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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보 바로가기 : 나는 입 없는 배우였다 실비아 크리스텔

나는 입 없는 배우였다 실비아 크리스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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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열과 위선, 여전한 성의 이중 잣대 1970년대 어느 날 방콕의 뜨거운 햇살 아래 한 네덜란드 여성이 카메라 앞에 섰다. 실비아 크리스텔(Sylvia Kristel, 1952~2012). 그녀가 주연한 영화 엠마뉴엘 (1974)은 전 세계 3억 5000만 명을 극장으로 불러들였다. 프랑스 역사상 최고 흥행작 중 하나가 되었고, 파리의 한 극장에서는 무려 13년 동안 상영되는 기록을 세웠다. 하지만 정작 그녀는 2006년 자서전에서 이렇게 고백했다. 나는 입 없는 배우였고, 몸뚱이였다. 나는 꿈속의 인물이었지만 그 꿈은 깨어지기 쉬운 것이었다.   1973년의 크리스텔 (위키피디아) 176㎝의 백치미인 , 알고 보면 지능지수 164 실비아 크리스텔에게 붙은 꼬리표는 백치미인 이었다. 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그녀의 지능지수는 164로 천재 수준이었고, 학교에서 네 학년을 월반했을 정도로 영리한 학생이었다. 네덜란드 위트레흐트에서 여관 주인의 딸로 태어난 그녀는 아홉 살 때 성폭행을 당했고, 열네 살 때는 아버지가 다른 여자와 가출하며 가족이 해체되는 아픔을 겪었다. 그것이 내 인생에서 가장 슬픈 일이었다 고 그녀는 회고했다. 열일곱에 모델 일을 시작한 그녀는 1973년 미스 TV 유럽 에 선발되었고, 우연히 참석한 오디션에서 감독 쥐스트 자캉(Just Jaeckin)의 눈에 띄어 엠마뉴엘  주인공이 되었다. 첫 출연료는 고작 6000 달러. 하지만 그녀가 받은 대가는 돈만이 아니었다. 그것은 엠마뉴엘 이라는 이름에 평생 갇히는 것이었다.   1990년 칸 영화제에서의 크리스텔 (위키피디아) 개봉 금지, 세운상가에서는 대박 한국의 1970~80년대 군사정권은 엠마뉴엘 을 수입 불가 판정했다. 검열의 잣대는 엄격했다. 하지만 인간의 본성은 묘하다. 금지하면 더 보고 싶어진다. 서울 세운상가와 을지로 뒷골목에는 불법 비디오테이프가 떠돌았고, 누군가의 장롱 깊숙한 곳에는 해외에서 몰래 들여온 테이프가 숨겨져 있었다. 음침한 만화가게나 다방에서 이 영화를 본 친구들은 너 엠마뉴엘 부인 못 봤지? 대화가 안 되겠군 이라며 으스댔다. 1994년, 영화는 마침내 한국에서 개봉되었다. 물론 상당 부분이 삭제되고, 신체 주요부분은 뿌옇게 연막 처리되어서였다. 전두환(1931~2021) 정권의 3S 정책 (스포츠, 섹스, 스크린)이 한창이던 시절이었다. 위로부터 허락된 성은 좋지만, 아래로부터 올라온 욕망은 검열해야 한다는 이중 잣대. 실비아 크리스텔이 출연한 채털리 부인의 사랑 (1981)이 1980년대 초 한국에 개봉되자, 애마부인 (1982), 장미부인 (1983), 웅담부인 (1987), 심지어 젖소부인 (1995)까지 쏟아져 나왔다. 모두 ~부인 이라는 제목을 달고 말이다.   1998년의 크리스텔 (위키피디아) 금기를 깬 여성, 엠마뉴엘 이란 굴레 엠마뉴엘 은 여성의 성적 자유를 다룬 영화로 포장되었지만, 실상은 남성의 판타지가 투사된 스크린이었다. 프랑스 페미니스트들은 엠마뉴엘은 남성 환상의 대상일 뿐 이라고 비판했다. 하지만 아시아, 특히 일본의 여성 관객들은 달랐다. 그들은 엠마뉴엘이 남자 몸 위에서 내려다보는 장면에 기립박수를 보냈다. 같은 영화, 다른 해석. 그것은 당시 사회가 여성의 성을 어떻게 바라보는가에 대한 거울이었다. 실비아 크리스텔은 속편 엠마뉴엘 2 (1975)에서 10만 달러를 받았지만, 15만 달러에 자신의 권리를 팔아버렸다. 그 영화는 결국 2600만 달러를 벌어들였다. 그녀는 로만 폴란스키(Roman Polanski, 1933~ )의 세입자 (1976), 루이 말(Louis Malle, 1932~1995)의 대미지 (1992) 같은 명작에 캐스팅될 뻔했지만, 번번이 다른 배우로 교체되었다. 세르지오 레오네(Sergio Leone, 1929~1989)는 원스 어폰 어 타임 인 아메리카 (1984)에 그녀를 원했지만, 제작자들이 반대했다. 이유는 간단했다. 그녀는 엠마뉴엘 이었기 때문이다.   크리스텔 (IMDb) 마약, 알코올, 그리고 금시계와 아들 하나 성공 이면에는 파괴가 있었다. 실비아 크리스텔은 열한 살에 담배를 배웠고, 성인이 되어서는 마약과 알코올에 빠졌다. 그녀는 자서전에서 고백했다. 이런 역할을 한 것은 단지 비싼 코카인 비용을 충당하기 위해서였다. 두 번의 결혼은 모두 실패로 끝났다. 1986년 결혼한 필립 블로(Philippe Blot)와의 결혼은 재정 파탄으로 1991년 끝났다. 1992년, 마흔의 실비아 크리스텔은 애마부인 을 연출한 정인엽(1942~ )의 영화 성애의 침묵 에 출연했다. 공동 주연인 유혜리는 당시를 이렇게 회고했다. 실비아 크리스텔은 이미 전성기가 지난 상태였다. 그녀는 나에게 남은 것은 금시계 하나와 아들 뿐 이라며 인생의 허무함을 토로했다. 네덜란드의 여신은 이제 한국의 B급 영화에 출연하며 생계를 이어가는 처지가 되었다.   크리스텔 (IMDb) 2012년, 60세로 쓸쓸히 떠나다 2001년, 실비아 크리스텔은 후두암 진단을 받았다. 열한 살부터 피운 담배가 그녀의 목을 조여 왔다. 세 차례 화학요법과 수술을 받았지만, 암은 폐로 전이되었다. 2012년 6월, 그녀는 뇌졸중으로 쓰러졌다. 그 해 10월 17일(일부 보도는 10월 18일), 네덜란드 암스테르담의 한 병원에서 식도암과 폐암으로 잠들 듯 세상을 떠났다. 예순이었다. 그녀가 남긴 유산은 무엇인가? 엠마뉴엘 은 주류 영화계에 노골적인 성애 장면을 허용하는 문을 열었다. 그것은 1970년대 성 해방의 상징이었다. 꿈을 팔았지만, 정작 자신의 꿈은 이루지 못했다. 그녀는 성적 대상이 되었지만, 배우로서의 존엄은 지켜지지 못했다.   크리스텔 (24 Femmes Per Second) 한국은 무엇을 배워야 하는가 지금 한국에서 실비아 크리스텔의 이야기는 여전히 유효하다. 우리는 여전히 성에 대한 이중 잣대를 가지고 있다. N번방 사건, 텔레그램 성착취, 디지털 성범죄가 난무하는 사회에서, 우리는 여성의 몸을 어떻게 바라보는가? 여성 연예인의 사생활은 끊임없이 소비되지만, 그들의 목소리는 얼마나 존중받는가? 실비아 크리스텔은 자신이 입 없는 배우 였다고 했다. 한국 여성들도 여전히 입 없는 존재 로 대상화되고 있지 않은가? 검열은 사라졌지만, 사회적 검열은 더욱 교묘해졌다. 우리는 성을 소비하면서도, 성을 이야기하는 것을 금기시한다. 실비아 크리스텔의 비극은 개인의 비극이 아니다. 그것은 여성의 몸을 상품화하면서도, 그 여성의 인격은 부정하는 사회구조의 비극이다. 한국의 ~부인 영화들이 쏟아져 나왔던 1980~90년대, 그리고 지금 디지털 성착취가 만연한 2020년대. 우리는 얼마나 변했는가? 실비아 크리스텔은 금기를 깼지만, 그 대가는 너무 컸다. 한국 사회는 그녀의 삶에서 무엇을 배울 것인가? 성적 자유와 인격 존중은 양립할 수 없는가? 금지가 아니라 존중이, 검열이 아니라 대화가 필요한 시대다. 실비아 크리스텔의 쓸쓸한 말년이 우리에게 던지는 질문은 무겁기만 하다. 당신들은 나를 소비했지만, 나를 존중했는가?   크리스텔 (The Boston Glob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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