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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보 바로가기 : 키 137㎝ 척추장애 노인의 피 튀기는 노예제 항거

키 137㎝ 척추장애 노인의 피 튀기는 노예제 항거
[사람들]
키가 137센티미터밖에 되지 않는 척추장애 노인이 커다란 외투를 걸치고 미국 뉴저지 주 벌링턴의 퀘이커 모임집에 들어선다. 1738년 9월 19일의 일이다. 외투 안에는 군인 복장이 감춰져 있고, 손에는 두툼한 책 한 권이 들려 있다. 그 책 속에는 동물의 방광이 숨겨져 있고, 방광 안에는 선명한 붉은색 돼지 피가 가득 채워져 있다. 모임이 시작되고, 퀘이커 관습대로 마음에 울림이 있는 사람이 일어나 발언한다. 노인이 벌떡 일어선다. 천둥 같은 목소리로 외친다. 그 몸집에서 어떻게 저런 목소리가 나오는지 모두가 놀란다. 노예를 부리는 자들이여, 그대들은 세상에서 가장 큰 죄를 짓고 있소! 외투를 벗어 던져 군복을 드러낸다. 총기를 극도로 혐오하는 퀘이커들 앞에서. 칼을 뽑아 들고 책을 높이 치켜 올린다. 그리고 칼을 책에 꽂는다. 붉은 돼지 피가 사방으로 튄다. 노예를 소유한 부유한 퀘이커 신사들의 새하얀 셔츠에, 정갈한 모자에, 놀란 얼굴에. 하나님께서 저 노예들의 피를 이렇게 쏟게 하신 것처럼, 그들을 노예로 삼는 자들에게도 피를 쏟게 하실 것이오! 퀘이커 모임은 금방 아수라장이 된다. 장정 여럿이 달려들어 노인을 번쩍 들어 문 밖으로 내던진다. 그러나 노인의 얼굴에는 오히려 미소가 번진다. 할 말은 다 했으니.   윌리엄 윌리엄스가 1750년에 그린 벤자민 레이의 초상화(위키피디아) 작은 몸, 큰 분노 벤자민 레이(Benjamin Lay, 1682~1759)는 1682년 영국 에식스(Essex) 주 코퍼드(Copford)에서 퀘이커 가정의 아들로 태어났다. 선천적으로 척추가 굽고 가슴이 앞으로 튀어나왔으며, 팔 길이도 좌우가 달랐다. 키는 137센티미터가 채 되지 않았다. 세상은 이 작은 몸을 보고 비웃었지만, 그 작은 몸 안에는 거대한 양심이 살아 있었다. 어린 시절 장갑 제조 공방에서 견습공으로 일하다가 뛰쳐나와 형의 농장에서 일했고, 스물한 살 무렵부터 7년간 선원 생활을 했다. 세계 각지의 항구를 돌며 인간의 탐욕과 억압을 두 눈으로 목격했다. 1718년 귀국 후, 역시 같은 장애를 갖고 있던 세라 스미스(Sarah Smith, ?~1735)와 결혼했다. 둘은 기묘하게도 몸의 모양뿐 아니라 신념도 닮아 있었다. 부부는 런던에 잠시 정착했다가, 1718년 바베이도스(Barbados)로 건너갔다. 이것이 벤자민의 인생을 결정적으로 바꾼 전환점이었다. 섬에서 그가 본 것은 노예제의 민낯이었다. 아프리카에서 끌려온 사람들이 채찍 아래 죽어가는 광경을, 그것도 기독교인이라 자처하는 퀘이커 상인들이 저지르는 것을 보며 벤자민은 분노로 몸을 떨었다. 퀘이커 모임에 나가 외쳤다가 쫓겨났다.    벤자민 레이의 노예제도 비판 글, 1737년.(위키피디아) 동지가 된 벤자민 프랭클린 1731년 미국 필라델피아 근교 애빙턴(Abington)에 정착한 벤자민 레이는, 당시 필라델피아의 부유한 퀘이커들이 노예를 소유하고 있다는 사실에 다시 한 번 경악한다. 당시 필라델피아 주민 11명 중 1명이 노예였다. 그것도 하나님 앞에 모든 사람은 평등하다 를 외치는 퀘이커들이 노예를 부리고 있었다. 그는 세상 사람들이 부끄러워하지 않으면 자신이라도 부끄러움을 만들어내기로 했다. 겨울 집회 날, 외투도 없이 한쪽 발만 눈 속에 드러낸 채 퀘이커 모임집 문 앞에 서 있었다. 걱정하며 다가오는 사람들에게 말했다. 당신들이 부리는 노예들은 신발도 없이 이렇게 일한답니다. 한 번은 노예소유자의 어린 자녀를 잠시 데려간 뒤 돌려보내며 말했다. 아프리카 부모들이 자기 아이를 빼앗겼을 때 어떤 심정이었겠소? 이 기이하고 거침없는 노인에게 친구가 생겼다. 바로 벤자민 프랭클린(Benjamin Franklin, 1706~1790)이었다. 신문 발행인이기도 했던 프랭클린은 1737년, 레이의 글을 책으로 펴냈다. 제목은 거침없었다. 『무고한 사람들을 속박 속에 가두는 모든 노예소유자들은 배교자다』. 당연히 교단의 사전 승인을 받지 않은 채였고. 퀘이커교단은 격분했다. 그리고 이듬해 돼지 피 사건 이 터진다.   벤저민 프랭클린의 초상화 (1785년경, 위키피디아) 추방당한 예언자의 쓸쓸한 자족 퀘이커교단은 레이를 공식 제명했다. 그러나 퀘이커 모임은 누구에게나 열려 있었다. 그래서 그는 제명된 뒤에도 계속 퀘이커 모임에 나타나 발언했다. 1742년에는 필라델피아 장터에 앉아 죽은 아내 세라의 찻잔 세트를 하나씩 꺼내 부숴버렸다. 차(茶) 무역이 식민지 착취와 노예노동으로 이어진다는 항의였다. 아내 세라가 세상을 떠난 것은 1735년이었다. 레이는 홀로 동굴 근처에 지은 작은 집에서 살았다. 채식주의자였고, 가죽으로 만든 것은 아무것도 쓰지 않았으며(가죽은 동물 학대!), 차와 커피도 마시지 않았으며, 옷도 직접 지어 입었다. 스스로 농사를 짓고, 책을 읽었다. 그의 문을 두드린 벤자민 프랭클린 역시 직접 노예를 부린 전력이 있었는데, 레이는 그때마다 무슨 권리로? 라고 물었다 한다. 레이는 1759년 2월 8일, 77세의 나이로 눈을 감았다. 임종 직전, 그가 그토록 싸워왔던 퀘이커 필라델피아 연회(Philadelphia Yearly Meeting)가 노예제에 반대하는 공식 결의를 채택했다는 소식을 들었다. 그는 미소를 지었다고 전해진다. 무려 30년의 싸움이었다. 그는 묘비도 없이 묻혔다. 묘지 기록에는 이름 옆에 아무 직함도 없었다. 장로도, 목사도, 회원도 아닌 이방인 으로. 그러나 시인 존 그린리프 휘티어(John Greenleaf Whittier, 1807~1892)는 훗날 그를 이렇게 불렀다. 노예제를 품은 퀘이커교의 이스라엘을 뒤흔든, 억누를 수 없는 예언자. 2018년, 레이를 제명했던 퀘이커 월회(Monthly Meeting)는 공식으로 그 제명이 잘못이었음을 인정하고 복권했다. 죽은 지 259년 만이었다.   존 그린리프 휘티어, 1885년(위키피디아) 영국에서 본 한국, 작은 예언자들의 나라 오늘의 한국을, 레이가 살아서 본다면 어떤 표정을 지을까. 계엄을 선포했다가 탄핵된 대통령, 그 계엄에 눈 하나 깜짝 않고 침묵한 고위 법관들, 반헌법행위자열전 에 이름을 올릴 만한 수많은 판사와 검사와 장성들. 이들 중 상당수가 스스로를 법치주의의 수호자 라 불렀다는 점에서, 18세기 퀘이커 노예소유자들과 기묘하게 닮아 있다. 우리는 하나님 앞에 평등을 믿습니다 라고 외치면서 노예를 부리던 그들처럼. 레이의 삶에서 배울 점은 여럿이다. 첫째, 불편함을 만드는 용기다. 레이는 설득이 통하지 않을 때 몸으로 불편함을 만들었다. 말이 안 통하면 행동으로, 행동이 외면 받으면 돼지피를 던지는 퍼포먼스로. 한국의 시민운동이 광장 집회 이후 무기력해질 때마다, 레이의 방식이 새삼 떠오른다. 둘째, 제도 밖으로 쫓겨나도 멈추지 않는 것이다. 레이는 제명된 뒤에도 모임에 나타났다. 진보정당이 분열하고 선거에서 패배해도, 여기서 멈추면 우리가 진 게 아니냐 고 말하는 사람이 레이 같은 사람이다. 셋째, 생활 자체를 저항으로 만드는 것이다. 채식, 자급, 가죽 거부. 레이는 강연만 한 게 아니라 살아내는 방식으로 항의했다. 오늘날의 불매운동, 탈(脫)플랫폼 운동, 소비 거부 운동이 그 맥락 위에 있다. 넷째, 그리고 가장 중요한 것, 혼자여도 옳은 쪽에 서는 것이다. 레이는 30년간 거의 혼자였다. 동조자도 없었고, 환호도 없었으며, 추방과 조롱만 있었다. 그러나 그가 죽기 직전, 세상이 바뀌었다. 한국에도 레이들이 있다. 아직 아무도 듣지 않는 말을 하는 사람들, 모임에서 쫓겨나도 다시 나타나는 사람들, 작은 몸으로 칼을 들어 책에 꽂는 사람들. 지금 당장 피가 튀겨 놀란 사람들이 훗날 그 피의 의미를 깨달을 수도 있다. 벤자민 레이의 키는 매우 작았다. 그러나 그의 그림자는 세기를 넘어 뻗었다. 우리는 얼마나 큰 그림자를 드리우고 있는가.   벤자민 레이를 기리는 역사 표지판이 펜실베이니아 역사박물관 위원회에 의해 애빙턴 퀘이커 모임집 근처에 설치되었다.(위키피디아)  김성수 시민기자 wadans@empa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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