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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보 바로가기 : 고아들의 핏값으로 만든 복지재단은 폐쇄해야

고아들의 핏값으로 만든 복지재단은 폐쇄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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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가 왔는지, 눈이 왔는지는 기억이 정확하지 않다. 다만 축축한 천 냄새와 엄마의 등이 아직 그의 감촉에 남아 있다. 안종환 씨의 기억은 거기서 시작된다. 세 살인지 네 살인지 모를 어린아이는 엄마 등에 업혀 있었다. 작은 손은 엄마 어깨를 붙들고 있었고, 얼굴은 낡은 옷깃 사이에 파묻혀 있었다. 사람들이 많았다. 아이는 자신이 어디로 가는지 몰랐다. 다만 엄마 몸이 계속 긴장하고 있다는 것을 느꼈다. 등에 업힌 아이는 엄마의 불안을 가장 먼저 배운다. 엄마의 숨소리가 평소보다 짧고 빨랐다는 것을 그는 오랜 세월이 지나서야 이해하게 됐다. 멀리 산비탈 아래 건물들이 보였다. 높은 담장과 계단, 군데군데 녹슨 철문. 사람들이 줄지어 움직이고 있었다. 어린 안종환은 그 풍경을 정확히 이해하지 못했지만, 좋은 곳은 아니라는 걸 본능적으로 알았다. 시설 안으로 들어가자 넓은 운동장이 먼저 보였다. 왼편에는 큰 식당 건물이 있었다. 쇠그릇 부딪히는 소리와 사람들 고함이 뒤섞여 울렸다. 산기슭으로 이어진 계단 옆엔 생활관 건물들이 층층이 모여 있었다. 여자들이 있는 곳, 아이들만 모인 곳, 나이 많은 형들이 있는 곳, 장애인들이 모여 있는 곳, 정신병동이라 불리던 공간까지. 어린아이 눈에도 그곳은 이상한 마을이었다. 직원들은 군대처럼 움직였다. 줄 서!” 고개 숙여!” 같은 명령어가 사방에서 튀어나왔다. 아이들은 겁먹은 얼굴로 뛰어다녔다. 그곳은 형제복지원이었다. 안종환 씨는 그날, 엄마 손이 자신에게서 떨어지는 순간을 희미하게 기억한다. 잠깐 맡겨놓겠다는 듯 등을 토닥였는지, 울지 말라고 했는지는 분명치 않다. 다만 엄마가 멀어질 때 느껴진 공기만은 선명하다. 그날 이후 엄마의 얼굴은 점점 흐려졌다. 그러나 형제복지원의 풍경은 이상하리만치 또렷하게 남았다. 큰 운동장, 산비탈 계단, 생활관 냄새, 군대식 호통, 그리고 유일한 여성 소대장의 차가운 눈빛. 어린 안종환에게 형제복지원은 보호시설이 아니라, 엄마가 사라진 장소로 기억된다. 생활관 책임자는 ‘소대장’이라 불렸다. 군대식 호칭이었다. 아이들은 이름 대신 번호로 불렸고 줄을 맞춰 움직였다. 그가 기억하는 소대장은 유일하게 여성 한 명이었다. 공간과 사람이 주는 두려움으로 호통 소리와 발소리가 가까워지면 아이들은 몸을 움츠렸다.   덕성원 피해자 안종환씨의 아동기록카드 고향이 경북 점촌이라는 사실도, 삼거리 코너에 집이 있었다는 것도 아주 나중에 친형을 만난 이후 기억과 기억을 이어붙이며 복원해낸 조각들이다. 국가 기록보다 형의 기억이 더 정확했고, 서류보다 어린아이의 공포가 더 선명했다. 46년 만에 만난 형제는 서로의 얼굴을 오래 바라봤다고 한다. 형은 잃어버린 시간을 계산하려 했고, 동생은 자신이 정말 존재했던 사람인지 확인하려는 듯 형의 말을 반복해 들었다. 아버지는 막내인 제가 태어난 지 한 달 만에 세상을 떠났고, 어머니는 어린 저를 등에 업고 어디론가 사라졌답니다. 형은 그날 이후 혼자 남겨진 겁니다. 어린 나이에 홀로 상경하여 구두를 닦고, 시장통에서 잔심부름을 하며 힘겨운 서울살이를 버텼다고 합니다. 동생이 살아있는지 죽었는지도 모른 채 46년이 흘러간 것입니다. 저의 법적 기록은 1977년생이라고 적혀 있습니다. 그러나 형의 기억과 저의 희미한 기억을 맞춰보면 실제 출생은 1975년이나 1976년 즈음으로 추정됩니다. 기록은 언제나 약하고 가난한 사람들의 시간을 함부로 기록합니다. 저의 경우도 예외는 아니었습니다. 특히 시설에 들어간 아이들의 나이는 자주 뒤섞였고, 이름조차 바뀌곤 했지요.” 국가 기록에 남은 것은 몇 줄뿐이었다. 1982년, 형제복지원에서 덕성원으로 전원 조치되었다. 그것이 어린 안종환의 삶을 설명하는 전부였다. 하지만 사람의 인생은 행정 서류의 문장 몇 줄로 남지 않는다. 특히 버려진 아이들의 시간은 더 그렇다. 기록은 짧았고, 기억은 길었다. 안종환 씨는 자신이 일곱 살 무렵 형제복지원에서 덕성원으로 옮겨졌다고 기억한다. 사람 취급받지 못한 채 다른 공간으로 ‘전원’되는 일이었다. 그 무렵부터 이름도 흔들리기 시작했다. 본래 이름은 안종한. 그러나 덕성원에 도착한 뒤 그의 이름은 안종환으로 바뀌었다. 누가 바꿨는지, 왜 바꿨는지는 아무도 설명해주지 않았다. 서류를 적던 직원의 실수였는지, 발음을 잘못 들은 것인지, 아니면 관리 편의를 위한 임의변경이었는지 지금도 알 수 없다. 아이에게 이름은 세상과 자신을 연결하는 마지막 끈이다. 그러나 시설 안에서 이름은 쉽게 고쳐졌고, 생년월일은 뒤섞였고, 고향은 삭제됐다. 가난한 아이들의 신원은 너무 쉽게 조작된다. 더 결정적인 것은 형제복지원 기록 자체가 대부분 사라졌다는 점이다. 국가 차원의 기록 소각. 누가 언제 어떤 이유로 폐기했는지 알 수 없다. 자신의 어린 시절이 담긴 문서가 국가 손으로 사라졌다는 사실. 누군가는 그것을 행정 정리라 불렀지만, 피해자들에게는 두 번째 삭제였다. 46년 만에 친형을 만난 뒤에야 그는 잃어버린 이름을 다시 입 밖으로 꺼낼 수 있었다. 덕성원 아이들에게 하루는 나이로 나뉘어 있었다. 국민학생은 풀을 뽑았다. 운동장 가장자리와 텃밭 주변에 쪼그려 앉아 하루 종일 잡초를 뜯었다. 어린 손톱 밑은 늘 검게 흙이 박혔다. 중학생이 되면 삽과 호미가 주어졌다. 밭을 갈고 배수로를 팠다. 고등학생 차례가 되면 일이 달라졌다. 벽돌을 나르고 시멘트를 섞고 건축 현장으로 내몰렸다. 여자아이들, 여고생들까지 공사판으로 끌려 나왔다. 시설은 그것을 생활교육이라고 불렀다. 아이들은 그냥 강제노역이라고 기억했다.   덕성원 일가 소유의 농장에서 강제 노동에 동원된 원생들 덕성원 안에는 자체 고등학교가 있었습니다. 바깥 학교로 다니는 것이 아니라 시설 안에서 수업이 이뤄졌어요. 그곳은 제7안식일 교회에서 운영했습니다. 토요일 예배의 특성상 토요일이 되면 학교도 갈 수 없었습니다. 학습권이 박탈된 것입니다. 평일에도 상황은 크게 다르지 않았어요. 수업을 마치고 돌아오면 다시 작업이 시작됐고, 해가 기울 무렵까지 삽질과 자재 운반이 계속됐습니다.” 1988년 서울올림픽 이후 시설 풍경에도 변화가 생겼다. 외부 시선이 조금씩 시설을 향하기 시작하면서 여자 기숙사동이 새로 지어졌다. 하지만 아이들에게 그것은 인간다운 삶의 시작이라기보다, 계속 늘어나는 시설의 또 다른 건물이었다. 그 건물조차 아이들의 노동으로 올라갔다. 덕성원의 벽에는 아이들의 보이지 않는 손자국이 남아 있다. 벽돌을 나르던 손, 삽을 쥐던 손, 잠든 친구를 깨우지 않으려고 몸을 웅크리던 손. 그러나 그 손들의 이름은 기록되지 않았다. 시설은 완공됐지만, 아이들의 어린 시절은 그 안에 묻혀버렸다. 덕성원 식당의 밥 냄새를 기억하는 원생들은 많다. 정확히는 밥보다 오래된 정부미 특유의 냄새를 기억한다. 농협을 통해 들어오던 정부미. 누렇게 변색된 쌀에는 오래 묵은 창고 냄새가 배어 있었다. 밥을 푸면 군데군데 돌이 씹혔고, 벌레 먹은 쌀이 섞여 있는 날도 많았다. 아이들은 밥그릇을 들고 줄을 섰지만 배를 채우지는 못했다. 1988년 서울올림픽을 전후로 상황은 달라졌다. 국제사회 시선을 의식한 정부는 복지시설 지원을 확대했다. 예산과 물자가 이전보다 훨씬 많이 내려왔다. 시설 환경 개선, 급식비, 운영비, 건물 신축 명목의 지원이 이어졌다. 아이들은 처음엔 자신들의 삶도 나아질 줄 알았다. 하지만 원생들 기억 속 덕성원 풍경은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식판 위 정부미는 여전했고 아이들은 계속 노동에 동원됐다. 생활관은 여전히 비좁았고 맞는 일도 줄어들지 않았다. 대신 눈에 띄게 달라진 건 시설 운영자들의 생활이었다고 증언하는 이들이 있다. 신축 건물이 올라가기 시작했고, 외부에 보여지는 시설 외형은 점점 번듯해졌다. 그러나 아이들에게 돌아온 것은 거의 없었다. 덕성원은 산으로 둘러싸여 있었다. 나머지 주변은 덕성원 일가의 농장이었다. 가까운 곳에는 군부대도 있었다. 덕성원 아이들은 시설을 ‘집’이라고 부르지 않았다. 담장은 사실상 없었다고 해도 무방하지만 누구도 쉽게 빠져나가지 못했다. 외부 사람들 눈에 잘 띄지 않는 지형이었다. 아이들이 어디에서 울고 맞는지 세상은 잘 몰랐다. 안종환 씨는 일곱 살 무렵 처음 성폭력을 당했다고 기억한다. 가해자는 덕성원 일가 쪽 사람이었다. 너무 어린 나이였기에 당시에는 그것이 정확히 무엇인지도 몰랐다. 다만 몸이 무서웠고, 숨이 막혔고, 누구에게도 말할 수 없었다는 기억만 남았다. 시설 아이들에게 침묵은 본능이었다. 말하면 더 큰 일이 벌어진다는 걸 너무 일찍 배웠기 때문이다.   안종환씨의 기억에 의존해 그린 부산 덕성원 일대의 지형도. 시간이 흐르며 덕성원은 외부 보육교사 채용을 줄였습니다. 대신 시설 출신 원생들이 다시 시설 관리 역할을 맡기 시작했어요. 아이였던 이들이 자라 보육교사라는 이름표를 달았던 겁니다. 그러나 그들 대부분은 정상적인 교육이나 보호 체계를 경험하지 못한 채 폭력 속에서 성장한 사람들이었어요. 그저 말 잘 듣는 착한 아이들이 성장해서 보육교사를 맡게 된 것입니다. 시설 내부 논리는 단순했습니다. 밖의 사람을 들이면 민원이 생길 수 있으니, 내부 사정을 잘 아는 사람들로 운영하는 편이 안전하다는 인식이었겠죠. 그렇게 시설은 점점 더 폐쇄적인 세계가 되어갔습니다. 아이를 관리하던 사람이 과거 학대받던 원생이었다는 사실은 그 구조의 잔혹함을 말해줍니다. 폭력은 개인이 아니라 시스템 속에서 되풀이됐다고 볼 수 있지요.” 허락 없이 외출을 나갔다가 붙잡히면 끔찍한 폭행이 이어졌다. 원생들은 탈출을 꿈꿨지만 대부분 실패했다. 부산 쪽으로 도망간 아이들은 다시 붙잡혀 오는 경우가 많았다. 시설과 경찰, 지역 네트워크가 얽혀 있다는 방증이었다. 그래서 아이들 사이엔 암묵적인 규칙이 생겼다. 도망칠 거면 서울로 가라.” 잡혀 돌아온 뒤엔 본보기가 됐다. 그 공포의 중심엔 ‘나무창고’가 있었다. 아이들은 그곳을 고문실처럼 기억한다. 약 100평 정도 되는 창고 안에는 농기구와 낡은 자재들이 쌓여 있었다. 삽과 곡괭이, 쇠파이프, 각목들. 낮에는 창고였지만 밤이 되면 처벌 장소가 됐다. 도망쳤다가 붙잡힌 아이, 말을 안 들은 아이, 관리자 심기를 거슬렀다고 지목된 아이들이 그곳으로 끌려갔다. 어떤 아이는 쌀포대에 몸이 묶인 채 매달렸다. 그리고 각목이 날아들었다. 비명소리는 두꺼운 벽과 산 속 어둠에 묻혔다. 다른 아이들은 그 사실을 알고 있었다. 직접 보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덕성원의 아이들에게 미래는 대개 두 가지였다. 시설 안에 남아 관리인이 되거나, 값싼 노동력으로 밖에 나가는 것. 그래서 기술은 살아남는 거의 유일한 탈출구였다. 안종환 씨는 공고에 진학한 뒤 용접을 배웠다. 쇳조각과 불꽃 사이에서 처음으로 자신만의 가능성을 본 시기였다고 했다. 어린 시절부터 삽질과 건축일에 익숙했던 몸은 기술을 빨리 익혔다. 쇳판 이어붙이는 감각도 남달랐다. 누군가는 그걸 재능이라고 불렀다. 낮에는 학교 수업, 방과 후엔 여전히 시설 노동이 이어졌지만 그는 틈만 나면 실습장으로 갔다. 그리고 몇 개의 자격증도 따냈다. 용접 관련 자격증과 기능 자격증들. 시설 아이들에게 자격증은 종이 한 장 이상의 의미였다. 이름도 생년도 흔들리던 삶에서 처음으로 국가가 인정한 자기 능력의 증표였기 때문이다. 그러던 어느 날 기능대회에 나가 2위를 했다. 대기업 쪽에서 스카우트 제안까지 들어왔다. 당시만 해도 기능 인력에 대한 수요가 많던 시절이었다. 용접 기술은 산업 현장에서 귀한 기술이었다. 하지만 안종환 씨는 그 제안을 받아들일 수 없었다. 시설 아이들에게 선택은 늘 제한적이었다. 당장 먹고 잘 곳이 더 중요했다. 공고 3학년 2학기 무렵, 그는 결국 숙식을 제공하는 업체로 취업을 결정했다. 월급보다도 ‘잘 곳 있음’이라는 조건이 절실했다. 시설을 나오면 당장 갈 곳 없는 원생이 대부분이었다. 기술보다 먼저 필요한 건 잠잘 방이었다. 퇴소 당시 그는 정착금 한푼 없이 그곳을 떠나야 했다. 당시 추정되는 정착금은 100만~200만원 정도되지만 덕성원 일가는 퇴소하는 원생들의 정착금마저 착복해버렸다. 1995년도의 일이었다.   덕성원 피해자 안종환(오른쪽) 씨가 지난 4월 27일 청와대 앞에서 은화복지재단의 설립 허가 취소를 요구하는 기자회견을 하고 있다. 이후, 우연한 계기로 그는 생선 유통 일을 배우기 시작했다. 처음엔 새벽시장 잡일이었다. 부산 항구의 새벽은 거칠었다. 경매사들 고함 소리와 생선 비늘 냄새가 뒤섞였다. 하지만 안종환 씨는 그곳에서 흐름을 읽기 시작했다. 지역마다 잘 팔리는 생선이 다르다는 걸 알게 됐다. 부산에서 흔한 생선이 순천에서는 귀했고, 순천에서 덜 좋아하는 어종은 다른 지역에서 값이 뛰었다. 그는 직접 트럭을 몰고 부산과 순천을 오갔다. 차 안에서 자기도 했다. 새벽 경매 끝나면 곧바로 이동했고, 시장 사람들과 인맥을 쌓아 거래처를 넓혔다. 시설에서 살아남기 위해 익힌 감각은 사업에서도 버티는 힘이 됐다. 남의 눈치 빠르게 읽는 법, 몸 아껴 쓰지 않는 법, 잠 못 자도 견디는 법. 그는 악착같이 일했다. 그러자 돈이 모이기 시작했다. 안종환씨가 많은 돈을 벌었다는 소문은 빠르게 퍼졌다. 시설 출신 가운데 드물게 자수성가했다는 이야기가 돌았다. 그 무렵, 덕성원 운영자 일가가 찾아왔다. 오랜 세월 연락 없던 사람들이었다. 시설에 있을 때는 절대적인 권력이던 이들이, 운영 자금이 필요하다는 말을 했다. 안종환 씨는 결국 돈을 빌려줬다. 총 3억 원이다. 약 25년 전의 일이었다. 어쩌면 시설에서 자란 이들에게 운영자들은 공포의 대상이면서 동시에 이상한 형태의 가족처럼 남아 있습니다. 미워하면서도 완전히 끊어내지 못하는 관계. 어린 시절을 지배했던 사람들에게서 자유로워지는 일은 생각보다 어려웠습니다. 차용증도 썼지만 공증 받은 금액은 1억 2천만 원뿐입니다. 나머지는 신뢰라는 이름 아래 넘어갔지요. 돈을 떼일 거라고는 생각하지 못했어요. 적어도 자신이 어린 시절을 보낸 시설 사람들인데, 설마 끝까지 모른 척하겠느냐는 마음이 남아 있었던 겁니다. 시간이 흐를수록 연락은 뜸해졌고, 변제 약속은 미뤄졌지요. 결국 또다시 이용당했다는 생각을 하게 됐습니다. 어린 시절 노동력으로 쓰였던 아이가, 어른이 되어서는 돈줄로 이용된 셈이죠.” 덕성원이 자리 잡고 있던 부산 외곽은 한때 사람보다 산과 군부대가 더 익숙한 곳이었다. 그러나 시대가 변하면서 땅의 가치도 달라졌다. 해운대 신도시 개발이 본격화되자 주변 부동산 가격이 급격히 뛰기 시작했다. 과거 독재정권 시절 복지시설 명목으로 불하받았던 부지들은 어느새 막대한 자산이 되어 있었다. 원생들의 기억 속에 삽질과 강제노동의 공간이었던 땅이, 도시 개발 흐름 속에서는 황금 부지로 변해간 것이다. 덕성원 관련 부지도 결국 매각 수순을 밟았다. 시설이 아이들을 먹이고 보호하기 위해 존재했다기보다, 시간이 흐르며 하나의 재산처럼 운영됐다는 비판이 나오는 이유다. 실제로 많은 수용시설들이 군사정권 시절 국가 지원과 토지 제공 아래 성장했고, 이후 도시 개발 과정에서 거대한 자산을 축적했다는 지적이 이어져 왔다. 덕성원은 2001년 자진 폐원했다. 공식적으로는 운영 종료였지만, 당시를 기억하는 이들 사이에서는 다른 해석도 나온다. 1980년대 부산 최대 인권침해 사건으로 꼽히는 형제복지원 사건이 사회적으로 다시 거론되기 시작한 시기와 맞물려 있다. 과거 수용시설 운영 방식에 대한 비판과 증언이 이어지면서, 덕성원 역시 부담을 느꼈을 가능성이 있다는 추정이다. 물론 덕성원 측은 공식적으로 이를 인정하지 않았다. 실제로 덕성원을 운영했던 일가는 폐원 후에도 복지사업 영역에서 완전히 손을 뗀 것은 아니었다. 이후 은화복지재단을 설립하고, 은화요양병원 등을 운영해온 것이다. 시설 형태와 대상은 달라졌지만, 아이들의 핏값으로 과거 수용시설 운영 세력이 다른 복지사업으로 이동한 사례다.   덕성원 피해자와 지원단체의 도움으로 지난 4월 27일 청와대 앞에서 기자회견을 하는 모습 2012년 형제복지원 사건이 에서 방영되었다. 이후 그는 자신의 피해사실도 알리기로 결심했다. 2020년부터 덕성원 사건을 본격적으로 알리기 시작했다. 인권단체 등 활동가들의 지원도 받았고 YTN과 부산 지역 언론의 도움도 받았다. 2024년에는 덕성원사건 피해자 협의회를 결성했다. 진화위는 덕성원 사건의 피해사실이 인정된다는 결정을 내렸다. 이를 근거로 법원은 2025년 11월 덕성원 사건 피해자에 대해 보상하라는 판결을 내렸다. 하지만 고아 수용시설 운영자들이 국가 지원금을 착복하여 축적한 재산으로 세운 은화복지재단 같은 시설은 아직도 운영 중이다. 그는 이에 대해 해당시설의 국가 환수와 함께 폐쇄가 당연하다고 주장한다. 안종환씨가 형제복지원에 엄마와 함께 입소했다는 기록은 존재하지만 이후 엄마의 기록은 사라졌다. 형제복지원의 수많은 사망자 중 한 명으로 추정하고 있다. 현재 그는 엄마의 사망 신고를 완료한 상태다. 이후 엄마의 피해사실도 보상받기위한 싸움을 계속하는 중이다. 안종환 씨 같은 원생 출신들에게 가장 괴로운 대목은 따로 있다. 시설은 사라졌는데 피해자들의 시간은 끝나지 않았다는 점이다. 어떤 이는 평생 가족을 찾지 못했고, 어떤 이는 이름과 생년월일이 바뀐 채 살고 있다. 누군가는 노동 후유증과 폭력 트라우마를 안고 살아가며, 누군가는 아직도 자신이 왜 그곳에 보내졌는지조차 모른다. 반면 시설 운영에 관여했던 사람들은 다른 이름의 법인과 재단으로 여전히 부를 쌓고 있는 중이다. 그 대비는 원생 출신자들에게 오래 지워지지 않는 질문을 남긴다. 국가는 누구를 보호했고, 누구의 삶을 기록 없이 지워버렸는가.이득신 시민기자 dsshine23@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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