졸업식에 으레 나오는 위풍당당 행진곡 과 엘가의 삶 [사람들] 졸업식장의 그 음악, 알고 보면
졸업식장마다 어김없이 울려 퍼지는 그 장중한 행진곡. 학사모를 쓴 채 눈물 반 웃음 반으로 걷던 그 순간의 배경음악. 혹시 그 곡이 누구 작품인지 아는가? 바로 에드워드 엘가(Edward Elgar, 1857~1934)의 〈위풍당당 행진곡(Pomp and Circumstance March)〉 제1번이다. 전 세계 졸업식장에서 연간 수십만 번 연주되는 이 곡의 작곡가를, 정작 졸업식장에 앉아 있는 사람들은 대부분 모른다. 이것이 엘가의 운명이자 아이러니다. 이렇게 유명한데 이렇게 제대로 알지 못하는 음악가가 또 있을까.
1900년 경의 엘가(위키피디아)
시골 악기상의 아들, 태생부터 아웃사이더
에드워드 윌리엄 엘가는 1857년 6월 2일, 잉글랜드 우스터셔(Worcestershire) 주 브로드히스(Broadheath)라는 작은 마을에서 태어났다. 아버지 윌리엄 엘가(William Elgar, 1821~1906)는 악기 상점을 운영하면서 피아노 조율로 생계를 꾸렸다. 귀족도 아니고, 대도시 출신도 아니고, 정규 음악학교를 다닌 적도 없다. 한마디로 19세기 영국 음악계의 철저한 흙수저 였다.
당시 영국 고급 음악계는 독일과 오스트리아 출신 음악가들이 판을 치던 시절이었다. 요한 제바스티안 바흐(Johann Sebastian Bach, 1685~1750)의 후예들, 루트비히 판 베토벤(Ludwig van Beethoven, 1770~1827)의 그늘이 유럽 전체를 덮고 있었고, 영국은 음악 불모지 라는 놀림까지 받던 나라였다. 그런 나라에서, 그것도 시골 악기상 집안 출신이 영국 음악의 아버지 로 추앙받게 되리라고는 아무도 예상하지 못했다.
엘가는 독학으로 바이올린을 익혔고, 아버지 가게에서 악보를 뒤적이며 화성과 대위법을 혼자 공부했다. 요즘 말로 하면 유튜브 독학 이지만, 유튜브도 없던 시절에 책과 악보만으로 해낸 것이니 그 집념이 보통이 아니다.
엘가의 출생지, 더 퍼스, 로어 브로드히스, 우스터셔.(위키피디아)
40대까지 무명, 그리고 느닷없는 대박
엘가의 삶은 젊은 천재의 화려한 등장과는 거리가 멀었다. 볼프강 아마데우스 모차르트(Wolfgang Amadeus Mozart, 1756~1791)처럼 다섯 살에 작곡하고 열 살에 교향곡을 쓴 게 아니었다. 엘가는 30대 내내 지역합창단을 지도하고, 정신병원에서 악단을 이끌고(이건 진짜다. 1879년부터 수년간 우스터 카운티 정신병원 악단 지휘자를 맡았다), 바이올린 과외를 하며 근근이 살았다.
결혼도 늦었다. 1889년, 그의 나이 32세에 캐럴라인 앨리스 로버츠(Caroline Alice Roberts, 1848~1920)와 결혼했는데, 신부는 무려 아홉 살 연상에 퇴역장군의 딸이었다. 신부 집안은 처음엔 격렬히 반대했다. 장군 집안 딸이 악기상 아들과 결혼한다니! 그러나 앨리스는 뚝심 있게 밀어붙였고, 엘가의 가장 든든한 후원자이자 비서이자 정신적 지주가 되었다.
그리고 마침내 1899년, 엘가의 나이 42세에 대반전이 일어난다. 〈수수께끼 변주곡(Enigma Variations)〉이 런던에서 초연되어 폭발적인 호평을 받은 것이다. 이 곡은 그의 친구들을 각각 음악적으로 묘사한 변주곡인데, 수수께끼 라는 부제처럼 숨겨진 주제 가 무엇인지는 엘가가 죽을 때까지 밝히지 않아 지금도 음악학자들이 머리를 싸매고 있다. 100년이 넘도록 풀리지 않는 수수께끼를 남겨 놓다니, 엘가, 이 사람 꽤 짓궂다.
엘가의 부모, 윌리엄과 앤 엘가(위키피디아)
대영제국의 나팔수 가 되다, 그 씁쓸함
1901년에 발표된 〈위풍당당 행진곡〉은 영국 왕실과 제국의 공식 찬가나 다름없게 되었다. 에드워드 7세(Edward VII, 1841~1910)가 이 곡을 극찬했고, 엘가는 귀족 작위(1904년 기사 작위, 1931년 준남작 작위)까지 받으며 대영제국의 상징적 음악가로 등극했다.
그런데 여기서 생각해 볼 점이 있다. 〈위풍당당 행진곡〉의 중간부 선율에 붙은 가사 희망과 영광의 땅, 자유의 어머니(Land of Hope and Glory, Mother of the Free) 는 영국의 비공식 국가처럼 쓰이는데, 이 가사를 엘가 본인이 쓴 게 아니라 시인 아서 크리스토퍼 벤슨(Arthur Christopher Benson, 1862~1925)이 붙인 것이다. 게다가 엘가 자신은 이 가사에 대해 상당히 불편해 했다는 기록이 있다.
제국의 팽창과 침략을 찬미하는 가사를 자기 음악에 붙여 쓰는 꼴을 보면서, 시골 출신 가톨릭 신자이자 평생 아웃사이더였던 엘가가 어떤 심경이었을지. 이건 마치 민중가요 작곡가가 어느 날 자신의 곡이 재벌기업 광고에 쓰이는 걸 보는 것과 비슷하지 않을까.
1891년 경의 에드워드 엘가와 앨리스 엘가(위키피디아)
아내를 잃고, 음악도 잃다
1920년, 평생의 동반자 앨리스가 세상을 떠났다. 그 뒤 엘가는 사실상 음악 창작을 멈췄다. 14년을 더 살았지만 주요 작품을 내놓지 못했다. 반쯤 완성된 교향곡 제3번의 초고만 남긴 채 1934년 2월 23일 눈을 감았다.
음악학자들은 엘가의 창작 중단에 대해 여러 분석을 내놓지만, 가장 단순한 설명이 가장 설득력 있다. 그에게 앨리스는 뮤즈이자 매니저이자 세상과 연결해 주는 끈이었다. 그 끈이 끊기자 음악도 멈췄다. 낭만적이라고 해야 할지, 슬프다고 해야 할지.
60세 무렵의 엘가(위키피디아)
한국에서 엘가를 읽는 법
자, 이제 핵심이다. 엘가 이야기를 한국 현실에 비춰보면 어떤 생각이 드는가?
첫째, 늦깎이와 독학의 문제. 한국 사회는 여전히 어릴 때 못하면 끝 이라는 강박에 사로잡혀 있다. 영재고, 특목고, 조기유학. 42세에 대박을 터뜨린 엘가를 보면서 무슨 생각이 드는가. 물론 엘가도 어릴 때부터 열심히 했다. 하지만 그는 정규 교육기관의 낙인 없이도, 스스로의 힘으로 자기 길을 개척했다. 한국의 입시지옥 이 얼마나 많은 잠재적 엘가들을 중간에 꺾어놓고 있는지 생각해볼 일이다.
둘째, 제도권 밖의 목소리가 결국 시대의 목소리가 된다. 엘가는 평생 영국 음악계의 주류인 척하면서도 사실은 가톨릭 신자(영국 국교회가 주류인 나라에서), 시골 출신, 독학파라는 세 겹의 비주류였다. 그 비주류가 결국 영국 음악을 대표하게 됐다. 지금 한국에서 주류 언론이 무시하고, 기득권이 외면하는 목소리들이 10년, 20년 후 역사에서 어떤 평가를 받을지, 엘가의 삶이 힌트를 준다.
셋째, 예술이 권력에 포획될 때. 〈위풍당당 행진곡〉이 대영제국의 팽창 이데올로기를 선전하는 도구로 쓰인 것처럼, 예술은 언제나 권력에 포획될 위험에 처한다. 지금 한국에서도 문화예술이 특정 정치세력의 선전물로 변질되거나, 반대로 불순분자 명단에 오르거나 하는 일이 끊이지 않는다. 예술가가 자기 작품에 어떤 딱지가 붙는지를 끝까지 경계해야 하는 이유다.
넷째, 동반자의 가치. 엘가에게 앨리스가 없었다면 〈수수께끼 변주곡〉도, 〈위풍당당 행진곡〉도 없었을 가능성이 높다. 천재 뒤에는 조용한 지원자 가 있다는 이 오래된 이야기를 한국사회는 아직도 제대로 인정하지 않는다. 수많은 예술가, 학자, 사회운동가들을 곁에서 묵묵히 지탱해온 이름 없는 동반자들에게 우리는 얼마나 경의를 표하고 있는가.
윌리엄 로텐스타인이 1919년에 그린 엘가 초상(위키피디아)
졸업식이 끝나고도 기억할 것
오늘도 어디선가 졸업식이 열리고, 〈위풍당당 행진곡〉이 울려 퍼진다. 학사모 쓴 청년들은 그 음악의 작곡가를 모른 채 퇴장한다. 어쩌면 그게 엘가다운 결말이다. 화려한 무대 앞에 서지 못하고, 평생 변두리를 맴돌다가, 그래도 결국 가장 오래 남는 음악을 만들어 낸 사람.
한국 사회에서 지금 이 순간도 변두리를 맴돌며 자기 작품을 묵묵히 쌓아가는 사람들이 있다. 입시에서 밀려난 사람, 정규직이 아닌 사람, 주류언론에 나오지 못하는 사람, 거대자본 없이 혼자 씨름하는 사람. 역사는 종종 그런 사람들 편이었다.
엘가는 말했다. 아니, 실제로 이런 말을 했는지는 모르겠다. 하지만 그의 삶이 이렇게 말하는 것 같다.
버텨라. 42살에도 늦지 않았다.
졸업식장의 그 음악이 다시 들릴 때, 부디 작곡가 이름 하나 정도는 기억해 주시길.
헤리퍼드에 있는 자전거를 탄 엘가 동상(위키피디아)
김성수 시민기자 wadans@empa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