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무현 공화국 의 시민 노사모와 진보의 미래 [카테고리 설정이 아직되어 있지 않습니다.] (본 칼럼은 음성으로 들을 수 있습니다.)
선거가 다가올 때마다 정치가 어떠해야 하는가를 묻는 담론이 많이 등장한다. 아니, 등장했는데, 기이하게도 최근에는 정치 그 자체의 의미를 묻기보다 그저 이기고 지는 일, 나아가 상대편을 적으로 돌리고 혐오를 퍼뜨리는 말들이 더 많아졌다. 정치를 바라보는 시야가 전 지구적으로 협소하고 저속해지고 있다는 실감이 자꾸 들어 괴로울 지경이다. 특히 민주당을 향해서는 전에 없이 답답함을 토로하는 글들이 는다.
이럴 때 장은주의 책 <공화주의자 노무현>이 등장한 것이 얼마나 고마운지 모르겠다.
<공화주의자 노무현>은 존재하는 공화주의 이론에 비춰 노무현을 해석한 것이 아니라, 노무현의 정책, 정치적 행보, 어록 등을 통해 일반적 의미의 민주주의 정치 언어를 넘어서는 그의 특별한 점을 공화주의로 자리매김한 책이다. 좀 더 중요한 점은, 그래서 노무현이 공화주의자라는 것을 증명하는 데 골몰한 것이 아니라 길을 잃은 듯 보이는 민주당과 진보정치의 혼란을 노무현의 사유를 따라가면서 극복할 방법을 제시하는 데 있다.
장은주 교수의 신간 〈공화주의자 노무현〉의 표지. 도서출판 피어나 제공.
장은주는 노무현을 스스로 의식하지 못한 공화주의자라고 보았다. 노무현의 공화주의적 성격을 대연정 제안에서부터 찾은 장은주는 노무현 공화주의를 몇 개의 문장으로 종합하고 있다. 사람 사는 세상, 반칙과 특권 없는 사회, 깨어 있는 시민의 조직된 힘, 그리고 진보의 미래가 그것이다. 이 책을 구성하는 생각은 축이 두 개다. 하나는 노무현을 통해 설명하는 공화주의이고, 따른 하나는 그러한 공화주의를 실천할 공화국의 구성원들, 다른 말로 민주공화적 시민이다. 그 후자의 모범례를 나는 대한민국 정치사에서 드물게 발생했던 노사모라는 조직에서 발견한다. 이 책을 빌어 이 두 가지를 이야기해보고 싶다.
왜 지금 노무현인가
그러면 우선, 이 시점에 왜 노무현인가. 이 질문은 이 책의 대전제다. 노무현은 왜 불려 나오는가. 해마다 그리고 선거 때마다 불려 나오지만 이 책에서 불러낸 노무현은 왜 새록새록한가.
벌써 몇 년째 우리는 87년 체제를 극복해야 한다는 말을 하고 있다. 심지어 노무현이 대통령으로 당선되는 2002년에 벌써 낡은 정치를 청산해야 한다는 말을 입에 달고 살았다. 그때의 낡은 정치가 설마 박정희 전두환에 이은 군사독재의 잔재겠는가. 심지어 김대중 정치겠는가. 2002년 대선 전후하여 가장 유명했던 정치 서적이 <민주화 이후의 민주주의>였다. 즉 우리는 당대의 민주주의가 무언가 잘못되거나 부족했다고 느꼈기에 새로운 것을 바랐던 셈이다,
그런데 실제로 우리가 바라야 했던 것이 새로움이 아니라 다름이었다면?
장은주의 책이 말하는 것이 바로 그 다른 정치에 대한 이야기다. 생전 처음 보는 다름이 아니라 이미 노무현이 선취했으나 우리가 몰랐던 그 다름.
과연 노무현의 정치사상은 ‘새로운’ 정치라기보다 ‘다른’ 정치에 가깝다.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이다”가 헌법 제1조임에도 그간 우리의 정치사상은 ‘민주’에 꽂혀 있었다고 보아도 무방하다. 박정희 시대만 해도 그가 만든 정당의 이름은 민주‘공화’당이었다. 심지어 북의 경우 자기들의 정치체제를 가리키는 관용적 표현이 ‘공화국’이다. 근대 국가 건설 초기로 거슬러 올라가 보면, 임시정부의 첫 헌법인 임시헌장도 제1조가 “대한민국은 민주공화제로 함”이니, 공화주의 사상 그 자체가 우리에게 낯설다 말할 수는 없다. 장은주도 책에서 말하듯 한반도의 정치사상에서 공화정은 완전히 낯선 사상은 결코 아니다. 그러나 우리 근대사에서는 특히 80년대의 반정부투쟁 이름을 민주화운동이라 붙인 데서도 볼 수 있듯 공화주의를 위한 투쟁보다는 민주주의를 위한 투쟁이 앞자리에 있었다. 박정희와 김일성 두 독재자가 나란히 앞세운 ‘공화’가 가부장적인 1인 독재 이념 비슷하게 받아들여진 탓도 있지 않나 싶다.
그러다 보니 2000년 노사모가 결성되고 노무현이 새로운 정치의 표상으로 떠오를 때도 공화보다는 민주가 더 중요한 정치용어였다. 그로부터 어언 20여 년, 이미 민주주의는 완성되다 못해 너무 익어 곪아가는 느낌마저 드는 요즘이다. 도대체 정치가 뭐길래 중차대한 선거를 앞두고도 나라를 미래로 이끌어갈 새로운 비전 하나 제시되지 못하는가. 윤석열만 타도하면 저절로 훌륭한 나라가 되는가. 공화 없는 민주는 자칫 혐오의 정치로 빠져들기 쉽다는 것을 지금 뼈저리게 느끼고 있지 않은가.
이럴 때, 오래된 미래 같고 달의 뒷면에 있는 예언석 같은 그 공화라는 이름을 노무현을 경유하여 불러내면 우리는 희망을 붙들 언어를 하나 가지게 되는 셈 아닐까. 즉, 지금 노무현이 이야기되어야 하는 이유, 그것은 우리에게 예전과는 전혀 다른 정치가 절실하게 필요하기 때문이다. 개인주의를 넘어 각자도생주의에 가까워지고 있는 이 즈음 ‘사람이 사람에게 그러해야 하는’ 정치는, 이름을 붙이지 못해 그렇지 절박한 꿈이다. 그것에다 장은주는 “한국 민주주의의 공화화”라는 이름을 붙여주었다. 지금 한국 나아가 전 지구적 시민사회에 주어진 ‘살아남기’의 과제는, ‘더불어 살아남기’가 아니면 수행해낼 수 없는 과제다. 그 더불어 살아남기를 정치적으로 불러보면 바로 민주주의의 공화화가 아니겠는가.
봉하마을의 고 노무현 전 대통령. 노무현 재단
새로운 시민 또는 시민적 진보의 씨앗 노사모
노무현은 생전에 노사모와 만난 자리에서 자주 “노사모는 노무현이즘을 탐구하고 노무현은 노사모이즘을 탐구하는 것, 그것이 우리의 할 일입니다”라는 말을 하곤 했다. 노무현이 생각한 노사모이즘은 “깨어 있는 시민의 조직된 힘”이라는 말로 일반적으로 요약된다. 노사모가 스스로를 부른 “깨어 있는 개인의 느슨한 연대”를 발전시킨 말이다. 각성한, 자유로운, 자발적인이라는 말로 변주되기도 하는 이 ‘깨어 있는 개인’을 다른 말로 하면 시민, 공화국을 만드는 시민이다. 노무현은 “우리는 노사모이지 노무현의 선거캠프가 아니다”라는 노사모 일반의 생각을 매우 존중했다. 이를 이해하지 못한 건 오히려 당시의 정치권과 언론이었다. 사조직과 노사모가 어떻게 다른가를 전혀 알지 못했던 선거관리위원회라든가, 나중에 노빠니 친노세력이니 하는 말로 노사모적 정치를 규정하려 했던 사람들은 아직도 노사모를 모르고 당연히 노무현도 모른다.
노사모는 대화하고 토론하는 모임이었고, 생각해보면 노무현, 두 번 생각하면 노무현이 보인다 등의 선거 캠페인 슬로건이 만들어지는 과정도 끊임없는 게시판 토론을 통해서였다. 유명한 노사모의 슬로건 ‘깨어 있는(각성한) 개인의 느슨한 연대’ 역시 마찬가지다. 그런 언어의 핵심엔 ‘생각하는 개인’이 있고, ‘평등’과 ‘관용’이 있었다. ‘각성한 개인’의 다양한 변화형인 자유로운 개인, 자발적인 개인, 깨어 있는 개인 등의 말도 마찬가지다. 빼어난 개인의 성취를 넘어서서 관계 속에서 이뤄내는 공동체 정신이 당시 노사모가 추구하던 것이었다. 노사모를 소위 문제적 정치팬덤의 원조쯤으로 인식하는 사람들은 결코 인정하고 싶지 않겠지만, 노사모는 노무현을 사랑하는 사람들은 어떠해야 하는가를 매우 진지하게 성찰하고 탐구한 집단이다. 사랑하는 사람은 자신의 사랑받는 이가 잘못되기를 원치 않는다. 그는 민주주의자여야 하고 보편적 가치, 다른 말로 공동선을 실현할 의지를 지녀야 한다. 무엇이 공동선인가를 두고 벌여온 노사모의 치열한 논쟁을 가끔 상기해 본다. 시끄럽고 갈등에 휩싸이는 것이 오히려 건강한 공동체라는 노사모의 주장은 확실히 특별한 데가 있었다. 그리고 노무현은 이러한 노사모를 매우 잘 이해하고, 모든 국민이 바로 노사모와 같은 공화주의적 시민이 되었으면 하고 바랐다고 나는 본다. 그렇다면 노사모가 생각한 노무현이즘은 어떠했을까?
노사모들은 이미 대선 경선 당시부터 노무현의 공화주의자적 면모를 깨닫고 있었다. 물론 이런 깨달음 또는 인식은 체계적이고 정돈된 이론적 인식이 아니라, 공화주의에 대한 막연한 이해에 기반한 것이다. 그러나 2002년 당시 그를 이런 관점에서 바라보는 정치학자를 본 일은 드물었다. 단지 상식적인 비엘리트 시민의 모임인 노사모가 공화주의자 노무현을 설명할 이론틀을 발견하기 힘들었던 연유라고 해야겠다.
그럼에도 노사모는 왜 그를 공화주의자라 생각했는가. 매우 일상적인 견지에서 노무현의 정치는 ‘나를 따르라’는 정치가 아니라 ‘대화하고 토론해 봅시다’의 정치라고 우리는 생각했다. 선거에 떨어진 ‘백수’ 노무현부터 ‘장관’ 노무현, ‘후보’ 노무현에 이르기까지 노무현을 접해본 경험이 있는 노사모 회원들에게 노무현의 이미지는 단지 민주적 지도자라는 말로는 아쉬운 어떤 것이었다. 우리는 노무현과 함께 이제야말로 성장을 넘어 성숙하는 정치를 해야 할 때라고 말하곤 했다. 노사모는 아이디(온라인 이름) 평등주의, 똘레랑스, 자율과 협력 등을 매우 중요하게 생각했는데, 장은주의 책을 읽으며 이런 것들이 공화주의적 생각이겠구나 하는 각성을 새삼 하였다. 당시 노사모가 생각하고 실천하기도 한 노무현의 다른 정치 즉 공화주의적 정치는 참여정부의 국정 원리에 잘 반영되어 있다. (원칙과 신뢰, 대화와 타협, 투명과 공정, 분권과 자율)
장은주의 책은 이 책을 읽는 독자들 모두에게 노무현을 그리워하게 할 것이지만, 특히 노사모라면 후회하는 마음, 반성하는 감정을 많이 불러일으키게 되리라고 생각된다. 기실 우리는 막연하게 노무현을 알았나 보다. 노무현이 노사모를 향해 이야기하던바 “노무현은 노사모이즘을, 노사모는 노무현이즘을!”이라는 말에서 그 ‘이즘’이란 결국 공화적 시민이 되자는 말이 아니었을까. 공화적 시민. 장은주의 책이 노무현을 경유해서 알려주고자 하는 바로 그것이다. 장은주의 책을 받아 읽으며 가장 감사히 생각했던 점이 바로 이 점이다. 노사모이즘과 노무현이즘, 이 두 구심의 ‘이즘’이 겹치는 자리에 있는 사상을, 장은주를 따라 “민주적 공화주의”, “시민적 진보”라고 불러도 될 것 같다.
민주당의 미래
<더 플랜>이라는 책이 있다. “미국의 새로운 비전과 민주당의 도전”이라는 부제가 달린 이 책은 아들 부시의 공화당 정권으로부터 민주당이 정권을 재탈환하기 위해 요구되는 것이 무엇인가를 제시한 책이다. 이 책은 단순히 민주당의 승리전략을 다룬 것이 아니라 미국이라는 나라가 미래로 나아가기 위해 정치가 해야 할 일을 아젠다화하고 정책 아이디어를 제시한 책이다. 달리 말해 민주당은 양당 중 하나의 정당이 아닌 위대한 미국을 부흥하는 정당이 되어야 한다는 주장을 담고 있다.
나는 장은주의 <공화주의자 노무현>을 읽으며 자주 <더 플랜>을 떠올렸다. <더 플랜>과 <공화주의자 노무현>이 유사한 구성을 지녔다거나 주제가 닮았다거나 해서가 아니라, 집권 전략을 넘어서는 국가의 재구성을 꿈꾼다는 점에서다. 과연 이 책에는 한국의 민주당은 단순한 양당제 정치의 한 축이 아니라 새로운 정치를 통해 시민적 진보를 담당해야 하는 정당이라는 강력한 주장이 담겨 있다. 그 주장을 노무현이 왜 어떻게 공화주의자인가 하는 설명과 해석을 통해 펼치고 있는 것이다.
한국의 민주당은 바로 그런 <더 플랜> 전략 같은 것을 수립하고 당원들을 꾸준히 교육하여 진보의 중추적 시민으로 길러내야만 하는 정당이다. 그래야 집권이 가능하고, 무엇보다 민주당의 집권은 그야말로 ‘진보의 미래’를 여는 일이기 때문이다. <공화주의자 노무현>은 노무현의 잘 알려지지 않은 공화주의자 면모를 탐구하면서 동시에 그 길이 민주당의 나아갈 길임을 철학적 현실적으로 보여준다. 즉, 민주당의 ‘당위’에 관한 명료한 정의가 이 책의 가장 중요한 점이다.
장은주는 민주당이 그 소속 정치인들이나 지지자들의 주관적 인식과 무관하게 우리 사회에서 사회적으로 요청되는 나름의 객관적 정치적 위상을 가지고 있다고 썼다. 그 객관적 정치적 위상을 드러내는 가장 핵심적 문장을 장은주는 노무현의 입을 빌어 “깨어 있는 시민의 조직된 힘”, “사람사는 세상을 향해 가는 진보”, “민주적 연대성에 기초한 힘없는 사람들의 힘” 등으로 표현한다. 이러한 당위적 위상을 지닐 수밖에 없는 구도 위의 정당인 민주당은, 그 현실태가 어떻게 구질구질하든, 현재의 지배 세력이 어떻게 어리석든, 강력한 시민의 요구를 충족시켜야 하는 소임이 있다. 즉, “시민의 힘의 대리자로서만 성공적인 정당정치를 할 수 있다.”
다만 이 책은 아쉽게도 시민성의 구현인 촛불 시민이라든가 그 이전 노사모라든가 하는 시민정치 전통의 연대체들이 어떤 정신의 구현이지 특정 사람들의 조직이 아님을 명료히 밝히지 않았다. 지금, 아니 이미 대통령 노무현 시절부터 권력 창출 즉 킹메이커 역할의 성공에 취한 사람들의 존재를 비판적으로 바라볼 때 비로소 노무현의 ‘공화’가 과잉 정치참여 또는 과잉 권력욕망의 정치와 충돌할 수밖에 없고 따라서 성공을 거두지 못함이 좀 더 명료해질 것이다.
흔히들 노무현을 가리켜 훌륭한 인간, 탁월한 정치인, 실패한 대통령이라고들 한다. 그런데 노무현이 정말로 실패한 대통령일까? 엄밀히 말하면 모든 대통령이 실패하게 되어 있는 제도와 구조를 우리는 지닌 것이 아닐까. 노무현은 그런 제도와 구조를 극복할 방안을 알게 모르게 제시해 주고 간 것은 아닐까.
총선을 얼마 앞두지 않은 지금, 이 책을 민주당의 정치인들뿐 아니라 대한민국의 침몰을 바라지 않는 모든 민주시민이 읽었으면 좋겠다. 민주의 반대말이 독재라면, 공화의 반대말은 단연 혐오다. 지금 우리나라의 상황은 단순히 민주주의만 후퇴하는 상황이 아니다. 민주공화국이어야 할 대한민국의 헌법적 가치가 망가진 상황이다. 사람 사는 세상을 향해 나아가기 위하여 눈앞의 선거 승리만을 위한 치졸함을 넘어 담대한 정치사상으로 승리해 보자. 그리고 단 한 번이라도 노사모로 자신을 인식해 본 사람이라면, 이러한 시민적 진보의 길에 담대하게 앞장서 보자고 권하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