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열이냐 연대냐, 노동조합이 마주한 거대한 갈림길 [노동] 지난 5월 27일 최종 조인된 삼성전자 임금협약은 지금 한국 경제를 떠받치는 반도체 산업의 파국을 피한 타협이었다. 주요 내용은 평균임금 6.2% 인상, 기존 초과이익성과급(OPI) 유지에 더해 DS(반도체) 부문 특별경영성과급 신설, 특별성과급 재원의 영업이익 연동, 자사주 지급 등으로 요약된다. 특히 반도체 부문 특별성과급은 1인당 최대 6억 원에 이르는, 기존 임금교섭의 상식을 넘어선 규모였다. 영업이익의 일정 비율을 성과급 재원으로 삼고 이를 부문과 사업부에 나누어 배분하는 방식은 삼성전자 내부에서도, 한국 노동사회 전반을 보더라도 이례적인 합의였다. 이를 두고 언론을 중심으로 다양한 평가가 제기되고 있지만 필자는 한국 노동사회에 던진 과제라는 관점에서 삼성전자 임금협약의 의미를 살펴보고자 한다.
삼전 노동조합 임금협약 승리의 그늘
합의의 내용만 보면 노동조합의 승리로 보인다. 오랫동안 무노조 경영의 상징이었던 삼성전자에서 노동조합이 6만여 명에 이르는 대규모 노동자를 조직했고 회사와 정부를 협상장으로 끌어냈으며, 결과적으로 천문학적 보상 체계를 제도화했기 때문이다. 노동조합의 힘은 결국 조합원 수에서 나온다”는 말은 이번 합의에서도 확인되었다. 삼성전자 초기업노조의 조합원 수가 폭발적으로 늘어나자 회사는 노조를 무시할 수 없었고 정부도 방관할 수 없었다. 삼성전자 노동자들은 처음으로 자신들의 집단적 힘이 어떤 결과를 만들어 낼 수 있는지 체험했다.
그러나 이 합의가 한국 노동사회에 남긴 의미를 단순히 ‘삼성전자 노조의 승리’로만 정리하기는 어렵다. 오히려 이번 합의는 한국 노동사회의 오래된 한계와 새로운 균열을 동시에 드러냈다. 이번 삼성전자 임금 합의는 대한민국 노동자의 절반이 넘는 중소영세사업장 노동자에게는 일종의 ‘절망’으로 다가왔기 때문이다.
20일 경기도 수원시 장안구 경기고용노동청에서 열린 삼성전자 임금협상을 마친 후 여명구 삼성전자 DS(디바이스솔루션·반도체 사업 담당) 피플팀장과 최승호 삼성그룹 초기업노동조합 삼성전자지부 위원장이 잠정 합의안에 서명한 후 김영훈 고용노동부 장관과 손을 맞잡고 있다. 2026.5.20 공동취재단 연합뉴스
가장 먼저 떠올릴 수밖에 없는 것은 삼성전자 하청 중소영세사업장 노동자들의 상대적 박탈감이다. 한국 반도체 산업의 초과이윤은 삼성전자 정규직 노동자의 힘으로만 만들어진 것이 아니다. 소재·부품·장비 기업, 하청업체, 파견·용역, 사내하청 노동자, 지역사회, 국가의 세제 지원과 인프라, 대학과 공공 연구개발 체계가 함께 만든 결과다. 그런데 그 이익이 삼성전자 내부, 그중에서도 특정 사업부 노동자에게 집중될 때, 같은 반도체 산업 생태계 안에 있는 또 다른 노동자들은 자신들이 배제되었다는 박탈감을 가질 수밖에 없다.
‘초기업노조’ 허울만 쓴 기업별 노조 행태
이번 합의는 비단 성과급 분배 잔치에서의 배제를 넘어 한국 노동사회 전반에 두고두고 곱씹어야 할 과제를 남겼다. 첫 번째 과제는 노동시장 이중구조에 대한 대응이다. 한국 노동시장은 이미 대기업 정규직과 중소영세기업·하청·비정규직 사이의 격차가 매우 깊다. 삼성전자 임금 합의는 이 격차를 완화하기보다는 더 도드라지게 했다. 필자는 한국 사회 노동조합 활동이 사회적으로 정당성을 가지려면 기본적으로 초기업적이어야 한다는 생각을 늘 해왔다. 기업 울타리 안의 조합원 이익만이 아니라 같은 업종, 같은 가치사슬, 같은 지역에서 일하는 노동자들의 조건을 함께 끌어올리는 방향이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한국 노동조합은 여전히 기업별 노조의 틀에 갇혀 있다. 이번 사례는 그 한계를 여실히 드러냈다. ‘삼성그룹 초기업노동조합삼성전자지부(삼성전자 초기업노조)’라는 이름에 걸맞지 않게 철저히 기업별 노동조합의 행태를 보였기 때문이다.
초기업적 임금교섭 구조·체계의 필요성은 다시금 확인되었다. 반도체 산업 전체를 포괄하는 업종별 교섭, 원청과 협력업체를 함께 놓고 다루는 공동교섭, 최소한 산업 차원의 임금·복지·훈련 기준을 만드는 제도가 필요하다. 그러나 바로 이 지점이 한국 노동조합에게 가장 취약하다. 민주노총을 중심으로 산별노조라는 조직 형식은 존재하지만, 실제 교섭은 여전히 기업별·사업장 중심으로 이루어지고 있기 때문이다. 대기업 정규직 노조는 자신들의 교섭력을 내려놓는 것을 두려워하고, 중소영세사업장 노동자는 교섭 테이블에 들어갈 힘조차 갖지 못한다. 그 결과 초과이윤은 반도체 산업 전체의 사회적 자원이 아니라 힘 있는 기업 내부자의 몫으로 먼저 배분된다. 이번 삼성전자지부의 교섭은 이를 적나라하게 드러냈다.
대의(大義) 외면하고 소리(小利)에 급급했던 노조 지도부
두 번째 과제는 노동조합 지도부(leadership)의 역할이다. 필자가 이전 글에서 언급한 것처럼 영국의 노동운동 연구자 하이만(Hyman, R.)은 노동조합 지도부가 조합원의 단기적·분파적 이해로부터 일정하게 독립할 필요가 있다고 강조했다. 노조는 조합원의 요구를 대변해야 하지만, 조합원의 즉자적 욕망을 그대로 따라가는 조직이어서는 안 된다. 조합원의 요구를 사회적 언어로 번역하고, 내부의 이해를 조정하며, 장기적 전략으로 재구성하는 것이 지도부의 역할이다. 이번 삼성전자 임금교섭과 합의는 바로 이 역량의 부재를 극적으로 보여주었다.
삼성전자 초기업노조는 SK하이닉스보다 확연히 낮은 성과급에 대한 불만을 기반으로 조합원 수를 급격히 늘렸다. 조합원 확대의 에너지는 분명했다. 그러나 그 에너지는 주로 ‘하이닉스만큼 또는 그 이상 받아야 한다’는 비교와 박탈감에 기대고 있었다. 지도부는 이 요구를 어떻게 사회적으로 정당화할 것인지, 반도체 산업 전체의 노동 격차 완화와 어떻게 연결할 것인지, 조합원 내부 부서 간 단기적 임금 극대화 욕구를 어떻게 조정할 것인지에 대해 최소한의 초보적인 역량조차 보여주지 못했다. 결국 교섭의 중심은 초과이윤을 반도체 산업생태계 전체에서 어떻게 쓸 것인가가 아니라, SK하이닉스보다 얼마나 더 많은 성과급 몫을 확보할 것인가로 좁혀졌다.
경기 수원시 수원지법 청사 앞에서 삼성전자 디바이스경험(DX) 부문 직원들이 주축이 된 삼성전자 노동조합 동행(동행 노조) 집행부가 삼성전자 노사 임금협상 잠정합의안 찬반 투표 중지 등 가처분 신청서를 제출하기 전 취재진의 질문에 답하고 있다. 2026.5.26 연합뉴스
디지털 자본 축적체계에 대한 노조의 장기적 전망은 있나
세 번째 과제는 AI로 집약되는 디지털 자본의 축적체계를 고려한 중장기적 노동조합 요구안 마련의 필요성이다. 지난 5월 20일 참여연대 등이 공동으로 개최한 ‘반도체 초과이윤, 어떻게 나눌 것인가’라는 좌담회에서 ‘노동포럼 나무’의 안정화 대표는 반도체 초과이윤 문제는 단순히 반도체 자본의 호황 문제가 아님을 언급하면서 현 시기 디지털 자본의 축적 방식과 연결되어 있음을 강조한 바 있다. 반도체 산업의 초과이윤은 AI, 데이터센터, 클라우드, 플랫폼, GPU, HBM, 스마트팩토리, 디지털 물류가 결합된 가치사슬 속에서 발생하기 때문이다. 핵심은 디지털 자본이 사회가 생산한 공유부(common wealth)를 사적으로 수익화 한다는 데 있다. AI는 사회가 축적한 데이터와 지식, 특히 피지컬AI는 공장 노동자의 숙련과 암묵지(tacit knowledge), 작업 활동을 학습한다. 그러나 그 공유부에 대한 정당한 평가와 대가는 제대로 지불되지 않고 있다.
이런 조건에서 노동조합의 요구는 임금에만 머물러서는 안 된다. 노동자가 축적한 숙련과 작업 데이터가 AI의 학습 재료가 되고, 그 AI가 다시 노동자를 통제하거나 대체하는 상황에서 문제는 훨씬 복잡해진다. 노동과정의 속도와 내용이 프로그램과 알고리즘에 의해 결정되고, 노동자가 자신의 생산물과 노동과정에 대한 기초적인 통제권을 잃는다면 단순히 더 많은 성과급을 받는 것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AI로 대표되는 기술을 누가 설계하고, 누가 통제하며, 그 이익과 위험을 누가 부담할 것인가가 노동조합 의제가 되어야 한다.
다시 하는 질문: 노조는 조합원만을 위한 조직인가
해당 토론회에서 제기된 ‘노동사회연대기금’ 제안은 이런 점에서 매우 시의적절하며 필요하다. 이 기금은 AI발 초과 수요에서 비롯된 천문학적인 이윤을 현금으로 어떻게 배분할 것인지의 문제를 넘어선다. 기금은 산업전환 교육훈련, 고용안정, 반도체 산업 하청 노동자 지원에서부터 노동친화적 AI 기술개발, 기후위기 대응, 지역사회 인프라, 노동자 경영참여를 위해 쓰일 토대를 만드는 것이다.
결국 삼성전자 임금 합의가 한국 노동사회에 남긴 가장 큰 질문이자 과제는 이것이다. 노동조합은 누구를 무엇을 위해 존재하는가. 조합원만을 위한 조직인가, 아니면 노동자 전체의 삶을 바꾸는 사회적 제도이자 조직인가. 조합원의 이익을 대변하는 것은 노조의 기본이다. 그러나 그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노동시장 내에서 교섭력을 지닌 조합원의 이익을 배타적으로 대변하는 노조는 노동시장 이중구조를 완화하기보다 악화시킬 수 있다. 반대로 자신의 힘을 산업 전체와 사회적 약자를 위해 일부라도 돌리는 노조는 한국 사회의 새로운 연대 질서를 만들 수 있다. 지난 글에서도 썼던 것처럼 한국와이퍼분회가 집단해고 속에서도 뚜벅이재단을 만든 것처럼 말이다.
디지털 자본주의 시대의 노동 연대를 새로 설계하라
삼성전자 초기업노동조합의 이번 합의는 한국 노동사회의 실패가 아니라 새로운 가능성이자 기회가 될 수도 있다. 문제는 그 가능성이 어디로 향하느냐이다. 조합원 수의 힘을 확인한 것에서 멈춘다면, 그것은 대기업 내부자의 성과급 배분 정치로 축소될 것이다. 그러나 그 힘을 산업생태계 기금, 초기업 교섭, 노동사회연대기금, 기술 전환에 대한 노동자 참여로 확장한다면 전혀 다른 길이 열릴 수 있다. 한국 노동운동이 해야 할 일은 바로 여기에 있다. 기업 울타리를 넘어서는 것, 단기적 임금 몫 다툼을 넘어 장기적 사회계약을 제안하는 것, 디지털 자본주의 시대의 노동 연대를 새로 설계하는 것이다.
손정순 시화노동정책연구소 연구위원
노동조합의 민낯을 적나라하게 드러냈다는 점에서 삼성전자 초기업노조의 임금 합의는 끝이 아니라 시작이다. 힘은 생겼지만 연대는 충분한가, 조합원이 늘어난 만큼 사회적 책임도 비례해 늘었는가, 성과급은 얻었지만 산업 전체의 노동 격차를 줄이기 위한 전망은 있는가의 문제이다. 이 과제에 비전을 제시하지 못한다면 삼성전자 초기업노조의 성과는 한국 노동사회에 또 하나의 분열로 기억될 것이다. 그러나 이 질문을 정면으로 마주한다면, 이번 합의는 한국 노동운동이 기업별 노조의 좁은 울타리를 넘어 디지털 자본주의 시대의 새로운 연대운동으로 나아가는 출발점이 될 수 있다.손정순 노동판 ksjso2@gmail.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