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일 경제 부진이 탈원전 탓이라는 왜곡 [카테고리 설정이 아직되어 있지 않습니다.] 최근 독일 경제가 장기 침체를 겪자 국내 일각에서는 이를 탈원전의 비극 으로 몰아가고 있다. 그러나 이는 사실을 과도하게 단순화한 진단이다. 독일의 부진은 에너지 정책 하나 때문이 아니라, 수십 년 누적된 구조적 문제들이 복합적으로 작용한 결과다. 러시아 가스 과의존, 중국과의 산업 경쟁 패배, 만성적 저투자·규제 경직성, 인구 고령화, 그리고 자산 불평등과 공유부(특히 토지 지대) 사유화가 그 주요 원인들이다.
탈원전은 85% 국민이 선택한 가치이자 합의였다
독일의 탈원전은 어느 한 정권의 독단이 아니다. 1970년대부터 50년 가까이 이어진 시민사회 토론과 위험 평가의 산물이다. 특히 2011년 후쿠시마 사고 직후, 독일 전역에서는 분노와 성찰의 물결이 일었다. 베를린과 함부르크 등 주요 도시에서만 하루 25만 명이 거리로 쏟아져 나왔고, 45km에 달하는 인간 띠를 만들어 원전 반대의 의지를 보였다.
정부는 윤리위원회를 구성해 8주간 공개방송을 통한 토론과 숙의를 거쳤다. 그 결과 국민의 85%가 조속한 원전 폐기를 요구했고, 보수·진보를 초월한 초당적 합의로 법안이 통과됐다.
이는 단순 전기요금 계산이 아니라 가치 선택 이었다. 원전 사고의 막대한 사회적 비용, 10만 년 이상 관리해야 할 핵폐기물 부담 등을 모두 고려한 결정이었다.
후쿠시마 사고가 일본 경제에 미친 충격은 전기요금 상승과는 비교조차 할 수 없을 정도였다. 따라서 탈원전 이후 요금 상승을 경제 부진의 원인으로 삼는 것은 회계 착시 에 가깝다.
국민이 이미 감수하기로 한 비용을 정책 실패의 증거로 제시하는 논리적 비약이며, 원전을 유지했을 때 피할 수 없었던 다른 위험과 비용을 무시하는 것이다.
2012년 필자와 일행이 독일을 방문했을 때 인구 30만 명의 도시 빌레펠트의 환경부시장이 독일 탈원전의 경위를 설명하면서, 자신의 도시에서는 수백 명의 시민위원회가 2018년까지 신속한 재생에너지전환과 에너지절약으로 원전 의존율을 50%에서 0%로 줄이는 결의를 했다고 한다. @이원영
진짜 실책은 과도기 러시아에의 지나친 의존이었다
문제는 탈원전 목표 자체가 아니라 전환 과정의 설계에 있다. 메르켈 정부는 원전 폐쇄의 빈자리를 러시아산 천연가스로 메우며 상호 의존 낙관주의에 빠졌다. 값싼 가스를 대가로 에너지 주권의 절반 이상을 특정 국가에 맡긴 것이 결정적 실책이었다. 재생에너지 인프라와 저장 장치가 충분히 구축되기 전에 발생한 공백을 지정학적 위험으로 채운 결과, 2022년 우크라이나 전쟁이 독일 경제를 직격했다.
그러나 탈원전 이후 훌륭한 전환사례도 있다. 오스트리아는 1978년 국민투표로 원전 건설을 금지한 후 재생에너지를 중심으로 전력 자급을 달성했고, 덴마크와 포르투갈 역시 철저한 설계와 다변화로 원전 없이 안정적인 운영이 가능하다는 것을 입증했다. 핵심은 원전 유무 가 아니라 공급망의 다변화와 설계 역량 이다.
구조적 원인은 자산 불평등과 공유부 사유화가 내수 기반을 약화시킨 것
독일 경제 부진의 가장 깊은 구조적 원인은 자산 불평등, 특히 토지 지대의 사유화다. 한때 중산층 국가였던 독일은 이제 소수가 자산 대부분을 독점하는 양극화가 심해졌다. 공유재여야 할 토지에서 발생하는 지대가 대형 부동산 기업과 소수 자산가에게 집중되면서 대도시 임대료가 폭등했다. 가구 소득 대비 주거비 비율이 급상승하며 시민의 가처분 소득이 증발했고, 이는 내수 시장의 질식으로 이어졌다.
2021년 베를린 시민투표에서 대형 임대주택 기업 주택의 공공화를 과반이 찬성한 것은 사유화된 공유부를 회수해야 경제가 살아난다는 절박한 외침이었다. 토지는 공동 유산인데 그 지대가 소수에게 집중되면, 기술 발전과 생산성 향상의 과실도 대다수 시민에게 돌아가지 않는다. 생산성이 높아져도 토지 가치 상승분을 소수가 독점하면 시민들은 상대적으로 더 가난해지는 역설이 발생하기 때문이다.
산업 구조 경직성과 글로벌 경쟁 패배가 위기를 증폭시켰다
독일은 제조업, 특히 자동차 산업에 과도하게 의존해 왔다. 러시아의 싼 에너지와 중국의 거대 시장에 안주하던 모델이 무너진 것이다. 중국이 전기차와 배터리 분야를 선점하면서 독일의 내연기관 기술 우위는 순식간에 무의미해졌다. 디지털 전환에서도 뒤처졌다. 행정 디지털화 순위는 EU 하위권이며, 데이터라는 새로운 공유부를 창출하고 관리하는 데도 실기했다.
2025년 독일 경제는 약 0.1~0.3% 성장에 그쳤고, 2026년에도 느린 회복이 예상된다. 메르츠 정부의 대규모 인프라 투자가 동력이 되고 있지만, 미국 관세 리스크와 중국과의 경쟁은 여전히 무거운 짐이다.
독일의 사례는 에너지 전환은 속도가 아니라 설계가 중요하다는 점, 과거의 성공 모델에 안주하면 안된다는 점과 공유부를 사유화하면 경제 전체가 좀먹는다는 점을 보여준다. 그런 가운데서도 탈원전과 같이 후손에게 책임을 지는 국민적 의사결정과정을 제대로 거치는 부분은 모범이 아닐 수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