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 질서 급변… 식탁에 못 앉으면 메뉴가 된다 는 경고 [카테고리 설정이 아직되어 있지 않습니다.] 2026년 1월 워싱턴에서 나온 외교·안보 정책과 다보스의 설산에서 울린 경고는 다른 각도에서 같은 사실을 가리키고 있다. 우리가 알고 믿어왔던 미국은 더 이상 예전의 미국이 아니라는 점이다. 미국은 급진적인 방식으로 스스로를 재규정하는 중이고 폭력을 동반하면서 세계질서를 다시 작성하고 있다. 지난 주 뮌헨 안보회의에서 마코 루비오 미 국무장관은 옛 세상(the old world)은 가버렸고 이제 새로운 지정학적 시대가 도래하고 있다”고 말했다.
ASP, NDS, 다보스의 경고 더 이상 예전의 미국 아니다”
미 국무부는 5개년 전략계획(ASP: Agency Strategic Plan)을 세워 1월 15일 공개했다. 과거와 크게 다르다. 첫째, ‘돈로 독트린’이다. 서반구 전체를 ‘미국 전용권’으로 공고화하겠다는 뜻이다. 둘째, 동맹의 역할 재정의다. 동맹국들의 방위비 분담과 역할 확대를 강하게 요구한다는 얘기다. 셋째, 경제와 안보의 결합이다. ‘미국의 재산업화’와 ‘무역 불균형 해소’가 외교 전략의 핵심 목표다.
미 국방부의 전략계획은 1월 23일 발표된 국방전략(NDS: National Defense Strategy)이다. ASP와 상응해 ‘미국 우선주의’와 ‘힘을 통한 평화’를 투영하고 있다. 중국을 최우선의 위협으로 보던 관점을 버리고 미국 본토 및 서반구 방어를 최우선으로 격상했다. 중국 억제는 2순위다. 이어 동맹국의 비용 분담 확대를 추구하고, 전시와 평시를 모두 감당할 수 있는 강력한 무기 생산 능력의 확보를 도모한다. 특히 그린란드는 북극 방어의 핵심으로 규정되어 있다.
미 국무부의 ASP, 국방부의 NDS 그리고 다보스 포럼에서 행한 마크 카니 캐나다 총리의 경고 연설은 한 가지 사실을 분명하게 제시하고 있다. 한미동맹을 ‘그대로 유지하는 것’은 더 이상 우리 국익을 위해 안전한 선택이 아니라는 점이다. 아무 생각 없이 타성에 맡긴다면 우리의 생존과 번영이 위험에 처해질 수도 있는 상황이 전개될는지 모른다.
요새로 들어간 미국, 계산기에서 나오는 외교
미 국무부의 전략계획과 국방부의 국방전략은 동시에 미국의 우선순위를 명확히 한다. 최우선 과제는 동맹 방어도 국제 분쟁의 중재도 아니다. 본토 방어, 국경 통제, 산업 기반의 회복이 모든 정책의 출발점이 되었다. ‘힘을 통한 평화’라는 구호 역시 그 의미가 달라졌다. 과거에는 동맹과 질서를 유지하기 위한 힘이었다면 이제는 스스로를 외부로부터 차단하기 위한 힘이다.
이러한 전환은 군사 전략에서 가장 극명히 드러난다. 미군의 자원과 예산은 해외 주둔과 동맹 방어에서 점차 본토 방공, 미사일 방어, 북극과 서반구 방어로 이동하고 있다. 동맹국의 안보는 무상으로 공급되는 공공재가 아니다. 대신 ‘누가 얼마를 부담할 것인가’라는 계산의 대상이며 때에 따라서는 동맹국 자신이 전적으로 부담해야 할 비용이다.
미국 외교의 기준 역시 달라졌다. 가치, 규범, 연대라는 언어는 후퇴하고 재산업화와 무역수지, 공급망 통제가 외교의 중심에 자리 잡았다. 동맹은 공동의 이상을 추구하는 관계가 아니라 비용 대비 효율을 따지는 계약 관계로 재정의되고 있다. 냉정하게 말하자면 동맹은 미국의 안보와 번영을 위해 희생하고 수탈당해야 하는 하위 개념일 뿐이다.
한국에 디각도로 가해지는 압박
이러한 변화는 한국에게 여러 겹의 압박으로 다가온다. 방위비 분담 증액 요구는 그 일부에 불과하다. 더 중요한 문제는 주한미군의 성격 변화다. 주한미군은 한반도 방어보다는 중국 견제를 위한 전략적 자산으로 재설정되고 있다. 이는 한국이 우리 의사와는 상관없이 미중 간의 갈등에서 지정학적 리스크를 떠안는 공간으로 전락하고 있음을 의미한다.
경제 영역에서도 마찬가지다. 미국의 재산업화 전략은 동맹국의 산업 역량을 미국 중심으로 재편하는 것을 요구하고 있다. 첨단 제조업과 핵심 기술을 미국으로 이전하라는 요구는 동맹 협력이라는 이름을 쓰고 있지만 실질적으로는 산업 주권의 이전을 의미한다. 미국은 대만의 TSMC를 미국으로 이전하기를 강요하고 있고, 그러한 요구는 한국을 예외로 하지 않는다.
순응한다고 안전해지지는 않는다”
미국의 변화에 가장 날선 말을 던진 이는 아이러니하게도 미국의 가장 가까운 이웃 캐나다의 카니 총리였다. 그는 다보스 연설에서 지금의 세계를 ‘전환’(transition)이 아니라 ‘단절’(rupture)이라고 규정했다. 강자는 할 수 있는 일을 하고, 약자는 당해야 하는 일을 당하는” 시대로 돌아갔다는 것이다. 순응하면 안전이 보장될 것이라는 믿음은 환상에 불과하다.
캐나다의 마크 카니 총리가 1월 20일 다보스 포럼에서 연설하고 있다. 2026. 1. 20 AP/연합뉴스
카니 총리의 메시지는 선명하다. 미국이 통합을 무기로 삼고 관세를 협박 수단으로 사용하는 상황에서 말 잘 듣는 동맹이라는 전략은 더 이상 통하지 않는다. 중견국들은 미국만 바라보는 외교에서 벗어나 스스로 선택할 수 있는 공간을 만들어야 한다는 것이다. 식탁에 앉지 못하면 메뉴판에 오른다(If you re not at the table, you re on the menu).” 의사결정에 참여하는 주체가 되지 못하면 강대국의 먹이가 된다.
미국은 이미 한미동맹에 대한 생각을 바꿨다
이제 한국의 상황을 돌아볼 차례다. 한국 사회에서 한미동맹은 비판 자체가 금기시된 영역이다. 그러나 미국의 NDS와 ASP를 보면 그 ‘성역’을 설정한 당사자가 이미 생각을 바꿨다. 미국은 한국을 존중해야 할 주권적 존재로 보기보다 본토 방어 비용을 나눌 대상, 혹은 미국 산업을 돌리는 데 필요한 자본과 기술의 공급처로 인식하고 있다.
미국 우선주의는 일시적인 정치 구호가 아니라 미국의 생존 전략으로 자리를 잡았다. 이런 상황에서 한미동맹을 유일신처럼 떠받드는 외교는 우리의 안보와 경제를 미국의 국내 정치에 그대로 맡기는 일과 다르지 않다. ‘해바라기 외교’는 충성의 서약으로 칭찬을 받을지언정 우리 국익을 보장해 주지는 않는다. 강자는 행동하고 약자는 결과를 떠안을 뿐이다.
재설계가 필요한 동맹, 중견국간 연대가 필요하다
이제 한미동맹은 재검토를 넘어 재설계의 단계에 들어가야 한다. 첫째, 동맹이 미국의 도구로만 작동하는 구조는 단연코 거부해야 한다. 한국의 군사·경제 자산이 미국의 전략에 종속되면 동맹은 상호 협력이 아니라 편입이요 예속이 된다. 동맹은 절대적인 가치가 아니라 상대적인 효용을 가질 뿐임을 주지해야 한다.
둘째, 전략적 자율성을 전제로 한 외교·안보정책이 필요하다. 미국이 언제든 우선순위를 바꿀 수 있다는 현실을 인정하고 독자적 억제력과 외교적 선택지를 넓혀야 한다. 전시 작전 통제권 회수와 주한미군의 역할에 대한 명확한 한계 설정은 그 출발점이다. 그리고 우리는 주체적으로 남북대화와 협력을 추진함으로써 한반도 평화체제를 확실히 구축해야 한다.
셋째, 중견국 간의 사안별 연대다. 캐나다, 호주, 유럽 국가들처럼 미국 우선주의의 영향을 함께 받고 있는 나라들과 실질적인 협력을 추진해야 한다. 고정된 진영이 아니라 사안에 따라 움직이는 연대가 현실적인 대안이다. 아울러 다극화 질서로의 편입도 시급하다. 중국 및 러시아와의 완전한 관계복원은 물론 브릭스(BRICS) 및 상하이 협력기구 가입도 서둘러야 한다.
나렌드라 모디 인도 총리가 9월 1일 중국 톈진의 메이장 컨벤션 및 전시 센터에서 열린 상하이 협력기구(SCO) 정상회의 2025를 앞두고 러시아의 블라디미르 푸틴 대통령과 중국의 시진핑 국가주석과 환담을 하고 있다. 2025.9.1. 로이터 연합뉴스
한미동맹은 언제까지 머물러야 할 성역 아니다
미국은 더 이상 동맹국을 위해 손해를 감수할 준비가 되어 있지 않다. 아니, 손해감수는커녕 오히려 우리의 희생을 요구하고 있다. 옳고 그름의 문제는 아니다. 문제는 그 변화 앞에서 우리가 무엇을 선택하느냐다. 아무런 재검토 없이 기존의 틀에 머무는 것은 안정이 아니라 지연된 위험일 수 있다.
테이블에 앉지 못한 국가는 결국 거래의 대상이 된다. 지금 한국 외교가 마주한 현실이다. 한미동맹의 ‘성역’을 허문다는 것은 관계를 끊겠다는 선언이 아니다. 변화한 세계에서 주체로 남기 위한 최소한의 조건을 다시 설정하자는 요구다. 이제 한국 외교는 관성에서 벗어나 선택하고 설계하는 단계로 나아가야 한다. 이게 진짜 대한민국의 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