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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보 바로가기 : 백 살까지 산 세상의 골칫덩어리 스콧 니어링

백 살까지 산 세상의 골칫덩어리 스콧 니어링
[사람들]
미국이라는 나라는 가끔 재미있는 실수를 저지른다. 명문대 교수 하나를 해고했더니, 그 사람이 100살까지 살면서 평생 그 대학을 부끄럽게 만드는 경우다. 스콧 니어링(Scott Nearing, 1883~1983)이 딱 그런 인물이다. 펜실베이니아의 잘사는 집안에서 태어나 와튼스쿨(Wharton School) 경제학 박사까지 딴 엘리트가 어쩌다 평생 체제와 싸우는 반항아가 됐는지, 그리고 그 반항의 끝이 왜 산속 통나무집이었는지 살펴보자.   1910년 경의 스콧 니어링(위키피디아) 아동노동 반대했다고 잘린 교수님 니어링은 1909년 와튼 스쿨에서 박사학위를 받고 곧바로 교수가 됐다. 문제는 이 사람이 강의실에서 조용히 강의만 하는 스타일이 아니었다는 것이다. 아동노동 반대에 목소리를 높였고, 심지어 부흥사 빌리 선데이(Billy Sunday, 1862~1935)에게 당신이 믿는 복음을 철도회사와 방직공장에도 좀 적용해보라 는 식의 공개편지를 날렸다. 대학 이사회는 은행가와 기업변호사들로 가득했으니, 결과는 뻔했다. 1915년, 니어링은 해고 통지를 받았다. 사유는 굳이 명시되지 않았지만 다들 알고 있었다. 이 교수, 말이 참 많네. 재미있는 건 이 해고가 오히려 그를 유명인으로 만들었다는 점이다. 미국 학계 최초의 대규모 학문의 자유 논쟁이 이 사건에서 터졌다. 그를 자른 대학이 58년 뒤인 1973년에 명예교수직을 도로 안겨준 걸 보면, 역사는 가끔 뒤늦게라도 제값을 치른다.   1915년의 니어링(위키피디아) 전쟁 반대했다고 또 잘리고, 이번엔 기소까지 펜실베이니아에서 쫓겨난 니어링을 받아준 곳은 오하이오의 톨레도 대학이었다. 그런데 1917년 미국이 1차대전에 참전하자 이번엔 반전 발언으로 또 해고됐다. 두 번 잘리면 보통 조용해질 법도 한데, 니어링은 오히려 팜플렛 대광기(The Great Madness) 를 써서 전쟁을 거대 기업의 살인게임 이라고 불렀다. 결국 방첩법(Espionage Act) 위반으로 기소돼 법정에 섰다. 변호사 없이 직접 자신을 변론했고, 1919년 배심원단이 30시간 고민 끝에 무죄 평결을 내렸다. 감옥은 면했지만 학계에서는 완전히 퇴출됐다. 뭐, 어차피 대학들이 그를 원한 것도 아니었고 그도 대학을 원하지 않았으니 피장파장이었다.   1918년 잡지 뉴욕 콜 (New York Call)에 실린 니어링 삽화(위키피디아) 사회주의자에서 공산당원으로, 그리고 탈당 이후 니어링은 사회당 후보로 뉴욕 시장에까지 도전했다가 낙선했고, 1930년대 초에는 아예 공산당에 입당했다. 하지만 조직의 노선 강요를 견디지 못하고 1930년 탈당했다. 평생 사회주의자로 남았지만, 어느 정당의 충성스러운 당원이 되기엔 성격이 너무 뻣뻣했다. 이 대목에서 그의 인생 패턴이 보인다. 어느 조직에 들어가든 결국 그 조직과 싸우고 나온다는 것. 자본주의와도 싸우고, 대학과도 싸우고, 심지어 자신이 몸담았던 공산당과도 싸웠다.   1955년 경의 니어링(위키피디아) 버몬트로 도망쳐 좋은 삶 을 짓다 1932년, 니어링은 뉴욕을 떠나 버몬트의 농장을 사들였다. 두 번째 부인 헬렌 니어링(Helen Nearing, 1904~1995)과 함께 자급자족 농사를 지으며 하루를 노동, 지적활동, 공동체활동으로 삼등분하는 생활 원칙을 세웠다. 이게 나중에 1954년 책 조화로운 삶 (Living the Good Life)으로 출간되면서, 1960~70년대 미국 히피세대와 귀농운동에 불을 지폈다. 정치판에서 두들겨 맞고 쫓겨난 사람이 결국 텃밭에서 혁명을 완성한 셈이다.   1920년대 헬렌 니어링(위키피디아) 백 살하고도 열여드레 니어링은 말년에 채식주의자, 평화주의자로 살다가 100번째 생일을 한 달 앞두고 스스로 곡기를 끊기 시작했다. 과일즙만 마시다가 나중엔 물만 마셨고, 1983년 8월 24일, 100살 하고도 열여드레를 채운 뒤 세상을 떠났다. 자신이 평생 주장한 인간은 스스로 존엄하게 삶을 마무리할 권리가 있다 는 신념을 마지막 순간까지 실천한 셈이다. 참고로 1981년 영화 레즈(Reds) 에도 실제 인물로 잠깐 출연해, 자신의 옛 친구 존 리드(John Reed, 1887~1920)와 러시아혁명 이야기를 들려주기도 했다. 백 살 노인이 할리우드 영화에 깜짝 출연”이라니, 이만하면 인생 이력서에 한 줄 더 추가할 만하다.   1916년 경의 존 리드(위키피디아) 한국에 남기는 물음표 니어링의 삶은 한 가지를 계속 되묻게 만든다. 권력에 밉보여 자리에서 쫓겨난 사람이 옳았는지 그른지는 잘린 그 순간에는 절대 알 수 없다는 것. 1915년 대학 이사회의 눈에 니어링은 그저 말썽꾼 교수 였을 뿐이다. 그러나 58년 뒤 그 대학은 스스로 판단을 뒤집었다. 2024년 12월 3일 비상계엄을 선포하고 그걸 정당화하려 했던 이들, 혹은 그 명령에 따라 부당한 지시를 수행했던 이들도 지금은 자신이 질서를 지킨 사람 이라 믿고 있을지 모른다. 그러나 역사는 니어링의 경우처럼 훗날 전혀 다른 판결을 내릴 수 있다. 또 하나, 니어링은 조직에 속박되지 않고 옳다고 믿는 바를 끝까지 밀어붙였다. 정당도, 대학도, 심지어 자신이 선택한 공산당조차 그의 신념 앞에서는 임시정거장에 불과했다. 진영논리에 갇혀 내 편의 티끌 은 눈 감고 상대편의 잘못만 들보 로 키우는 습성이 한국 정치판 곳곳에 스며있다. 니어링이라면 아마 이렇게 물었을 것이다. 그래서, 옳은 게 뭔데? 조직이 옳다고 하니까 옳은 거야, 아니면 원래 옳은 거야? 답하기 불편한 질문일수록, 오래 곱씹을 가치가 있다. 역사의 법정에는 공소시효가 없다.   스콧과 헬렌 니어링 부부.(Nearing Enough: Simple Living Lessons – Mother Earth News)  김성수 시민기자 wadans@empa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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