 알게 된다. 이러한 태도는 특히 불확실한 상황에서 더욱 중요해진다. 우리는 불확실성을 견디기 어려워한다. 그래서 가능한 한 많은 정보를 모으고, 위험을 최소화하려 한다. 그러나 삶의 중요한 순간들은 대부분 불확실한 상태에서 이루어진다. 완전히 준비된 순간은 거의 오지 않는다. 이때 수도적 지혜는 말한다.   사진=pixavay.com 불확실함 속에서도 걸어라.” 이 말은 무모함을 권하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그것은 인간 존재의 조건을 정직하게 받아들이는 태도이다. 우리는 모든 것을 알 수 없고, 모든 것을 통제할 수 없다. 그렇다면 남는 것은 하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걸어가는 것. 길 위에서는 실패의 의미도 달라진다. 우리는 흔히 잘못된 선택을 두려워한다. 한 번 잘못 들면 되돌릴 수 없을 것처럼 느끼기 때문이다. 그러나 실제의 길에서는 그렇지 않다. 돌아가는 길도 길이고, 헤매는 시간도 하나의 과정이다. 수도사들은 이것을 잘 알고 있었다. 그들은 길을 잃는 경험을 실패로 보지 않았다. 오히려 그것을 자신을 더 깊이 이해하는 기회로 받아들였다. 잘못된 길을 걸으면서 드러나는 자신의 욕망, 두려움, 집착을 직면하는 것. 그것이야말로 진정한 배움의 순간이기 때문이다. 이렇게 보면 걸으면 해결된다”는 말은 실패를 제거하는 말이 아니다. 그것은 실패를 다른 방식으로 이해하게 만드는 말이다. 멈춰 있을 때 실패는 끝처럼 보인다. 그러나 걸을 때 실패는 과정이 된다. 과정 속에서는 어떤 경험도 무의미하지 않다. 모든 것은 다음 걸음을 위한 준비가 된다. 또한 걷기는 속도에 대한 우리의 집착을 내려놓게 만든다. 현대 사회는 빠름을 요구한다. 더 빠르게 결정하고, 더 빠르게 움직이며, 더 빠르게 성취하라고 압박한다. 그러나 빠름은 방향을 보장하지 않는다. 우리는 빠르게 움직이면서도, 어디로 가고 있는지 모를 수 있다. 수도사들의 걸음은 느렸다. 그러나 그 느림 속에는 깊이가 있었다. 느리게 걷는 동안, 그들은 자신을 관찰하고, 세계를 느끼며, 삶을 이해했다. 이 느림은 단순한 속도의 문제가 아니라, 존재의 밀도와 관련되어 있다.  Solvitur ambulando”는 그래서 이렇게도 말한다. 빠르게 해결하려 하지 말고, 걸으며 이해하라.” 이 말은 해결의 시간을 늦추라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해결을 더 깊게 만들라는 것이다. 얕은 해결은 빠르게 이루어질 수 있지만, 그것은 오래가지 않는다. 반면 걸으며 이루어지는 이해는 느리지만, 더 근본적이다. 이제 다시 질문으로 돌아가 보자. 길은 어디에 있는가.” 우리는 이제 이렇게 대답할 수 있다. 길은 미리 완성된 형태로 우리를 기다리고 있지 않다. 길은 우리가 걸어갈 때, 그 순간순간에 드러난다. 그리고 그 길은 단 하나가 아니다. 우리의 선택과 움직임에 따라, 끊임없이 새롭게 생성된다. 이 사실을 받아들이는 순간, 우리는 더 이상 완벽한 길을 찾으려 애쓰지 않는다. 대신 우리는 걸어갈 수 있는 용기를 찾는다. 완벽하지 않아도 괜찮다. 불확실해도 괜찮다. 중요한 것은, 지금 이 자리에서 한 걸음을 내딛는 것이다. 수도사들이 매일 반복했던 그 단순한 걸음 속에는 바로 이 용기가 담겨 있었다. 그들은 거창한 목표를 향해 달리지 않았다. 대신 오늘의 길을 걸었다. 그리고 그 오늘의 반복 속에서, 삶은 서서히 깊어졌다.  우리의 삶도 다르지 않다. 우리는 먼 미래를 계획하지만, 실제로 살아내는 것은 언제나 오늘 하루이다. 그리고 그 하루는 수많은 작은 걸음들로 이루어진다. 그러니 다시 이 문장을 마음에 새겨 보자.  Solvitur ambulando.” 길은 생각 속에서 완성되지 않는다. 길은 걸어가며 비로소 생겨난다. 지금 당신이 서 있는 그 자리에서, 아주 작고 불완전한 한 걸음을 내딛어 보라. 그 한 걸음이, 아직 보이지 않던 길을 조용히 당신 앞에 펼쳐 보일 것이다.   사진=pixavay.com 3. 걸음은 존재를 바꾼다 걷는다”는 것은 단순한 이동이 아니다. 그것은 존재의 상태를 바꾸는 행위이며, 삶을 해석하는 방식을 근본에서부터 뒤흔드는 사건이다. 우리는 흔히 걸음을 목적을 위한 수단으로 이해한다. 더 나은 곳에 도달하기 위해, 더 좋은 결과를 얻기 위해, 지금 이 자리를 벗어나기 위해 걷는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Solvitur ambulando”라는 오래된 문장은 우리에게 전혀 다른 진실을 들려준다. 걸음은 수단이 아니라, 이미 그 자체로 하나의 변화이며 하나의 사건이라는 사실이다. 우리는 해결을 결과로 상상한다. 문제가 사라지고, 갈등이 끝나며, 명확한 답이 주어지는 상태를 해결이라 부른다. 그러나 삶은 그렇게 단정하게 정리되지 않는다. 어떤 문제는 사라지지 않고, 어떤 질문은 끝내 답을 갖지 못한 채 우리 안에 남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살아간다. 아니, 어쩌면 바로 그 질문들과 함께 살아가기 때문에 더 깊어진다. 그렇다면 걸으면 해결된다”는 말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그것은 문제가 사라진다는 뜻이 아니다. 그것은 문제를 대하는 내가 변한다는 뜻이다. 처음에는 감당할 수 없을 것처럼 느껴졌던 일들도, 시간을 지나며 다시 바라보면 전혀 다른 크기로 다가온다. 그 사건 자체는 변하지 않았지만, 그것을 받아들이는 우리의 시선과 내면의 힘이 달라졌기 때문이다. 이 변화는 생각의 결과가 아니라, 살아낸 시간의 결과이다. 그리고 그 시간은 언제나 걸음의 형태로 우리 안에 축적된다. 걸음은 생각을 몸으로 끌어내린다. 우리는 머리로 이해한다고 믿지만, 실제로는 몸이 먼저 세계를 통과한다. 발걸음을 옮길 때마다 우리는 땅과 접촉하고, 공기를 들이마시고, 리듬을 형성한다. 이 반복적인 움직임 속에서 우리의 감정은 서서히 가라앉고, 생각은 조금씩 정리되며, 보이지 않던 것들이 서서히 떠오른다. 이 과정은 조용하다. 눈에 띄는 변화도 없고, 즉각적인 성과도 없다. 그러나 바로 그 조용함 속에서, 가장 깊은 변화가 일어난다. 현대 사회는 빠른 해결을 요구한다. 즉각적인 답, 명확한 결론, 눈에 보이는 결과. 우리는 이러한 속도에 익숙해져 있다. 그래서 걷는다는 행위는 종종 비효율적으로 보인다. 느리고, 불확실하며, 무엇을 얻는지 분명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나 삶의 중요한 변화는 대부분 이런 방식으로 이루어진다. 느리게, 반복적으로, 그리고 거의 눈에 띄지 않게. 걸음은 시간의 흐름을 바꾼다.   2024년 11월 히말라야 랑탕 트래킹 중의 박철 시민기자 빠르게 달릴 때 우리는 시간을 압축하지만, 걷는 순간 우리는 시간을 펼친다. 하나의 순간이 더 길어지고, 하나의 감각이 더 깊어진다. 이 시간의 확장은 우리의 인식을 바꾸고, 결국 삶을 바라보는 태도를 변화시킨다. Solvitur ambulando”는 그래서 단순한 실용적 조언이 아니다. 그것은 삶을 살아내는 방식에 대한 근본적인 전환이다. 우리는 완벽한 조건을 기다리며 멈춰 서 있기 쉽다. 확신이 생기면 움직이겠다고, 길이 분명해지면 떠나겠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삶은 그렇게 기다려 주지 않는다. 오히려 말한다. 걸어라. 그러면 길이 드러날 것이다.” 이 말은 무책임한 낙관이 아니다. 그것은 인간 존재의 조건을 정직하게 인정하는 태도이다. 우리는 모든 것을 알 수 없고, 모든 것을 통제할 수 없다. 그렇다면 남는 것은 하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 걸음을 내딛는 것. 걸음은 우리를 겸손하게 만든다. 길 위에서 우리는 계획이 얼마나 쉽게 흔들리는지, 삶이 얼마나 예측 불가능한지 깨닫는다. 그러나 동시에 우리는 또 하나를 배우게 된다. 완벽한 조건이 아니어도 우리는 걸어갈 수 있다는 사실이다. 이 깨달음은 우리를 자유롭게 만든다. 자유는 모든 것을 통제하는 데서 오지 않는다. 어떤 조건에서도 계속 걸어갈 수 있는 힘에서 온다. 그리고 바로 그 지점에서, 어떤 사람의 삶에는 하나의 전환점이 찾아온다. 설명하기 어려운 방식으로, 그러나 분명하게 삶의 방향을 바꾸어 놓는 순간. 성서 속에서 모세는 불붙는 가시덤불 앞에서 자신의 삶이 완전히 뒤집히는 경험을 한다. 평범한 목자의 길을 걷던 그는 그 불꽃 앞에서 새로운 소명을 받아들인다. 또한 요나는 호박넝쿨 아래에서 인생의 중요한 각성을 경험한다. 잠시 주어진 그늘과 그것의 사라짐을 통해 그는 자신의 분노와 편협함을 직면하게 된다. 누군가에게는 불꽃이, 누군가에게는 식물이, 누군가에게는 한순간의 사건이 삶의 방향을 바꾼다. 그리고 어떤 사람에게는, 그 전환점이 하나의 나무로 다가온다. 2015년 12월의 끝자락. 내가 일군 공동체가 해체되는 아픔 속에서, 인간적으로 감당하기 어려운 배신과 절망이 겹쳐 하루하루가 무너져 내리던 시간. 말로 설명하기조차 어려운 상실감과 분노, 그리고 깊은 고립감이 마음을 짓누르던 날들이 이어지고 있었다. 그날 아침, 아무 생각 없이 길을 걸었다. 어디로 가야 할지도 모른 채, 그저 발걸음을 옮겼다. 그리고 그렇게 도착한 곳이 부산박물관 후원의 한적한 공간이었다. 잠시 벤치에 앉았다. 몸은 앉아 있었지만, 마음은 여전히 흔들리고 있었다. 그때 시선이 멈춘 곳에 하나의 나무가 있었다. 가느다란 라일락 나무. 이미 대부분의 잎은 떨어지고, 몇 개 남지 않은 잎사귀가 겨울 바람에 가볍게 흔들리고 있었다. 생명이라 부르기에는 너무 연약해 보이는 그 잎들이, 이상하게도 끝까지 가지를 놓지 않고 매달려 있었다. 그리고 그 위로 겨울 햇살이 스며들었다. 차갑고 투명한 빛이 잎사귀에 닿아, 조용히 반짝였다. 그 순간, 아무런 예고도 없이 눈물이 흘러내렸다. 억눌려 있던 감정이 터져 나온 것인지, 아니면 전혀 다른 차원의 어떤 접촉이 있었던 것인지 알 수 없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그 눈물이 단순한 슬픔이 아니었다는 사실이다. 그리고 바로 그 순간, 지옥 같던 마음 한가운데에 설명할 수 없는 평안이 스며들었다. 그까짓 게 뭐라고…”  그까짓 게 뭐라고…”  그 말이 조용히 떠올랐다. 한겨울 나뭇잎 하나도 저렇게 절실하게 반짝이며 생명을 노래하는데. 그까짓 게 뭐라고…” 그것은 논리로 만들어진 문장이 아니었다. 어디선가 주어진 것처럼, 마음 깊은 곳에서 자연스럽게 떠오른 말이었다. 그날 이후 모든 문제가 사라진 것은 아니었다. 상처는 여전히 남아 있었고, 현실은 그대로였다. 그러나 단 하나, 결정적으로 달라진 것이 있었다. 그 현실을 바라보는 나 자신이 변했다는 사실이다. 그 변화는 거창하지 않았지만, 삶의 방향을 바꾸기에는 충분히 깊었다. 그날 이후의 걸음은 이전과 달랐다. 여전히 느렸고, 여전히 불완전했지만, 더 이상 절망 속의 방황은 아니었다. 그것은 어딘가로 이어지는 길 위의 걸음이 되었다. 그래서 지금도 때때로 그곳을 다시 찾는다. 부산박물관 후원의 벤치에 앉아, 말없이 그 라일락 나무를 바라본다. 계절은 바뀌고 나무의 모습도 달라지지만, 그 자리는 변함없이 그 자리에 있다. 그리고 그 침묵 속에서, 마음은 다시 고요해진다. 설명할 수 없지만 분명한 평안이, 다시 스며든다. 어쩌면 이것이 Solvitur ambulando”의 가장 깊은 의미일 것이다. 걸음은 단지 문제를 해결하는 도구가 아니라, 우리를 어떤 만남의 자리로 이끄는 길이다. 그 만남은 거창하지 않을 수도 있다. 한 그루의 나무, 한 줄기의 빛, 한 순간의 침묵. 그러나 그 만남은 삶의 방향을 바꾼다. 걸었기 때문에 그 자리에 도달했고, 걸었기 때문에 그것을 볼 수 있었으며, 걸었기 때문에 그것을 받아들일 수 있었다. 아름다운 순간이었다. 걷기에 도움이 되는 책 어느 인문학자의 걷기 예찬(아널드 홀테인) : 이 책은 인문학자 아널드 홀테인이 ‘걷기’라는 가장 단순한 행위를 통해 인간 존재의 깊이를 사유해 나가는 산문집이다. 저자는 걷기를 단순한 이동이나 운동이 아니라, 자기 자신과 세계를 다시 연결하는 철학적 행위로 바라본다. 빠르게 소비되고 흘러가는 현대 사회 속에서, 천천히 걷는 시간은 잊혀진 감각을 되살리고 사유의 여백을 마련해 준다. 책은 길 위에서 만나는 풍경과 기억, 역사와 사색을 엮으며, 걷는다는 행위가 어떻게 인간의 내면을 확장시키는지를 차분하게 풀어낸다. 또한 자연과 도시, 타인과의 관계 속에서 걷기가 갖는 의미를 다층적으로 탐구하며, 삶의 속도를 늦출 때 비로소 보이는 것들을 일깨운다. 결국 이 책은 어떻게 살아갈 것인가”라는 질문에 대한 하나의 응답으로서, 걷기를 제안한다. 바쁘고 지친 일상 속에서 자신을 잃어버린 이들에게, 한 걸음씩 삶을 회복하는 길을 조용히 건네는 인문학적 안내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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