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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보 바로가기 : 검찰독재와 이재명 테러가 소환한 정치인 암살 악령

검찰독재와 이재명 테러가 소환한 정치인 암살 악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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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기사는 음성으로 들을 수 있습니다.)   백승종 역사가·퇴직교수 암살은 대개 정치적으로 영향력이 있는 인물을 제거하는 행위인데, 그 역사는 동서고금 대단히 넓고 깊다. 역사가인 내 머릿속에는 정치적 암살에 관해 다음의 세 가지 질문이 늘 맴돈다. 첫째, 암살사건에도 보편적 형식이랄까 또는 구성요건이 존재하는지 둘째, 정치적 암살도 때로 긍정적으로 평가되는 경향이 있는데 그 판단의 기준은 무엇인지 셋째, 민주주의가 시대정신이 된 현대에도 암살은 사라지지 않고 있는 이유를 우리는 과연 어디에서 찾을 수 있을까. 동서고금의 역사 속 무수히 틀어박힌 암살사건 조선 시대의 선비들이 가장 주목한 암살사건은 자객 형가(荊軻)에 관한 것이다. 사마천(司馬遷)이 지은 <사기(史記)>의 ‘자객열전(刺客列傳)’에 실려 있는 이야기이다. 중국에서도 바로 그 사람에 관한 후세의 논의가 가장 활발하였다. 형가는 훗날 중국을 통일하게 될 진시황제를 암살하려고 하였다. 그러나 준비가 미흡해 미수에 그치고 말았다. 그는 엄연히 실패한 자객이었는데도, 후세가 그 사건에 몹시 주목한 것은 나중에 진시황이 분서갱유(焚書坑儒)를 일으켜 유가(儒家)의 공분을 샀기 때문인 것 같다.   형가가 진시황제를 찌르려는 장면을 묘사한 그림. 나무위키 형가의 암살사건을 다룬 선비들의 글은 참으로 많다. 그중에서도 나는 월사(月沙) 이정구가 쓴 글에 주목하였다. 그것은 당대 조선 선비들의 여론을 집약한 것으로 보인다. 이정구는 <갑진조천록(甲辰朝天錄)> 하편에서 대강 다음과 같이 기술했다. “이 암살사건의 배후는 연단(燕丹, 연나라 태자)이었는데 그의 계책은 어리석었다. 그것을 실행에 옮긴 형가란 이도 허점투성이였다. 선비란 지기(知己)를 위해 은혜와 원수를 갚는 것이 옳기는 하다. 그러나 실패하면 소용이 없는 법이다. 형가는 어리석어 창과 칼을 든 장사가 가득한 대궐에서 태자(훗날의 진시황)를 죽이려 하였으니 실패한 것이 당연하다. 그때 연단에게 형가를 소개한 이는 전광(田光)이다. 그는 비밀유지를 위해 자결하고 말았다. 그러므로 열사(烈士)라고 할 수도 있는데, 역시 허점이 많았다. 형가의 자격이 미달하였는데도 추천하였고, 비밀유지를 위해 꼭 자신이 죽어야 했는지도 의문이다. 아마도 전광은 명예를 지나치게 탐낸 나머지 목숨을 너무 가볍게 여긴 것이 아닐까 한다.” 적대세력 간 정치적 암투가 암살사건의 근본적 구조 형가의 암살미수 사건은 2300년 전에 일어난 것이지만, 암살사건의 구조를 암시한다는 점에서 흥미롭다. 이 사건은 연과 진이라는 적대세력 간에 벌어진 정치적 암투였다. 암살을 기도한 것은 바로 연나라의 태자 연단이었다. 그는 전광이란 매개자의 도움으로 하수인인 형가를 포섭하였다. 암살이 실패하더라도 배후가 폭로되지 않게 보안 유지에 힘써, 전광이 미리 자살하는 일이 발생하였다. 조선 건국 전야에도 엄청난 암살사건이 있었다. 이방원이 정몽주를 제거한 사건이었다. 그 사건도 형가 사건과 비슷한 구조였다. 이성계와 정몽주를 정점으로 새 나라를 세우려는 세력과 고려를 지키려는 세력, 두 개의 정치세력이 대립하던 중에 이성계 진영에 뜻밖의 위기가 찾아왔다. 그러자 이방원은 세력 판도를 뒤엎으려고 뛰어난 무사를 고용해 정몽주를 암살하였다. 고대 로마 공화정 말기에 황제나 다름이 없었던 율리우스 시저가 공화주의자 브루투스 등에게 암살 당한 것도 마찬가지이다. 공화주의 전통을 계승할 것이냐, 아니면 새로운 정치체제를 도입할 것이냐를 둘러싸고 암투를 벌이던 두 세력의 충돌이었다. 암살자 브루투스는 사실상 시저의 의자(義子)나 다름없었는데도, 이념 투쟁에 말려들어 공화파의 하수인이 되고 만 셈이다. 그런데 후세에는 암살사건의 배후가 명확히 드러나지 않는 일도 많아졌다. 가령 1865년 4월 14일에 미국의 제16대 대통령 에이브러햄 링컨이 암살되었다. 막 남북전쟁에서 승리한 직후였다. 그는 언론에 예고한 날짜에 극장을 방문했다가 암살자의 총에 맞아 절명하였다. 암살자는 남부군에 동조하는 사람이었다. 그러나 그가 누구의 조종을 받았는지는 끝내 알 수 없었다. 20세기 들어 더욱 흑막 뒤로 숨는 암살 배후 이 사건처럼 암살자가 정치적으로 어느 진영에 속하는지는 알 수 있어도, 그가 어떠한 개인 또는 집단의 지시나 조종을 받았는지 알 수 없는 경우가 적지 않다. 특히 20세기 이후에 발생한 사건에서는 범행의 배후가 분명히 드러나지 않은 경우가 대부분이다. 심지어 암살자의 정신상태가 정상인지조차 판단하기 어려울 때도 있다.   존 F. 케네디를 암살한 오즈월드는 이틀 뒤(1963년 11월 24일) 경찰서에서 감옥으로 압송되던 도중 댈러스의 나이트클럽 경영자 잭 루비에게 살해됐다. 나무위키 미국의 제35대 대통령 존 F. 케네디의 암살사건은 더욱 오리무중이다. 1963년 11월 22일에 그는 댈러스에서 총에 맞아 목숨을 잃었다. 사건 직후에 리 하비 오스왈드(Lee Harvey Oswald)가 암살용의자로 체포되었다. 하지만 이틀 뒤 그는 경찰에 구금된 상태에서 잭 루비(Jack Ruby)의 총격으로 사망했다. 그리하여 암살사건의 배후는 도저히 밝힐 수 없게 되었다. 정리하면, 고대에는 암살사건의 맥락과 구조가 뚜렷이 드러날 때가 비교적 많았다. 하지만 근대 이후의 사건은 그렇지 못하다. 사회가 점차 복잡해진 데다 사건의 배후를 숨기려는 노력도 더욱 치밀해져, 속내를 파악하기 어려운 사건이 갈수록 많아졌다. 정당한 암살도 있는가? 둘째, 암살의 정당성 문제다. 월사 이정구의 글에서도 감지할 수 있는 것처럼 때로는 암살이 정당한 수단으로 인정되었다. 사건 관련자였던 형가, 전광 및 연단에 대해 이정구 외 다른 선비들도 도덕적인 비난은 하지 않았다. 그들은 오히려 이 사건이 실패하고 만 것을 안타깝게 여겼다. 형가 등은 진시황이라고 하는 거악(巨惡)을 제거하려고 하였기 때문에 후세의 지지와 동정을 얻은 것이었다.   안중근 의사가 이토 히로부미를 저격하는 장면을 다룬 민족기록화. 나무위키 1909년 10월 26일 하얼빈 역에서 안중근은 일본 제국주의를 상징하는 거물 정치가 이토 히로부미를 권총으로 쏘았다. 오늘날 정상적인 한국 사람이라면 누군들 안중근 의사의 거사를 비난하겠는가. 이토는 자국의 이익을 위해 이웃 나라 조선의 국권을 강탈하려고 한 자였다. 그러므로 오늘날 한국 사람들은 그를 제거한 안중근을 독립 의지를 만방에 떨친 의사(義士)로 평가하는 것이다. 암살사건에 대한 도덕적 미화는 20세기 서양의 역사에도 있다. 1944년 7월 20일, 독일군 장교들이 아돌프 히틀러 총통을 암살하려고 사령부에 폭탄을 설치하였다. 폭탄은 터졌으나 히틀러는 운 좋게 살아남았다. 그러자 이 사건에 깊숙이 관련된 고위층은 사건의 내막을 숨기려고, 장교인 슈타우펜베르크 등 4명의 군인을 바로 총살하였다. 엄밀한 의미로, 그들은 민주주의를 회복하고자 암살을 기도한 것이 아니었다. 그들은 독일이 패전하기 전에 전쟁을 끝내려고 히틀러를 살해할 계획이었다. 그러나 전쟁 후에 독일 사회는 이 암살계획에 참여한 장교들을 ‘순교자’로 대접한다. 진영 간 이념에 따라 범죄자도 되고 성인도 되고 그러나 이념 대립이 극심한 세상에서는 암살자에 대한 평가도 진영에 따라 완전히 엇갈린다. 길게 말할 것도 없이, 서방세계에서는 이슬람 테러리스트를 범죄자로 단죄한다. 그러나 이슬람 근본주의자들은 그들을 ‘성전(聖戰)’에 헌신한 희생자라고 추앙한다. 똑같은 사람도 진영의 가치관에 따라 죄인과 성인으로 다르게 평가되는 것이다. 형가가 진시황 암살을 시도했을 때는 정치제도가 전제군주제이어서 합법적으로 폭군을 제거할 방법이 없었다. 그래서 암살이란 수단도 합리화 되었다. 제국주의 일본이나 독일은 파쇼 국가였다. 그 역시 합법적인 방법으로는 사회적인 변화를 시도할 수 없었던 때였다. 최근 이스라엘의 무자비한 가자 학살에서 보듯 이슬람 테러도 도저히 이성적으로 해결할 수 없는 종교 간 인종 간 갈등에서 발생하는 문제다. 그러나 대부분의 현대 국가들은 정치제도적인 면에서 그런 상태를 완전히 벗어났다. 서구사회는 물론이고, 한국과 일본 및 대만 등 동아시아 국가들도 개인의 인권을 상당한 수준으로 보장할 뿐만 아니라 정치, 각종 정치·사회적인 갈등들 역시 민주적이고 합법적인 방법으로 얼마든지 문제를 해결할 수 있게 되어 있다. 이런 나라에서는 어떠한 이유로도 암살을 정당화할 수 없다. 상상을 초월하는 암살사건의 여파 정치적 암살은 정치지도자 개인의 억울한 죽음뿐 아니라 인류사회에 상상을 초월할 정도로 깊은 영향을 주기도 한다. 1914년 6월 사라예보에서 일어난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황태자 프란츠 페르디난트 대공과 황태자비인 호엔베르크 공작부인의 암살 사건은 결국 제1차 세계대전의 시발점이 되었다. 1945년 8월 해방 이후 수년 동안 한국에서는 여러 차례 암살사건이 일어났다. 여운형, 송진우, 장덕수, 김구 등 주요 지도자들이 잇따라 정치 테러로 목숨을 잃었다. 해방정국에서 큰 역할을 하며 좌우 합작 운동을 전개했던 여운형은 이를 반대하는 좌·우익 양측으로부터 십여 차례나 습격을 당했다. 마침내는 1947년 7월 19일에 서울의 혜화동 로터리에서 한지근(본명 이필형) 외 5명의 저격을 받고 숨졌다. 김구 선생도 안두희에게 암살 당했다. 이들 민족지도자들이 암살자의 손에 숨을 거두지 않았더라면, 민족의 비극인 국토분단과 6.25 전쟁을 피할 수 있었을지도 모른다. 민주시민, 극우파의 선동과 폭력을 단호하게 물리쳐야 박정희 시절에도 암살의 그림자가 짙게 드리워져 있었다. 박정희의 영구집권을 반대하던 뜻있는 인사들이 교통사고로 목숨을 잃기도 했고 <사상계>로 독재정권에 경종을 울리던 장준하도 의문의 죽음을 당했다. 그리고 독재자 박정희의 정적인 김대중도 의문의 트럭사고를 당해 죽을 고비를 넘겼으나 끝내 하반신이 불편하게 되었다.   부산 가덕도 신공항 부지를 방문 중이던 이재명 더불어민주당 대표를 흉기로 공격한 피의자가 현장에서 경찰에 체포되고 있다. 유튜브 바른소리TV 갈무리 30년 넘게 한국의 민주주의를 질식시킨 군사독재정권은 역사의 뒤편으로 사라졌다. 그러나 오늘날 시민들은 그 악령이 검찰독재 정권으로 부활한 것 아니냐는 느낌을 가진다. 그래서일 것이다. 검찰이 이재명 민주당 대표를 수백 회에 걸친 압수수색으로 괴롭혀온 상황에서 최근 백주대낮에 벌어진 그에 대한 암살기도가 심히 범상치 않아 보이는 것이다. 지난 문재인 정권 때만 하여도 한국은 “완전히 민주화된 나라”라는 국내외의 평가가 잇따랐다. 그러나 오늘날의 여러 정치·사회적인 상황으로 볼 때 그것은 착각에 불과한 것이 아니었나 자괴감이 든다. 암살이란 상대방에 대한 증오를 폭력으로 표현하는 것이다. 오늘날 소수 극우세력이 우리 사회에 광기와 폭력을 증폭하고 있다. 그 배후에는 의도적으로 사회적 증오를 조장하는 특정한 정치세력이 도사리고 있음을 우리는 안다. 그렇게 우리 사회가 이념으로 분열되고 양극화로 찢어진 것은 명백한 사실이나, 암살이나 테러 같은 방식으로 우리 사회의 갈등을 해결 수는 없다. 민주시민들이 극단주의자들이 가슴에 품은 증오에 증오로 대응하지는 않을 줄 알지만 증오는 또다른 증오를 부른다는 것이 명백한 역사의 교훈이다. 초야에 묻힌 한 역사학자의 고뇌와 걱정이 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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