검색   로그인   회원가입   초대장  
페이지투미   페이지투미 플러스
페이지투미 홈   서비스 소개   아카이브   이야기   이용 안내
페이지투미는 사회혁신 분야의 새로운 정보를 모아 일주일에 3번, 메일로 발송해드립니다.

link 세부 정보

정보 바로가기 : 골반으로 세상을 뒤흔든 사나이 엘비스 프레슬리

골반으로 세상을 뒤흔든 사나이 엘비스 프레슬리
[카테고리 설정이 아직되어 있지 않습니다.]
골반이 혁명이 되던 시절 1935년 1월 8일, 미국 미시시피주 투펠로의 허름한 두 칸짜리 판잣집에서 한 아이가 태어났다. 쌍둥이 형 제시 개런 프레슬리는 태어나자마자 숨을 거뒀고, 홀로 살아남은 엘비스 에런 프레슬리(Elvis Aaron Presley, 1935~1977)는 살아남긴 커녕 그 뒤 42년간 세상을 아예 뒤집어 버렸다. 아버지 버논 프레슬리(1916~1979)는 날품팔이였고, 어머니 글래디스 프레슬리(1912~1958)는 재봉 일을 했다. 집안에 여윳돈이라고는 없었다. 그러나 가난은 엘비스에게서 음악을 앗아가지 못했다. 흑인교회음악, 복음 노래, 리듬앤블루스, 컨트리가 뒤섞인 남부의 공기를 마시며 자란 그는, 1954년 열아홉 나이에 테네시주 멤피스의 소규모 음반사 선 레코드 에 들어가 역사의 방아쇠를 당긴다. 당시 미국 대중음악계는 정갈하게 빗어 넘긴 머리에 양복 차림의 백인가수들이 지배하고 있었다. 흑인음악은 흑인들만의 것으로 격리되어 있었다. 그 시절 인종분리 정책은 버스좌석부터 음반 판매대까지 구석구석 스며들어 있었다. 엘비스는 그 경계를 골반 하나로 허물었다. 정확히는 백인 얼굴에 흑인 소리 라는, 당시 음반제작자 샘 필립스(Sam Phillips, 1923~2003)가 꿈꾸던 바로 그 조합이었다.  결과는 폭발이었다.   1957년 엘비스 프레슬리.(위키피디아) 골반은 왜 그렇게 위험했나 1956년, 엘비스가 당대 최고의 텔레비전 프로그램 에드 설리번 쇼 에 출연했을 때, 방송국은 카메라를 허리 위로만 고정했다. 골반을 흔드는 장면이 공중파를 타면 미국의 도덕이 무너진다는 이유였다. 오늘날의 시각으로 보면 가소롭지만, 당시 어른들에게 그것은 진심이었다. 생각해 보라. 단지 엉덩이를 흔들었을 뿐인데 방송국이 검열을 단행했다. 이것이 말해주는 것은, 엘비스가 그냥 노래를 잘한 게 아니라 몸의 해방을 실연했다는 사실이다. 정해진 자리에 앉아, 정해진 방식으로 즐겨야 했던 대중에게 그는 당신의 몸이 원하는 대로 움직여도 된다 고 말했다. 그것은 단순한 오락이 아니라 사회적 선언이었다. 보수언론은 그를 청소년 비행의 원흉 이라 불렀다. 성직자들은 설교단에서 그의 이름을 저주했다. 그러나 10대들은 레코드판을 사고 또 샀다. 1956년 한 해에만 그의 음반은 1000만 장 넘게 팔렸다. 시장이 도덕보다 솔직했다.   프레슬리의 출생지인 미시시피주 투펠로.(위키피디아) 군대, 할리우드, 그리고 서서히 다가온 함정 1958년, 엘비스는 육군에 입대한다. 당시 미국 정부로서는 이보다 더 좋은 홍보물이 없었다. 저 위험한 골반도 나라를 위해 봉사합니다 라는 메시지. 그는 서독에서 복무하는 동안 14세 소녀 프리실라 보리외(1945~ )를 만나게 된다. 이 만남은 훗날 결혼(1967년)과 이혼(1973년)으로 이어지며 또 다른 스캔들의 재료가 된다. 군 제대 후인 1960년대, 엘비스는 할리우드로 흘러들어간다. 영화를 찍고, 찍고, 또 찍었다. 총 31편. 대부분은 예쁜 여자와 노래와 해변이 나오는 내용이었다. 평론가들은 혹평했지만 표는 팔렸다. 그러나 이 시기는 그의 음악적 날카로움이 흐려지는 시간이기도 했다. 음반사와 기획사의 돈벌이 기계가 되어가면서, 진짜 엘비스는 점점 사라지고 있었다. 1968년, 텔레비전 특집방송으로 극적 귀환이 있었다. 검정 가죽옷을 입고 다시 무대에 선 그는, 잃어버렸던 야성을 되찾은 듯했다. 그러나 이미 시대는 비틀스와 밥 딜런(1941~ )이 판을 바꿔 놓은 뒤였다.   1954년 선 레코드 프레슬리 홍보 사진(위키피디아) 라스베이거스의 왕, 그리고 쓸쓸한 끝 1969년부터 엘비스는 라스베이거스 호텔 무대에 정착한다. 흰색 보석장식 옷을 입고 스카프를 관객에게 던지며 노래했다. 공연은 매진이었다. 그러나 뒤에서는 처방약 남용이 심각해지고 있었다. 체중이 불었고, 무대 위에서 가사를 잊기도 했다. 1977년 8월 16일, 엘비스는 테네시주 멤피스의 자택 그레이스 랜드 에서 마흔둘 나이에 숨진 채 발견되었다. 공식 사인은 심장마비였으나, 부검 결과 다수의 처방약 성분이 검출되었다. 화려했던 왕의 죽음은 너무 초라했다. 그의 어머니 글래디스는 아들보다 19년 먼저 세상을 떠났다. 어머니의 죽음 이후 엘비스의 삶이 급격히 기울었다는 것은, 이 화려한 남자가 얼마나 깊이 어머니에게 기대고 있었는지를 보여준다.   1956년 스코티 무어, 빌 블랙과 함께 공연하는 프레슬리(위키피디아) 역사의 시선, 그는 도둑인가, 혁명가인가 엘비스에 대한 비판 중 가장 날카로운 것은, 그가 흑인음악을 백인의 얼굴 로 포장해 주류에 팔았다는 것이다. 실제로 리틀 리처드(Little Richard, 1932~2020), 척 베리(Chuck Berry, 1926~2017), 패츠 도미노(Fats Domino, 1928~2017) 등 흑인 원조예술가들은 엘비스가 누린 부와 명성의 극히 일부만 가져갔다. 이것은 유머로 덮을 수 없는 구조적 부당함이다. 그러나 동시에, 엘비스가 백인 청중들에게 흑인음악의 문을 연 것도 사실이다. 모순된 존재. 그는 제도의 산물이면서 동시에 제도를 균열 냈다. 착취의 수혜자이면서 동시에 해방의 전령이었다. 역사는 그를 단순히 영웅이나 악당으로 분류하기를 거부한다.   1956년 미니애폴리스에서 사인회를 하는 프레슬리.(위키피디아) 한국에서 엘비스를 읽는다면 자, 이제 바다를 건너보자. 한국에서 엘비스 프레슬리의 이름이 처음 울려 퍼진 것은 1950년대 후반이다. 한국전쟁 이후 주한미군 방송을 통해 그의 음악이 흘러나왔고, 이른바 미8군 무대 에서 한국 음악인들이 그의 노래를 모방하며 연주했다. 한국 대중음악의 씨앗 중 하나가 그렇게 뿌려졌다. 신중현(1938~ ), 한명숙(1942~ ), 패티김(1938 ~ ) 등 한국 초기 대중음악인들이 그 문화적 자장 안에서 자랐다. 그렇다면 오늘날 한국사회에서 엘비스는 어떤 거울이 되는가. 첫째, 몸의 정치학. 엘비스의 골반이 검열 당했듯, 한국에서도 표현의 자유는 늘 위태로웠다. 1970년대 유신정권 시절 장발과 미니스커트가 단속되었고, 노래가사는 검열관의 연필 아래 잘려나갔다. 오늘도 온라인 공간에서 특정 표현이 플랫폼 알고리즘이나 법조항으로 제약되는 현실은, 엘비스 시대와 형태만 달라졌을 뿐 본질은 같다. 무엇이 위험한가 를 정하는 권력은 늘 존재한다. 둘째, 상업화의 덫. 엘비스는 재능 있는 예술가였으나 기획사와 음반 자본의 논리에 포획되면서 서서히 자신을 잃었다. 오늘날 한국의 아이돌 산업을 보라. 10대 청소년들이 혹독한 훈련 체계 안에 들어가 몇 년 동안 연습생 으로 소비되다, 짧은 전성기를 지나 시장에서 사라진다. 엘비스의 할리우드 시절과 구조가 다르지 않다. 자본은 재능을 발굴하는 척하며 소진시킨다. 셋째, 원조와 모방, 그리고 공정성. 흑인음악을 백인 엘비스가 가져갔듯, 한국 문화산업 내에서도 원조예술가와 뒤늦게 상업화에 성공한 주체 사이의 불균형은 반복된다. 인디 음악인의 창작물이 대형기획사의 상품으로 둔갑하거나, 지역 전통문화가 자본의 포장지에 싸여 팔리는 일들. 엘비스 논쟁은 지금 여기에서도 진행 중이다. 넷째, 지도자의 쇠락. 엘비스의 말년은 처방약에 기댄 고립이었다. 주변에는 아첨꾼들이 가득했고, 진실을 말해줄 사람은 없었다. 어디에서 많이 본 풍경 아닌가. 권력의 정점에 오른 정치인이든 재벌총수든, 절대권력 주변에서는 직언이 사라진다. 한국 현대사에서 이 패턴은 지겨울 만큼 반복되었다. 왕은 골반이 아니라 고립으로 쓰러졌다.   1956년 9월 26일, 미시시피-앨라배마주 투펠로의 박람회장에서 라이브 공연을 펼치는 엘비스 프레슬리.(위키피디아) 왕은 떠났지만 골반은 남았다 엘비스는 1977년에 죽었다. 그러나 그레이스 랜드에는 지금도 매년 60만 명 이상이 찾아온다. 세상 어딘가에서는 지금 이 순간에도 누군가가 그의 흉내를 내며 무대에 서고 있다. 죽은 왕이 이렇게 많은 몸을 통해 살아 움직이는 것은, 그가 단순한 연예인이 아니라 시대의 상징이었기 때문이다. 상징은 죽지 않는다. 다만 변형될 뿐이다. 가난한 집 아이가 골반 하나로 세상을 흔들었다. 체제는 그를 검열했고, 자본은 그를 소진시켰고, 고립은 그를 삼켰다. 그럼에도 그 음악은 남아, 오늘 우리가 듣는 모든 대중음악의 혈관 속을 흐른다. 당신에게 묻는다. 지금 당신의 골반은 어디를 향하고 있는가. 권력이 보라는 방향인가, 아니면 당신 자신이 원하는 방향인가. 엘비스라면 분명 이렇게 답했을 것이다. Thank you, thank you very much. 그리고 골반을 흔들었을 것이다.   엘비스 프레슬리와 그의 아내 프리실라 프레슬리가 1968년 갓 태어난 딸 리사 마리 프레슬리를 안고 있는 모습.(위키피디아)


최근 3주간 링크를 확인한 사용자 수

검색 키워드


주소 : (12096) 경기도 남양주시 순화궁로 418 현대그리너리캠퍼스 B-02-19호
전화: +82-70-8692-0392
Email: help@treeple.net

© 2016~2026. TreepleN Co.,Ltd. All Right Reserved. / System Updated

회사소개 / 서비스소개 / 문의하기 / 이용약관 / 개인정보취급방침
To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