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가간다, 목숨을 걸고 [카테고리 설정이 아직되어 있지 않습니다.] 김혜형 농부 작가
가을, 화려한 무당거미의 계절
테라스 철제 의자 등받이에 뭔가 대롱대롱 매달려 있기에 들여다보니 무당거미 암컷이다. 내려온 줄의 위쪽에 허물이 걸려 있다. 갓 탈피한 거미구나. 탈피 장면을 보지 못해 아쉽다. 탈피한 직후의 거미는 몸이 홀쭉하고 활동성도 약하다. 10월 중순에 아직 본격적인 거미줄을 못 쳤으니 늦된 거미다. 추워지기 전에 산란하려면 서둘러야겠다.
무당거미는 가을 거미다. 5월경 알에서 깨어 어린 거미로 여름을 날 때는 그다지 눈에 띄지 않다가, 선선한 9~10월이 되면 거대한 그물망을 펼치며 순식간에 가을 정원을 장악한다. 본격적인 몸 불리기와 짝짓기가 시작된 것이다. 자고 일어나면 안방 창문 앞, 현관 처마 밑, 테라스 기둥 사이, 정원과 텃밭 길목에 무당거미의 거대한 수직 그물 장벽이 하나씩 들어서 있다. 자주 다니는 길이나 빨래건조대의 거미줄은 휘저어 치우지만 내 동선 바깥의 거미줄까진 굳이 손대지 않는다.
무당거미 허물.
탈피 직후, 줄에 매달린 무당거미 암컷.
어제는 보일러실 근처를 지나다 얼굴과 상반신에 거대한 무당거미 그물을 뒤집어쓰고 말았다. 모자를 쓴 채 텃밭을 둘러보느라 코앞의 거미줄을 보지 못했다. 끈적이는 거미줄이야 문질러 떼면 그만이지만 한순간에 집을 잃은 무당거미는 얼마나 황당했을까. 모자 끝 한 가닥 줄에 매달려 대롱거리는 집주인 거미를 홍매자나무 가지로 살며시 옮겨 주었다.
암컷들의 방사형 요새
늦여름에 무당거미 암컷이 안방 창문 앞에 첫 집을 지었다. 그 집을 기점 삼아 좌우 사방으로 또 다른 암컷들이 방사형 집을 잇대어 짓기 시작했다. 한 마리의 암컷이 구축한 진지 주위로 여러 암컷들의 그물망이 아파트처럼 연결되면서 거대한 거미집 군락이 만들어졌다. 타고난 관찰자의 본능으로 나는 이 거미 아파트를 오랫동안 지켜보았다.
무당거미는 황금빛 거미줄을 수직으로 펼친다. 한 겹이 아니라 여러 겹의 그물을 복잡하게 연결한다. 촘촘하고 밀도 높은 덫이다. 낮에는 꿀벌과 잠자리와 펄쩍 뛰는 메뚜기가, 밤이면 불빛에 끌려든 나방과 모기와 하루살이가 이 덫에 걸려든다. 한번 걸려들면 살아 돌아갈 수 없다. 요행을 허락하지 않는 덫, 날벌레들의 무덤이다.
거미줄에 걸린 노린재에게 잽싸게 다가가는 무당거미 암컷.
오전 9시, 커다란 암컷 무당거미가 거미줄 한가운데서 아침식사를 하고 있다. 머리 양옆에 달린 더듬이다리로 먹이를 꽉 붙든 채 열심히 씹어먹는 중이다. 먹히는 것은 꿀벌처럼 보인다. 잡힌 지 며칠 된 듯 색이 짙고, 반쯤 먹힌 상태다. 무당거미는 거미줄에 걸려든 곤충을 독으로 마비시킨 후 사나흘에 걸쳐 조금씩 먹는 습성이 있다. 거미집 여기저기에 거미줄로 칭칭 감겨 미라가 된 곤충들, 먹히고 남은 곤충의 잔해들이 걸려 있다.
식사에 몰두하고 있는 암컷 뒤로 조심조심 접근하는 작은 거미가 있다. 몸집이 매우 작아 새끼처럼 보이지만 장성한 무당거미 수컷이다. 흥미로운 일이 벌어질 것 같아서 휴대전화 카메라를 켠 채 숨죽여 지켜본다.
무당거미 암컷과 두 마리의 수컷, 그리고 먹잇감의 잔해들. 왼쪽 하단에 암컷의 허물이 보인다.
그녀에게 다가간다, 목숨을 걸고
무당거미는 암수가 뚜렷이 구분된다. 거미줄 중앙에 앉은, 몸집 크고 강렬한 무늬를 가진 거미가 암컷이다. 암컷에 비하면 수컷은 너무 작아 존재감이 없다. 수컷들은 암컷이 지은 거미집 가장자리에 더부살이하는데, 암컷이 잡아둔 먹이를 조금씩 훔쳐 먹으며 연명한다. 수컷들의 일평생 목표는 단 하나, 바로 짝짓기다.
수컷이 조심스러운 몸짓으로 암컷 주위를 맴돈다. 살살 다가가다가 불현듯 멈춰 서고, 다시 다가가다가 암컷이 다리를 까딱이자 화들짝 뒤돌아 도망간다. 그리고 다시 몸을 돌려 기회를 엿본다. 짝짓기 공략 타이밍은 암컷이 먹이를 먹느라 방심할 때다. 타이밍이 안 맞으면 곤충 대신 자신이 먹힐 수도 있다.
무당거미 암컷은 때때로 수컷을 먹는다. 수컷이 암컷의 식사 시간을 틈타 짝짓기를 노리는 건 유전자 배달과 개체의 생존 가능성, 둘 다 공략할 만한 전략이기 때문이다. 수컷은 이 한순간을 위해 목숨을 건다. 다리를 몇 개 잃을 수도 있고 통째로 잡아먹힐 수도 있지만, 유전자를 암컷의 몸에 전달할 수만 있다면 그것으로 성공이다.
암컷 무당거미의 실젖과 생식공의 위치.
암컷의 생식공은 가슴 바로 아래에 있다. 꽁무니 쪽에 보이는 구멍은 생식기가 아니라 거미줄을 뽑아내는 실젖이다. 수컷의 머리 좌우에 있는 더듬이다리엔 까만 방울 같은 게 붙어 있다. 얼핏 보면 두 눈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정자 주머니다. 수컷은 자기 배에서 생산한 정자를 더듬이다리에 저장했다가 짝짓기철에 사용한다. 더듬이다리가 생식기 역할을 겸하다 보니, 위험을 무릅쓰고 제 머리를 암컷의 가슴께까지 디밀어야 한다. 목숨을 건 정면 도전. 우회로는 없다.
무당거미 수컷. 까만 눈처럼 보이는 것이 생식기를 겸하는 더듬이다리다.
수컷은 다가갔다 물러서기를 수없이 반복한다. 거미줄의 좌우 상하로 오가며 암컷의 움직임을 계속 주시한다. 수컷이 진퇴를 반복하는 사이, 한 시간이 지난다. 암컷 입에 물린 먹이도 어느새 1/3로 줄어든다.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 암컷이 식사를 마치면 수컷은 유전자가 아니라 몸뚱이 전체를 내줘야 할지 모른다. 한 시간째 옆에 서서 지켜보는 나도 수컷 거미만큼이나 간절해진다. 시간이 없어, 용기를 내!
암컷이 먹는 일에 정신이 팔려 있는 사이, 최대한 가까이 접근한 수컷.
그 순간, 수컷이 예사롭지 않은 행동을 한다. 여태껏 암컷의 앞쪽 거미줄(무당거미의 거미줄은 여러 겹이다.)을 오가던 녀석이 드디어 암컷이 앉아 있는 거미줄로 재빠르게 내려간다. 암컷의 꽁무니 옆에 서더니 몸을 움찔움찔, 으쓱으쓱, 앞뒤로 흔들기 시작한다. 도약 직전의 워밍업일까. 마치 ‘할 수 있어! 해낼 거야!’라고 다짐하는 것 같다. 몇 차례 몸을 흔들던 수컷이 결심한 듯 암컷의 배 위로 빠르게 올라간다. 그리고 망설임 없이 암컷을 끌어안는다. 아, 드디어!
죽음이 부여한 최선의 삶
짝짓기가 진행되는 동안 암컷은 놀랍게 잠잠하다. 어떤 공격 행동도 하지 않는다. 수컷이 먹힐까봐 가슴 졸이던 나는 비로소 안도한다. 짝짓기 시작한 지 5분쯤 지났을까. 암컷이 들고 있던 먹이를 아래로 툭 떨군다. 먹이엔 더 이상 관심 없다는 거겠지. 만세 부르듯 아래로 늘어뜨린 암컷의 더듬이다리 끝에 먹잇감이 대롱대롱 매달려 있다. 비로소 암컷의 까만 두 눈이 보인다.
먹잇감을 내려놓은 암컷의 가슴께에 엎드려 짝짓기하는 수컷.
거미의 짝짓기는 20분 넘게 지속된다. 주변에서 얼쩡거리던 다른 수컷들은 접근할 엄두를 내지 못한다. 성공적으로 짝짓기를 마친 수컷은 자신의 생식기(더듬이다리)를 부러뜨려 코르크 마개처럼 암컷의 생식공을 막는다는데, 육안으로 확인하진 못했다. 자기 유전자를 품은 암컷이 또 다른 수컷의 유전자를 받을 수 없게 하는 차단 장치라니, 대단한 자기 복제 전략이다. 죽기를 각오하고 짝짓기하며, 잡아먹히는 도중에도 생식만은 멈추지 않는 무당거미나 사마귀 같은 생명체를 보면, 개체가 유전자의 운반자라는 리처드 도킨스의 이론에 고개가 끄덕여진다. 개체에겐 죽음이 부여한 최선의 삶이 있고, 유전자는 그저 영속할 뿐이다.
산란과 죽음, 그리고 환생
거미줄 위에서 생애를 마친 수컷 무당거미.
무당거미 수컷의 사체가 거미줄에 걸린 채 팔랑거린다. 먹히는 건 피했지만 남은 시간은 지극히 짧다. 짝짓기를 마친 수컷에겐 수행할 과제가 없다. 하지만 암컷에겐 일생일대의 중차대한 과제가 남아 있다. 알을 낳아 자손을 잇는 일이 그것이다. 안방 창문 앞에 거미줄을 쳤던 암컷 중 한 마리가 높은 처마까지 올라와 알집을 짓기 시작한다. 비 맞지 않을 곳에 요람 자리를 잘 잡았다. 나는 다락방 창을 통해 간헐적으로 그를 관찰한다.
암컷 무당거미가 다락방 처마에 알집을 붙였다.
산란은 암거미 생애의 마지막 클라이맥스다. 곧 어미가 될 암거미는 꽁무니의 실젖에서 거미줄을 뽑아내 하얀 이부자리를 정성껏 깐다. 몇 시간에 걸쳐 폭신한 요가 완성되면 그 위에 엎드려 온몸을 짜내듯 주황색 알을 낳는다. 산란 직전 터질 듯 풍만했던 암컷의 배가 한 시간여 만에 홀쭉해진다. 암거미는 다시 거미줄을 뽑아내 솜이불을 덮듯 알을 뽀얗게 덮는다. 이 작업에 또 몇 시간이 걸린다. 이전에 거처했던 거미집은 황금색이었는데 새끼가 머물 알집은 희한하게 흰색이다.
몸이 가진 가용자원을 바닥까지 긁어 쓴 암거미가 휘청거린다. 암거미는 마지막으로 거미줄을 따라 내려가 마른 낙엽, 먹잇감의 잔해, 죽은 수컷의 사체를 물고 와서 알집 위를 장식한다. 알집을 보호하려는 위장술이다. 마지막 소임을 마치고 기운을 소진한 어미가 알집을 감싸듯 껴안고 엎드린다. 이대로 알집을 지키다 때가 되면 스르륵 지상으로 떨어질 것이다. 육신은 말라 가벼운 껍데기로 굴러다니다가 부스러져 흙이 될 것이다.
어미 거미들이 산란할 때까지 나는 거미줄에 손대지 않는다. 11월 첫서리에 그들이 모두 사라지면 집 외벽을 포위하다시피 한 십수 개의 텅 빈 거미집을 먼지떨이가 달린 장대를 휘둘러 모조리 없앨 것이다. 주인 없는 집은 찌꺼기이자 잔해일 뿐, 진짜 알맹이는 저 알집에 오글오글 모여 있다. 봄날의 풀잎과 여름 메뚜기를 거쳐 가을 거미의 정자와 알로 옮겨간 태양 에너지가 겨우내 알집 속에 웅크려 있다가 내년 봄 어린 거미들로 바글바글 환생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