검색   로그인   회원가입   초대장  
페이지투미   페이지투미 플러스
페이지투미 홈   서비스 소개   아카이브   이야기   이용 안내
페이지투미는 사회혁신 분야의 새로운 정보를 모아 일주일에 3번, 메일로 발송해드립니다.

link 세부 정보

정보 바로가기 : 테니슨, 제국을 노래하며 근대를 고민한 계관 시인

테니슨, 제국을 노래하며 근대를 고민한 계관 시인
[카테고리 설정이 아직되어 있지 않습니다.]
영국 문학사에서 알프레드 테니슨(Alfred Tennyson, 1809~1892)만큼 시대의 아이콘 이면서도 동시에 시대의 딜레마 를 체현한 인물도 드물다. 그는 빅토리아 여왕(Queen Victoria, 1819~1901) 시대 영국의 공식 계관시인으로서 83년의 생애 동안 제국의 영광과 근대의 불안을 동시에 노래한 모순적 존재였다.   알프레드 테니슨. (위키피디아) 시골 목사 집안에서 나온 국가대표 시인 링컨셔 주의 한적한 시골에서 태어난 테니슨은 열두 명의 형제자매 중 하나였다. 아버지는 목사였지만 정신적으로 불안정했고, 어머니는 살림살이에 쪼들렸다. 요즘 말하는 금수저 와는 거리가 먼 환경이었다. 이런 시골청년이 케임브리지 대학교에서 시재를 인정받으며 문단에 데뷔하고, 결국 영국 문학계의 정점에 오르게 된다. 1850년 세상을 떠난 워즈워스(William Wordsworth, 1770~1850)의 뒤를 이어, 테니슨은 계관시인에 임명되었다. 이때부터 그는 사실상 영국 정부공인 시인 이 됐다. 국가행사가 있을 때마다 찬양시를 써고, 제국의 위업을 노래해야 했다. 일종의 문화계 공무원 이었던 셈이다.   테니슨이 자라나 글을 쓰기 시작한 소머스비 목사관을 보여주는 윌리엄 에드워드 프랭크 브리튼의 삽화. (위키피디아) 크림전쟁과 가벼운 기병대의 돌격 테니슨의 가장 유명한 작품 중 하나가 (The Charge of the Light Brigade, 1854)이다. 크림전쟁(1853~1856) 중 발라클라바 전투에서 잘못된 명령으로 인해 영국 경기병대가 전멸에 가까운 피해를 입은 사건을 다룬 작품이다. 반 리그, 반 리그, 반 리그 앞으로 로 시작하는 이 시는 절망적인 상황에서도 명령에 따라 돌격하는 병사들의 용기를 찬양한다. 문제는 이 용기 가 사실은 군부의 무능한 작전 때문에 빚어진 참극이었다는 점이다. 테니슨은 정부시인으로서 이를 영웅적 희생 으로 포장해야 했다. 현대 관점에서 보면 테니슨은 일종의 전쟁 홍보담당관 역할을 한 셈이다. 정부의 실책을 영웅담으로 바꿔치기하는 문학적 세탁 작업이었다.   케임브리지 트리니티 칼리지 예배당에 있는 테니슨 경의 동상. (위키피디아) 인 메모리암 과 빅토리아 시대의 불안 하지만 테니슨의 진면목은 사적인 작품에서 드러난다. 그의 대표작 (In Memoriam A.H.H., 1850)은 친구 아서 할람(Arthur Henry Hallam, 1811~1833)의 갑작스러운 죽음을 애도하며 17년에 걸쳐 쓴 장편 서정시다. 이 작품에서 테니슨은 과학의 발달로 인해 흔들리는 종교적 믿음, 진화론이 제기하는 인간 존재에 대한 의문, 산업화로 인한 사회변화 등 당대의 모든 불안을 솔직하게 드러냈다. 다윈(Charles Darwin, 1809~1882)의 진화론보다 9년이나 앞서 자연은 붉은 이빨과 발톱을 가졌다 며 생존경쟁의 잔혹성을 노래했다. 공적으로는 제국의 영광을 찬양하면서도, 사적으로는 근대문명에 대한 깊은 회의를 품고 있었다. 일종의 이중생활 이었다고 할 수 있다.   테니슨과 그의 아내 에밀리(1813~1896)와 그의 아들 핼럼(1852~1928)과 라이오넬(1854~1886). (위키피디아) 여성 문제와 테니슨의 (The Lady of Shalott, 1832)은 겉으로는 아서 왕 전설을 소재로 한 낭만적인 이야기지만, 깊이 들여다보면 빅토리아 시대 여성의 억압된 현실을 은유적으로 다룬 작품이다. 탑에 갇혀 거울로만 세상을 보며 베틀질을 하던 여인이 직접 세상을 보려다 저주에 걸려 죽는다는 내용은 당시 여성들이 처한 상황을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집 안에 갇혀 간접적으로만 세상을 경험해야 했던 여성들, 그리고 그 틀을 벗어나려 할 때 사회적 죽음을 맞게 되는 현실 말이다. 하지만 테니슨 자신은 여성참정권이나 여성해방운동에 적극적으로 나서지는 않았다. 역시나 진보적 문제의식 과 보수적 행동 이라는 이중성을 보여줬다고 평가할 수 있다.   존 윌리엄 워터하우스의 그림, 샬롯의 여인, 1888. (위키피디아) 기술문명에 대한 양가감정 산업혁명이 한창이던 빅토리아 시대에 테니슨은 기술발전에 대해 복잡한 감정을 드러냈다. (Locksley Hall, 1842)에서는 큰 상선들이 마법의 돛을 달고 미래의 하늘을 날아다닐 것이라며 기술문명을 찬양했다. 동시에 기계문명이 인간성을 파괴한다는 우려도 표현했다. 공장 굴뚝에서 나오는 검은 연기, 시골의 목가적 풍경을 파괴하는 철도, 전통적 공동체를 해체하는 도시화 등에 대해 깊은 우려를 표했다. 이는 오늘날 인공지능과 디지털 문명에 대한 우리의 양가감정과 크게 다르지 않다. 테니슨은 150년 전에 이미 기술발전의 딜레마 를 예견했다 할 수 있다.   Break, Break, Break, Break, on thy cold gray Stones, o Sea, 미국 사진작가 루돌프 아이케마이어 주니어(1862–1932)의 사진. 제목은 알프레드 테니슨 경의 1842년 시 Break, Break, Break 에서 따온 것. (위키피디아) 계급사회의 옹호자이자 비판자 테니슨은 기본적으로 영국의 전통적 계급제도를 옹호했다. 귀족과 평민의 구분을 자연스러운 것으로 받아들였고, 급진적 사회변화에는 반대했다. 1848년 유럽 전역을 휩쓴 혁명의 물결을 보며 질서와 안정 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하지만 동시에 가난한 사람들의 삶에 대한 연민도 보여줬다. (Enoch Arden, 1864)에서는 가난한 어부의 삶을 동정적으로 그렸고, 같은 작품에서는 산업화로 고통 받는 서민들의 모습을 사실적으로 묘사했다. 결국 테니슨은 온정주의적 보수주의자 였다. 기존 체제는 유지하되, 그 안에서 약자들에게 베풀어야 한다는 입장이었다. 오늘날로 치면 시혜적 복지 를 주장하는 온건 보수 정치인 같은 느낌이랄까.   패링포드, 테니슨의 와이트 섬 거주지. (위키피디아) 대중 스타가 된 시인 테니슨은 아마도 인류역사상 가장 많은 돈을 번 시인으로 꼽힌다. 그의 시집은 베스트셀러였고, 시 낭송회는 매번 매진이었다. 빅토리아 시대 중산층 가정의 응접실에는 성경과 함께 테니슨 시집이 놓여 있었다. 그는 또한 초기 사진술의 대상이 되기도 했다. 율리아 마거릿 카메론(Julia Margaret Cameron, 1815~1879)이 찍은 테니슨의 초상사진들은 예술가의 초상 이라는 새로운 장르를 만들어냈다. 긴 머리와 수염, 깊이 있는 눈빛의 테니슨은 말 그대로 시인다운 시인 의 전형을 만들었다. 현대적 관점에서 보면 테니슨은 문학계 최초의 유명 인사 였다. 시인으로서는 드물게 대중적 인기와 비평가들의 인정을 동시에 얻었다.   조지 프레데릭 왓츠(1817~1904)가 그린 알프레드 테니슨, 초대 테니슨 남작. (위키피디아) 제국주의의 나팔수인가, 근대성의 증언자인가 테니슨에 대한 평가는 복잡하다. 20세기 모더니스트들은 그를 시대에 뒤떨어진 빅토리아 시대의 유물 이라며 폄하했다. T.S. 엘리엇(Thomas Stearns Eliot, 1888~1965) 같은 이들은 테니슨의 시를 감상적이고 진부하다 고 비판했다. 하지만 최근의 연구들은 테니슨을 다시 평가하고 있다. 그가 빅토리아시대의 찬양자인 동시에 예리한 비판자였다는 점, 근대문명의 모순과 불안을 누구보다 예민하게 포착했다는 점이 새롭게 주목받고 있다. 특히 그의 여성 인물들, 샬롯의 여인이나 의 주인공 같은 캐릭터들은 당시로서는 상당히 진보적인 여성상을 보여준다. 사회적 관습에 도전하고, 자신의 욕망에 솔직하며, 운명에 맞서는 여성들이다.   계관 시인 이라는 제목의 테니슨 캐리커처, 1871년 7월 22일자 허영의 시장(Vanity Fair)에 실린 글. (위키피디아) 오늘날의 테니슨 150여 년이 지난 지금, 테니슨의 시는 여전히 유효한 메시지를 던진다. 기술발전과 인간성의 갈등, 전통과 변화 사이의 긴장, 개인의 자유와 사회적 책임의 딜레마 등은 오늘날에도 여전한 문제들이다. 테니슨이 에서 던진 질문, 강한 자가 약한 자를 짓밟는 것이 자연의 법칙이라면, 사랑과 도덕은 무엇인가? 는 여전히 우리를 괴롭히는 근본적 물음이다. 어쩌면 테니슨의 진정한 유산은 확실한 답을 제시하지 않았다는 데 있을지도 모른다. 그는 빅토리아시대의 모든 모순과 불안을 온몸으로 받아들이며, 그것을 아름다운 시어로 승화시켰다. 시대의 대변인이면서 동시에 시대의 양심이었던 것이다. 결국 테니슨은 완벽한 진보주의자 도 완고한 보수주의자 도 아니었다. 그는 그저 자신이 살던 시대의 복잡성을 정직하게 증언한 한 명의 시인이었을 뿐이다. 그리고 그 정직함이야말로, 오늘날에도 우리가 테니슨을 읽어야 하는 이유가 아닐까.   알프레드 테니슨, P. 크레이머의 초상화. (위키피디아)


최근 3주간 링크를 확인한 사용자 수

검색 키워드


주소 : (12096) 경기도 남양주시 순화궁로 418 현대그리너리캠퍼스 B-02-19호
전화: +82-70-8692-0392
Email: help@treeple.net

© 2016~2025. TreepleN Co.,Ltd. All Right Reserved. / System Updated

회사소개 / 서비스소개 / 문의하기 / 이용약관 / 개인정보취급방침
To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