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글의 법칙을 쓴 남자, 조지프 러디어드 키플링 [카테고리 설정이 아직되어 있지 않습니다.] 문학상을 받았다고 해서 반드시 옳은 사람인 것은 아니다. 마찬가지로 아름다운 시를 썼다고 해서 반드시 아름다운 사상을 가진 것도 아니다. 조지프 러디어드 키플링(Joseph Rudyard Kipling, 1865~1936)은 바로 이러한 불편한 진실을 상징하는 인물이다. 그는 영어권 최초의 노벨 문학상 수상자(1907년)이자 전 세계 어린이들의 사랑을 받는 『정글북』의 저자인 동시에, 제국주의의 나팔수이자 인종차별의 서정시인이라는 극단적인 평가를 동시에 받는다. 한 인간 안에 이토록 거대한 모순이 공존할 수 있다는 사실은 경이롭기까지 하다. 어쩌면 그것이 인간이라는 존재의 가장 정직한 초상일지도 모르겠다.
키플링 1895년.(위키피디아)
인도에서 태어나 영국에서 버려진 소년
키플링은 1865년 12월 30일, 영국 식민지였던 인도의 봄베이(현 뭄바이)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는 미술 교사이자 학예사였고, 어머니는 영국 화단의 명문가 출신이었다. 식민지에 파견된 문화 관료의 아들로서 그는 인도의 강렬한 열기와 색채 속에서 풍요롭고 행복한 유년을 보냈다. 힌두어를 먼저 배우고 영어를 나중에 배웠을 만큼, 그의 정체성 뿌리는 인도의 흙에 닿아 있었다.
그러나 여섯 살이 되던 1871년, 부모는 교육을 명분으로 그를 영국으로 보냈다. 결과는 참혹했다. 사우스시(Southsea)의 위탁 가정에 맡겨진 어린 키플링은 가혹한 양육자 밑에서 5년간 심리적 학대에 가까운 나날을 보냈다. 그는 훗날 이 시절의 고통을 단편 「검은 양 바아 바아」(1888)에 투영했다. 상처는 글이 된다 는 작가의 숙명이 시작된 지점이다.
이후 진학한 기숙학교 유나이티드 서비스 칼리지 는 군인 자녀들을 위한 거친 곳이었다. 여기서 키플링은 약자가 강자에게 짓밟히며 생존하는 법을 몸소 익혔다. 그의 작품 전반에 흐르는 묘한 잔인함과 강인함 에 대한 집착은 이 시절의 부산물일 가능성이 크다. 1882년, 열여섯의 키플링은 기자 신분으로 다시 인도로 돌아온다. 이후 7년간 그는 앵글로-인도 상류사회와 인도 토착문화의 현장을 동시에 목격하며 작가적 역량을 쌓았다. 1890년경 그는 이미 바이런 이후 유례없는 명성 을 구가하는 문단의 총아가 되어 있었다.
영국 문화유산청에서 설치한 파란색 명판으로, 키플링이 포츠머스 사우스시에서 보낸 시간을 기념.(위키피디아)
정글에는 법칙이 있다, 하지만 누가 만들었는가
키플링의 문학적 성취는 눈부시다. 『정글북』(1894)과 『킴』(1901), 그리고 「만달레이」, 「만약에(If—)」 같은 시들은 영문학의 고전으로 자리 잡았다. 특히 늑대 소년 모글리의 모험을 다룬 『정글북』은 헤밍웨이, 조지 오웰, 톨킨 등 후대 대작가들에게 깊은 영감을 주었다. 우리가 흔히 쓰는 정글의 법칙 이라는 표현이나 동쪽은 동쪽, 서쪽은 서쪽(East is East, and West is West) 이라는 구절 역시 그의 펜 끝에서 탄생했다.
하지만 여기서 우리는 질문을 던져야 한다. 정글의 법칙 을 정의한 이는 누구인가? 인도에서 태어난 영국인이다. 세계를 동쪽 과 서쪽 으로 명확히 갈라치기한 이 역시 제국주의의 수혜자였다. 키플링은 의도적으로, 혹은 무의식중에 세계를 영국의 시선으로 재단하는 언어 체계를 구축했다. 그것이 그의 천재적인 위대함이자, 지울 수 없는 역사적 죄악이었다.
키플링(오른쪽)과 그의 아버지 존 록우드 키플링(왼쪽), 1890년경.(위키피디아)
「백인의 짐」, 제국주의의 서정적 위선
이제 가장 불편한 지점인 「백인의 짐(The White Man s Burden)」(1899)을 마주할 시간이다. 미국-필리핀 전쟁을 배경으로 쓴 이 시에서 키플링은 필리핀인을 새로 포획된, 침울한 민족, 반은 악마요 반은 아이 로 묘사했다. 그는 제국주의 침탈을 탐욕이 아닌 도덕적 사명 으로 포장했다. 미개한 타자를 문명화하기 위해 백인이 기꺼이 고난(짐)을 짊어져야 한다는 이 논리는, 아시아와 아프리카를 짓밟은 수백 년 수탈의 가장 강력한 명분이 되었다.
당시 뉴욕 주지사 시어도어 루스벨트는 이 시를 두고 시로서는 형편없지만, 팽창주의 관점에서는 타당하다 고 평했다. 문학이 권력자들에게 얼마나 달콤한 정당성을 부여했는지 보여주는 대목이다. 물론 당시에도 마크 트웨인 같은 지식인들이 이를 정면으로 비판하며 「갈색인의 짐」, 「흑인의 짐」 같은 패러디 시들이 쏟아져 나왔다. 오늘날 키플링이 인종차별주의자, 전쟁광 이라는 혹독한 비판을 받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존 콜리어가 그린 키플링의 초상화, 1891년경.(위키피디아)
아들을 전쟁터로 보낸 아버지의 죄의식
키플링의 삶에는 비극적인 반전이 있다. 외아들 존 키플링(John Kipling, 1897~1915)의 죽음이다. 시력이 나빠 입대가 거절된 아들을 위해, 키플링은 자신의 인맥을 동원해 억지로 입대시켰다. 제국과 전쟁을 찬미하던 아버지가 자기 아들을 사지로 밀어 넣은 셈이다. 존은 루스 전투에서 전사했고, 시신조차 찾지 못했다.
이후 키플링의 후기 작품은 눈에 띄게 어둡고 쓸쓸해졌다. 제국주의적 낙관론 대신 인간 실존의 허무와 슬픔이 그 자리를 채웠다. 자식을 잃은 고통이 그를 조금 더 인간적인 작가로 만들었을까. 이는 역사가 남긴 가장 잔인한 아이러니 중 하나다.
키플링 1892년.(위키피디아)
한국에서 키플링을 어떻게 읽을 것인가
이제 시선을 우리에게로 돌려보자. 키플링이 「백인의 짐」을 쓰던 1899년, 한반도 역시 스스로를 다스릴 능력이 없다 고 조롱받던 제국주의의 사냥터였다. 일본이 조선을 식민화하며 내세운 문명개화 와 내선일체 의 논리는 키플링의 언어와 정확히 일치한다. 키플링을 읽는 것은 우리를 지배했던 자들의 논리구조를 파헤치는 일과 같다.
동시에 우리는 자문해야 한다. 오늘날 한국사회는 키플링의 망령으로부터 자유로운가? 이주노동자와 특정 국가 출신 이웃을 대할 때 우리가 내뱉는 차별적 언어들은 키플링이 정교하게 다듬어놓은 제국주의적 습성과 닮아 있다. 피해자였다는 사실이 우리에게 타자를 향한 가해의 면죄부를 주지는 않는다.
또한, 자기계발서의 단골 문구인 그의 시 「만약에(If—)」를 읽을 때도 주의가 필요하다. 흔들리지 않는 강인함 을 강조하는 그 구절 이면에는 제국을 수호하는 강한 남성상이라는 배경이 깔려 있다. 맥락을 거세한 채 소비되는 문장은 때로 본래의 독성을 감춘 채 우리 의식을 지배한다.
키플링이 1895년 미국 버몬트주 나울라카에 있는 자신의 서재에서 찍은 사진.(위키피디아)
위대한 문학, 위험한 사상
키플링의 작품은 제국주의자 라는 딱지 하나로 요약하기엔 너무나 방대하고 중의적이다. 그의 글 속에는 지배자의 언어뿐만 아니라, 그가 사랑했던 인도의 풍경과 피지배자들의 생생한 숨결이 공존한다. 1936년 그가 세상을 떠난 후, 그가 찬양했던 대영제국은 해체되었고 식민지들은 독립했다. 역사는 그의 정치적 신념을 배신했다.
그러나 그의 문학은 여전히 살아남아 우리를 불편하게 만든다. 그리고 그 불편함이야말로 우리가 그를 계속 읽어야 하는 이유다. 제국주의적 욕망이 어떻게 아름다운 서사로 포장되는지 알아야만, 오늘날 새로운 탈을 쓰고 나타나는 지배의 언어들을 식별할 수 있기 때문이다.
정글에는 법칙이 있다. 하지만 그 법칙을 쓰는 자가 누구인지, 그 펜 끝이 어디를 향하는지를 끊임없이 묻는 것, 그것이 바로 우리가 지향해야 할 진짜 문명이다.
피츠로비아 예배당에 있는 명판은 루디야드 키플링의 시신이 사후 그곳에 안치되었음을 알려준다.(위키피디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