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번 믿으면 끝까지 믿어줬던 사람, 이해찬 [카테고리 설정이 아직되어 있지 않습니다.] 이해찬 선배와 만난 건 1982년 가을이었다. 물론 그 전에도 서점주인과 학생 손님으로 스친 적은 있었지만 그때 춘천교도소에서 만나 함께 생활했다. 나는 학림사건으로 구속된 후 광주교도소에 있다가 박관현 열사가 죽은 뒤 춘천으로 이감됐다. 나는 우원식이 있다가 나간 방을 배정받았다. 해찬 형은 80년 김대중내란음모 사건으로 투옥되어 안동교도소를 거쳐 나보다 먼저 춘천에 와 바로 옆방에 있었다.
5년이나 선배여서 어려워했는데 그럴 필요가 없었다. 딱딱한 듯 자상한 충청도 억양의 목소리와 매일 아침 푸쉬업을 수백여 번 하는 모습에 감동받을 무렵 내게 일이 터졌다. 서울, 광주에서부터 따라온 내 사물보따리의 책들이 모조리 불허된 게 아닌가. 그때만 해도 피가 식지 않아서 매일 방문을 차고 소리를 지르다가 급기야 단식에 들어갔다. 교무과장은 모르쇠하고 보안과장 놈은 징벌을 때릴 기세였다. 열이 머리꼭지까지 올라 그날부터 아예 물도 끊었다. 난 드러누운 채 정신을 잃었고 정말 사경을 헤맨다는 게 어떤 건지 알았다. 나흘을 넘긴 날 드디어 교무과장이란 자가 내 방에 와서는 무릎을 꿇었다.
그 동안 사태를 해결한 건 선배였다. 보안과장과 만나 ‘애 죽일꺼냐’고 윽박지르며 만일 강제급식 같은 걸 하려 든다면 같은 층에 있는 강원대 학생들과 함께 모두 단식에 돌입하겠다고 엄포를 놨다. 이미 다른 교정시설에서 허용된 서적이니 책임질 일 없다고 달래기도 해서 교무과장이 내 앞에 무릎을 꿇은 거였다. 뿐만 아니라 옥외운동시간 연장, 일반 재소자의 부식개선까지 따냈다. 그 때 형이 투쟁 협상의 달인이란 생각이 들었다.
그해 12월 형은 성탄절 특사로 나가게 되었다. 순박한 강원대 학생들이 이별이 서러워 울먹이는 가운데 나는 형에게 호구조사를 당하게 되었다. 출소 후 우리 집에 들러 부모님을 찾아뵈었고 당시 나와 연애하다 만 서명숙을 만나 면회 가라고 부추기기도 했다. 나중에 우리 애들 엄마가 된 그녀는 이해찬 선배를 보고 형사인 줄 알았다고 한다. 각진 얼굴에 두꺼운 안경테 안의 날카로운 눈매, 거기다 가죽잠바까지 입은 모습에 놀라 ‘엄주웅이 감옥에서 무슨 사고라도 쳤나’ 놀랐다는 것이다. 그런 형사같은 사람이 그녀에게 나를 기다려달라고 부탁했다나 어쨌다나. 그리고는 극한 단식투쟁의 여파로 실명 위기에 빠졌던 나를 서울로 이감시키게 도와주기도 했다. 어찌보면 출소 후 1년 만에 결혼한 것도 아이를 낳고 행복했던 것도 형 덕분이 전혀 아니라고 할 수는 없다.
국무총리를 지낸 이해찬 민주평화통일자문회의 수석부의장이 25일 베트남에서 치료 중 별세했다고 민주평통이 밝혔다. 향년 73세. 사진은 2024년 11월 13일 국회에서 당시 이해찬 상임고문이 더불어민주당 이재명 대표와 함께 외교안보통일자문회의 출범식에 참석하는 모습. 2026.1.25. 연합뉴스 자료사진
하지만 그 후 이해찬은 그냥 좋은 선배로만 남았다. 상당히 교조적이었던 나는 해찬 형이 뜻을 두었던 청년운동이나 정치에 관심도 없었고 오로지 노동운동만이 최고라고 생각해 왔기 때문에 멀리서 그저 지지하고 응원하는 관계 정도로 지냈다. 그래도 내가 하는 일에는 무조건 편들어 준다는 느낌이 든 건 1989년 인천에서 노동상담소를 차려 운영 책임을 맡게 된 때였다. 나는 언제나 그렇듯 돈 만드는 재주가 없어 거의 매일 앵벌이를 하고 다녔다. 당시 시사 잡지사에서 정치기사를 쓰던 애엄마가 해찬 형을 볼 때마다 내 안부를 묻는다고 해서 후원을 좀 부탁해 볼까 하고 언질을 띄웠다. 그러자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인편을 통해 1만 원짜리 1백 장이 든 봉투가 왔다. 당시 형은 초선의원이었다. 그 때는 후원회도 제도화되지 않은 시절이었다. 그 큰 돈이 그의 가처분 소득의 절반쯤 된다는 걸 알고 나서 날 믿는 선배의 마음을 확인했던 기억이 있다.
그런 분이 나에게 섭섭한 마음을 비친 적도 있었다. 2012년 열린우리당이 거의 공중분해되고 민주세력이 여러 갈래 찢어졌을 때 나는 재야 민주세력의 일원으로 오충일 목사님 등을 따라 이른바 대통합민주신당을 만드는 데 합류했다. 내 역할은 국민경선위원, 민주신당의 대통령후보를 내는 일이었다. 정당 최초의 디지털 경선이라 했는데 손학규 정동영 이해찬 등이 참여했다. 민청련 출신 김찬과 내가 경선위원이라고 인사하자 사뭇 기대하는 듯했다. 그러나 이 룰의 허점을 잘 파고든 정동영 후보측이 결국 승리해 대통령후보가 되었다. 국민경선인단을 많이 모집한 쪽이 이기는 게임이었다. 도중에 이해찬 후보 진영으로부터 강력한 어필이 있었지만 나로서도 어쩔 수가 없었다. 그리고는 사상 최대 표차로 민주당은 정권 재창출에 실패했다.
하지만 그 때 뿐이었다. 그 후로도 간간히 스칠 때마다 형은 내게 미소를 거두지 않았다. 70년대 학번 동지들과 윤석열 낙선투쟁을 할 때 국회 어느 행사에서 뵈었는데 내가 무슨 일하는지 아는 척하며 말없이 등을 두드려 주셨다. 사람은 자신의 덕으로 반쯤 살고 나머지는 다른 사람의 덕으로 산다고 했는데 내가 그 짝이다. 십년을 못보고 살아도 언제나 내편이 되어 준 것 같은 사람, 한때의 믿음만으로 끝까지 인정해주는 사람. 이해찬 선배를 만난 건 나의 복이다. 이제 곱절로 돌려 드릴테니 저승의 복으로 쓰시길 간절히 바라나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