귀 자른 천재가 세상을 뒤집다, 빈센트 반 고흐 [카테고리 설정이 아직되어 있지 않습니다.] 살아생전 그림 한 점 제대로 팔지 못한 화가가 있다. 정확히 딱 한 점 팔았다. 죽기 불과 몇 달 전이었다. 그 화가가 죽고 나서 130년이 넘은 지금, 그의 그림은 경매에서 수백억 원에 팔린다. 이쯤 되면 시장의 눈 이란 게 얼마나 믿을 수 없는 것인지 새삼 고개를 끄덕이게 된다. 그렇다, 오늘의 주인공은 네덜란드가 낳은 불꽃같은 화가, 빈센트 빌렘 반 고흐(Vincent Willem van Gogh, 1853~1890)다.
고흐 자화상, 1887년경(위키피디아)
목사 아들이 왜 붓을 잡았나?
고흐는 1853년 네덜란드 브라반트 주 준데르트(Zundert)에서 태어났다. 아버지 테오도루스 반 고흐(Theodorus van Gogh, 1822~1885)는 개신교 목사였고, 어머니 안나 코르넬리아 카르벤투스(Anna Cornelia Carbentus, 1819~1907)는 제본업자의 딸이었다. 집안은 그리 넉넉하지 않았으나 문화적 소양만큼은 풍족했다.
고흐는 처음부터 화가가 되려 했던 게 아니다. 젊은 시절 그는 미술품 거래상으로 일했고(1869~1876년), 이후에는 아버지를 따라 전도사의 길(1879년)을 걸으려 했다. 벨기에 탄광 지역 보리나주(Borinage)에서 광부들과 함께 뒹굴며 가난한 이들을 돕겠다고 나섰지만, 교회 당국은 그를 해고했다. 이유인즉슨 너무 열성적 이라는 것이었다. 가난한 이들에게 지나치게 공감한 게 죄였다. 이 대목에서 오늘날 한국의 어느 조직이 떠오른다면, 그건 우리 양심이 살아있다는 증거다.
하여간 이 좌절이 고흐를 붓으로 이끌었다. 그나마 다행이라 해야 할지.
19세의 빈센트 반 고흐(위키피디아)
동생 테오, 진짜 후원자란 이런 것
고흐의 이야기에서 남동생 테오 반 고흐(Theo van Gogh, 1857~1891)를 빼면 반쪽짜리다. 테오는 파리에서 미술품 거래상으로 일하며 형에게 달마다 생활비를 보냈다. 10년 넘게. 편지도 670통 넘게 주고받았다. 형이 죽고 6개월 만에 테오도 세상을 떠났다. 형의 죽음을 버티지 못한 것이다.
테오는 단순한 돈줄 이 아니었다. 그는 형의 예술을 진심으로 믿었고, 시장이 외면할 때도 버텼다. 한국사회에서 진정한 후원과 연대가 무엇인지 묻고 싶을 때, 테오의 이야기는 꽤 쓸 만한 교재가 된다. 요즘처럼 단기 성과와 즉각적인 보상만 추구하는 문화 속에서, 10년을 묵묵히 믿어준 테오는 거의 전설적인 존재다.
테오 반 고흐(위키피디아)
아를의 노란 집, 그리고 귀 사건
1888년 고흐는 프랑스 남부 아를(Arles)로 이주해 이른바 노란 집(Yellow House) 에 정착했다. 햇살 가득한 남프랑스의 빛은 그의 붓을 더욱 뜨겁게 달궜다. 이 시기에 그 유명한 해바라기 연작, 침실 그림, 별이 빛나는 밤 등 걸작들이 쏟아졌다.
고흐는 동갑내기 화가 폴 고갱(Paul Gauguin, 1848~1903)을 이 집으로 불러들였다. 둘은 예술적 공동체를 꿈꿨으나 현실은 달랐다. 두 달도 채 안 되어 둘의 관계는 파국을 맞았고, 1888년 12월 23일 고흐는 자신의 귀 일부를 잘라 근처 술집 여성에게 건넸다. 이유는 지금도 분분하다. 정신적 발작이었다는 설, 고갱과의 다툼 끝에 벌어진 일이라는 설 등이 있다.
이 사건은 고흐를 단숨에 미친 화가 의 상징으로 만들었다. 하지만 생각해보라. 귀를 자른 것보다 훨씬 기이한 일들이 멀쩡한 얼굴로 지금도 버젓이 벌어지고 있지 않은가. 적어도 고흐는 남의 귀를 자르지는 않았다.
노란 집, 1888년경. 반 고흐 미술관, 암스테르담(위키피디아)
생레미의 요양원에서, 그래도 붓을 놓지 않다
이듬해 고흐는 스스로 생레미드프로방스(Saint-Rémy-de-Provence)의 정신병원에 걸어 들어갔다. 그런데 여기서 놀라운 일이 벌어진다. 요양원에 있는 동안 그는 150점이 넘는 그림을 그렸다. 불안과 두려움이 극에 달했던 그 시간에, 별이 빛나는 밤(The Starry Night)이 탄생했다. 소용돌이치는 밤하늘, 불꽃처럼 타오르는 별들, 그것은 단순한 풍경화가 아니라, 무너지지 않으려는 한 인간의 처절한 몸부림이었다.
창작이란 결국 고통의 다른 이름인가. 아니면 고통에도 불구하고 피어나는 무언가인가? 고흐의 생레미 시절은 이 질문에 그 어떤 철학책보다 강렬하게 답한다.
별이 빛나는 밤, 1889년 6월. 뉴욕 현대 미술관(위키피디아)
37년의 삶, 그리고 밀밭의 총성
1890년 고흐는 파리 근교 오베르쉬르우아즈(Auvers-sur-Oise)로 옮겨 의사 폴 가셰(Paul Gachet, 1828~1909)의 보살핌을 받으며 지냈다. 이 마지막 두 달 동안 그는 무려 70점이 넘는 그림을 그렸다. 하루 한 점 이상의 속도다.
드 래 7월 27일, 고흐는 밀밭에서 권총으로 자신의 가슴을 쐈다. 이틀 뒤 세상을 떠났다. 나이 37세. 그의 마지막 말은 슬픔은 영원히 계속될 것이다 였다고 전해진다.
그가 남긴 그림은 약 900점의 유화와 1100점이 넘는 소묘였다. 이 방대한 유산이 고작 10년 남짓한 화가 생활에서 나왔다는 사실이, 지금도 믿기지 않는다.
죄수들의 순회 (구스타브 도레의 작품을 모방), 1890년. 푸시킨 미술관, 모스크바(위키피디아)
고흐가 역사에 남긴 것
고흐는 미술사에서 후기 인상주의(Post-Impressionism)의 중심에 놓인다. 그러나 그의 영향은 미술교과서 안에 머물지 않는다.
그는 표현주의(Expressionism) 미술의 길을 열었다. 에곤 실레(Egon Schiele, 1890~1918), 에드바르 뭉크(Edvard Munch, 1863~1944) 등 후대 화가들은 고흐의 거칠고 격렬한 붓질에서 해방감을 얻었다. 그림이란 아름다운 것을 그럴듯하게 그리는 것 이라는 고정관념을 고흐가 통째로 흔들어버렸기 때문이다.
그리고 더 근본적인 질문을 남겼다. 우리는 살아있는 동안 서로를 제대로 알아보고 있는가?
씨 뿌리는 사람, 1888. 크롤러-뮐러 박물관, 오터로.(위키피디아)
한국사회, 이 화가에게 무엇을 배울 것인가?
이제 시선을 한반도로 돌려보자.
첫째, 당대에 인정받지 못한 것이 실패가 아니다. 고흐는 생전에 철저히 무시당했다. 비평가들은 그의 그림을 조잡하다 했고, 시장은 외면했다. 그러나 역사는 다르게 기록했다. 지금 한국사회에서 빠른 성과 와 즉각적 인정 을 강요받는 청년들, 예술가들, 연구자들에게 고흐의 삶은 불편하지만 소중한 위로가 된다. 물론 고흐처럼 죽고 나서 유명해지라는 말은 아니다. 살아있을 때 알아봐주는 사회를 만들자는 것이다.
둘째, 테오 같은 연대가 필요하다. 한국의 예술지원구조는 여전히 허약하다. 공공지원은 줄어들고, 민간후원은 홍보수단으로 전락하기 일쑤다. 진심으로 오랫동안 믿고 버텨주는 테오 같은 존재, 그것이 개인이든 제도든 절실하다. 문화예술인들이 생계를 걱정하지 않고 창작에 전념할 수 있는 환경, 이건 사치가 아니라 사회적 투자다.
셋째, 정신건강을 부끄러워하지 않는 문화. 고흐는 정신병원에 스스로 들어갔고, 치료를 받으면서도 창작을 멈추지 않았다. 오늘날 한국의 자살률은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회원국 중 최상위권을 오랫동안 맴돌고 있다. 정신적 고통을 나약함 이나 개인의 실패 로 보는 시선이 여전히 강하다. 고흐의 삶은 정신적 고통이 얼마나 보편적이고 인간적인 것인지를 보여준다. 도움을 청하는 것은 용기다.
넷째, 다름 을 견디는 사회. 고흐는 평생 이방인이었다. 직업도, 거처도, 관계도 불안정했다. 그의 화풍은 너무 달랐고, 그의 삶은 너무 거칠었다. 그러나 바로 그 다름 이 역사를 바꿨다. 획일성을 강요하는 사회, 표준화된 성공경로만을 정상으로 보는 문화는, 수많은 고흐들을 소리 없이 질식시키고 있지 않은가?
해질녘 눈 덮인 밭에서 흙을 파는 두 농부 여인 (장 프랑수아 밀레 원작 모방), 1890년. E.G. 뷔를레 재단 소장, 스위스 취리히(위키피디아)
별은 언제나 저기 있었다
고흐는 죽기 전 테오에게 이런 편지를 썼다.
나는 삶에서 내가 할 수 있는 위험을 감수했고, 나의 이성 일부를 잃었다.
그리고 덧붙였다.
하지만 어쩌면 화가란 원래 그런 것인지도 모른다.
그의 밤하늘 그림 속 별들은 지금도 소용돌이치고 있다. 저 별들은 고흐가 그린 게 아니라, 고흐가 봤던 것이다. 세상이 아직 보지 못했던 것을 먼저 본 사람. 그게 고흐였다.
지금 이 사회에서, 세상이 아직 보지 못한 것을 보고 있는 사람들이 있다. 그들이 귀를 자르기 전에, 우리가 먼저 귀를 기울일 차례다.
오베르의 베세노들, 1890년. 마드리드 티센보르네미사 미술관 소장. 고흐가 죽기 몇 주 전에 그린 작품이다.(위키피디아)
김성수 시민기자 wadans@empa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