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관위, 밀실 독단 행정 끝내고 하청 구조 타파해야 [사회혁신] 노태악 중앙선거관리위원장이 5일 경기도 과천 중앙선거관리위원회에서 투표용지 부족 사태에 대한 대국민 사과를 하고 있다. 2026.6.5. 연합뉴스
지난 6월 3일 치러진 제9회 전국동시지방선거는 우리 민주주의 역사에 깊은 상흔과 과제를 남겼다. 전국 91개 투표소에서 발생한 역대 초유의 투표용지 부족과 이로 인한 투표 지연 사태는 신성한 참정권을 행사하러 나선 유권자들에게 크나큰 불편과 공분을 안겼다. 주권자의 소중한 한 표를 담아낼 종이 한 장조차 제대로 준비하지 못한 선거관리위원회의 무능은 변명의 여지가 없다.
지금 정치권은 이 사태를 두고 거친 공방을 벌이고 있다. 일각에서는 즉각적인 개표 중단이나 재선거, 혹은 특검을 요구하며 사법적 단죄와 정치적 음모론으로 군불을 때고 있다. 그러나 30년 넘게 지방자치 최일선에서 현장을 지키고 행정을 고민해 온 정치인의 눈으로 볼 때, 이러한 정쟁적 접근은 사태의 본질을 비껴간 것이다. 이번 사태는 악의적인 정치적 음모가 아니라, 민주적 통제를 벗어난 관료제의 타성과 무능이 낳은 행정적 참사다.
우리는 거대한 관료제의 패러다임 전환기 앞에 서 있다. 1987년 민주화와 1997년 외환위기 이후 김대중·노무현 정부를 거치며 대한민국 정부 혁신의 핵심 기치는 정치적 중립성과 독립성의 확보 였다. 그러나 30년이 지난 지금, 이 선의의 개혁은 통제받지 않는 관료제의 전혀 다른 두 가지 기형적 단면을 드러내고 있다.
한쪽 극단에는 검찰이 있다. 정치적 외풍을 막아주겠다는 독립성 을 무기 삼아 스스로 무소불위의 권력 주체가 된, 통제받지 않는 관료제의 비대화 모델이다. 반대쪽 극단에는 바로 선관위가 있다. 똑같은 헌법상 독립성 이라는 방탄막 뒤에 숨어 외부의 합리적인 감사와 견제를 거부한 채, 조직 내부의 나태와 비효율을 키워온 통제받지 않는 관료제의 무능화 모델이다. 검찰이 남용되는 날카로운 칼이라면, 선관위는 녹슬어 움직이지 않는 방패다. 두 사례는 결국 민주적 통제(Democratic Accountability)를 상실한 관료제가 어떻게 타락하는지를 보여주는 동전의 양면이다.
제9회 전국동시지방선거일인 3일 서울 동작구 상도4동 주민센터에 마련된 투표소에서 유권자들이 투표하고 있다. 2026.6.3. 연합뉴스
특히 분권자치주의자의 관점에서 이번 사태의 가장 치명적인 민낯은 바로 선관위가 고수해 온 고질적인 선거 행정의 하청 구조 다. 선관위의 정규 관료들은 중앙에서 기획과 생색만 낼 뿐, 선거 당일 투표소 현장의 격무와 위험 부담, 그리고 행정 과실에 대한 모든 법적 책임은 지방자치단체의 하위직 공무원들과 교사들에게 전적으로 전가(하청)되어 왔다.
지방자치의 핵심은 현장의 자율성과 책임성이다. 하지만 현재의 선거 공무원제는 지자체 공무원들을 강제로 차출하면서도 물가상승률조차 반영되지 않은 처참한 수당으로 사기를 꺾고 있다. 현장에서 묵묵히 땀 흘리는 지자체 공무원들에게는 강제 동원 과 책임 전가 만 있고, 권한과 보상은 없다. 데이터 예측 실패로 투표지가 부족한 상황이 터졌을 때, 현장 인력들이 유연하고 전문적으로 대응할 동기부여 자체가 구조적으로 봉쇄되어 있었던 것이다. 상부가 저지른 잘못의 뒷감당을 온전히 지방 현장의 공무원들이 눈물로 메워야 하는 이 부조리한 관행을 언제까지 방치할 것인가.
이제 국회 행정안전위원회가 나서서 이 낡은 관료 체제를 뿌리부터 뜯어고쳐야 한다.
첫째, 헌법적 독립성이라는 이름으로 자행되던 밀실 독단 행정 을 끝내야 한다. 유권자의 표권에 직결되는 핵심 선거 지침을 위원회 전체회의도 거치지 않고 사무총장 선에서 전결 처리하는 폐쇄성을 타파해야 한다. 선거 사무의 독립성은 존중하되, 인사·예산·물류 등 일반 행정에 대해서는 감사원의 정기 감사와 국회의 실질적 감사를 의무화하도록 법을 개정하겠다. 아울러 공직선거법을 개정해 투표지 최소 인쇄 비율을 유권자의 70% 이상으로 명문화함으로써 행정 편의주의적 임의 조정을 원천 차단하겠다.
둘째, 지방 공무원을 소모품처럼 동원하는 선거 하청 체제 를 근본적으로 청산해야 한다. 관행적인 지자체 공무원 강제 차출제를 점진적으로 폐지하고, 퇴직 공직자와 지역 주민, 선거 행정 전문가로 구성된 상설 선거 관리 전문 임기제 공무원단 을 구축해야 한다. 부득이하게 협조하는 지방 공무원들에게는 정당한 대우와 수당을 지급하고, 과실에 대한 책임 소재를 명확히 하여 상부 관료가 책임을 지는 구조로 전환해야 한다.
이광희 국회의원
민주주의의 뿌리는 투표소에 있고, 그 투표소를 지키는 이들은 지방의 현장 공무원들이다. 이번 사태를 단순한 정쟁이나 인적 쇄신으로 덮고 가려 해서는 안 된다. 통제받지 않는 관료제의 방종을 멈춰 세우고, 중앙 집권적인 선거 행정을 현장과 분권 중심으로 혁신하는 것, 그것이 6·3 사태가 우리 국회에 던진 진정한 혁신의 과제다.
더불어민주당 이광희 국회의원(행정안전위원회, 청주시 서원구) goanhee1@naver.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