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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민기와 청개구리들, 한국 대중가요의 뿌리 흔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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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관하고 2주일 만인 7월 11일 청개구리 홀에서는 조영남의 입대 전 고별 리사이틀이 열렸다. 두 달 전 김씨스터즈 귀국 공연 때 벌어진 ‘신고산 타령 사건’으로 최고위층의 부아를 건드려 반강제로 입영하게 된 조영남을 위한 환송 무대였다. 이날 공연은 청개구리의 무대가 앞으로 어떻게 전개될 것인지 예고하는 것이었다. 이 자리에서도 조영남은 겁도 없이 바로 그 ‘신고산 타령’을 ‘가시만 빼고’ 다시 불렀다. 김민기는 김지하의 풍자시 ‘오적’을 연상시키는 ‘검은 지프차’를 불렀고, 서유석은 머잖아 금지곡 목록에 오르게 될 ‘세상은 요지경’을 선보였다. 무대는 온통 권력에 대한 풍자로 채워졌다. 조영남이 1971년 5월 김시스터즈 공연에서 신고산타령을 와우아파트타령으로 개사해 부른 뒤 타의에 의해 입영을 하기전 후배 동료들은 청개구리집에서 조영남 리사이틀을 개최하기도 했다.  조영남은 미국 유학에서 돌아올때 연락이 끊긴 김민기를 생각하며  김군에 대한 추억라는 노랫말을 만들었다.  그런데 공항에 내리자 김민기가 마중나와 있었다는 이야기가 전해진다. 김민기왼쪽)와 조영남이 화실로 보이는 사무실에서 담소를 나누고 있다.  사진 출처 : 유튜브 채널 겨울나그네 영상 캡처.  ‘검은 지프차’는 ‘귀하에게’라는 제목으로도 알려진 김민기의 자작곡으로, 권력층의 부정부패를 비판했다. 방의경은 이 노래를 듣고 충격을 받아, 우리 사회에 대한 문제의식을 표현하는 노래를 작곡하기 시작했다고 한다. ‘세상은 요지경’은 군대에서 많이 불리던 잡가를 개사한 노래로, 포복절도할 노랫말로 한국 사회의 현실을 신랄하게 풍자했다. 이런 식이다. 영어 공부 10년에 생각나는 건 노래 가사뿐, 엿새 동안 죄짓고 하루만 기도하면 천당 간다네.” 서유석은 모태신앙으로 4대째 개신교 집안 출신이다. 번안곡이 포크 시장을 지배하던 시절 청개구리 홀에는 ‘왜 우리가 다른 나라, 다른 사람의 이야기나 불러야 하나?’라는 발칙한 문제의식을 지닌 이들의 놀이터였다. 기성의 권위, 가치, 작풍에 맞서고 보는 한국 가요계의 청개구리들이었다. 이들은 그곳에서 나의 노래, 우리의 노래를 짓기 시작했고, 기성 포크 가수들이 여기에 뛰어들면서 새로운 노래의 요람이 되었다. 이곳에서 발화된 ‘새로운 노래 운동’은 곧 메마른 들판에 불길을 지폈다. 일주일에 다섯 차례나 공연이 이어졌고, 그것도 발표회 형식이었으니, 경쟁하지 않아도 청개구리들이 무대에 설 수 있는 기회는 많았다. 저희가 등판할 때가 되면 삼삼오오 명동 일대를 누비며 직접 그린 홍보 포스터를 붙이거나 즉석에서 거리 공연을 하기도 했다. 나름 인정받게 되면 단독 공연도 했다. 이른바 ‘한국 포크’가 태동하던 시절의 풍경이었다. 방송국 음악 프로그램 프로듀서들은 이런 움직임에 주목하지 않을 수 없었다. 1970년대가 되면서 팝 애청자들이 폭발적으로 늘었고, 방송국마다 심야 음악 프로그램이 생겼다. 피디나 진행자들은 청취율을 끌어올리기 위해 안간힘을 썼고, 이를 위해 새로운 음악, 새로운 가수를 발굴하기 위해 동분서주했다. 장안의 피디들은 익숙한 가수들이 출연하는 오비스 캐빈, 금수강산 등 내로라하는 ‘제도권’ 음악다방에서 ‘재야’의 소박하지만, 발칙한 청개구리들의 놀이터로 시선을 돌렸다. 순전히 우연이었지만, 이때 이들의 눈에 가장 먼저 띈 것은 항상 구석에 박혀 있던 김민기였다. 그는 오랫동안 처박아두었던 노래 ‘친구’를, 순전히 번안곡 혹은 영어 팝송에 맞서려는 오기로 불렀다가 선배들에 의해 방송국으로 불려 갔고, 그때부터 자작곡 ‘친구’를 비롯한 그의 노래들이 전파를 타기 시작했다. 이어서 방의경, 김광희, 양희은의 노래가 전파를 탔고, 박인희나 이수영이 그 뒤를 이었다. 이들은 단순히 노래만 제공한 게 아니라 음악 프로그램 진행자로 발탁되기도 했다. 이 가운데 방의경은 특기할 만했다. 시대의 이야기를 담은, 저만의 노래를 고민하게 된 건 순전히 김민기의 노래 ‘귀하’를 듣고 받은 충격 때문이었다고 한 이화여대 미대 재학생이었다. 고교 시절부터 작곡에 손을 대기는 했지만, 그건 팝송을 흉내 낸 것에 불과했다. 고민의 결과는 그해 말 탄생한 자작곡 ‘겨울’이었다. 방의경을 대중음악계의 관심권으로 끌어올린 노래였다.  방의경은 청개구리홀의 주요 멤버였다. 방의경은 아른다운 것들을 개사해 양희은을 스타반열에 올려 놓았고,  직접 앨범 작업에 참여하기도 했다. 방의경은 여성싱어송라이터로서 처음으로 창작앨범을 내기도 했다.  사진은 1971년 발매된 방의경 1집앨범. 방의경은 두 옥타브를 넘나드는 빼어난 가창력과 서정적인 미성, 수준급의 기타 연주 실력, 자신의 감성을 시적 언어로 풀어내는 언어 감각, 그리고 이를 음악적으로 표현하는 작곡 능력 등 싱어송라이터로서 갖춰야 할 것은 모두 갖추고 있었다. 양희은의 대표곡 가운데 하나인 ‘아름다운 것들’은 조안 바에즈의 노래 ‘매리 해밀턴’을 방의경이 번안한 것으로, 그의 깔끔한 언어 감각을 유감없이 보여준 노래였다. 김민기는 방의경 김광희 등과 함께 청개구리 홀을 ‘새로운 노래(누에바 칸시온)’의 못자리로 조성하고자 했다. 더 많은 청개구리가 모여들 수 있는 프로그램을 짰고, 노래를 짓고 부르는 데 서로 협업하는 공간으로 꾸몄다. 그곳에서 성장한 청개구리들이 더 넓고 깊은 연못, 호수로 진출하는 디딤돌로 자리매김하려 했고, 그 결과 청개구리 홀은 곧 ‘새로운 노래’ 생태계의 중심이 되었다. 김민기 자신도 그곳에서 자극을 받아 더 많은 노래를 짓게 됐고, 양희은을 만나 자신의 노래가 더 널리 퍼질 수 있었고, 최경식 이백천 김진성 등 음악 피디, 평론가들을 만나 방송도 타고 처음이자 마지막 독집 를 발매했다. ‘세노야’의 작곡자 김광희는 앨범 와 양희은의 1, 2집에서 피아노 반주로 힘을 보탰다. 청개구리를 통해 당시 최고의 포크 가수로 떠오른 양희은은 김민기와 이용복, 김광희 등의 반주로 첫 앨범을 제작해, 한국 포크의 대표적인 플랫폼으로 첫걸음을 내디딜 수 있었다. 혼성듀엣 라나 에 로스포의 한민과 은희, 최인순, 남성 듀엣 투코리언스의 김도향과 손창철, 사월과 오월, 이주원 등도 그 무대에 섰다. ‘바보처럼 살았군요’ ‘너’ ‘겨울 아이’ 등을 부른 이종용(현 미국 LA 코너스톤 교회 담임목사)의 첫 무대였으며, 해바라기의 이주호 그리고 서울대 음대생 이정선의 데뷔도 그곳에서 이루어졌다. 사월과 오월도 청개구리 무대에 섰다. 사진은 사월과 오월의 초기멤버였던 이수만(왼쪽) 과 백순진이 1971년 상명여대에서 공연하고 있는 모습. 훗날 SM 수장이 되는 이수만은 김태풍으로 교체된다.  사진출처: 서울신문 박성서의 7080  가요X파일 최초의 시각장애인 가수이자 12줄 기타 연주에서 필적할 사람이 없었던 이용복도 단골 청개구리였다. 이용복은 데뷔만으로도 화제가 되었지만, 장애인에 대한 사회적 편견 때문에 방송 출연은 쉽지 않았다. 아무런 제약 없이 노래를 부르고 친구들과 어울릴 수 있는 청개구리 홀은 그의 ‘음악적 보금자리’였다. 이용복은 단골 청개구리였다. 그는 양희은 앨범 작업에 기타반주로 참여하는 등 데뷔 자체만으로 화제가 됐다. 사진은 이용복의 앨범들.   청개구리 홀은 노래 운동이 확산하는 진원지 구실을 하기도 했다. 방의경은 청개구리의 경험을 살려, 더 전투적인 가객들과 함께 음악 동인 겸 음악 공간 ‘내쉬빌’을 만들었다. 서유석, 김도향, 한돌 등은 김민기와 함께 민요 부흥 운동 쪽으로 나아갔고, 김의철과 이정선 등은 해바라기 홀을 통해 또 다른 노래 운동에 나섰다. 청개구리 홀은 개관 후 6개월쯤 지났을 때면 창작 포크로 서울의 청소년들에게 장안의 명소가 되어 있었다. 서울 YWCA는 1971년 초 유스센터 건립 기금 모금을 위한 창작 포크송 페스티벌을 열었다. 최경식이 기획했던 이 공연에는 최양숙, 서유석, 김홍철, 송창식, 윤형주, 김세환, 서수남, 도비두, 라나에로스포, 에보니스, 아미고스, 미 7사단의 캄보밴드 등 당대 최고의 포크 가수들이 출연했다. 처음엔 청개구리 홀에서 열려고 했으나, 팬들이 너무 몰려 공연장을 서울YWCA 대강당으로 옮겨야 했다. 청개구리홀이 좁아 공연장소를 YWCA 대강당으로 옮겨 개최한 제1회 포크 페스티벌 공연모습. 사람이 직접 마이크를 기타 가까이 대어주는 모습이 이채롭다. 사진출처: 가요앨범사     1971년 6월 24일에는 개관 1주년 행사로, 포크 뮤직 축제 ‘청개구리 사운드’를 열었다. 서유석, 송창식, 윤형주, 김세환, 이동원, 이주한, 쉐그린 등 기성 가수는 물론 이용복, 양희은, 김민기, 임문일, 김윤태, 청개구리 가족이 무대에 올랐다. 관객이 1천여 명이나 됐는데 대학생, 직장인은 물론 ‘중딩’, ‘고딩’까지 몰려들어 발 디딜 틈이 없었다고 한다. 55년전에 열린 제1회 포크 페스티벌에는 이미 대중으로부터 인기를 한몸에 받던 세시봉 멤버들도 참여했다. 특히 윤형주 송창식 김세환은  청개구리들과 여러차례 공연을 하했다. 사진은 2025년 세시봉 멤버들이 전국투어를 앞두고  노래 연습을 하는 모습. 사진: 연합뉴스 청개구리 홀에서 공연이 있을 때면 언론은 다투어 보도했고, 신예를 발굴하려는 피디들은 시도 때도 없이 드나들었다. 이에 따라 청개구리 홀은 ‘한국 포크’의 요람이자 거점이 되어 있었고, 1970년대 초 새로운 문화 현상으로서 이른바 ‘청년문화’가 퍼져나가는 근거지가 되었다. 이 모든 일은 불과 1년 만에 일어난 것이었다. 그 중심에 있던 인물이 김민기와 방의경이었다. 예명 최영선으로 활동했던 가수 최지선은 이렇게 회고했다. 포크 음악의 새로운 흐름, 한국 포크 음악의 생성과 확산을 주도했던 인물을 꼽으라면 아무래도 당시 서울대 미대생이었던 김민기와 이화여대 미대생 방의경이었다.” 당사자인 방의경은 당시 청개구리 홀의 성격을 이렇게 정리했다. 그곳은 오갈 데 없는 청춘 군상이 아무 때나 들러 노래를 짓고, 노래를 하고, 노래를 듣던 곳이었다. 70년대 청년문화의 약호였다.” 김민기도 청개구리 홀이 이런 역할을 할 수 있었던 배경에 대해 훗날 한마디 했다. 당시 젊은이들은 통기타라는 무기를 확보해 자본으로부터, 밴드나 작곡가로부터 독립할 수 있었다. 이들은 저의 이야기, 저의 노래를 하고 싶었지만, 그런 뜻을 펼칠 곳이 따로 없었다.” 청개구리 홀의 이런 시도를 비판하는 군내 나는 여론도 물론 적지 않았다. 권력의 눈치를 볼 수밖에 없는 기성 가요계나, ‘청년문화’에 핏대부터 세우는 장, 노년층 그리고 이들을 대변하는 언론이나 평단도 마찬가지였다. 1971년 6월 10일 자 기사는 좋은 실례다. (출연진의) 기타 솜씨나 작곡 수준은 대단히 높으나 정리가 되지 않은 자기 생각을 노래에 담아보려고 애쓰고 있어…, 도둑촌을 묘사한 (김민기 작 ‘검은 지프차’)는 그런대로 성공한 프로테스트 송이지만, 나머지 작품의 가사가 해괴하게 들리는 것은 자기류를 너무 어렵게 쓰려고 애쓰기 때문인 듯하다.” 는 당시 대중가요 등 연예계 뉴스를 폭넓게 다루는 유일한 일간지였다. 아마 그런 중, 장년층의 따가운 눈총 때문이었을 것이다. 서울YWCA는 개관 1주년 행사를 시끌벅적하게 치르고 불과 한 달 뒤 청개구리 홀의 폐관을 알린다. 사정에 의해 일단 프로그램을 중단하고 구내식당으로 환원한다.” 100명이나 앉을까 싶은 좁은 공간에 1년 동안 8,500여 명의 젊은이들을 불러 모으고, 200여 회 이상의 프로그램을 운영한 청개구리 홀을 하루아침에 닫아버리겠다는 것이었다. 그 ‘사정’이란 게 복잡했다. ‘적자’는 손쉽게 둘러대는 핑계였다. 당시 청개구리 홀은 운영위원회와 후원회가 운영을 총괄하고 지원했다. 운영을 담당하는 ‘청개구리위원회’는 김유생(일간스포츠 기자), 박정자(연극) 이백천, 원대연(실내 장치가) 조광식(티비씨) 최경식(씨비에스), 서울YWCA의 여성 간사들로 이루어졌고, 후원회는 김종양(새한상사), 이봉수(신일기업), 김성섭(대한모방), 김봉기(삼성물산 부사장), 이양구(동양시멘트 사장) 등 쟁쟁한 기업인들로 이루어져 있었다. 최종 결정권자인 이사회는 노장년층으로 구성돼 있었다. 젊은 청개구리의 감수성과 열정이 위험하기만 한 세대였다. 게다가 명동 뒤 남산 기슭에는 자유를 노래하는 청년들이 불온하고 불편했던 중앙정보부가 있었다. 비판적인 지적도 많았던 였지만, 난데없는 폐관 앞에서 당혹스러웠던가 보다. 이 신문은 저간의 사정을 이렇게 에둘러 전했다. 2달 전 YWCA의 ‘시민논단’이 1백회를 끝으로 역시 운영 적자 때문에 일단 중지된 뒤끝이라, 공익단체가 주도하는 각종 의의 있는 모임들이 크게 시련을 받고 있는 것이 최근의 공통된 추세처럼 보이는데, …YWCA의 일부 이사진의 프로그램 방향에 대한 이견도 폐쇄의 한 원인이 된 걸로 알려지고 있다.” 오늘의 시점에서 돌아보면, 청개구리 홀은 50년 전의 ‘학전’이었다. 학전이 그랬듯이 청개구리 홀은 ‘한국 포크’의 씨앗을 뿌리고, 싹을 키우는 곳이었다. 김민기가 1991년 대학로에, 노래하고 연기하는 이들을 위한 배움의 못자리 ‘학전’을 연 것은 어쩌면 청개구리 홀의 기억 때문인지 모른다. 학전은 1990년대 ‘미디 음악’에 밀려 설 자리를 잃어가던 포크와 싱어송라이터 문화가 소생할 수 있는 마지막 보루였으며, 새로운 노래 새로운 가수들이 싹 트고, 성장해 더 큰 밭으로 진출하는 교두보 즉 못자리였다. 학전은 김민기라는 희생적인 ‘농부’가 든든한 못자리를 지켜 33년간 유지했다. 그러나 청개구리 홀에는 그런 보호자가 없었다. 게다가 뼛속 깊이 반달리스트(문화 파괴주의자)였던 군사정권으로서는, 엇나가기 일쑤인 ‘청개구리’는 군홧발로 밟아 버려야 할 대상이었다. 청개구리 홀이 새로운 노래 운동의 씨를 싹 틔워 퍼트리고, 불과 1년여 만에 사라진 건 그 때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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