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소현의 탄소시장 브리핑】탄소자산 시대, 자발적 탄소시장의 변모 [카테고리 설정이 아직되어 있지 않습니다.] 불과 2년 전만 해도 자발적 탄소시장은 기후위기 시대의 차세대 시장으로 각광받았다. 관련 스타트업과 펀드가 우후죽순 생겨났지만, 그 열기는 이제 온데간데없다. 자발적 탄소시장은 사라지고 있는 걸까? 어떤 의미에서는 그렇다고 할 수 있다. 우리는 1997년 교토의정서 시대와 전혀 다른 시대를 살고 있다.
이미 파리협정 1.5도를 넘었고 기후변화와 전쟁 등으로 세계는 그 어느 때보다 빠르게 불가역적인 티핑포인트를 향해 다가가고 있다. 이러한 위기감은 탄소 감축을 더 이상 민간의 자발적인 시장에만 맡겨둘 수 없게 만들었다.
2015년 파리협정 이후 당사국들은 벌써 세 번째 국가 온실가스 감축목표(Nationally Determined Contributions, NDC)를 제출하며 이전보다 한층 강화된 감축을 공약했다. 자연스럽게 온실가스(편의상 탄소로 지칭함)를 얼마나, 어떻게 줄일 수 있는가는 이제 국가의 사활이 걸린 문제가 됐다.
규제시장과 자발적 시장의 경계가 무너지다
파리협정 제6조는 국가 간 온실가스 감축사업을 통해 발생한 감축실적을 사고팔 수 있는 국제탄소시장 메커니즘을 열었다. 동시에 감축분을 판매하려는 국가, 구매하려는 국가, 그리고 자국 목표치도 채워야 하는 국가 간의 복잡한 줄다리기가 시작됐다. 그 과정에서 자발적 시장과 규제 시장의 경계는 빠르게 허물어지고 있다.
우리나라와 같이 국외 감축분을 국가 온실가스 목표 달성에 사용하려는 국가들은 국내 배출권거래제를 운영하는 동시에 국제 탄소시장도 병행 활용하고 있다. 한국은 5%까지, 일본은 10%, 중국은 5%까지 해외 혹은 국내 감축사업에서 발생한 상쇄 크레딧을 인정한다.
대부분의 국가들은 자발적 탄소시장의 민간 레지스트리와 방법론보다 국가 주도 탄소시장을 선호하고 있다. 국외 감축분을 확보하기 위해 우리나라에서는 2024년 12월 기준 베트남, 몽골, 가봉 등 9개국과 양자협정을 체결했고 해외 감축사업을 개발하는 국내 사업자에게 지원을 제공한다. 이외에도 싱가포르, 스위스, 일본 등 주로 고소득 고배출 국가들은 감축 잠재량이 비교적 큰 개발도상국과 적극적인 양자협약을 체결하고 있다.
개발도상국의 전략적 전환
교토의정서 체제와 달리, 파리협정 아래에서는 개발도상국이 감축 의무를 지는 동시에 감축분을 판매할 수 있는 주체로 전환됐다. 동시에 과거 개도국이 감축사업을 승인하는 지정국가기관(DNA)의 인가 역할에 그쳤다면, 현재는 국가 탄소 자산을 직접 관리·모니터링해야 하는 위치에 놓였다. 탄소를 감축하는 행위가 석유처럼 국제 시장에서 거래되는 핵심 자원이 된 것이다. 즉, 자원파괴를 통한 성장에서 자원 보존을 통한 가치 창출로 패러다임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개도국 입장에서는 셈법이 복잡해졌다. 자국 국가 온실가스 목표 안에 설계된 감축 사업을 타국 사업자가 해외 감축분으로 팔아버리거나, 쉽게 달성 가능한 저비용 사업만 빠져나가고 고비용 장기 사업만 남는다면 손해 보는 장사다. 급속한 경제 성장을 경험하고 있는 신흥공업국일수록 더욱 민감한 사안이다. 이에 가나, 케냐, 짐바브웨 등은 국내외 감축분을 체계적으로 관리하기 위해 국가 탄소 레지스트리 혹은 파리협정 6.4조 레지스트리를 구축·활용하고 있다.
아프리카가 보는 탄소시장: 기후 금융이자 녹색 성장
파리협정 제6조 협상이 마무리되면서 아프리카에서는 탄소시장에 대한 기대감이 고조됐다. 파리협정 6조 협상이 마무리됨에 따라 아프리카 7개국에서는 아프리칸 카본 마켓 이니셔티브 (African Carbon Markets Initiative, ACMI)와 서아프리카 탄소시장 동맹 등이 출범하며 아프리카 국가들의 탄소시장에 대한 관심을 보여줬다.
일부 국가에서는 탄소사업 사업자들에게 환경 부담금 (environmental levy)을 부과하여 기후 금융 수단으로 설계하려는 움직임이 본격화됐다. 케냐는 토지기반 사업 수익의 40%, 기타사업은 30%를 가져가고, 짐바브웨는 사업자와 국가 간 7:3 수익 배분을 적용하고 있다. 양자간 국제 감축분의 이중산정 방지를 위한 상응조정의 경우 상응조정 비용을 청구하는 사례도 빈번해지고 있다. 이에 아프리카 개발 은행은 아프리카 탄소 지원 기구(ACSF, Africa Carbon Support Facility)를 통해 아프리카산 크레딧의 가격 안정성과 유동성을 확보하는 등 시장 리스크 관리에 적극 나서고 있다.
탄소크레딧의 법적 지위에 대한 논란
탄소시장이 의무 시장으로 진화하면서 크레딧의 법적 취급에 대한 논의도 뜨거워지고 있다. 브라질은 규제시장에서 탄소 크레딧을 증권(securities)으로, 미국은 상품 기반 파생상품(derivatives)으로 처리한다. 한국은 배출권거래제 내에서 무형자산으로 분류한다. 줄인 감축실적은 수출하느냐 수입하느냐, 어떤 시스템을 운영하느냐에 따라 회계·세무·법적 취급이 제각각인 상황이다.
국제사법통일연구소(UNIDROIT)는 검증된 탄소 크레딧에 대한 통일된 법적 해석 마련을 논의 중이며, 부가세 부과와 보험 설계 등 관련 금융·법제 인프라 논의도 빠르게 확산되고 있다.
탄소자산이 국가 경쟁력이 되는 시대
그렇다면 한국의 탄소 자산은 어디에 있는가. 자산의 관점에서 현재의 우리는 해외 감축실적을 수입하는 국가다. 그러나 NDC 강화로 국내 감축 비용은 매년 상승하고 있고, 유럽의 탄소국경조정제도(CBAM)와 같은 탄소 가격 메커니즘이 확산되면서 머지않아 국외 감축분을 수입하기보다 수출하는 편이 유리해지는 시점이 올 것으로 예상된다. 이러한 관점에서 산림 복원, 그린 수소 개발, 친환경 선박, 재생에너지 송전망 확대처럼 10-20년 이상의 장기 투자가 필요한 사업들이 고품질 크레딧의 핵심 자산이 될 수 있다. 그러나 비용 절감 효과가 큰 국외 감축이냐 장기적인 국내 탈탄소화에 투자해야 할지는 치열히 고민해봐야 하는 딜레마다.
결국, 자발적 탄소시장의 침체는 시장의 쇠퇴가 아니라 ‘옥석 가리기’의 시작이다. 어떤 감축 포트폴리오를 국내에 장기투자하고, 어떤 크레딧을 국제시장에 수출할 수 있는지, 그 선택이 곧 국가 기후 경쟁력을 결정하는 시대가 오고 있다.
☞박소현 매니저는
박소현 매니저는 클라이밋 아크(Climate Arc)의 아시아 파트너십 매니저로, 전환금융과 자발적 탄소시장(VCM), 국제 탄소 기준 및 거버넌스 분야를 중심으로 활동하고 있다. 영국 유니버시티칼리지런던(UCL)에서 환경정치학 석사 학위를 취득했으며, VCMI(Markets and Standards) 선임연구원으로 근무하며 기업 기후 클레임과 탄소시장 무결성 기준 개발에 참여했다. ICVCM 파리협정 제6조 상응조정 전문가 그룹과 Climate Action Data Trust 상응조정 태스크포스 및 유저 포럼 전문가로 활동하며 국제 탄소시장 제도 설계와 데이터 거버넌스 논의에 관여했다. 에코아이 해외감축사업팀 연구원을 거쳐 탄소시장, 국제감축사업, 기업 거버넌스 관련 다수의 국제 보고서와 가이드라인 집필에 공동 참여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