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 융의 조언 그림자를 통합하면 더 온전해져요 [카테고리 설정이 아직되어 있지 않습니다.] 선생님, 저 왜 자꾸 꿈에서 뱀을 봐요?
진료실의 환자가 묻는다. 칼 구스타프 융(Carl Gustav Jung, 1875~1961)이라면 이렇게 답했을 것이다. 당신만 그런 게 아니랍니다. 인류가 태초부터 공유해온 상징이지요. 그리고 덧붙였을 게 분명하다. 그런데 그 뱀이 당신에게는 무엇을 의미하나요?
이 대화 한 토막이 융 심리학의 핵심이다. 개인의 경험을 넘어선 인류 공통의 정신세계, 즉 집단 무의식 을 말하면서, 동시에 그것이 각자에게 어떻게 드러나는지를 중시했다. 참으로 절묘한 줄타기가 아닐 수 없다.
1935년경의 칼 구스타프 융. (위키피디아)
목사 아들에서 마음의 탐험가로
1875년 7월 26일, 스위스 북동부의 작은 마을에서 태어난 융은 개혁교회 목사의 아들이었다. 그의 부친 폴 융은 경제적 성공을 원했지만 이루지 못했고, 시골 목사로 평생을 살았다. 어린 융이 목격한 아버지는 유대인 차별 앞에서 무력했고, 어머니 에밀리 프레이스바크는 우울증으로 침실에서 대부분의 시간을 보내며 밤에 귀신이 보인다는 등 착란 증세를 보였다.
이 이상한 가정 환경이 어쩌면 그를 마음의 세계로 이끌었는지도 모른다. 바젤 대학과 취리히 대학에서 의학을 공부한 융은 정신과 의사가 되었고, 부르크휠츨리 정신병원에서 일하며 단어 연상 검사를 응용해 콤플렉스(심리적 복합체) 개념을 정립했다.
융이 자란 바젤의 클라인휘닝겐에 있는 성직자 사택. (위키피디아)
프로이드와의 아름답지만 쓰라린 이별
1900년대 초, 융은 지그문트 프로이드(Sigmund Freud, 1856~1939)의 정신분석학에 매료되었다. 1907년 3월 3일, 오스트리아 빈에서 둘은 처음 만났다. 50세의 프로이드는 19세 연하인 융에게서 자신의 후계자를 보았다. 6년의 깊은 교류가 이어졌다.
하지만 그들의 브로맨스 는 오래 가지 못했다. 프로이드가 리비도(정신적 욕망)를 오로지 성적인 것으로 해석한 반면, 융은 그것을 더 넓은 삶의 에너지로 봤다. 프로이드에게 인간은 성적 억압의 피해자였지만, 융에게 인간은 더 풍요로운 가능성을 지닌 존재였다.
1914년, 융은 정신분석학회를 탈퇴했다. 떠나는 제자를 지켜보는 스승의 마음이 어땠을까. 융 역시 고통스러웠을 것이다. 하지만 그는 독자적인 길, 분석심리학 을 개척했다. 사제 관계의 끝은 슬펐지만, 새로운 학문의 시작은 필요했다.
1921년경의 지그문트 프로이드. (위키피디아)
집단 무의식과 원형, 인류의 공통 유산
융이 발견한 가장 혁명적인 개념이 바로 집단 무의식 이다. 프로이드가 개인의 억압된 기억에 천착했다면, 융은 인류가 진화 과정에 공유해 온 정신적 유산에 주목했다. 뱀, 용, 어머니, 영웅 같은 상징들이 시대와 문화를 초월해 반복적으로 나타나는 이유는 무엇일까? 융은 이를 원형 (archetype)이라 불렀다.
그는 신화, 민담, 종교, 예술을 방대하게 연구했다. 스위스 정신과 의사가 동양의 불교와 도교, 힌두교 철학까지 섭렵하며 동서에 다리를 놓았다 는 평가를 받은 건 결코 우연이 아니다. 융에게 꿈은 억압된 욕망의 발현이 아니라, 집단 무의식이 보내는 메시지였다.
재미있는 일화가 있다. 1909년 융은 프로이드와 논쟁 중에 방 전체가 울릴 정도의 폭음을 예고했고, 실제로 그 소리가 났다고 한다. 프로이드는 아연실색했다. 융은 이런 신비한 현상들을 미신으로 치부하지 않고 정신세계의 실재로 여겼다. 그래서 일부는 그를 비과학적 이라고 비판했지만, 융은 과학이 아직 설명하지 못하는 영역을 탐구한 것뿐이었다.
융의 어린 시절, 1880년대 초 (위키피디아)
그림자, 페르소나, 자기실현 - 융의 인간 이해
융은 인간의 정신을 여러 층위로 나눴다. 우선 겉으로 드러내는 페르소나 (가면)가 있다. 직장에서의 나, 집에서의 나, 친구들 앞에서의 나가 다르듯 우리는 상황에 맞춰 가면을 쓴다. 하지만 그 뒤에는 우리가 인정하고 싶지 않은 어두운 면, 그림자 가 숨어 있다.
융은 말했다. 당신이 설명할 수 없는 이유로 누군가를 싫어한다면, 그건 당신 자신의 그림자를 그 사람에게서 본 것 이라고. 정치적 반대편을 향한 극렬한 혐오, 특정집단에 대한 맹목적 비난. 혹시 우리 안의 그림자를 투사한 건 아닐까?
융의 궁극적 목표는 개체화 (individuation)였다. 페르소나, 그림자, 내면의 남성성(아니무스)과 여성성(아니마) 등 분열된 정신의 조각들을 통합해 진정한 자기가 되는 것. 여든여섯까지 왕성하게 활동하다 1961년 6월 6일 세상을 떠난 융은 스스로 이 여정을 걸었던 사람이었다.
융이 1895년부터 1900년까지 공부했던 바젤 대학의 옛 본관 건물(앞쪽) (위키피디아)
한국사회와 융 - 우리가 마주한 집단무의식
오늘날 한국에서 융을 이야기하는 건 단순한 학문적 호기심 때문이 아니다. 우리 사회는 현재 집단 무의식의 격렬한 분출을 경험하고 있다.
첫째, 세대 갈등. 기성세대는 젊은 세대에게 자신들의 억압된 욕망을 투사하고, 젊은 세대는 기성세대에게 분노의 그림자를 던진다. 융이라면 서로의 그림자를 인식하라 고 조언했을 것이다.
둘째, 젠더 갈등. 남성과 여성이 서로를 향해 품는 적대감 역시 각자 내면의 아니무스와 아니마를 통합하지 못한 결과일 수 있다. 융은 남성 안에도 여성성이, 여성 안에도 남성성이 있다고 봤다. 완전한 인간은 이 둘을 조화시킨다.
셋째, 지역·계층·이념 갈등. 우리는 끊임없이 우리 편 과 저쪽 편 을 나눈다. 하지만 융의 관점에서 보면, 극단적 대립은 결국 같은 원형의 다른 표현일 뿐이다. 영웅과 악당은 동전의 양면이다.
1910년 부르크횔츨리 외곽에서의 융. (위키피디아)
융이 한국에 주는 세 가지 처방전
첫째, 그림자를 인정하라. 우리 사회는 지나치게 밝은 페르소나만 강조한다. 성공, 긍정, 화목. 하지만 그림자를 짓누르면 더 폭력적으로 돌아온다. 온라인 공간의 혐오발언, 극단적 정치 대립이 그 증거다. 그림자를 인정하고 통합할 때 비로소 성숙한 사회가 된다.
둘째, 집단 무의식을 이해하라. 한국 사회에는 분단, 전쟁, 급속한 산업화라는 집단 트라우마가 깔려 있다. 이것이 불안, 경쟁, 생존주의로 나타난다. 융이라면 과거의 상처를 의식화하라 고 말했을 것이다. 의식하지 못한 트라우마는 반복된다.
셋째, 개체화의 여정을 존중하라. 한국사회는 획일적 성공코드를 강요한다. 좋은 대학, 안정된 직장, 결혼, 출산. 하지만 융이 말한 개체화는 각자의 고유한 길을 걷는 것이다. 누군가는 예술가로, 누군가는 농부로, 누군가는 독신으로 살면서도 온전한 자기가 될 수 있다.
1911년의 엠마 융. 그녀는 남편의 초기 연구를 도왔고, 이후 정신분석가이자 작가가 되었다. (위키피디아)
융과 프로이드를 넘어서
프로이드가 왜 당신은 병들었는가? 물었다면, 융은 어떻게 온전해질 것인가? 물었다. 프로이드는 과거의 상처를, 융은 미래의 가능성을 봤다. 둘 다 필요하다.
융의 이론이 완벽한 건 아니다. 과학적 검증이 부족한 부분도 있고, 때로 신비주의에 치우쳤다는 비판도 받는다. 하지만 그가 열어놓은 문, 즉 인간정신의 깊이, 문화와 종교의 심리학적 의미, 동서양 사상의 통합은 여전히 유효하다.
지금 한국에서 우리가 융을 다시 읽어야 하는 이유는 간단하다. 우리 사회가 집단무의식의 소용돌이 속에 있기 때문이다. 융은 말했다. 빛이 강할수록 그림자도 짙다. 한국은 눈부신 경제 발전을 이뤘지만, 그만큼 짙은 그림자도 생겼다.
이제 그 그림자를 직시할 때다. 융이라면 웃으며 말했을 것이다. 그림자를 통합하면 당신은 더 온전해집니다. 두려워하지 마세요.
1909년 클라크 대학 앞에서 찍은 단체 사진. 앞줄: 지그문트 프로이드, G. 스탠리 홀, 칼 융. 뒷줄: 아브라함 브릴, 어니스트 존스, 산도르 페렌치. (위키피디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