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후 189년 흘러도 살아 숨쉬는 시인 푸시킨 [카테고리 설정이 아직되어 있지 않습니다.] 러시아 문학을 한마디로 설명하라고 하면 대부분의 학자들은 잠시 뜸을 들이다가 이렇게 말한다.
푸시킨에서 시작해서 푸시킨으로 끝난다.
그렇다면 알렉산드르 세르게예비치 푸시킨(Aleksandr Sergeevich Pushkin, 1799~1837)은 도대체 누구인가? 한국으로 치면 이순신(1545~1598)과 윤동주(1917~1945)를 합쳐놓은 사람쯤 될까. 아니, 거기다 김소월(1902~1934)의 감수성까지 얹어야 구색이 맞춰지지 않을까 하는 인물이다.
푸시킨 초상화, 1827년(위키피디아)
귀족 집안에서 태어난 반항아
1799년 6월 6일, 모스크바의 귀족 가문에서 태어난 푸시킨은 태생부터 조금 복잡한 사람이었다. 그의 증조할아버지는 아프리카 출신으로, 표트르 대제(1672~1725)에게 발탁되어 러시아 귀족이 된 아브람 간니발(Abram Gannibal, 1696~1781)이었다. 그러니까 푸쉬킨은 러시아 귀족이면서 동시에 아프리카 혈통을 가진 사람이었는데, 이 사실이 당대 사교계에서는 꽤 묘한 얘깃거리였을 것이다. 지금 기준으로는 그냥 다양한 혈통을 가진 훌륭한 시인이지만, 19세기 러시아 귀족사회에서 그 존재 자체가 이미 일종의 균열이었다.
어릴 적부터 글쓰기에 뛰어났던 그는 상트페테르부르크 근교의 황실학교 리체이(Lyceum)를 다니며 시를 쓰기 시작했다. 학교를 졸업할 무렵에 이미 러시아 문단의 거물 가브릴라 데르자빈(Gavriil Derzhavin, 1743~1816)으로부터 이 아이가 나의 뒤를 이을 것 이라는 예언 아닌 예언을 들었다. 데르자빈 선생이 그 말을 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사망했으니 마치 바통을 넘겨준 것 같아 감동적이면서도 약간 서늘하다.
세르게이 치리코가 그린 푸시킨의 젊은 시절(위키피디아)
붓이 곧 폭탄이었던 시절
문제는 이 젊은 천재가 권력 앞에서 절대 고개를 숙이지 않았다는 점이다. 졸업 후 관직에 나갔지만 그의 손가락은 신나게 풍자시와 자유를 노래하는 시들을 써댔다. 자유에 부쳐 (Ode to Liberty)를 비롯한 여러 시가 황제 알렉산드르 1세(1777~1825)의 심기를 긁었고, 결국 1820년 남쪽 오지로 좌천 겸 유배를 떠나게 된다.
여기서 잠깐 생각해보자. 글 몇 편으로 황제에게 찍혀 유배를 간다? 지금 대한민국 기준으로는 국가정보원에 사찰당하거나 세무조사를 당하는 수준이라고 할 수 있겠다. 권력이 예술가를 두려워한다는 것, 이건 동서고금 어디서나 달라지지 않는 철칙인 모양이다.
유배지에서도 푸시킨은 멈추지 않았다. 오히려 그 시절 가장 풍요로운 창작이 이루어졌다. 크림 반도와 카프카스의 풍광, 집시 생활에 대한 낭만적 동경, 그리고 억압받는 민중에 대한 연대감이 그의 시와 산문 속에 녹아들었다. 고난이 사람을 죽이기도 하지만, 어떤 사람은 고난 속에서 오히려 더 빛나게 된다는 걸 푸시킨이 증명한다.
푸시킨이 1815년 1월 8일 차르스코예 셀로 고등학교에서 가브릴라 데르자빈의 시험 도중 자신의 시를 낭송하고 있다. 일리야 레핀 작 1911년(위키피디아)
그가 남긴 것들
푸시킨의 대표작을 나열하는 것은 끝이 없다. 운문 소설 『예프게니 오네긴(Evgeny Onegin)』(1833)은 러시아 소설의 원형이라 불리며, 이후 표도르 도스토예프스키(1821~1881), 레프 톨스토이(1828~1910), 이반 투르게네프(1818~1883) 같은 대문호들이 사실상 이 작품이 닦아놓은 길 위를 걸었다. 희곡 『보리스 고두노프(Boris Godunov)』(1825)는 권력과 역사의 문제를 정면으로 다룬 작품으로, 나중에 모데스트 무소르그스키(Modest Mussorgsky, 1839~1881)가 오페라로 만들었다. 산문 『스페이드의 여왕』(1833), 『대위의 딸』(1836)은 지금도 세계 각지에서 읽힌다.
무엇보다 푸시킨이 이룬 가장 큰 업적은 따로 있다. 그는 귀족들만이 쓰던 딱딱하고 거드름피우는 문어체 러시아어를 버리고, 살아있는 민중의 말로 글을 썼다. 언어란 그것을 쓰는 사람들의 것이라는 아주 단순한 진리를 몸소 실천한 것이다. 이는 단순한 문학적 선택이 아니라, 일종의 정치적 선언이었다. 이 땅의 언어는 귀족만의 것이 아니다 라는.
푸시킨의 기혼 연인이었던 안나 페트로브나 케른은 푸시킨이 러시아에서 가장 유명한 사랑시를 쓴 대상일 가능성이 높다.(위키피디아)
결투, 그리고 어이없는 죽음
천재의 삶이 늘 그렇듯, 끝은 너무 허망했다. 푸시킨은 아름다운 아내 나탈리야 곤차로바(Natalya Goncharova, 1812~1863)를 두고 있었는데, 프랑스 출신의 젊은 장교 조르주 당테스(1812~1895)가 끈질기게 나탈리야에게 추근댔다. 그리고 이 추근거림의 배후에 황실 권력이 개입되어 있다는 의혹이 당시부터 제기되었다. 결국 푸시킨은 1837년 1월 27일 결투를 신청했고, 이튿날 복부에 총알이 박혀 이틀 후 숨을 거뒀다. 서른일곱 한창 나이였다.
당테스는 살아서 유유히 러시아를 떠났다. 심지어 훗날 프랑스 상원의원까지 지냈다. 역사의 아이러니란 때로 이렇게 잔인하다. 총을 쏜 자는 오래 살고 상원의원까지 됐으며, 총을 맞은 자는 젊은 나이에 세상을 떴지만 200년 가까이 흐른 지금도 살아있다. 어느 쪽이 이긴 것인지는 굳이 말할 필요도 없다.
푸시킨의 아내 나탈리아 곤차로바, 1849년(위키피디아)
한국이 푸시킨에게서 배워야 할 것
자, 이쯤에서 우리 이야기를 해보자. 푸시킨은 황제에게 찍히면서도 풍자시를 멈추지 않았다. 유배를 당하면서도 자유를 노래했다. 그 시절 러시아에서 표현의 자유 란 법률 조문 어디에도 보장되어 있지 않았지만, 그는 그걸 몸으로 구현했다. 글쟁이 한 명이 제국의 심기를 건드릴 수 있다는 것, 그리고 그 글이 황제보다 오래 살아남는다는 것, 이게 바로 언론과 문화의 힘이다.
한국에도 분명히 그런 사람들이 있었다. 함석헌(1901~1989)이 그랬고, 리영희(1929~2010)가 그랬으며, 김지하(1941~2022)가 그랬다. 이들이 글을 쓸 때 권력은 두려워했고, 그래서 탄압했다. 그리고 지금 그들의 이름은 남아있지만 그들을 탄압한 자들의 이름은 역사의 각주 속에서 겨우 연명하고 있다.
지금 이 나라에는 푸시킨 같은 목소리가 필요하다. 화려한 미사여구 없이도 진실을 꿰뚫는 언어, 권력의 위선을 웃음으로 발가벗기는 풍자, 그리고 억압받는 사람들 편에 서는 용기. 푸시킨은 그것을 천재성 이 아니라 선택 으로 보여줬다. 어떤 편에 설 것인가, 무엇을 위해 쓸 것인가.
프랑스 출신의 젊은 장교 조르주 당테스.(위키피디아)
마지막으로
푸시킨이 죽은 뒤 러시아 대중은 자발적으로 거리에 쏟아져 나왔다. 황실은 그것이 두려워 그의 장례를 비밀리에 치렀다. 죽은 시인 한 명이 군중을 모을 수 있다는 걸 알았기 때문이다.
권력은 늘 이걸 안다. 진짜 무서운 건 총칼이 아니라 사람의 마음을 움직이는 말 한 마디라는 걸. 그래서 시인을 유배 보내고, 결투를 부추기고, 장례조차 숨긴다.
하지만 소용 없다. 푸시킨은 1837년에 죽었지만 지금도 살아있다. 반면 그를 유배 보낸 황제들의 제국은 1917년에 무너졌다.
역사는 언제나 누가 옳았는지를 결국 말해준다. 다만 살아있는 동안 그 답을 듣지 못할 뿐이다. 그러니 우리는, 지금 이 자리에서, 어느 편에 설 것인지를 스스로 결정해야 한다. 푸시킨처럼,
알렉산드르 푸시킨의 데스 마스크, 석고(위키피디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