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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보 바로가기 : 사상범 하루 70명 처단 신기록 회고록서 떠벌린 검사

사상범 하루 70명 처단 신기록 회고록서 떠벌린 검사
[사회혁신]
2026년 봄, 영국에서 『반헌법행위자열전』 3권을 펼쳤다. 조인구(趙寅九, 1923~1994) 항목에서 가장 충격적인 인용문은 그 자신의 자랑이었다. 한국전쟁 직후 계엄군법회의 군검찰관으로서 그는 계엄군법회의가 착수한 첫 업무가 재판을 보류해온 사상범에 대한 일괄 처단이었다. 하루에 70명을 처단하는 신기록을 우리 3인이 세우기도 했다 고 1972년 회고록에서 떠벌렸다. 하루 70명의 죽음을 신기록 이라 부르는 그 자랑스러움이, 이 인물을 이해하는 첫 단서다. 그리고 1950년의 부산형무소 학살은, 한강의 소설 『작별하지 않는다』(2021년)에 흔적을 남겼다. 소설 속 인물이 회상하는 9월부터 그 사람들이 트럭에 실려 나가며 사라진 그 봄이, 조인구가 자랑하던 그 신기록 이 세워지던 시점이었다.   반헌법행위자열전 편찬위 1923년 경남 진주 출생, 사상검사로 출발한 검사 조인구는 1923년 11월 19일 경상남도 진주에서 태어났다. 1942년 경성법학전문학교를 졸업하고 1946년 사법요원양성소 입소시험에 합격했다. 1948년 3월, 26세에 대구지검 검사로 첫발을 디뎠다. 그 자신의 회고에 따르면 대구폭동이 일어난 좌익소굴에서 사상검사로 출발했다. 세계사 속의 동류, 자랑스러운 처형자 들 영국에서 이 장면을 들여다보면 비슷한 유형이 떠오른다. 소련 대숙청의 처형 집행자들 중 일부는 처형 건수를 경쟁적으로 자랑했다는 기록이 있다. 효율성이 영웅적 행위로 둔갑하는 구조다. 조인구가 하루 70명 을 자랑스러운 업적으로 남긴 것도 같은 구조다. 인간의 목숨이 통계가 되고, 그 통계가 경력의 훈장이 되는 순간, 도덕은 완전히 마비된다. 1950년 한국전쟁, 조인구 거리 의 탄생 부산지검으로 옮긴 조인구는 좌익사건을 엄중히 다뤄 조인구 거리 라는 별칭이 부산 남포동에 붙을 만큼 위세를 떨쳤다. 한국전쟁 발발 직후 그가 세운 하루 70명 처단 의 신기록이 바로 이 시기의 일이다. 부산형무소에서는 보도연맹원들이 1950년 9월부터 트럭에 실려 나갔다는 증언이 한강의 소설에 기록돼 있다.   조인구(반헌법행위자열전 편찬위) 1955~1958년, 박정호, 김정제 간첩사건, 그리고 극동 코민포름 이라는 존재하지 않는 조직 서울지검으로 옮긴 조인구는 오제도(1917~2001)와 함께 오제도-조인구 공안체제 를 구축했다. 그가 만든 극동 코민포름 사건 은 존재하지도 않는 조직을 끌어들여 영화감독 홍성기 등을 간첩으로 몰았다가, 1심에서 대부분 무죄가 나왔다. 박정호 간첩사건에서는 사형을 구형해 1959년 실제로 사형이 집행됐다. 김정제 간첩사건도 사형을 구형해 확정시켰으나, 집행이 계속 미뤄지다 5·16쿠데타 이후인 1961년 7월 결국 집행됐다. 김정제 간첩사건은 김정제가 월북 후 남파된 것이 아니라 사실은 납북됐다가 사선을 넘어 귀환했지만 오제도에게 간첩으로 몰려 처형당했다 고 보는 시각이 있고, 또한 자유당 강경파와 온건파가 대립하는 과정의 희생물이었다는 해석도 있다.   반헌법행위자열전 편찬위 1955년 박인수 사건, 현대 여성의 약점을 역용하는 똔판적 존재 조인구가 다룬 특이한 사건 중에는 한국판 카사노바 박인수 사건도 있다. 그는 박인수를 기소하며 정조를 헌신짝같이 밟고 다니는 똔판 적인 존재 라고 표현했다. 똔판적 이라는 표현은 돈판적(화폐 가치나 이기적 타산만 따지는) 또는 독일어 돈판(Don Juan, 바람둥이·난봉꾼) 의 번역·와전 과정에서 나온 표현으로 해석된다. 하여간 공안검사 조인구가 풍속사건까지 모든 사회통제의 영역에서 활약했다는 것을 보여준다.   KBS 다큐멘터리극장 – 박인수 사건과 두 판사 / KBS 19940717 방송 1958~1959년, 조봉암 사법살인의 주역 조인구의 반헌법 행위 정점은 진보당 사건과 조봉암(1898~1959) 사법살인이다. 사상검사로서 그는 진보당의 평화통일론을 북한의 통일론과 동일시해 조봉암을 간첩으로 몰았다. 1959년 7월 31일 조봉암의 사형이 집행됐다. 2011년 대법원 재심에서 무죄가 확정됐다. 52년 만이었다.   ‘진보당 사건’을 다룬 고등법원은 조봉암, 양명산에 사형을, 기타 전 피고인에 유죄를 선고했다. 1958.10.25. 연합뉴스 1960년, 3·15부정선거 치안국장, 4·19 발포 책임자, 그리고 5년의 도피 1960년 3월 내무부 치안국장에 임명된 조인구는 3·15 마산의거를 용공분자의 소행으로 몰아갔다. 4·19혁명 당시에는 경무대 발포책임자 중 하나로 지목됐다. 그러나 1심에서 무죄를 선고받아 석방된 뒤 1960년 10월부터 남철수 라는 가명으로 5년간 도피했다. 1965년 11월에야 자수했다. 1967년 징역 3년 6개월을 선고받았으나 1968년 항소심에서 무죄가 확정됐다. [KBS 역사저널 그날] 그날 비화, 1960년 3.15 부정선거ㅣ KBS 200414 방송 영국에서 2026년을 생각한다 영국에서 소련 대숙청 처형자들의 통계자랑 은 가장 끔찍한 도덕적 마비의 증거로 얘기된다. 조인구가 1972년 회고록에서 하루 70명 처단 을 신기록으로 자랑한 것은, 50년이 지나 한강의 소설로 다시 소환됐다. 가해자의 자랑이 결국 문학의 증언으로 되돌아온 것이다. 2024년 12월 3일 윤석열(1960~ )의 비상계엄 선포를 영국에서 생중계로 보며 나는 조인구를 떠올렸다. 발포를 명령하고 5년을 도망친 사람도, 결국 무죄로 풀려나 25년을 변호사로 살았다. 역사가 그를 완전히 단죄하지 못한 그 빈틈이, 60여 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우리에게 경고로 남아 있다. 역사의 법정에는 공소시효가 없다. 그리고 그 법정의 방청석에는 우리가 앉아 있다. 참고문헌 반헌법행위자열전 편찬위원회, 2026, 『반헌법행위자열전 1~4』, 사회평론아카데미   반헌법행위자열전 편찬위  김성수 시민기자 wadans@empa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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