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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션토피아]㉛ 어제의 범죄를 벌하지 않으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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갯바위. [컴백홈] 해역의 개체 수는 좀처럼 늘어나지 않았다. 물살이들은 본능적으로 개체 수를 조절해야 하는 시기임을 알고 있었다. 치어들도 자신의 앞날이 어두운 것을 아는지 대부분 태어나자마자 죽거나 부화과정에서 도태되었다. 이는 지구온난화나 수온의 상승 때문만은 아닐 것이었다. 이런 때일수록 대왕개복치는 산란과 체외수정 조사를 엄격히 했다. 그러던 중 저쪽 해역에서 사찰단이 방문을 해왔다. 명목은 친선이었지만 물살이 수는 얼마나 되는지, 묻혀있는 자원은 얼마나 있는지 조사해 가는 게 목적이었다. 사찰단의 방문 횟수가 늘어날수록 대왕개복치는 개체 수 조사를 게을리 했다. 그러더니 언젠가부터 [오션일보]에 ‘연합’이란 단어가 빈번하게 등장했다. 저쪽 해역과의 만찬 식사 사진도 자주 올라왔다. 장수거북은 매체의 기능을 오래 전에 상실한 [장수일보] 앞에 섰다. 비겁한 물살이 하나가 패드 액정에 비쳤다. 오래 전 그는 공개수배자에서 풀려나는 대신 [장수일보]를 폐간하기로 대왕개복치와 합의를 봤었다. 하지만 한시도 백전불태를 잊은 적은 없었다. 어찌되었든 위태롭지만 않으면 언제든 일어설 수 있다고 믿었다. 그러나 언제까지나 위태롭지 않기만을 바란 것은 아닌지. 그렇게 자신의 안위를 염려하는 사이 이 해역은 이웃 해역에 넘어가기 일보 직전의 상황까지 가고 말았다. 이럴 때 은빛연어님이 있었더라면...” 장수거북은 한숨을 쉬었다. 은빛연어는 땅 속으로 꺼진 건지 바다 위로 나른 것인지 어느 날 자취를 감추어버렸다. 만약 강으로 무사히 거슬러간 거라면 자신에게 한 마디 인사도 하지 않고 떠났을 리 없었다. 피치 못할 사정이 있었겠지요.” 폼폼크랩은 장수거북의 마음속을 훤히 들여다보고 있었다. 무사히 잘 건너갔겠죠?” 은빛연어님의 저력을 알잖아요.” ...” 전 장수거북님의 현재 행보를 ‘전진 위한 후퇴’라고 보고 있어요.” 장수거북은 속으로 고개를 저었다. 자신을 누르는 무력함에서 도저히 벗어날 길이 없었다. 참, 예전에 못 다한 비톨드 필레츠키 얘기, 마저 해주시죠.” 잊고 있었던 그 이름이 폼폼크랩에 의해 불리어지자 장수거북은 꼬리 끝에서 약간의 기운이 차오르는 것을 느꼈다. 은빛연어님도 불가살이님도 종적을 감춘 마당에 이야길 하려니 만감이 교차하는군요. 하지만 제 곁에 남아 있는 폼폼크랩님이 듣고 싶어 하니 마저 하겠습니다. 비톨드 필레츠키는 아우슈비츠 수용소에 잠입해 히틀러의 만행을 온 천하에 알립니다. 거기에 그치지 않고 독일의 적국 수장인 스탈린의 만행도 퍼뜨리지요. 결국 양쪽 모두에게 미움을 받은 그는 전쟁이 끝난 뒤 버림받아요. 아무데서도 환영해주지 않았죠. 그는... 같은 편이라고 믿었던 극렬한 공산주의자들에 의해 최후를 맞이했어요. 히틀러에게도, 스탈린에게도 살아남았던 사람이 같은 편에게 그렇게 죽임을 당했다는 게 믿어져요? 하지만 세월이 흐르자 그의 ‘가치’가 빛을 발하기 시작했어요. 히틀러 때문에 스탈린의 과오가 작게 보이는 착시효과가 한동안 만연해 있어서 그를 재평가하는 데 시간이 걸렸던 거예요. 당대에는 절대 보이지 않던 ‘가치’가 수면 위로 떠오른 거죠.” 다행이네요. 지하에서 조금이나마 원통함이 가셨겠어요.” 이상한 일이었다. 비롤트 필레츠키의 최후를 얘기했을 뿐인데 장수거북은 자신의 안에서 뜨거운 게 용솟는 것을 느꼈다. 대왕개복치가 일당독재를 하게 된 건 암암리에 저지르던 나쁜 짓이 수습 불가의 지경에까지 이르렀기 때문이라고 봐요. 향후 차기 지도자에게 처벌당할 것을 우려해 다른 당 후보들을 모두 죽였죠. 벌하기 위해 죄를 꾸며냈어요. 어용 일보와 초록 구슬만 있으면 조작하고 선동하는 건 일도 아니에요. 제일 무서운 게 뭔지 알아요? 언제 이 해역이 넘어갈지 모르는데도 아무도 나서는 물살이가 없단 거예요...” 듣고 있던 폼폼크랩이 주저하듯 입을 뗐다. 다른 얘기긴 한데... 은빛연어님이 강으로 무사히 회귀하셨는지 알 수 있는 방법이 있어요.” 장수거북의 눈빛이 바로 바뀌었다. 방법이 뭐죠?” 머잖아 은빛연어님의 치어들을 이 해역에서 보게 된다면... 무사히 갔단 증거 아니겠어요.” 아, 그렇군요. 그럼 우린 대왕개복치의 해코지로부터 치어들을 보호해야겠군요!” 왕년의 장수거북님으로 돌아오신 것 같은데요.” 덕분에요.” 갑자기 장수거북이 머쓱한 표정을 지었다. 그런데 이 타이밍에 이런 말하기 좀 그렇지만 심기일전한 탓인지 허기가 지네요.” 하하. 저도 시장하던 참이에요.” 간만에 갯바위에 올라가서 갯지렁이 통이라도 털어올까요?” 인간한테 들키기 이전에 대왕개복치한테 걸릴 걸요. 수면 위로 나가면 간첩으로 간주할 거라고 공표했잖아요. 더군다나 오늘 저쪽 해역 사절단 방문 예정이라 서식처 밖으로 출입금지고요.” 지금쯤 난파궁에서 열린 만찬 파티 때문에 다들 곤드레만드레일 걸요. 이런 날이야말로 절호의 찬스에요.” 배고픔에 의견의 일치를 본 두 물살이는 서식처를 조용히 빠져 나갔다. 정말이지 해역은 환경 정화라는 명목하에 물이끼 하나 구경할 수 없을 정도로 텅 비어 있었다. 인간의 낚싯대들이 드리워진 갯바위로 살살 헤엄쳐가던 중 거센 물보라가 일어나나 싶더니 수면 아래로 무언가가 풍덩 빠졌다. 두 물살이는 질겁하며 도망쳤다. 정신을 차리고 다시 보니 그것의 정체는 휴대전화였다. 쓸 만한 것인지 보기 위해 가까이 다가간 그때 열한 자리 번호가 뜨면서 전화기의 몸체가 부르르 떨렸다. 걸려오는 전화는 처음이었기에 이들은 어찌할 바를 몰랐다. 어쩌면 대왕개복치가 파놓은 함정일지도 몰랐다. 폼폼크랩은 고민 끝에 집게발을 내밀어 통화버튼을 터치했다. -형. 나 명진이야. 별 일 없지? 여친이랑은 잘 지내구? 인간 수컷의 목소리가 물살이들의 귓전을 선명하게 때렸다. -나 이번 휴가 못 나올 뻔 했잖아. 헬리콥터 타라길래 북한 지휘부 제거하러 가는 줄 알고 얼마나 쫄았는지 알아? 그런데 평양이 아닌 여의도에 내릴 줄 누가 알았겠어? 그래서 이렇게 살아 있는 건지도 모르겠지만... 여보세요? 명민이 형, 듣고 있어? 왜 이렇게 웅웅거려? 여튼 집에서 봐. 우럭 회 대 짜에 소주 콜? 통화는 저절로 종료되었다. 마지막 문장에서 확 깨네요.” 저도요. 역시 뭍의 것들이란.” 그때 두 물살이 뒤로 기다란 낚싯대 하나가 슬슬 다가왔다. 자유자재로 구부러지고 휘어지며 접근해오는 그것을 발견한 장수거북은 눈 깜짝할 사이에 등을 까집곤 목과 팔, 다리를 쑤셔 넣었다. 고물 플라스틱 의자가 영락없이 내동댕이쳐진 모양새가 되자 폼폼크랩은 그 밑으로 기어 들어갔다. 낚싯대는 이리 저리 움직이며 몸체를 불리기 시작했다. 색깔 또한 무채색에서 붉은색으로 바뀌는가 싶더니 이내 본연의 모습으로 돌아왔다. 대왕문어님-!” 그 한마디는 억겁 같은 세월을 단박에 돌려놓았다. 대왕문어는 마치 어제 해역을 나갔다 온 물살이처럼 침착하게 주위를 둘러보았다. 그가 등껍질에 새겨진 ‘지피지기 백전불태’를 어루만지자 장수거북은 꾹꾹 눌러왔던 설움이 폭발했다.   귀환. 그간의 안부를 전하자면 밤을 샐 것 같으니 잠시 미루겠다. 그런데 물결에서 불안한 기운이 감지되는구나.” 개복치 놈이 대왕에 오르고 부터 해역이 엉망진창이 되어 버렸습니다. 흑흑.” 과거 우리와 원수였던 저쪽 해역 놈들에게 이 해역을 넙죽 바치려고까지 해요. 대왕문어님이 막아주셔야 합니다!” [장수일보]는 그 날로 운영을 재개했다. 1면에 실린 대왕문어님의 귀환 소식은 빠르게 퍼져나갔다. 이제껏 숨죽이고 있던 물살이들이 불합리와 부정부패를 바로 잡기 위해 [장수일보] 앞으로 속속들이 모여들었다. 대왕문어는 그간 있었던 일들을 장수거북으로부터 세세히 보고받았다. 그는 해역에 돌아온 지 하루도 안 되어 감을 잡았는데 인간계에서 겪었던 풍비풍파가 큰 몫을 했다. 떠날 때 빈 지느러미로 오기 뭣해서 말이다.” 대왕문어는 다리 사이에 숨겨놓은 물건을 장수거북 앞에서 슬그머니 꺼내보였다. 인간계에서 벌어진 가장 큰 전쟁이 이것의 억제력 때문에 종결되었다더구나.” 둥근 솔방울 같기도, 평범한 인간쓰레기 같기도 한 폭탄의 위력이 상상초월이란 걸 들은 장수거북은 그것을 경계하면서도 자세히 살펴보았다. [장수일보]를 접한 난파궁 안의 부역자들은 대응에 나서려 했지만 이미 늦은 뒤였다. 그들이 가짜뉴스라고 주장하기도 전에 장수거북이 대왕문어의 음성이 담긴 경고 영상을 보낸 것이었다. -이 해역을 팔아넘기려 한 매국 수괴와 그 부역자 놈들과 저 해역의 도둑놈들에게 고하노라. 현재 난파궁 입구엔 인간계 폭탄이 설치되어 있다. 열고 탈출하는 즉시 난파궁은 초토화되어 네 놈들은 뼛가루로 변할 것이다. 만약 그대로 있으면 굶어 죽게 될 것이다. 어찌하든 비참한 최후만이 남아있는 바, 그 죄의 대가를 톡톡히 치르라. 다시 한 번 고한다. 네놈들은 이 시간부로 포위되었다... 장수거북은 난파궁에 부착된 폭탄 사진과 폭탄의 위력을 적나라하게 실어 보냈다. 난파궁 안에선 지금쯤 ‘리틀 보이’나 ‘팻맨’ 같은 단어들을 검색하고 있을 것이었다. 난파궁은 한동안 잠잠했다. 아마도 어떻게 대처할 것인지 대가리 모아 의논하는 듯했다. 이틀 후 이들은 [오션일보]를 통해 협상하잔 메시지를 보내왔다. 대왕문어는 무시와 차단으로 일괄했다. 그러던 어느 날 이상한 냄새가 흘러나왔다. 물살이들은 이전에 맡아본 시체 썩은 내란 걸 어렵지 않게 간파했다. 그 날 오후 [오션일보]에 긴 호소문이 올라왔다. -이 해역의 본래 대왕이신 대왕문어님의 귀환을 환영합니다. 현명한 대왕문어님께 통촉하오니 제발 폭탄을 제거하시고, 난파궁 안의 살아 있는 물살이들만이라도 불쌍히 여겨 꺼내주십시오. 현재 난파궁 안엔 플라병이 돌아 절반 이상이 숨졌습니다. 먹을 게 없어 플라스틱 찌꺼기를 먹으며 하루하루 연명한 결과 몇 물살이들의 몸이 굳더니 플라스틱화 되었습니다. 우리가 이름 붙인 이 플라병이 전염병인지 아닌지 아직은 모르는 상태입니다. 어찌되었든 플라병으로 인해 죽는 물살이가 더 이상 속출하지 않도록 자비를 베풀어주십시오. 저희를 구해주시면 하해와 같은 은혜에 평생 감사해하며 새롭게 살아갈 것을 약속드립니다. 참고로 저쪽 해역에서 온 물살이들은 모두 죽었습니다. 살아 있는 건 백 마리 정도의 치어들과 리본장어, 그리고 개복치뿐입니다. 참, 얼마 전 리본 장어가 산란을 하였습니다. 아직 알에서 깨어나지도 않은 새끼들이 무슨 죄가 있겠습니까? 더군다나 리본 장어는 과거에 대왕문어님을 잘 따랐던 바, 선처 부탁드립니다. -살아 있는 물살이 일동- 리본장어가 쓴 거 너무 티 나는데?” 부역자 얘기는 들을 필요도 없어.” 그래도 생명은 소중한 거잖아.” 그래서 다시 해역의 물을 흐리자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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