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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보 바로가기 : 배고픈 죄, 부모를 그리워한 죄, 자유를 갈망한 죄

배고픈 죄, 부모를 그리워한 죄, 자유를 갈망한 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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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광석 씨의 나이는 하나가 아니다. 법적 나이는 1970년 생으로 되어 있다. 그러나 그 이전에는 1967년, 다시 1965년의 기록도 있다. 그가 추정하는 그의 출생년도는 1963년이다. 부모와 헤어지던 마지막 기억 속의 그는 아홉 살이었다. 국가는 그에게 나이를 부여했지만, 기억은 그보다 앞서 있다. 아버지의 목소리가 또렷하다. 너는 왜 아홉 살이나 되어도 친구들을 못 사귀냐.” 그 말은 단순한 꾸중이 아니었다. 그가 ‘이미 충분히 큰 아이’였다는, 그래서 세상에 적응해야 한다는 의미였다. 그의 곁에는 두 살 아래 동생, 그리고 아직 말을 제대로 하지 못하고 기어 다니는 갓난아이 동생이 있었다. 기록은 그를 여러 번 태어나게 했지만, 기억은 단 한 번도 그를 온전히 살게 하지 못했다. 외가에 가기 위해 혼자 기차에 올랐습니다. 전에는 엄마와 함께 다녔던 길이었어요. 기차 안에서 잠이 들었어요. 그리고 눈을 떴을 때, 세상은 끊어져 있었어요. ‘수원역’ 쯤으로 기억합니다. 역 주변에는 건어물 시장이 있었고, 시장은 소란스러웠어요. 몹시 허기가 졌는데, 어느 곰탕집 주인이 불러 앉혀서 뜨거운 곰탕 한 그릇을 내주더군요. 아마도 내가 ‘버려진 아이’가 아니라 아직 ‘누군가의 아이’였던 마지막 순간이었던 거 같아요. 역 근처 파출소로 보내졌고, 경찰은 보호라기보다, 처리하는 방식으로 시립아동보호소로 보냈습니다. 1971년의 일이었습니다.”   시리비아동보호소 내 천사의 집 입소당시 오광석씨의 기록은 1965년 생으로 되어있다. 시립아동보호소에서의 첫 날 밤. 아이들의 옷은 벗겨졌다. 도망을 막기 위해서였다. 아이들에게 옷은 단순한 의복이 아니었다. 그것은 마지막 남은 ‘자기 것’이었다. 그러나 그곳에서는 그조차 허락되지 않았다. 그는 시립아동보호소 13통에 배정됐다. 30명의 아이들이 함께 생활하는 곳이었다. 좁은 공간 사이 눅눅한 냄새가 배어 있었고, 바닥과 벽 틈에서는 바퀴벌레가 기어 다녔다. 이와 벼룩은 일상이었다. 아이들의 피부는 성한 곳이 없었다. 종기, 습진, 이름 모를 발진들, 약 대신 발라주던 소독약이 치료의 전부였다. 가끔은 하얀 가루를 전체 원생 몸에 뿌리기도 했다. 그것은 DDT라는 살충제였다. 어느 날, 관리자가 그의 귀를 잡아당겼다. 이유는 중요하지 않았다. 그곳에서 맞아야 할 이유는 늘 관리자의 기분에 의해 만들어지기 때문이다. 손은 거칠었고, 힘은 조절되지 않았다. 귓불이 찢어지며, 피가 흘렀다. 누구도 놀라지 않았다. 이미 익숙한 일이었기 때문이다. 상처는 1년이 넘도록 계속되었다. 아물지 않는 통증과 계속된 염증은 그가 ‘사람’이 아니라 ‘관리 대상’이었음을 말해준다. 지금도 그의 귓불에는 당시 아픔이 기록처럼 새겨져 있다. 1973년 정도로 기억된다. 시립아동보호소의 공기가 달라졌다. 운영 주체가 천주교 계열로 넘어가면서, 아이들은 ‘보호’가 아닌 또 다른 질서 속으로 편입되었다. 그는 그 변화를 ‘신앙’이 아닌 ‘공포’로 기억한다. 아이들 사이에는 이름보다 별명이 돌았다. 오실수녀라고 불리던, 덩치가 유난히 컸던 그 수녀는 언제나 아이들 위에 그림자처럼 서 있었다. 그녀가 연결된 기억에 가장 두려운 장소는 재래식 화장실이었다. 그녀는 아이를 그 안에 밀어 넣을 듯 다시 끌어냈다. 그리고 또다시 밀어 넣었다. 그 행위는 단순한 처벌과 함께 협박을 포함했다. 누구든 말을 듣지 않으면 어떻게 되는지를 몸으로 보여주는 방식이다. 아이에게 그것은 단순한 공포가 아니었다. 어둠, 악취, 추락의 감각이 한꺼번에 덮쳐왔다. 그 안에서 아이는 스스로를 인간으로 느낄 수 없었다. 수녀들은 원래 아이들을 괴롭히는 사람들이라고 생각했어요. 이 생각은 누가 가르친 것이 아니라 경험이 그렇게 만든 거죠. 수녀들은 자주 폭력을 휘둘렀습니다. 그곳에서 종교는 위로가 아니었어요. 어떤 수녀들은 더 조용하고 은밀한 방식으로 아이들을 유인했어요. 배고픔은 아이들에게 가장 확실한 미끼였습니다. 특히 외모가 잘생기고 조용한 아이들이 대상이었습니다. 그렇게 불려간 남자 아이들이 음식을 준다는 유혹에 넘어가 수많은 성폭행을 당했습니다. 그리고 입을 닫았죠. 침묵은 개인의 선택이라기보다 생존 방식이었습니다.” 한 아이가 병들어가고 있었다. 손마디가 떨어져나가 늘 붕대로 감싸고 있었던, 지금 생각해 보면 한센병 정도로 추정된다. 그의 몸은 점점 망가졌지만, 돌보는 이가 없었다. 아이들은 그를 피했고, 어른들은 외면했다. 그는 조용히 죽어갔다. 죽음조차 사건이 되지 못했다. 누군가 울부짖지도, 기록하지도 않았다. 시신은 시신창고로 옮겨졌다. 오히려 ‘옮겨졌다’기보다 ‘던져졌다’는 표현이 정확할지도 모른다. 사람이 물건처럼 취급되는 곳이었다. 겉으로는 아동보호소였지만, 아이들은 보호받지 못했다. 관리되고, 통제되고, 때로는 소비되는 대상일 뿐이었다. 종교의 이름 아래, 침묵은 미덕이 되었다. 그곳에서 오광석 씨는 1976년까지 머물렀다.   1967년생으로 기록된 오광석씨의 선감학원 원아대장. 앵벌이 구걸등의 가짜 기록으로 조작되어있다. 집에 보내주겠다.” 그 말은 희망처럼 들렸다. 그러나 그 약속은 또 하나의 이동을 의미할 뿐이었다. 그가 도착한 곳은 선감학원이 자리 잡고 있던 섬, 대부도 옆의 선감도였다. 마산포에서 배를 타고 그들은 밤에 들어갔다. 어둠은 방향 감각을 지웠고, 섬이라는 사실을 늦게야 깨닫게 했다. 배에서 내린 순간, 아이들은 알 수 없는 공포에 휩싸였다. 눈치 빠른 아이들은 도망을 시도했다. 그러나 그곳은 섬이었다. 바다를 건너지 못하는 한, 어디로도 갈 수 없었다. 도망은 시도일 뿐, 결과가 아니었다. 배에서 내리자 원산폭격 등 각종 기합과 구타가 시작되었다. 공포심을 잔뜩 심어준 후에야 군대 행진처럼 아이들은 선감학원 숙소로 이동할 수 있었다. 운이 좋았는지 선감학원에서 저를 선감국민학교에 보내줬어요. 어느 날, 한 아이가 학교에 나오지 않았습니다. 담임교사는 아무렇지 않게 ‘무장공비에게 가족이 몰살됐다’고 말하더군요. 세상은 어디서든 삶보다는 죽음이 먼저라는 사실을 알았어요. 그때 생각했습니다. ‘이래 죽으나, 저래 죽으나....’ 선택지가 사라진 것이죠. 선감학원에서 아이들은 서로의 이름을 모르는 경우가 많았어요. 대신 별명으로 불렀습니다. 저를 포함해서 많은 아이들이 이미 다른 수용시설을 거쳐 온 상태라 반복된 구타와 폭력이 기억을 흐리게 만들었습니다. 자기 이름조차 제대로 떠올리지 못한 겁니다. 폭력은 장소를 바꿔가며 반복되었고, 아이들은 이미 익숙해진 겁니다. 그것은 견딘다는 의미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무뎌진다는 뜻이기도 했습니다.” 섬의 시간은 노동으로 흘렀다. 끝이 없는 강제노역. 모내기, 밭갈이, 누에치기, 염전일, 연탄 나르기 등으로 아이들은 쉬지 못했다. 그래서 어떤 아이들은 스스로 몸을 망가뜨렸다. 독사에게 일부러 물렸다. 그것은 자해이자 탈출이었다. 잠깐이라도 노동에서 벗어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었다. 살기 위해 스스로를 해치는 아이러니가 이해되는 곳이었다. 배고픔은 일상이었다. 아이들은 들과 바다에서 살아 있는 것들을 잡았다. 뱀, 쥐, 개구리 할 것 없이 무엇이든 먹을 수 있는 것을 먹었다. 굶주림 앞에 금기는 없었다. 바다에 떠내려온 쇼팅이라고 불리는 기름덩어리를 마을 장독대에서 훔쳐온 고추장에 비벼 먹었어요. 그조차도 ‘음식’이었습니다. 선감학원 주방 대형 가마솥에서 밥을 지으면, 하수구를 퍼내는 삽으로 밥을 뒤적입니다. 밥에도 오물이 잔뜩 묻어요. 그것을 먹는 겁니다. 반찬은 검은 단무지가 나옵니다. 단무지 색이 원래 검은 색인 줄 알았어요. 상했기에 검은색이라는 사실을 몰랐던 겁니다. 간혹 특식이라고 어묵이 나오는 날도 있었어요. 변질된 상태라 끈적였고, 구더기가 나오기도 했습니다. 그래도 배가 고프니 남길 수가 없어요. 가끔 마을의 길바닥에 버려진 담배꽁초에서 연초를 모아 말아서 피우도 했는데, 담배가 허기를 잊게 해주더군요.”   선감학원은 경기도에서 운영관리 감독권을 지닌 국가시설이었다. 원장들 모두 경기도에서 임명하였다. 기상과 동시에 아침 점호가 시작되면, 인근 언덕이나 운동장을 도는 선착순 경쟁을 붙였다. 아이들은 고무신을 벗고 맨발로 뛰었다. 미끄러지지 않기 위해서였다. 늦으면 맞았다. 속옷을 벗긴 채 때리는 날도 있었다. 수치심도 처벌의 일부였다. 그곳의 관리자는 대부분 경기도 소속 공무원들이었다. 일부 임시직은 원장 등 고위직의 친인척이었다. 20~30가구의 섬 마을 주민들도 선감학원 직원들과 연결되어 있었다. 친인척이거나, 이해관계를 공유한 사람들이었다. 아이들이 도망치면 마을 사람들이 붙잡아서 다시 돌려보냈다. 섬 전체의 어른들이 하나의 공모자였다. 그래도 아이들은 계속 탈출을 시도했다. 죽은 아이들을 선감학원에서 약간 떨어진 공동묘지에 묻어요. 묘비는 물론이고 관도 봉분도 없이 이불이나 거적대기로 말아서 묻어버립니다. 시신 위에 시신을 겹쳐 묻기도 했고, 운반하기 힘들면 가는 길에 아무 데나 묻었죠. 비가 오면 시신 일부가 떠내려 오는 걸 봤다는 아이들도 있었어요. 시신을 묻을 때면 모든 아이들을 불러요. ‘도망치면 이렇게 된다.’는 것을 아이들에게 보여주는 겁니다. 그래도 죽음을 담보하고 도망치는 아이들이 부지기수였어요. 바다로 둘러싸인 섬이라 길은 없었지만 자유를 향한 갈망조차 막지는 못했죠.” 어느 날 선감학원을 떠나게 되었다. 수용시설의 시간이 끝난 듯 보였다. 그러나 끝난 것은 그 공간뿐이었다. 몸은 섬을 떠났지만, 그 안에서의 시간을 서류는 다르게 말하고 있다. 그가 그곳에 있었던 기간은 ‘1980년부터 1981년까지’ 1년 남짓으로 적혀 있다. 그러나 그의 기억은 다르다. 1976년부터 1979년까지 4년이라는 시간이었다. ‘기록’의 시간은 자신들의 각종 비리를 감추기 위해 ‘기억’의 시간을 덮어버렸다. 이 차이는 오류가 아니었다. 의도된 조정, 혹은 편의적인 정리, 그 사이에서 사라진 것은 단순한 연도가 아니라 삶의 일부였다. 섬을 떠나던 날 기억이 지금도 또렷합니다. 한 시대의 끝을 알리는 총성과 함께 그는 섬을 떠나왔습니다. 섬에서는 접하지 못했던 라디오에서 뉴스가 흘러나왔죠. 박정희가 사망했다는 소식이었습니다. 어른들 중, 누군가는 울고, 어떤 이들은, 아주 짧게, 미소를 지었습니다. 그 표정들을 이해하지 못했지만, 같은 사건을 두고도 서로 다른 얼굴을 한다는 느낌은 분명했습니다. 그리고 부천에 있는 ‘새소망 소년의 집’으로 전원조치 되었습니다.”   150여구의 유골이 발견된 선감학원 공동묘지터. 초등학교 4학년 후반기, 또 한 번의 이동이었다. 이전의 시설들과 마찬가지로그 곳 역시 선택이 아닌 배치였다. 그러나 도착하자마자 그는 한 가지 변화를 느꼈다. 그곳에서 처음으로 윤기가 흐르는 밥을 먹었다. 쌀알이 서로 붙지 않아 살아 있었고, 냄새는 구수했고, 입안에서는 부드럽게 풀렸다. 밥이 원래 이런 맛이구나.” 먹는 것이 나아지자 삶도 나아진 것처럼 느껴졌다. 학교에 갈 때는 도시락도 주어졌다. 하지만 모든 것이 달라진 것은 아니었다. 폭력은 여전히 그곳에도 있었다. 구타와 폭력을 일삼았던 관리자 중 한 사람이 교회 장로로 불리던 인물이었다. 무릎 사이에 각목을 끼워 넣고 그 상태에서 허벅지를 밟았어요. 아이의 체중이 아니라 어른의 체중이 실리는 고통이었어요. 관절이 비틀리고, 근육이 찢어지는 감각이었습니다. 처벌이라기보다 고문이었습니다. 한 번으로 끝나지 않고 반복되었습니다. 먹는 것이 나아졌다고 해서 삶이 나아진 것은 아니었어요. 강제노역은 어디서나 여전했습니다. 이전 시설에서 하던 일들과 크게 다르지 않았죠. 아이들은 여전히 일을 해야 했고, 노동은 교육도 아니었고, 선택도 아니었습니다. 고아라는 죄가 노동의 이유였습니다.” 한 끼의 밥이 폭력을 덮을 수는 없었지만, 잠시 잊게는 해주었다. 그곳은 이전보다 나은 곳이었을까. 아니면 단지 다른 방식의 공간이었을까. 확실한 것은 하나다. 아이에게 ‘보호’란 폭력이 없는 상태를 의미하는 것은 아니었다. 그저 조금 덜 굶주리고, 여전히 맞는 상태일 뿐이었다. 한편, 새소망 소년의 집은 각종 비리와 폭력 등의 사건으로 2017년 폐쇄조치 되었다. 퇴소는 해방이 아니었다. 그것은 아무것도 없는 상태로 세상에 던져지는 일이었다. 당시 고아원 퇴소자들은 단 한 푼의 정착금도 없이 시설을 떠나야 했다. 짐도, 보호자도, 안내도 없었다. 그는 그렇게 거리 위로 나왔다. 그가 처음 들어간 곳은 공업사였다. 용접 일을 배우며 몸으로 버텼다. 불꽃이 튀고, 금속이 녹아내리는 현장이었다. 위험했고, 고됐지만 그는 묵묵히 6개월을 일했다. 그러나 그에게 임금은 지급되지 않았다. 고아라는 이유였을 것이다. 그를 보호할 사람도, 대신 항의해 줄 사람도 없었다. 한동안 그는 거리에서 지냈다. 노숙자와 다르지 않은 삶. 잠을 잘 곳을 찾고, 다음 끼니를 고민하는 하루가 이어지기도 했다. 시설에서의 삶이 끝났지만 안정적인 삶은 멀게만 느껴졌다.   선감학원 옛터에 마련된 선감역사 박물관. 당산역 인근에 있는 작은 악세사리 공장에 취업했어요. 그곳에서 처음으로 다른 종류의 어른을 만났습니다. 사장이 일뿐만 아니라 머물 곳을 내주었습니다. 작은 옥탑방이 기숙사가 되었고, ‘집’이 되었습니다. 비좁고, 덥고, 추운 공간이었지만 기거할 수 있는 공간이 생겼다는 사실만으로 충분했어요. 그곳에서 조금씩 돈을 모으기 시작했습니다. 그것은 단순한 금액 이상의 의미였어요. 그때 비로소 내 삶이 시작되었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그렇게 작은 종자돈을 모으고 새로운 일에 도전할 수 있었습니다. 지금은 건축 도장 도색 자영업을 하며 생계를 이어가고 있습니다.” 그러나 과거는 끝나지 않았다. 국가를 상대로 하는 선감학원 관련 재판은 지금도 이어지고 있다. 배상과 보상에 대한 판결이 다가오는 5월로 예정되어 있다. 시간은 수십 년이 흘렀지만 그 일은 여전히 현재진행형이다. 사과와 보상은 반드시 필요하다. 그러나 그것만으로 충분한가. 그는 묻는다. 잃어버린 삶은 어떻게 보상할 것인가. 국가에 의해 망가진 시간은 무엇으로 되돌릴 수 있는가. 국가는 때로 보호자가 된다. 그러나 그에게 국가는 다른 얼굴로 기억된다. 관리자, 통제자, 그리고 책임지지 않는 존재가 대한민국이라는 사실이다. 그는 여전히 질문을 던진다. 국가는 개인에게 어떤 얼굴이어야 하는가. 그는 인터뷰를 마무리하며 이런 말을 남겼다. 배고픈 죄, 부모를 그리워한 죄, 자유를 갈망한 죄가 우리의 죄라면 죄일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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