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석의 한글철학 ㊱] 길알줄(道德經), 참 깨는 빛줄 [카테고리 설정이 아직되어 있지 않습니다.] ‘도덕경(道德經)’은 우리말로 ‘길알줄’이다. 도는 ‘길’이요, 덕은 ‘속알’이요, 경은 ‘날줄’이지 않은가. 길에 ‘참’이 있으니 또한 ‘참알줄’이리라.
노자 늙은이 4월(章)에 길은 고루 뚤렷 ᄒᆞㅣ, 씨우오라. 아마 채지 못ᄒᆞ지 ᄅᆞ.”라고 했다. 길은 고루 뚫려 뚜렷하고, 가온데로 텅 비어 밑없다. 그러니 채우지 못할 터. 뚫린 길을 저 없이 간다. 저는 ‘제나’다. 저 없으니, 밑없고 끝없고 한없다. ‘없’ 하난데 무엇이 있을까?
40월에는 도라ᄀᆞ는 이 길 가 움직이오. 므른 이 길 가 쓰오. 셰상의 몬이 있에 남. 있이 없에 남.”이라 하였다. 돌아가는 이는 길을 휘감아 가면서 움직인다. 무른 이도 길을 휘감아 가면서 쓴다. 길은 휘감으면서 늘 움직일 뿐이요, 길은 휘감으면서 늘 쓸 뿐이다.
휘감아 돌아가는 길에 ‘저’가 없다. 오가면서 돌아가는 자리는 비었으니까. 무를 약(弱)은 궁궁(弓弓)이 한꼴로 ‘둥근 없’에 빛숨(易)이 휘감아 도는(숨 쉬는) 꼴이다. 길이 ‘나없’(無我)으로서 간다. 내가 길을 닦는 게 아니다. 길에 ‘몸’을 닦을 뿐이다. 그래야 비어 찬다. ‘참꼴’(眞身)이 된다. 길은 늘 ‘나없’으로서 간다. ‘나없’으로 가면서 쓴다. 있에 난 몸(몬)이지만, 길을 몸에 닦아서 ‘앗숨’이 트인다. 이제 길은 ‘빈몸’에 숨돌리면서 쓸 뿐이다.
몬(物)에 씨(種)요, 씨 ‘앗숨’에 깨어난 비(虛)다. 본디 비(虛)에 씨(種)요, 씨에 몬(物)일 터. 하지만 길은 몬에 씨요, 씨 ‘앗숨’에 비다. 몬(몸)에 앗숨 깬 빈탕이다. 몬(몸)에 고루 뚫려 뚜렷하니 그 뚫린 길이 텅 비어 찬 ‘참’이다. 비어 찬 참을 알아차리는 알(知)이 슬기(智)요, 슬기슬기 알로 숨빛 돌리는 ‘속알’(德)이다. 그런 속알이 우주 올로 내리오르며 휘감아 꿴 빛숨이 ‘줄’(經)이다.
서구의 ‘로고스’나 동양의 ‘타오(道)’를 넘어, 우리말 ‘길’로 올바른 참이 고디(貞) 선 벼리이겠다. 그저 읽는 말씀(經典)이 아니라, 끊어진 얼줄을 이어서 산 목숨(生命)을 살리는 빛줄이리라. 이 줄을 곧이 세우고 빈탕을 타면서 날벼락 번개로 내리쳐야 깨지리라. 참! 하나 숨.
[다석의 한글철학]에 가져다 쓴 노자 늙은이 풀이는 다석 류영모의 것이다. 있는 그대로 가져왔기에 띄어쓰기, 하늘아(), 이어쓰기를 그대로 두었다. 또한 이 글에 가져다 쓴 다석어록”은 1993년 홍익재에서 펴낸 『씨ᄋᆞᆯ의 메아리 다석어록: 죽음에 생명을 절망에 희망을』이 온통이다. 여기서 가져왔다.
열쇳말: 참-알-줄-말숨-얼나
그림1) 단원 김홍도의 ‘습득도’(拾得圖)이다. 비단에 담채, 21.5x 15.2cm, 조선(18세기), 간송미술관 소장. ‘습득’은 당나라 천태산 국청사(國慶寺)에서 활동했던 사람으로, 보현보살의 난꼴(化身)로 우러렀다. 그는 늘 실실 웃으며 삶의 안쪽을 깨트려 바깥을 열었던 승려였다. 미쳐야 미친다. 찌든 누리의 법을 뛰넘어 깨달은 이다. 참, 하나는 여기를 뛰넘는 이제로 거듭나야 이룬다.
#1. 참(眞), 하나
깨야 끗
지금은 ‘참’을 두드리지 않는다. 두드려야 길이 온다. 지금은 두드리지 않는 그런 때인가 한다. 진짜 가짜가 뒤섞여 ‘참꼴’을 알아차리기 어려운 뒤범벅 세상이다. 꽃고운 티 낸 겉모습에 아찔하고, 어지러운 말솜씨가 판친다. 저마다 ‘저’를 내세우며 제것을 좇아 내달린다. 그것은 잠시 있다가 사라질 ‘하고픔’의 물거품이리라. 다석 류영모는 말을 비틀어서 꾸짖는다. 이 상(常)놈아!” 하고. 다석은 이 상(常)놈. 심상(尋常)하게도 무상(無常)한 물신(物神). 이상(異常)하게도 비상(非常)한 정신(精神).”이라 했다. 상놈은 쌍놈이 아니다. ‘참’은 굳었고 ‘늘’은 잊혔다. 그저 등불에 날아드는 불나방처럼 ‘더 더’라는 ‘덫’에 갇혀 사는 얼빠진 사람일 뿐이다. 모두는 ‘상놈’이 되어가는지 모르겠다. 다시 ‘참’을 켜야 하리라. 노자 늙은이는 길 옳단 길이 늘길 아니고, 이를 만한 이름이 늘이름 아니오라.”(1월)고 했다. 깨야 ‘끗’이다. 그래야 환하다. ‘늙은이’에 길이 있다. 다석은 노자를 ‘늙은이’라 했다. 글쓴이는 『도덕경』은 ‘길알줄’로 풀었다. 이를 또 ‘참알줄’로 바꾸어 불렀다. 길에 참이 있으므로. 길(道) 알(德)로 줄(經)을 환히 태우라. 참나를 모르고 있는 동안은 잠을 자고 있는 것이나 다름이 없다. ... 한잠 자고 깨야 한다. 참나인 한아님을 알아야 한다.”(다석어록)
스스로 늘길
다석은 도(道)를 ‘길’로 풀었다. 그 길은 눈으로 보고 발로 밟는 흙길이나 아스팔트 길만이 아니다. 길 옳단 길이 늘길 아니고,”라 하지 않았나. 이것이 길이다”, 이것이 옳다”라고 말하는 순간, 그것은 이미 지나버린 굳은 껍데기에 불과하다. 늘 있는 그대로의 길, 즉 ‘늘길’(常道)은 이름 지을 수도 없고 꼴을 그릴 수도 없다. 오직 끊임없이 바뀌어 돌아가는 ‘늘길’만이 참이요, 길의 본바탕이다. 다석에게 길은 곧 참이다. 가기 위한 잔꾀가 아니다. 길은 그 스스로 이루는 눈이고 목숨․산숨(生命)이다. 예수가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라고 했다. 스스로가 길이요, 스스로가 참이요, 스스로가 산숨(生命)이란다. 그러니 ‘스스로’에 길이 있고, 참이 있고, 산숨이 있다. 스스로를 말미암아야 한다. 산숨에 스스로요, 참에 스스로요, 길에 스스로다. 스스로 이루는 눈이다. 그래야 참이 길 저절로 나타난다. ‘참알줄’에는 써먹을 따위의 앎이 없다. 온날을 한껏 뚫어 보아도 그런 앎은 쌓아지지 않는다. 오히려 나타나 뵌 글에 눈 뜨이면 ‘길’이 속에 깨어난다. 옳고 그른 길, 남들이 만들어 놓은 헛길이 아니다. 길은 고루 뚤렷 ᄒᆞㅣ, 씨우오라.”(4월)의 길은 스스로 저절로 뚫린 땅하늘 돌아가는 길, 그 길이다. 다석은 이 길을 가리켜 사람이 한아님께 가는 길”이라 하였으니, 이 길만이 비로소 우리를 영원한 산숨으로 인도하는 참길인 것이다.
없이 계시는 참
그렇다면 ‘참’은 어디에 있을까? 어떻게 참이 깨어나게 할 수 있을까? 다석은 ‘빈탕한데(虛空)’를 말한다. 거기 그 자리에 ‘맞혀 놀이’하라고 한다. 그 가온데에 하늘아(․)를 콕 찍으라고 한다. 그래야 깨어난다고! 그러나 빈탕한데는 눈에 보이지 않는다. 눈에 보이는 것, 손에 잡히는 것은 모두 ‘있’(有)의 세계다. ‘있’은 언젠가 낡고 부서지고 흩어져 사라진다. 그 ‘있’이 생겨나고 돌아가는 바탕인 ‘없’(無), 즉 빈탕은 늘 그대로다. 텅 비어 있지만, 그 속은 ‘검얼 숨’(神靈之氣)이 가득 돌아간다. 잘몬(萬物)을 내고 낳고 기르는 ‘감ᄒᆞᆫ’(玄)의 빛숨이다. 다석은 그렇게 끝없이 감아 돌아가는 ‘감ᄒᆞᆫ’을 ‘없이 계시는 님’이라 했다. 맑안 ᄒᆞ이, 아마 있지 ᄅᆞ. 나는 기 누구 아ᄃᆞᆯ인줄 몰라.”(4월) 곧 그 님이 한ᄋᆞ(大我), 한늘(宇宙), ᄒᆞ실(一)이다. 한ᄋᆞ는 하나님, 하늘은 하느님, ᄒᆞ실은 하는님이다. 참은 꽃에 있지 않다. 그 꽃을 피워낸 ‘빈탕’에 있다. 빈탕이 참이다. 다석이 그렇게 말했다. 늙은이(老子)는 21월에 그 알짬이 아주 참, 그 ᄀᆞᆫᄃᆞㅣ 믿음이 있”이라 했다. 겉은 어릿어릿하고 흐릿하여 종잡을 수 없지만, 그 깊은 속은 산알의 ‘알짬’이 꿈틀거린다. 이것이 바로 참이다. 거짓은 겉을 꾸미느라 요란하지만, 참은 속이 비어 차 있어 고요하다. 뒷경치로 흐르는 텅 빈 ‘참’에 눈 맞추라. 다석은 일찍이 빈탕은 아무것도 없는 것이 아니라, ‘없이 계시는 님’이 가득 차 있는 참의 본바탕”이라 하였으니, 우리가 그 빈탕에 눈뜰 때 비로소 ‘참’이 깨어나리라.
몸을 빼
땅하늘은 하나로 ‘맟’이다. ‘맞춤’에는 사이 새가 없다. 말로는 땅과 하늘”이라고 하여 ‘사이’를 벌린다. 그런데 땅하늘에 사이 새가 어디 있는가? ‘~과’ 따위는 없다. 눈 크게 뜨고 보라. 사이 새는 없다. 딱 맞추어 붙었으니 ‘마침’이다. ‘맟’이다. 아주 붙은 ‘맟’이 참이다. 비어 찬 참이다. 그런 참은 땅하늘에만 있지 않다. 다석은 길을 몸에 닦아서 그 속알이 이에 참하다.”(54월)고 풀었다. 길을 몸에 닦으니 속알이 참하단다. 놀랍지 않은가? 그런 속알은 싱싱하다. 싱싱한 참은 굳은 생각 따위가 아니다. 싱싱한 사슴뿔(生角)이다. 온몸에 소소소 싱싱한 싹이 돋는다. 그렇지만 제 아무리 좋은 말로 ‘참’을 떠들어도 살아내지 못하면 거짓이다. 몸성히, 맘놓이, 뜻태우(바탈태우)”하는 하루하루에 참이 솟는다. 제 잇속만 차리는 ‘제나’는 깨져야 한다. 깨진 자리가 참이다. 참을 몸에 닦는다. 일을 이루고, 이름이 나게 돼선, 몸을 빼, 믈러나는 것이 하늘 가는 길.”(9월) 깨어난 산알 얼은 나날을 산다. 나죽지 않는다. 이 ‘얼나’야말로 늘 두드려야 할 오롯한 ‘참’이다. 참이 열리는 순간이 ‘한ᄋᆞ’ 곧 ‘큰나’(大我)다. 비로소 ‘참사람’(眞人)이다. 깨끗이다. 다석은 참은 보이지 않으나 몸으로 실천할 때만 비로소 나타난다”고 하였다.
하나 얻은 이
세상은 자꾸만 쪼개고 나눈다. 너와 나로 가르고, 내 편과 네 편으로 나눈다. 그놈의 ‘와/과’가 문제다. 땅하늘이라 했듯이 그냥 ‘너나’여야 한다. ‘너나’로 한꼴이면 ‘없’다. 너나 한꼴로 ‘없’이면, ‘비롯’이다. 그런데 세상은 너와 나”로 가른다. 그러니 ‘다툼’이 끊이지 않는다. 참은 오롯하다. 오직 하나다. 늙은이 39월에 옜날에 한아 얻은 이”가 나오듯, 땅하늘은 ‘하나’로 온새미로요, 골도 ‘하나’로 온새로미로다. 잘몬(萬物)은 이 ‘하나’를 얻어서 온새미로다. 다석은 그래서 『천부경』의 일석삼극(一析三極)을 ᄒᆞᆫ 푸리 ․ 셋 : 가장”이라 하였다. 하나가 풀려서 ‘셋’인데, 그 셋이 ‘가장’이라는 것이다. ‘ᄒᆞᆫ 푸리’는 ‘크게 풀렸다’는 뜻이요, ‘한 뿌리’라는 뜻이다. 쪼개진 게 아니다. 하나가 쪼개지면, 하늘은 찢어지고 땅은 갈라지고 사람은 흩어진다. 이둘은 한끠 나와서 달리 이르(브르)니, 한끠 일러 감ᄋᆞ,”(1월)라 하지 않았나. ‘없있’을 일러 ‘감ᄋᆞ’란다. 이 둘은 휘감아 오르내리는 하나다. 참을 두드리는 일은 이 ‘하나’로 휘감는 일이다. 다석은 천 가지 만 가지 말을 해도 결국은 하나밖에 없다”고 외쳤다. 그 하나는 시작도 끝도 없는 ‘늘’이요, 안팎 없는 ‘온통’이다. 온 마음을 모아 한 점으로 깨고 난 뒤에, 이 오롯한 하나로 솟아야 하리라. 속에 속 씨알인 ‘바탈’(本性)을 태워 환한 얼빛을 밝혀야 하리라. 그래야 모둔 몸이 맑게 살아나리라. 다석은 하나를 찾아야 한다. 하나는 온전하다. 모든 것이 하나를 얻자는 것이다.”라고 했다.
그림2) 이수민의 ‘좌수도해’(坐睡渡海)이다. 종이에 담채, 20.5x26.0cm, 간송미술관 소장. 그림 속 사람은 물결이 일렁이는 큰 바다에서 조그만 나뭇잎이나 갈대(혹은 아무것도 없는 빈탕)를 의지한 채, 눈을 감고 깊은 ‘ᄋᆞᆷ’에 빠져 있다. 이는 거친 세상 속에서도 마음이 흔들리지 않는 텅 빈 ‘고요’를 뜻한다. 오롯이 온새미로다! 이 그림은 억지 부림 없는 ‘함없’의 배를 타고, 제나의 잠 속에서 얼나의 눈을 뜨다.”라고 해야 하리라.
#2. 알(知/核), 속에 여문 산알
낮춘 낮힘
흔히들 좀 아는 듯하면 ‘안다’고 굳게 내세운다. 보고 들은 것이 얼핏 생각나면 그 또한 ‘다 안다’고 느낀다. 다석 류영모에게 ‘앎’은 그런 껍데기가 아니다. 우리말 ‘알다’의 뿌리는 ‘알’(核)에 있다. 달걀이 겉은 딱딱한 껍질이지만 그 속에서 목숨(生命)이 자라듯, 참 앎이란 속 깊은 곳에 산알이 저절로 무르익는 것이다. 다석은 성(性)은 만유근원(萬有根源)이다. 심신(心神)의 본체요, 만유의 근원인 성을 잊어버렸다. 성을 찾아야 한다.”라고 했다. 바로 이 성이 속의 속알이다. 알이란 겉이 아닌 속으로 무르익는 숨빛이다. 속으로 듬직하게 익어가기에 ‘알’이요 ‘앎’이라 하는 것이다. 곡식이 알알이 여물어 고개를 숙이듯, 참으로 아는 사람은 저를 낮춘다. 쭉정이는 고개를 치켜 쳐들지만, 알찬 이삭은 고개를 낮추어 숙인다. ‘길알줄’을 통해 찾고자 하는 ‘알’은 바로 이 속이 ‘알짬’(精)으로 꽉 찬 산알의 고맹이다. 늙은이는 기잎음이여, 잘몬의 마루 같고나.”(4월)라고 했다. 다석이 맘은 궁리(窮理)하자는 것이다. 궁리란 이치(理致)를 찾는 것이다. 용심(用心)하면 궁리가 되고 궁리를 자꾸 하면 품부(稟付)함을 더 받아서 그 바탕을 다해가면 목숨에 이를 수 있다(以至於命).”라고 한 까닭이다.
앓음알이
알아서 밴 제 앎의 ‘알음알이’는 거저가 아닐 터. 오래 앓아야 한다. 정신은 거저 깨어나지 않는다. 가난과 고초를 겪은 끝에 정신이 깨난다.”(다석어록)라고 했다. 그것이 ‘알음앓이’다. ‘알(앎)’은 ‘앓이’로 배어든다. 어미 닭이 알을 품고 때를 견뎌야 병아리가 깨어나듯. 참에 깨나기 위해서는 온가슴으로 ‘낳’을 앓아야 한다. 나고 내고 낳는 아픔이다. 깊이 앓아야 깨지고 오래 앓아야 터진다. 머리보다 먼저 가슴으로 삭혀 앓아야 뚫린다. 쪼개고 파헤치는 따위는 헌 앎에 불과하다. 산알의 알음알이는 온몸으로 부딪혀 끙끙 앓은 뒤에야 얻는다. 그때서야 비로소 피가 되고 살이 되는 ‘참알’(眞覺)이 솟는다. ‘알음앓이’가 깊을수록 속알은 단단해지고 껍질은 얇아진다. 다석이 철학을 ‘알맞이’라고 한 까닭이다. 귀한 손님처럼 알을 맞이해야 한다. 참으로 귀하게 ‘맞이’하여 깨어난 ‘알’이 곧 알맞이다. ‘알맞이’하는 자리, 그 자리는 늘 비어 있다. 가득가득 비어서 텅텅 채워지는 자리에 ‘앗숨’이 먼저 씨를 낸다. 씨앗이 튼다. 그런 뒤에야 숨빛이 환하다. 다석은 고난은 생명의 밥이다. 고난이 없으면 생명의 발달이 없다.”라고 했다. 늙은이가 쉽고, 어렵이, 되돌고.”(2월) 하지 않았나!
알짬 속알
다석철학에서 ‘알’은 ‘씨알’과 ‘속알’로 나타난다. ‘씨알’은 민중을 뜻하고 식물의 씨앗을 뜻한다. 그 본질은 ‘하느님 씨앗’이다. 너나 모두의 마음속에는 하늘이 내어 놓은 거룩한 목숨의 씨눈이 있다. 이것이 씨알이다. 겉꼴은 보잘것없는 흙덩이 같아도, 그 속에 집집 우주를 품고 있는 씨알이다. 이 씨알이 썩고 문드러져 껍질을 터뜨릴 때, 비로소 산알의 싹이 트고 ‘큰나’로 자라난다. ‘속알’은 덕(德)의 우리말이다. 겉치레 겉멋이 아니라 속이 가득 찬 속알이다. ‘않’(內)이 무르익었다는 뜻이다. 다석은 속알은 인간성이요, 신성(神性)이요, 인격이다. 내 마음 속에 온 한아님 아버지의 형상이다.”(다석어록)이라 했다. 속알이 들어야 사람이다. 속알이 없는 사람은 ‘소갈머리 없는 놈’이 된다. 텅 빈 마음(빈탕)에 하느님 뜻을 채워, 남에게 베풀고 세상을 살리는 힘, 그것이 바로 ‘속알’이다. 속알이 꽉 찬 사람은 흔들리지 않고 무겁다. 그 묵직함이 곧 ‘알짬’이다. 노자 늙은이는 잘몬이 니는데, 말라지 않고. 낳나, 가지지 않고.”(2월)라 했다. 그래서 다석은 ‘속알’이란 덕(德)이란 한자의 옮김인데 창조적 지성이란 말이다. 솟구쳐 올라 앞으로 나아가는 지성(知性)이 속알”이라고 했다.
하느님 씨알
알은 깨어나야 한다. 알 속에 머물러 있으면 결국 썩어서 달걀 프라이가 되거나 곯아버린다. 스스로 껍질을 깨고 나와야 ‘참나’가 되어 땅하늘을 돌아간다. 여기서 여기서 껍질은 바로 ‘제나(몸나)’다. 제 몸뚱이가 전부라고 믿는 ‘나가짐’(我執)과 ‘하고픔’(欲望)의 껍데기다. 우리가 ‘알’을 공부하는 까닭은 이 단단한 ‘제나’의 껍질을 깨뜨리기 위함이다. 노자 늙은이가 말한 ‘닦아남’(修)은 바로 이 알 깨기다. 닦고 또 닦아 제나를 얇게 하고, 마침내 ‘톡’ 하고 터뜨려 ‘얼나’로 솟구치는 것이다. 얼의 자유를 위해 몸은 죽어야 한다. 몸의 죽음이 없으면 얼의 자유도 없다.”(다석어록)고 했다. 이때 몸은 ‘제나’다. 한껏 꾸리고 꾸민 제나의 몸. 그런 제나는 한 번 죽어야 거듭난다. 얼나는 하느님 씨알로 거듭난 ‘참알’이다. 다석은 나를 본 자는 아버지를 보았다”는 예수의 말씀을 내 속에 있는 하느님의 씨(알)를 가리키는 것”이라 풀었다. 내 안의 알을 보는 것이 곧 하느님을 뵈는 것이다. 노자 늙은이는 그 ᄆᆞᆷ이 븨이고, 그 배가 든든 ᄒᆞ고. 그 뜻은 므르고, 그 뼈는 셰오라.”(3월) 했다.
모름직이
알의 완성은 ‘모름’에 있다. 다석은 ‘모름직이’ 곧 모르는 줄을 아는 것”이 으뜸가는 앎이라 했다. 내가 가진 앎은 한 줌 티끌이다. 끝없이 큰 집집 우주는 오직 모를 뿐이다. ‘숨은 감ᄋᆞᆷ’(玄牝)은 알 수 없어 오직 모를 뿐이다. ‘숨은 검’(神)을 그 스스로 고요할 뿐이다. 그 텅 빈 ‘모름’의 자리에 참된 ‘알’이 들어와 똬리를 트리라. ‘안다’고 뽐내는 이는 ‘제봐란이’로 꽉 차서 더 들어갈 틈이 없지만, ‘모른다’고 비우는 이는 하늘 뜻을 끝없이 받아들일 수 있다. 그러니 ‘참알’은 썩먹을 앎을 쌓는 게 아니다. 오히려 그런 앎은 ‘끝이 있다’는 걸 깨닫고 스스로 비우는 ‘앎없’(無知)의 ‘알’(知)”이다. 노자 늙은이는 늘 씨알이 못된 앎이 없게, 못된 ᄒᆞ고ᄌᆞᆸ이 없게, ᄒᆞ이금.”(3월)이라 했고, 다석은 모르면서 아는 체험은 어리석고 굳은 짓이오, 아무 것도 모르는 자기임을 깨달으면 신비의 아버지를 만나리라(知不知神秘).”고 했다. 너나는 이제 ‘참’에 눈길을 주고 ‘알’이라는 씨앗을 품어야 한다. 이 알을 새 씨앗으로 길러내기 위해서는 하늘과 나를 이어주는 튼튼한 ‘줄’이 필요하다. 그 산숨의 탯줄이. 이제 ‘줄’을 이야기해 보겠다. 가슴 속에 심긴 이 ‘알’ 하나가 ‘알음앓이’를 통해 단단한 ‘속알’로 여물어가리라.
그림3) 현재 심사정의 ‘선동도해’(仙童渡海)이다. 종이에 수묵담채, 22.5x27.3cm, 간송미술관 소장. 그림 속 사람은 ‘아이’다. 아이는 갈대 한 잎(또는 작은 나뭇가지)에 몸을 싣고 있다. 이는 밀어내는 힘이나 아주 큰 배(제나의 꾀)가 아니라, 오직 하나의 줏대로 바로 선 ‘얼줄’에 의지해 삶의 물결을 넘어서는 모습을 보여준다. 이 그림은 가냘픈 갈대 줄기 하나에 온 우주의 숨결을 싣고, 제나의 바다를 건너 얼나의 언덕으로 솟구치는 구나.”라고 해야 하리라.
#3. 줄(經): 땅하늘 잇는 벼리
땅하늘 날줄
우리는 흔히 성경(聖經), 불경(佛經), 도덕경(道德經)이라 하여 ‘경’(經) 자가 붙은 책을 거룩하게 생각한다. 하지만 그런 책들을 눈으로만 읽고 입으로만 외운다면 그것은 종이 쪼가리에 불과하다. 다석 류영모는 ‘경’을 우리말 ‘줄’로 풀었다. 베틀에서 천을 짤 때 세로로 놓이는 ‘날줄’이 바로 ‘줄’(經)이다. 씨줄이 이리저리 왔다 갔다 하며 무늬를 만들 때, 날줄은 꼿꼿하게 서서 그 모든 움직임의 가온데(中心)를 잡아준다. 옷감이 짜지려면 날줄이 먼저 팽팽하게 걸려 있어야 하듯, 우리 삶이 제대로 무늬를 놓으려면 맘속에 변치 않는 ‘줄’ 하나가 서 있어야 한다. 이 줄이 없으면 삶은 헝클어진 실타래가 되고 만다. 그러므로 『도덕경』, 아니 『길알줄』은 읽는 책이 아니라, 물에 빠진 사람이 동아줄 잡듯이 죽을 힘을 다해서 ‘잡아야 할 줄’이다. 다석은 우리 앞에는 영원한 생명인 정신의 줄(絲) 곧 얼줄이 늘 늘어져 있다. ... 이 한 얼줄을 잡고 좇아 살아야 한다.”라고 외쳤다.
꿰뚫은 얼줄
이 줄은 어디서 왔을까? 땅에서 솟은 게 아니다. 땅하늘에 솟은 용오름이다. 다석은 이를 ‘얼줄’이라 불렀다. 마치 숨은 거미가 제 꽁무니에서 줄을 내어 빈 하늘에 매달리듯, 우리도 보이지 않는 빈탕에서 내려온 얼줄에 매달려 사는 ‘있몬’(存在)이다. 사람(人)이라는 글자를 보면, 하늘(一)과 땅(一) 사이를 뚫고 서 있는 꼴이다. 머리는 하늘을 이고 발은 땅을 디뎠으나, 그 가온데를 꿰뚫고 솟은 것이 한 가닥 ‘얼줄’이다. 다석은 한 금(線)을 내려 그은 줄 ‘ㅣ’를 이라고 발음하며 영원한 진리의 생명줄을 말한다.”라고 했다. 이 줄이 끊어지면 우리는 흙으로 돌아가는 ‘몸뚱이’에 불과하다. 하지만 이 줄이 이어져 있으면 죽어도 죽지 않는 ‘얼나’가 된다. 우리가 노자 늙은이의 『길알줄』을 공부하는 것은 흐릿해진 이 얼줄을 크게 깨닫기 위해서다. 단단히 부여잡기 위해서다. 늙은이는 옛 가는 길 잡아 ᄀᆞᆫ 서 이제 가는 있을 꿜음이 옛 비롯을 아는 나위니, 이 일러, 길날.”(14월)이라 했다.
한 벼리
어부는 그물을 던질 때 그물코 하나하나를 잡지 않는다. 그물 온통을 잡아낸 굵은 줄 하나를 붙잡는다. 곧 ‘벼리’(綱)다. 한 벼리에 그물코가 만 개다. 저절로 따라온다. 다석은 『길알줄』 여든 한 개 글월을 바로 이 ‘길벼리’(道紀)로 보았다. 세상일은 복잡하고 어지러워 보인다. 그렇지만 그 바탕이 되는 ‘줄’(벼리) 하나만 딱 잡으면 모든 게 끝이다. 차례 차례로 제자리를 찾는다. 세상이 세운 알알이(知識)는 그물코처럼 아주 많고 어지럽다. 그것을 쫓아다니며 다 알려고 하면 삶이 피곤하다. 하나를 알고 살면 다른 것은 몰라도 괜찮다. 나는 하나밖에 모른다.”(다석어록)라고 했다. 그러므로 ‘참’이라는 벼릿줄 하나를 잡으면, 세상의 온갖 알알이와 나타난 꼴들이 ‘하나’로 꿰진다. 노자 늙은이는 하늘그믈이 넓직 넓직 섬글되, 잃지 않오라.”(73월)라 했고, 39월에는 한아 얻은 이로,” 하나를 얻어서 맑게, 편안케, 령케, 참으로, 삶으로 쓰고, 또 하나를 얻어서 셰상고디 된다고 했듯이, 이 줄은 만물을 하나로 꿰뚫는 우주의 등골이다.
속곧섬기
벼릿줄은 팽팽해야 한다. 느슨해지면 버티는 힘을 잃고 만다. 다석은 이 탄탄한 긴장을 ‘고디’(貞)라 했다. ‘곧이’, ‘곧장’이라는 말도 여기서 나왔다. 마음이 한눈팔지 않고 땅하늘로 곧게 선 꼴짓(常態), 그것이 ‘고디’다. 다석은 머리를 하늘에 두고 곧곧하게 땅을 딛고 반드시 서야 우리는 산다. 곧이 곧게 하늘을 그리워하는 것이 정신이다.”라고 했다. 줄을 잡은 사람은 비굴하게 굽히지 않는다. ‘굽어 곧음’은 빈 속의 저절로 둥긂일 뿐 ‘비굴함’이 아니다. 세상의 꾀어냄(誘惑)과 으름질(威脅) 앞에서도 꼿꼿하게 제 길을 간다. 늙은이는 18월에 나라 집이 어둡어지럽자 속곧섬기 뵈져났오라.”고 했다. 세상이 흔들릴 때일수록 속이 곧은 사람은 더욱 빛난다. ᄀᆞᆫ 직힘만 같지 못.”(5월) 그가 잡고 있는 줄이 땅하늘에 닿아 있기 때문이다. 우리가 줄을 ‘잡는다’는 것은 좋은 낌새를 바라는 게 아니다. 내 속의 어진 ‘ᄆᆞᆷ’(良心)과 얼을 꼿꼿하게 세워 비바람 치는 세상에서도 ‘바른길’을 가겠다는 다짐이다.
없는 줄
살다 보면 줄이 끊어질 때가 있다. 하고픔 따위에 눈이 멀어 줄을 놓치기도 하고, 괴로움 따위에 겨워 줄이 삭아버리기도 한다. 그때 가져야 할 것이 ‘이음길’이다. 다석은 기도를 ‘하느님과 나를 잇는 줄’이라고 했다. 끊어진 줄을 다시 매는 간절한 마음, 그것이 ‘닦아남’(修行)이고 ‘믿바람’(信仰)이다. 생명은 끊어지면서 줄곧 이어가는 것이다. 오래 살려면 실줄을 자꾸 물려줘야 한다.”(다석어록)라고 했다. 또 노자 늙은이는 가는데 줄이 없고,”(69월)라 하지 않았나. 참된 줄은 눈에 보이지 않는다. 꼴이 없는 줄이기에 칼로 자를 수도 없고 불로 태울 수도 없다. 이 ‘없는 줄’이 가장 센 줄이다. 늙은이는 도라ᄀᆞ는 이 길 가 움직이오.”(40월)라 했다. 우리가 잡아야 할 줄은 썩은 동아줄인 ‘돈줄’이나 ‘권력줄’이 아니다. 이제로 늘 썩지 않는 땅하늘의 ‘참줄’이다. 이제 너나는 ‘참’을 알고, ‘알’을 품고, ‘줄’을 잡아야 하리라. 이 든든한 산알줄로 ‘ᄆᆞᆷ’을 휘감고, 저 거친 세상 파도 속으로, 제 맘대로의 항해를 떠나보라. 너나는 젖지 않으리라. ‘길알줄’이 너나를 저절로 저 피안(彼岸)의 언덕으로 이끌어 주리라.
그림4) 단원 김호도의 ‘승하좌수도해’(乘蝦坐睡渡海)이다. 종이에 담채, 26.6x38.4cm, 간송미술관 소장. 새우 ‘하’(蝦)는 연잎이나 갈대를 뜻하는 ‘하’(蕸)와 소리가 같다. 달마가 갈대를 타고 바다를 건넜다는 ‘단위도해’(單葦渡海) 옛 이야기를 단원이 해학으로 비틀어 새우로 나타냈다. 굽은 새우 등은 늙은이를 뜻한다. 거센 세상살이 다 겪고 깨달음에 이른 늙은이의 슬기를 드러낸다. 작은 아이는 거친 물결이 치는 바다에서 아랑곳하지 않고 고개를 떨군 채 깊은 잠(혹은 고요)에 빠져 있다. 어떤 바람결에도 흔들리지 않는 ‘오롯한 평온’이다.
#4. 말숨(言息): 얼 깨우는 산알 숨
숨통
책을 볼 때는 눈으로 글자를 좇고 머리로 뜻을 헤아린다. 다석 류영모에게 책읽기는 그런 게 아니었다. 『도덕경』을 풀면서 그이는 ‘늙은이’로 말숨을 쉬는 데에 있다고 생각했다. ‘말숨’이란 무엇일까? ‘말’(言)과 ‘숨’(息)이 하나 된 것이다. 말이 곧 숨이고, 숨이 곧 말이다. 우리가 코로 공기를 들이마셔 몸을 살리듯, 입과 마음으로 참말을 들이마셔 얼을 살리는 ‘짓거리’(行爲)가 바로 말숨이다. 다석은 말숨(말씀) 쉬는 것이 한아님을 믿는 것이요, 한아님을 사는 것이다.”(다석어록)라고 했다. 그러므로 이 공부는 알알이를 쌓는 책읽기가 아니다. 얼의 숨통을 크게 키우는 ‘익힘’(修練)이다. 글자 속에 갇힌 죽은 뜻을 파내는 게 아니다. 글자가 품고 있는 산알의 ‘숨돎’(氣運)을 몸속으로 빨아들여 피와 살로 돌리는 세찬 산알 소용돌이다. 노자 늙은이는 말 않고 가르쳐 온대로 가오라.”(2월) 하지 않았나.
말씨에 씨말
말숨 쉬기 위해서는 먼저 말의 씨앗을 알아야 한다. 우리말 속에 깃든 깊은 뜻을 ‘말씨’라 하고, 앞으로 산알이 될 말은 ‘씨말’이라 한다. 제소리 말씨는 제절로 씨말이다. 거짓 멋부린 말씨는 썩은 씨말이다. 땅하늘 울리는 제소리는 오롯이 산알 숨에 있다. 산알 숨 가진 말씀으로 ‘말숨’ 쉬어 ‘말슴’이 되어야 하리라. 농부가 밭에 씨를 뿌리듯, 다석은 한글이라는 밭에 우주 이치를 담은 씨말을 심어 놓았다. ‘가온찍기’, ‘빈탕한데’, ‘속알’, ‘얼나’ … 이 낯설지만 정겨운 우리말들은 단순한 ‘말뭉치’(語彙)가 아니다. 그 속에 우주 산알힘을 품고 있는 씨눈들이다. 우리가 이 씨말들을 입으로 읊조리고 마음으로 되새길 때, 그것은 내 속에서 싹을 틔우고 자라나는 씨알의 참꼴(實體)이 된다. 늙은이는 기잎음이여, 잘몬의 마루 같고나.”(4월)라고 했다. 말숨을 쉰다”는 것은 이 씨말들을 내 마음밭에 심고, 정성껏 가꾸어 꽃피우는 거룩한 여름질(農事)이다. 다석은 우리의 정신을 닦는다는 것은 말씀을 닦는 것이다. 생각이란 무엇인가. 말씀 닦는 것이다”라고 했다.
말숨에 말슴
다석철학에서 말글은 세 디딤돌로 깊어진다. ‘말씀-말숨-말슴’의 디딤돌 뛰기다. 첫째, ‘말씀’은 땅하늘에 잇닿은 참올(眞理)의 말글이다. 로고스(Logos)이자 길(道)이다. 이것은 우리 눈앞에 있는 그대로 놓인 참이다. 둘째, ‘말숨’은 그 말씀을 내 것으로 만드는 나날 흐름이다. 말씀을 숨쉬기에 실어 들이마시고 내뱉는 일이다. 이때 말씀은 딱딱한 껍데기를 벗고 나의 산알 윤슬과 하나가 된다. 다석이 코로 쉬는 숨이 몸을 살리고, 말숨으로 쉬는 숨이 얼을 깨운다”고 말한 까닭이다. 셋째, ‘말슴’은 마침내 삶으로 몸에 배어 ‘살살이’(肉化)된 말씀이다. 살살이에 삶살이로 하나다. ‘삶’과 ‘씀’이 하나 된 경지다. 말은 하늘 마루꼭대기에 있는 말이다. 우리는 그 말을 받아서 씀으로 한아님을 안다. 그래서 말씀이다.”(다석어록) 말숨을 깊이 쉬어 얼나로 거듭난 이는, 그의 삶이 온통 크고 큰 ‘말슴’이 되어 세상을 향해 울려 퍼진다. 늙은이는 소리와, 울림이, 맞,어우름.”(2월)이라 했다. 벼락치듯 얼줄을 당겨 말씀이 조여지면 말숨이 트이고, 마침내 흔들리지 않는 ‘말슴’이 우뚝 서는 것이다.
맨 꼭대기
말숨은 비워지는 것이다. 채우는 게 아니다. 숨통(肺)에 숨이 가득 차면 새 숨을 들일 수 없듯, 우리 마음도 하고픈 ‘시픔’(欲心)과 딱딱한 ‘알알이’(智識)로 가득 차 있으면 참 말숨을 쉴 수 없다. 다석은 ‘빈탕한데 맞혀놀이’라고 했다. 그것은 빈탕한데에 맞혀 돌리는 땅하늘 놀이다. 텅 빈 빈탕(虛空), 그 빈탕의 ‘없꼭대기’(無極)에서라야 빈 숨이 돌아간다. 다석이 ‘없’을 강조한 까닭도 여기 있다. 다석은 인생은 피리와 같다. 피리는 속이 비어야 한다. ... 피리를 부는 이는 한아님이시다. ... 요는 맘이 비어야 한다. 허공이 피리의 본질이다.”이라고 했다. ‘없’은 그저 아무것도 없는 따위가 아니다. 온갖 것이 거기서 나와 살아가는 산알의 텅 빈 입이다. 우리가 말숨을 쉬는 것은 ‘제나’를 텅 비우고, 그 빈자리에 집집 우주 숨인 ‘한얼’이 깨어나는 일이다. 내 속에 하늘이 깨어 솟아 숨쉬는 그 얼덜(恍惚)의 모심, 그것이 바로 말숨의 맨 꼭대기다. 길은 고루 뚤렷 ᄒᆞㅣ, 씨우오라.”(4월)를 잊지 않아야 한다.
숨길
숨 가쁜 시대를 살고 있다. ‘쓸몬’(財貨), 움켜진 ‘쥔힘’(權力), ‘즐짓’(快樂)을 좇느라 헐떡이는 ‘하고픈 숨짓’만 눈에 띈다. 얼을 살리는 ‘고요한 말숨’은 잘 보이지 않는다. 끊어질까 두렵다. 숨이 끊어지면 몸도 죽음이듯, 말숨이 끊어지면 얼도 죽는다. 그래서 다석은 기도를 ‘숨쉬기’라 했다. 하느님!” 하고 부르는 그 한마디가 곧 숨구멍을 트는 일이다. 『길알줄』을 꿰는 일은 끊어진 하느님 숨길을 다시 잇는 숨쉬기다. 이제 우리는 입 다물고 귀를 열어야 하리라. 세상의 잡소리는 끊어버리고, 속 깊은 속에서 들려오는 저 들음 없이 들은 말(希言)”, 곧 말없는 소리에 귀 기울여야 한다. 다석은 우리의 기도는 정신적인 호흡, 바꾸어 말하면 성령의 호흡인 원기식(元氣息)을 두텁게 조심하여 깊이 숨쉬는 것이다.”라고 했다. 그러니 이제 천천히, 깊게, 다석이 건네주는 우리말 씨말들로 숨쉬기 해 보자. 그 말들이 내 속에서 피가 되고 살이 되어, 마침내 ‘얼나’로 솟구칠 때까지. 그 ᄆᆞᆷ이 븨이고, 그 배가 든든 ᄒᆞ고.”(3월)라 했다. 깊게 숨을 들이켜 보라. 오! 늘.”이다.
그림5) 김홍도의 ‘좌수도해’(坐睡渡海)이다. 종이에 수묵담채, 26.6x38.4cm, 간송밋술관 소장. 예부터 선종화는 달마가 갈대잎을 타고 바다를 건너는 ‘단위도해’(單葦渡海)를 주로 그렸다. 김홍도는 이를 비틀어, 갈대 대신 새우(蝦)를 등장시키거나 졸고 있는 이의 모습(坐睡)으로 그렸다. 그만의 ‘해학미’를 더했다. 이 그림을 거친 풍랑을 ‘모름’으로 베개 삼고, ‘없’의 잠 속에서 참의 언덕에 닿다.”라고 해야 할까.
#5. 얼나(靈我): 뚫고 솟구친 이
참 임자
우리는 ‘나’를 입에 달고 산다. 내가 했다”, 내 것이다”, 나를 알아달라”. 그런데 정작 그 나가 누구냐”고 물으면 꿀 먹은 벙어리다. 다석은 우리에게 두 개의 ‘나’가 있다고 가르진다. 하나는 몸뚱이와 하고픔에 갇힌 ‘제나’(自我)요, 다른 하나는 하늘로 깨어나 늘살이 하는 ‘얼나’(靈我)다. 제나는 ‘좀나’(小我), 얼나는 ‘큰나’(大我)다. 다석은 ‘좀나’와 ‘큰나’를 말했다. ‘제나’는 제 것만 아는 나다. 몸을 나라고 착각하고, 먹고픔(食慾)과 씹고픔(性慾), 이름고픔(名譽慾) 같은 ‘하고픔’을 채우는 데 한 삶을 바친다. 그러나 이 ‘몸나’는 언젠가 흙으로 돌아갈 껍데기다. ‘몸성히’를 바랄 일이다. 사라질 때 사라지더라도 ‘몸성히’로 아름답게 살아야 한다. 하지만 몸꼴 꾸미는데만 팔려서는 안 된다. 몸꼴로 영원을 바라는 건 헛짓이다. 그러면 삶이 괴롭다. 다석은 헛짓에 팔린 제나를 ‘원수’라고 했다. 그러면서 제나가 죽어야 얼나가 산다”고 꾸짓었다. 그리고 나(自我)가 죽어야 참나(眞我)가 산다. 완전히 내가 없어져야 참나다. 참나가 우주의 중심이요, 나의 임자다.”라고 힘주었다. 우리가 『길알줄』을 배는 까닭은 거짓 임자인 제나를 깨고, 참 임자인 얼나를 모시기 위함이다. 늙은이는 일을 이루고, 이름이 나게 돼선, 몸을 빼, 믈러나는 것이 하늘 마련대로 가는 길이ᄋᆞᆸ.”(9월)이라 했다.
얼의 씨
‘얼나’는 ‘얼’과 ‘나’를 더한 말이다. 얼은 줏대로 선 고디(精神)요, 검얼(神靈)로 솟는 숨빛이다. 얼나는 내 속에 계신 하느님 산알이다. 하느님 얼이 머리골에 내려와 계시니 그이가 곧 나다. 밤송이가 겉은 가시로 덮여 있지만 그 속에 알밤이 들어 있듯, 너나 속에는 하느님으로 계시는 ‘얼나’의 거룩한 불꽃이 타오르고 있다. 이것이 바로 얼빛의 ‘참나’다. 노자 늙은이는 21월에 그 ᄀᆞᆫᄃᆞㅣ 알짬이 있. 그 알짬이 아주 참.”(21월)이라고 한 것이 바로 이 얼나의 참꼴이다. 이어서 그 알짬이 아주 참, 그 ᄀᆞᆫᄃᆞㅣ 믿음이 있.”이라는 것도 알아 차려야 한다. 얼나는 늙지도 않고 아프지도 않으며 죽지도 않는다. 나죽지 않는다. 때곳을 뛰넘어 집집 우주로 계시는 ‘한아’(大我)이기에, 몸은 사라져도 늘 곳곳 어디에나 계신다. 다석은 내 속에 있는 한아님의 씨를 키워 성령이 나라는 것을 깨달아 아는 사람은 누구나 다 얼의 씨로 독생자이다.”라고 했다. 깜짝 놀랄 일이다. 오롯이 홀로 난 씨알이다. 그러니 ‘서로’는 ‘있’이나, ‘홀로’는 ‘없’이다. 오직 ‘홀로’에 휘감는 소용돌이다. 예수가 나를 본 자는 아버지를 보았다”고 했다. 그 ‘나’가 얼나다.
솟구침
얼나는 저절로 드러나지 않는다. 달걀이 껍질을 깨야 병아리가 되듯(몸 바꿈이다), 제나의 단단한 껍질을 뚫고 솟구쳐야 한다(얼 솟남이다). 임금 왕(王) 자를 풀이하며, 하늘(一)과 땅(一)과 사람(一)을 하나로 꿰뚫어(丨) 솟구친 ‘있꼴’(存在)이라 했다. 몸에 든 속알이 솟구쳤으니 ‘ᄆᆞᆷ’ 으로 가온찍기 돌리는 꼴이다. 이제 있는 그대로 ‘솟난이’다. 이 솟구침이 불숨(革命)이다. 거짓 나인 자아(自我)로는 죽고 참나인 신으로 솟나자는 것이다.”(다석어록)라고 하지 않았나. 땅을 기던 애벌레가 나비로 거듭나 하늘을 날 듯(이것은 몸이 바뀌는 꼴짓이다), 땅에 매였던 ‘알아차림’(意識)이 땅하늘 새없이 집집 우주 온통으로 거듭난 꼴짓에 그냥 그대로 ‘늘길’에 든다. ‘솟남’은 알아차림이 아니다. 있는 그대로 늘이요, 길일 뿐이다. 늘을 타고가는 길에 끊임없는 ‘솟남’이 저절로다. 나는 ‘참나’로서 나다. 너나 없다. 너나 없으니 알아차림도 없다. 그저 하나 한꼴로 ‘없’이다. 그 자리에 ‘비롯’이다. 까마득하다. 노자 늙은이는 16월에 가장 븨워 아주. 고요 직혀 도탑. 잘몬이 나란히 니는데, 나로서는 그 도라ᄀᆞᆷ을 봄. 그저 몬이 쑥쑥 나 오나 따로 다 그 뿌리로 도라ᄀᆞ오라.”고 했다. ‘말숨’을 쉬며 끊임없이 나를 깨우는 솟구침은 ‘돎’ 도움닫기다. 돌아가는 가온데, 얼빛이 환하다.
늑근에 넉넉
깨어난 이는 스스로 제절로다. 다석은 참나는 없이 있는 나”라면서 빈탕한데(虛空)에 맞춰 놀이하는 것이 나의 소원이다. 나는 해 달에 맞춰 놀려고 하지 않는다.”라고 했다. 가없이 비어 빈 빈탕으로 걸림이 없다. 좁쌀만 한 내 몸뚱이에 갇혀 아등바등하지 않는다. 저 드넓게 트인 우주를 집으로 삼고, 끊이지 않는 때를 늘 산알로 삼는다. 그러니 얼나는 하고픔 따위를 갖지 않는다. 누구나 가진 ‘마음’조차 갖고 있질 않은 까닭이다. 이미 우주 온통이 제 ‘ᄆᆞᆷ’인데 무엇이 더 있겠는가? 노자 늙은이가 44월에 알아 늑근히 녁이면 몰리지 않고, 알아 근치면 나죽지 않으리.”라고 했다. ‘알아 늑근히’로 ‘녘’이 숨돌리면 땅하늘(地天泰:늑) 한꼴이 하나로 ‘맞춤’이다. 그러니 몰리지 않는다. 또 ‘알아 근치면’으로 하늘땅(天地否:근)이 그치면 ‘맞춤’이다. 그러니 나죽지 않는다. 삶 사는 얼나는 둥근 넉넉을 알고 그칠 줄 안다. 남을 이기려 하지 않고, 스스로를 낮춘다. 세상 밑거름이다. 이것이 늙은이가 말한 ‘씻어난이(聖人)’의 참꼴이다. 그이는 세상에 물들지 않는다. 오히려 진흙 속에서 연꽃을 피운다.
얼나로 난
우리는 오롯한 하느님 씨알이다. 그이로부터 홀로 난 이다. 다석은 예수와 나는 얼로는 같은 한아님으로부터 온 씨다.”라고 했다. 숨 쉬는 모든 산 목숨은 하느님의 얼을 가진 거룩한 ‘있꼴’이라는 뜻이다. 늙은이는 늘 씨알이 못된 앎이 없게, 못된 ᄒᆞ고ᄌᆞᆸ이 없게, ᄒᆞ이금.”(3월)이라 했다. 너나가 지금 ‘숨을 쉬고 있다’는 것, 무언가를 ‘생각하고 느낀다’는 것 자체가 바로 얼이 ‘살아있다’는 증거다. 너나는 흙으로 빚어진 질그릇이지만, 그 속에는 귀한 ‘얼’이 담겨 있다. 제나의 껍질을 벗겨내고 이 얼을 환하게 밝히는 날, 너나는 오! 늘” 하고 감탄하며 ‘이제살이’ 살게 되리라. ‘참’을 솟대 삼아, ‘알’을 품고, ‘줄’을 잡고, ‘말숨’을 쉬며, 모두 ‘얼나’로 솟구치리라. 이것이 『늙은이』를 배우는 까닭이다. ‘배움’은 아이 뱀(孕胎)이다. 뱀에 씨앗이 움튼다. 집집 우주 한늘의 씨앗이 얼마나 클까? 므로 길 커. 하늘 커. 땅 커. 임금 또한 커.”(25월)라고 했다. 임금은 ‘솟난이’가 아닌가!
그림6) 단원 김홍도의 ‘청명낭화’(淸明浪華)이다. 종이에 수목, 41.7x48cm, 간송미술관 소장. 배도 사람도 보이지 않는 이 물결은, 나를 세우려는 고집(제나)이 온통 다 씻겨 나간 뒤에야 비로소 만나는 참 바탕의 움직임이다. 쉼 없이 움직이나 그 가온데는 고요한 ‘가온찍기’의 이어짐이다. 물결이 솟구쳐 오르는 짧은 찰나는 ‘있’이나, 다시 바다로 잦아드는 순간은 ‘없’일 터. 이 그림은 있이 없에 남”을 꿰뚫어 본다. 일어남과 잦아듦이 한꼴로 돌아가는 ‘밝돌’을 드러내 보여준다.
[부록] 다석 류영모의 우리말 알맞이(哲學) 뜻글 풀이
1. 참(眞): 거짓 없는 참올이다. 다석은 도(道)를 ‘길’로 풀면서, 길 옳단 길이 늘길 아니고”라 했다. 말로 사로잡은 옳고 그른 길은 때때로 바뀌면서 굳어간다. 끊임없이 흐르는 집집 우주의 있는 그대로가 바탕(本性)이요, 바로 ‘참’이다.
2. 비롯(始): 짓고 일으키는 밑둥이다. 없에 하늘 땅이 비롯고,”라 했다. ‘없’이라는 빈탕에서 잘몬이 일어남을 이르는 우리말이다.
3. 어미(母): 잘몬을 내고 낳고 품어 기르는 어머니다. 있에 잘몬의 어머니.”라 하였다. 텅 빈 ‘없’에 솟아 나타난 ‘있’이다. ‘없있’ 한꼴이다. 잘몬을 기른다.
4. ᄒᆞ고ᄌᆞᆸ(하고픔): ‘하고 싶어 하는 마음’, 즉 욕망이다. 다석은 늘 ᄒᆞ고ᄌᆞᆸ 없에 그 야믊이 뵈고, 늘 ᄒᆞ고ᄌᆞᆸ 있어 그 도라감이 뵈와라.”라고 했다.
5. 감ᄋᆞ(玄): 가마득하고 까마득하게 ‘감다’는 뜻이다. 가없이 감고 있는 꼴이다. 집집 우주가 야믈어 가는 숨은 뜻을 ‘감다’(玄)로 나타낸 것이다. 한끠 일러 감ᄋᆞ, 감ᄋᆞ 또 감ᄋᆞᆷ”이라 하여 까마득하게 감아 돌아가는 산 우주의 ‘ᄋᆞᆯ’을 보여준다.
6. 야믊의 오래(衆妙之門): ‘감ᄋᆞ(玄)’로 휘감아 돌아가는 숨은 문이다. 글쓴이는 씨알 튼 밝돌”이라고도 했다. 온갖 씨알이 안팎으로 숨빛 터지는 우주의 입이다. 환히 빛나는 ‘밝’이 소용돌이로 돌돌 돌아가기에 ‘밝돌’이라 하였다.
7. 못쓸 것(惡): 아름다움(美)에 빗대어 추함(惡)을 다석은 ‘못쓸 것’으로 풀었다. 세상이 예쁜 것만 찾으면 도리어 그것이 ‘못쓸 것’이 된다는 뒷친말(逆說)로 쪼개가르는 마음을 꾸짖었다.
8. 잘몬(萬物): 만물(萬物)의 우리말이다. ‘잘’은 일만 만(萬)으로 수를 헤아릴 때 쓰고, 또 온갖 산알이 자라는 ‘몬’으로 풀 때도 그리 쓴다. 땅하늘에 생겨난 ‘있꼴’을 귀하게 여기는 말이다.
9. 씻어난이(聖人): 성인(聖人)을 나타내는 우리말이다. 다석이 그리 썼다. 몸과 마음을 씻어내고 얼(靈)로 거듭난 사람이다. 하고픔의 먼지를 털어내고 참나를 찾은 이다.
10. 함없(無爲): 무위(無爲)의 풀이다. 다석이 그리 풀었다.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게 아니다. 억지 부림이 없는 ‘함’이다. 씻어난이는 함 없이 일을 봐내고”라 했듯이, 저절로 돌아가는 올을 거스르지 않고 이루어지게 하는 참된 짓거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