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왕과 사는 남자’, 꿈꾸는 역사와 사실의 역사 [사람들] 주진오 역사학자·상명대 명예교수
장항준 감독은 영화 를 통해, 이미 결말이 알려진 비극적인 단종의 역사를 새로운 시선으로 재구성했습니다. 기록이 별로 없는 단종의 유배 생활을 ‘있을 법한 상상력’으로 채웠어요. 전반부의 코미디와 후반부의 처절한 비극을 매끄럽게 연결하며, 역사적 사실 위에 따뜻한 인간애를 덧입히는 연출 스타일을 보여주었습니다. 1700만 명에 육박하는 관객은 바로 그러한 ‘꿈꾸는 역사’에 공감한 결과이지요.
역사학자로서 그동안 ‘꿈꾸는 역사를 허하라’는 말을 꾸준히 해 왔습니다. 이는 제작진에게 실제로 그랬던 것은 아니지만, 역사가 이렇게 흘러갔으면 좋았을 것이라는 상상력을 허용해야 한다는 것이지요. 그래야 재미있고 대중들의 호응을 받을 수 있는 역사콘텐츠들이 만들어질 수 있는 것입니다. 사실의 무게에 짓눌려 다 아는 이야기를 재현해서는, 관객이 티켓을 사서 영화관에 오지 않을거에요.
하지만 역사학자들은 영화에 나오는 이야기를 역사로 그대로 믿는 대중들에게 사실에 입각한 역사를 알려 줄 의무가 있습니다. 팩션이라는 말도 있지만, 본질적으로 이 영화는 픽션이니까요. 그동안 열렬한 반응을 보이며 성공적으로 영화관 상영을 마쳤으니, 이제 실제 역사로 들어가 볼 시간입니다. 이미 여러 예능 프로그램에서도 다루었고 유투브에는 AI를 활용한 자극적 영상이 너무 많던데 정리가 필요한 것 같아요.
영화의 배경이 된 영월 청령포 원경. 국가유산포털
야사와 영화는 ‘교살(絞殺), 실록은 자살
장항준 감독은 단종을 단순히 유약하고 무기력한 피해자로 그리지 않았습니다. 박지훈 배우가 연기한 단종은 어린 소년에 머물지 않고 점차로 내면의 분노와 응집된 힘을 가진 인물로 성장하는 것으로 묘사되지요. 한명회의 강압에 의해 죽음을 당하는 것을 거부하고, 마을 사람들을 보호하기 위해 엄흥도의 손에 죽는 길을 스스로 선택하는 것으로 각색되어, 비극 속에서도 주체적인 면모를 보여주어 더욱더 슬픔과 공감을 느끼게 했습니다.
물론 실록이란 승자였던 세조의 입장에서 기록한 것이기 때문에, 많은 부분들이 생략되거나 자신들을 정당화하고 있지요. 하지만 단종이 청령포에 머물렀던 기간은 두달 남짓 밖에 안 되고 그 후에는 객사의 관풍헌에 머물다가 세상을 떠났습니다. 일부 야사에서 관청의 통인이 활시위로 목을 졸랐다는 내용이 있지만, 신뢰하기 힘들지요. 사실이라 하더라도 영화에서처럼 엄흥도가 그 역할을 했다고 기록되어 있지 않습니다.
실록은 그의 죽음에 대해 스스로 목숨을 끊었으며 예로 장사를 지냈다고만 하고 있어요. 금성대군의 거사 계획이 실패하면서 왕실의 어른 양녕대군이 앞장서 사형을 요구하자, 세조는 마지못한 듯이 허락했습니다. 영화처럼 금성대군이 단종과 결합하여 거병했다가 실패했다는 것은 영화적 상상력이지요. 실제로는 거사를 준비하다가 발각되어 미수에 그쳐 체포되었으며, 단종은 그 거사에 동의하고 참여하지 않았습니다.
엄흥도는 ‘촌장’ 아닌 영월 관아의 호장(戶長)
영화에서 엄흥도는 마을을 책임지는 소박한 촌장 이자 단종을 관리·감시하는 조수주인 으로 설정되었습니다. 하지만 실제 역사에서 엄흥도는 영월 관아의 호장(戶長) 이었어요. 호장은 향리 가운데 우두머리로서, 지방 수령의 유고시 행정을 총괄하고 관용 공물의 조달을 주관하는 위치에 있었어요. 관노비를 관리하는 것도 호장이었습니다. 그런데 민초의 시선에서 인간적 교감을 이끌어 내기 위해 다르게 설정한 것이지요.
영화 왕사남 한 장면. 단종과 엄흥도
만약에 역사대로 호장으로 나온다면 관객을 웃겼다가 울게 만드는 유해진 배우 특유의 현란한 명연기는 불가능했을 것입니다. 따라서 피폐해진 마을을 살리기 위해 기상천외한 유배지 유치 작전 설정도 없었을 테지요. 장항준 감독 특유의 유쾌한 코미디를 가미하여 영화의 활력을 불어넣는 장치로 잘 활용되었습니다. 그런데 엄흥도가 삼족을 멸한다는 엄포를 듣고도 몰래 노산군을 땅위에 묻고 도피하는 장면이 나오는데요.
야사에서도 엄흥도가 세 아들과 함께 노산군의 시신을 지게에 지고, 눈보라를 뚫고 산을 오르다가 노루가 앉았던 자리에 눈이 녹아 있어 그곳에 묻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노산군이 사망한 것은 분명히 실록에 1457년 음력 10월 21일로 기록되어 있어요. 양력으로 11월 16일입니다. 그런데 눈보라를 뚫고 시신을 묻었다는 것이 어색하지요. 그러니까 이런 내용들은 후대에 각색되어 남겨진 이야기일 가능성이 높습니다.
엄흥도가 장례를 치렀던 것은 다 알고 있던 사실
1516년 중종 12년에 왕명으로 영월의 노산군묘에 가서 제사를 지내고 돌아왔던 승지 신상은 ‘묘는 높이가 겨우 두 자쯤 되고, 여러 무덤이 곁에 총총했으나 고을 사람들이 군왕의 묘라 부르므로 비록 어린이들이라도 식별할 수 있었다’고 눈물로 보고했어요. 그리고 「당초 돌아갔을 때 온 고을이 황급하였는데, 고을 아전 엄흥도가 곡하고 관을 갖추어 장사했다.」 하며, 고을 사람들이 지금도 슬프게 여긴다.’고 전했습니다.
그러니까 엄흥도는 영월군의 호장으로서 노산군의 장례를 치른 것은 사실이지만, 버려진 시신을 몰래 수습해서 묘를 만들고 가족들과 도피한 것은 아닐 수 있는 것이지요. 오랜 세월이 흘러 작성된 야사의 내용을 사실 그대로 믿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습니다. 철저한 검증이 필요한 것이 역사라고 할 수 있지요. 그렇다고 해서 영월의 호장 엄흥도가 솔선수범해서 노산군의 장례를 치렀다는 가치는 사라지지 않을 것입니다.
1516년에 이어 1540년 중종 35년에도 연산군묘와 함께 노산군묘에 승지를 보내 제사를 지냈어요. 선조 14년 1581년에는 강원도 관찰사 송강 정철도 노산군의 묘가 ‘봉분의 높이가 겨우 몇 자뿐이고 퇴락하여 풀 속에 묻혀버렸습니다. 본래 비석조차 없어 사람들이 그곳이 노산군의 묘임을 알지 못하니, 나무꾼과 목동들이 그 위를 오가고 있습니다’는 장계를 올렸어요. 그것을 받아 들여 봉분을 수리하고 표석을 세웠습니다.
영월 장릉의 곡장과 봉분. 국가유산포털
숙부 금성대군은 복위 운동, 큰할아버지 양녕대군은 죽여라”
양녕대군 등이 노산군을 죽이라고 요청한 직접적 이유는 1456년 사육신의 단종복위운동에 직접 가담했다는 것이었습니다. 성삼문 등이 단종에게서 칼을 받았다고 진술한 것이지요. 이로 말미암아 단종의 입지는 더욱 좁아졌습니다. 결국 다음 해 노산군으로 강등되어 영월로 유배를 떠날 때, 세조의 명으로 전송을 나왔던 환관에게 성삼문의 역모를 알고 있었으나 아뢰지 못하였다. 이것이 나의 죄이다 라고 했다지요.
하지만 처음부터 그를 죽일 생각은 아니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세조실록에는 노산군의 유배 후에, 여러 물건들을 보낸 기록들이 여러 차례 기록되어 있어요. 옷과 과일, 채소는 물론 술과 얼음을 바치라는 명령도 내렸습니다. 의원을 보내 주고 매월 수령이 문안을 하라는 지시도 있었어요. 여름이 되어 청령포에 물이 들자, 곧 영월군의 객사인 관풍헌으로 옮겨 주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몰래 접촉하는 자는 엄벌에 처했습니다.
하지만 1457년에 20살이던 맏아들 의경세자를 잃게 되자 불안한 마음이 들었던 것도 이유가 되었어요. 11년 후에 예종으로 즉위하는 둘째 아들 해양대군은, 당시 8세에 불과했습니다. 만약에 세조에게 무슨 일이라도 생기면, 이미 17세로 장성한 단종을 구심점으로 삼는 복위 운동이 거세질 가능성이 높았던 것이지요. 이는 세조 세력의 정치적 생존과 직결된 문제였기 때문에, 결국 노산군을 죽이기로 한 것입니다.
그런데 10월에 경상도 순흥에 유배 중이던 금성대군이 단종 복위를 위한 봉기를 모의하다 발각된 사건이 발생했어요. 이로 말미암아 숙부 금성대군과 장인 송현수가 사형에 처해질 무렵에, 노산군의 처형을 요구하는 목소리가 높았습니다. 표면적 이유는 사육신의 단종 복위운동에 참여했다는 것을 내세웠지만, 실제로는 계속적으로 나타날 가능성이 있는 복위운동을 막기 위해서 집요하게 세조를 압박해서 결국 죽인 것이지요.
영화 왕사남 의 한 장면. 금성대군
예로써 장사를 지내지도 않았고 묘 관리도 허술
실록에는 10월 21일 노산군(魯山君)이 이를 듣고 또한 스스로 목매어서 졸(卒)하니, 예(禮)로써 장사지냈다.”고 기록되었습니다. 유배 4개월 만에 단종이 가까운 사람들의 죽음 이야기를 듣고 스스로 자살했다는 것이지요. 하지만 어떤 예로 장사를 지냈다는 것인지 아무 기록이 없습니다. 반면에 세조가 자신의 장남 의경세자의 장례에서는 지극히 세심하게 배려를 하며 정성껏 진행하는 모습을 볼 수 있지요.
노산군의 죽음 이후 실록에서 그의 이름은 사라졌습니다. 세조 이후 예종-성종-연산군-중종으로 이어지는 격변 속에서도 그에 대한 복권은 언급되지 못했어요. 그것은 세조의 처분을 부정하는 불충이 되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런데 중종 12년에 조광조를 비롯한 사림의 요청으로 승지를 보내 노산군의 묘에 제사를 지냈지만, 묘소의 단장이나 명예회복에는 더 이르지 못했어요. 하지만 그 후에도 아주 방치되지는 않았습니다.
1516년에 이어 1540년 중종 35년에도 연산군묘와 함께 노산군묘에 승지를 보내 제사를 지냈어요. 선조 14년에는 강원도 관찰사 송강 정철도 노산군의 묘가 ‘봉분의 높이가 겨우 몇 자뿐이고 퇴락하여 풀 속에 묻혀버렸습니다. 본래 비석조차 없어 사람들이 그곳이 노산군의 묘임을 알지 못하니, 나무꾼과 목동들이 그 위를 오가고 있습니다’는 장계를 올렸어요. 그것을 받아들여 봉분을 수리하고 표석을 세웠습니다.
숙종 때 단종 복위. 엄홍도 자손은 부역 면제
인조 대인 1653년 김익희는 노산군 묘소를 이렇게 묘사하고 있어요. ‘봉분의 높이는 4~5자 정도이고, 앞에는 한 쌍의 망주석이 서 있다. 능 아래에는 위패를 모신 세 칸 집이 있고, 재실과 주방도 모두 갖추어져 있다. 고을 사람을 참봉으로 차출하여 매달 두 번 청소를 하게 하며, 명절에는 관청에서 제물을 갖추어 군수가 친히 제사를 지낸다 는 것입니다. 그는 심지어 노릉이라는 표현까지 쓰고 있어요.
김익희가 능에 절을 올릴 때, 고을 유생들이 네 번 절하라 고 외쳤다고 하지요. 아무리 폐위되었지만 단종에게 임금을 뵙는 예법을 요구했던 것입니다. 그가 위패함을 열어 보니 노산군 신위 와 부인 송씨 신위 라고 쓰여 있었어요. 이어서 그는 고을 관리 엄흥도가 장사 지냈으며, 정철의 요청으로 엄흥도의 자손 한 사람을 대대로 부역을 면제해주었다는 사실을 기록에 남기고 있습니다.
노산군묘에 대한 치제는 후대 왕들도 계속 거행했지만 복위에 이르지는 못했어요. 결국 숙종 7년(1681년) 노산대군으로 승격되었다가 24년(1698년)에 단종으로 복위 및 추존되었습니다. 사후 241년이 지난 시점이었어요. 부인 송씨에게도 정순 이라는 시호가 내려졌어요. 폐위와 사사는 신하들의 요청과 강요 때문이라는 논리를 내세워, 단종을 복권시킨다고 세조를 부정하는 것이 아니다 라는 명분으로 복위시켰던 것입니다.
인생의 승리자와 역사의 승리자
이번 영화를 통해 많은 분들이 금성대군이라는 존재를 알게 되었습니다. 왕족의 기품과 올바른 이미지를 극대화하여 비극의 깊이를 더했지요. 그런데 그의 거사는 영화에서처럼 실제로 진행되지는 못했고 단종이 가담한 적도 없었습니다. 순흥부의 관노가 고발하여 미수에 그쳤고 그로 말미암아 거사를 모의했던 금성대군은 물론 왕비 송씨의 장인인 송현수도, 정혜공주의 남편 영양위도 차례로 처형되었습니다.
은평구 구파발에 있는 금성당. 국가유산포털
그런데 금성대군은 전국의 무속신앙으로 살아남아, 그를 주신(主神)으로 모신 굿당이 서울과 경기지역에 세워져 많은 무당들이 그를 영험한 신으로 모셨습니다. 서울에도 여러 곳이 있었는데 도시개발로 사라졌어요. 지금은 유일하게 은평구 구파발역 부근에 있는 금성당만이 남았습니다. 그의 의리와 좌절을 안타깝게 생각하면서 억울하게 죽은 그의 한을 통해 마침내 신이 되었던 것이지요.
세조는 형제들을 포함해서 너무나도 많은 사람들을 잔혹하게 죽이고 자신의 가계로 왕실의 계보를 이어갔습니다. 그가 아무리 역량있는 군주였다 하더라도 그것은 명백한 죄악이지요. 반면에 단종과 금성대군은 참혹한 피해자로 인생을 마감했습니다. 하지만 570년이 지난 오늘날 대한민국에서 를 통해 다시 살아나 역사의 승자로 남은 것입니다. 반대로 인생의 승리자였던 세조와 한명회는 역사의 패자가 되고 말았지요.주진오 한국현재사 formchu@hanmail.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