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로의 시민 불복종 …숲속 산책 명상 속에서 탄생 [카테고리 설정이 아직되어 있지 않습니다.] 헨리 데이비드 소로
1. 길 위에서 태어난 사유
헨리 데이비드 소로에게 걷기는 단순한 신체 활동이나 취미가 아니었다. 그것은 인간이 세계와 관계 맺는 가장 오래되고 근본적인 방식이었으며, 사유와 자유, 삶의 존엄을 회복하는 철학적 실천이었다. 그는 평생 걷는 사람으로 살았고, 그의 사상과 글쓰기는 대부분 길 위에서 태어났다. 걷지 않고는 제대로 생각할 수 없었고, 생각하지 않고는 제대로 살 수 없다고 믿었던 인물, 그가 바로 소로였다.
소로의 산문 걷기 (Walking)는 산책에 대한 에세이가 아니다. 그것은 문명 비판이자 인간 존재에 대한 선언문에 가깝다. 19세기 중엽 미국 사회는 산업화와 도시화로 빠르게 재편되고 있었고, 인간의 삶은 점점 속도와 효율의 기준에 종속되어 갔다. 길은 목적지에 도달하기 위한 수단이 되었고, 자연은 통과하거나 이용해야 할 대상으로 축소되었다. 소로는 이 흐름 속에서 걷기를 통해 삶의 방향 자체를 다시 묻고자 했다.
그가 말한 걷기는 ‘산책 (walk)이 아니라 ‘소풍 (sauntering)이었다. 소로는 이 단어의 어원을 중세 순례자에서 찾았다. 성지를 향해 길을 나섰으나 아직 도착하지 않은 사람, 영적으로 길 위에 머무는 존재가 바로 진정한 걷는 인간이라는 것이다. 소로에게 걷기란 목적지에 도달하는 행위가 아니라, 도착하지 않은 상태를 기꺼이 받아들이는 태도였다. 길 위에 머무는 동안 인간은 열려 있고, 감각은 깨어 있으며, 세계는 여전히 살아 움직인다.
소로는 거의 매일 콩코드 주변의 숲과 들판을 걸었다. 이 걷기는 여가 시간이 아니라 하루의 핵심이었다. 그는 적어도 하루에 몇 시간은 걸어야 비로소 자신에게로 돌아온다고 느꼈다. 집 안에서 이루어지는 사유는 쉽게 굳어지지만, 숲길에서 이루어지는 사유는 늘 변화하고 확장된다고 보았다. 발걸음에 맞춰 생각은 흐르고, 생각에 따라 시선은 깊어졌다.
미국 매사추세츠주 월든 호숫가에 있는 소로의 오두막집과 그의 동상.
소로의 걷기를 이해하기 위해 반드시 짚어야 할 개념이 ‘야생성 (wildness)이다. 그는 문명화된 삶이 인간을 안전하게 만들었을지는 몰라도, 살아 있게 만들지는 못했다고 보았다. 인간의 감각과 상상력, 도덕적 용기는 야생과의 접촉 속에서만 유지될 수 있다고 믿었다. 그래서 그는 늘 서쪽으로 걸으라고 말했다. 서쪽은 태양이 지는 방향이자, 아직 개척되지 않은 자연과 미지의 가능성이 남아 있는 상징적 공간이었다.
야생을 향해 걷는다는 것은 불확실성을 감수하는 일이다. 길은 정비되어 있지 않고, 방향은 언제든 바뀔 수 있다. 그러나 소로는 바로 이 불확실성 속에서 인간이 비로소 살아 있음을 느낀다고 보았다. 모든 것이 계획되고 통제된 삶에서는 자유가 자랄 수 없다. 숲에서 길을 잃는 경험, 날씨와 지형에 몸을 맡기는 경험은 인간을 겸손하게 만들고, 동시에 스스로 판단하는 능력을 되살린다.
소로의 걷기는 정치와도 깊이 연결되어 있다. 그는 걷는 동안 국가와 제도, 관습으로부터 거리를 확보했다. 이것은 현실 도피가 아니라, 비판적 시선을 얻기 위한 실천이었다. 숲속을 걸으며 그는 노예제의 부당함을, 전쟁의 폭력을, 다수의 이름으로 자행되는 불의를 더 또렷하게 인식했다. 걷기는 자유로운 사유를 가능하게 했고, 그 사유는 시민 불복종이라는 급진적 윤리로 이어졌다.
걷는 인간은 쉽게 통치되지 않는다. 걷는 동안 인간은 속도를 스스로 정하고, 방향을 스스로 선택한다. 소로가 걷기를 사랑했던 이유는 여기에 있다. 걷기는 권력과 시장이 강요하는 속도에서 벗어나는 가장 단순하면서도 강력한 방법이었다. 걷는 몸 자체가 이미 하나의 저항이었다.
헨리 데이비드 소로의 대표작 월든 . 동생 소피아 소로의 그림을 표지로 썼다.
2. 야생을 걷다, 자연과 관계 맺는 윤리
소로의 걷기는 사유와 자유의 문제를 넘어, 자연을 어떻게 이해할 것인가라는 더 근본적인 질문으로 이어진다. 그의 걷기는 자연 예찬이나 풍경 감상의 차원에 머물지 않는다. 그것은 인간이 자연과 어떤 관계를 맺으며 살아가야 하는지를 몸으로 묻는 윤리적 실천이었다.
월든 은 흔히 자급자족이나 검소한 삶의 기록으로 읽히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걷기의 책이기도 하다. 월든 호숫가에서의 삶은 정착이 아니라 끊임없는 이동과 왕래의 연속이었다. 소로는 호수 둘레를 걷고, 숲을 관찰하며, 계절의 변화를 몸으로 기록했다. 걷기는 그에게 자연을 이해하는 방식이자, 자연과 대화하는 언어였다.
소로에게 자연은 인간 외부에 놓인 대상이 아니었다. 걷는 동안 자연은 늘 인간의 몸과 맞닿아 있었다. 흙의 질감, 풀잎의 저항, 계절마다 달라지는 공기의 밀도는 자연이 추상적 개념이 아님을 증명했다. 자연은 배경이 아니라 관계였고, 걷기는 그 관계를 회복하는 행위였다. 인간은 자연을 바라보는 주체가 아니라, 자연 속에 놓인 존재로 자신을 다시 위치시킨다.
그의 일기와 월든 에 담긴 방대한 자연 기록은 모두 걷기의 산물이다. 그는 식물의 개화 시기, 동물의 이동, 얼음이 얼고 녹는 과정을 집요할 만큼 기록했다. 그러나 이 기록은 자연을 통제하기 위한 과학적 데이터가 아니었다. 그것은 자연의 리듬을 이해하고 존중하기 위한 관찰이었다. 그는 자연을 설명하려 하지 않았고, 자연이 스스로 드러나도록 기다렸다.
특히 월든 호수 주변을 걷는 그의 태도는 소로의 자연관을 잘 보여준다. 그는 호수를 하나의 고정된 풍경으로 보지 않았다. 아침과 저녁, 맑은 날과 흐린 날, 계절의 변화에 따라 호수는 전혀 다른 얼굴을 드러냈다. 걷는 인간 역시 그 변화에 따라 달라진다. 자연은 관찰자의 태도에 따라 달라지는 살아있는 존재였다. 이 인식은 자연을 소유하거나 지배하려는 욕망과 정면으로 충돌한다.
소로의 걷기에서 중요한 태도 중 하나는 ‘반복’이다. 그는 같은 길을 수없이 걸었다. 이 반복은 단조로움이 아니라 깊이를 만들어냈다. 같은 숲길이라도 하루하루 다른 소리를 내고, 다른 냄새를 품는다. 반복 걷기를 통해 그는 자연의 미세한 차이를 감지하는 능력을 길렀다. 이것은 생태 윤리의 기초가 되는 감수성이다. 자연을 아끼는 마음은 멀리서 생기지 않는다. 가까이, 오래 머무를 때 비로소 생겨난다.
걷기는 자연에 대한 책임감을 몸으로 가르친다. 걷는 사람은 땅을 함부로 대할 수 없다. 발로 밟는 흙의 감각은 자연을 추상화하지 않는다. 무심코 꺾이는 가지, 짓밟히는 풀잎은 인간의 행동이 곧바로 자연에 영향을 미친다는 사실을 일깨운다. 소로에게 자연 보호는 법과 제도의 문제가 아니라, 일상의 태도 문제였다.
소로는 인간 중심적 사고를 끊임없이 경계했다. 그는 인간의 편의와 욕망을 기준으로 자연의 가치를 평가하는 태도가 결국 인간 자신을 황폐하게 만든다고 보았다. 걷는 동안 그는 인간이 없어도 자연은 스스로 질서를 유지하며 살아간다는 사실을 목격했다. 이 깨달음은 인간의 위치를 근본적으로 낮춘다. 인간은 자연의 주인이 아니라, 잠시 머무는 존재일 뿐이다.
이런 겸손은 소로 생태 윤리의 핵심이다. 그는 자연을 보호하자고 외치기보다 자연 앞에서 인간이 어떤 존재가 되어야 하는지를 묻는다. 숲과 습지를 걸으며 그는 인간의 욕망이 자연의 리듬을 얼마나 쉽게 파괴하는지를 보았고, 동시에 자연이 보여주는 회복력과 인내를 배웠다.
헨리 데이비드 소로의 저작 워킹 (1862) 초판 하드커버. 틸버리 하우스 출판사. 2017
소로의 걷기는 계절의 윤리를 가르친다. 그는 사계절 내내 같은 장소를 걸었다. 봄의 생동, 여름의 충만, 가을의 쇠락, 겨울의 침묵은 인간 삶의 국면과 닮아 있다. 걷는 동안 인간은 자신의 삶 역시 자연의 순환 속에 놓여 있음을 깨닫는다. 이것은 성장과 쇠퇴, 시작과 끝을 자연스럽게 받아들이는 태도로 이어진다.
또한 걷기는 ‘충분함’의 감각을 회복시킨다. 자연에는 과잉이 없다. 모든 존재는 제 몫만큼만 존재한다. 소로는 이 단순한 질서를 인간 사회와 대비시켰다. 끊임없이 더 많이 소유하려는 욕망이 인간을 불안하게 만들고, 자연을 파괴한다고 보았다. 걷기는 욕망을 줄이고 감각을 회복하는 가장 확실한 방법이었다.
오늘날 생태 위기의 시대에 소로의 걷기는 다시 읽힐 필요가 있다. 기후변화와 생물 다양성의 붕괴는 기술적으로만 극복될 수 없다. 그것은 자연을 바라보는 인간의 관점 자체가 바뀌어야 풀 수 있는 문제다. 소로의 걷기는 그 관점 전환의 출발점에 서 있다. 멀리서 관리하는 자연이 아니라, 가까이에서 관계 맺는 자연 말이다.
소로의 걷기는 자연 예찬을 넘어, 생태 윤리의 근원으로 이어진다. 그의 걷기는 자연 보호를 위한 구호가 아니라 자연과 더불어 살아가기 위한 삶의 방식이었다.
3. 오늘 우리는 어떻게 걸을 것인가
헨리 데이비드 소로의 걷기는 19세기 미국의 숲과 호숫가에 머물러 있지 않다. 그의 발걸음은 시간을 건너 오늘의 도시와 거리, 아스팔트 위까지 이어진다. 속도와 효율이 삶의 기준이 된 시대, 이동은 넘쳐나지만 걷기는 사라진 시대에 소로의 걷기는 하나의 질문으로 되돌아온다. 우리는 어디를 향해 이렇게 서두르고 있는가, 그리고 무엇을 잃어버린 채 도착하려 하는가.
오늘날 인간은 역사상 가장 빠르게 이동한다. 자동차와 고속철, 비행기는 공간을 좁혔고, 디지털 네트워크는 이동조차 필요 없게 만들었다. 그러나 이 편리함의 이면에서 인간의 몸은 점점 자리를 잃었다. 발로 걷는 경험이 사라지면서 세계는 풍경으로 축소되고, 삶은 목적지의 연속으로 분절된다. 소로가 보기에 이는 단순한 생활 방식의 변화가 아니라, 인간 존재 방식의 위기였다.
소로의 걷기는 속도를 늦추자는 제안이 아니다. 그것은 속도의 기준 자체를 바꾸자는 요청이다. 그는 빠르게 도착하는 것보다, 제대로 지나가는 것이 중요하다고 보았다. 걷는 동안 인간은 세계를 소비하지 않고, 세계와 함께 시간을 보낸다. 소비되는 세계에서는 책임이 사라지지만, 함께 시간을 보내는 세계에서는 윤리가 생겨난다.
도시에서의 걷기는 소로의 시대와는 전혀 다른 조건 속에 놓여 있다. 숲 대신 인도와 횡단보도를 걷고, 새소리 대신 자동차 소음을 듣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소로의 걷기는 여전히 유효하다. 걷기는 장소의 문제가 아니라 태도의 문제이기 때문이다. 도시를 걷는다는 것은 도시를 단순히 통과하지 않고, 그 안에서 살아 있는 관계를 회복하려는 시도이다. 골목의 냄새, 계절에 따라 달라지는 빛, 사람들의 표정은 걷는 사람에게만 열리는 세계다.
헨리 데이비드 소로의 시민의 불복종 (루미너리북스)
특히 노년의 걷기에서 소로의 철학은 새로운 의미를 얻는다. 젊은 시절의 걷기가 확장과 정복의 감각을 동반했다면, 노년의 걷기는 유지와 돌봄의 감각을 요구한다. 더 멀리 가기보다 넘어지지 않고 계속 걷는 것이 중요해진다. 소로의 걷기는 성취가 아니라 지속의 철학이다. 매일 같은 길을 걷는 일, 어제와 조금 다른 몸의 상태를 받아들이는 일 속에서 인간은 삶의 리듬을 다시 배운다.
걷기는 또한 고독을 회복하는 행위다. 현대인은 늘 연결되어 있지만, 정작 혼자 있는 시간에는 불안을 느낀다. 소로는 의도적으로 혼자 걸었고, 그 고독을 두려워하지 않았다. 혼자 걷는 시간은 자신과의 대화가 가능해지는 시간이다. 침묵 속에서 인간은 타인의 기대와 사회적 역할에서 잠시 벗어나 자신의 참모습을 마주한다. 이 고독은 고립이 아니라 회복의 조건이다.
소로의 걷기는 영성의 언어로도 다시 읽힌다. 그는 특정 종교의 교리보다 자연 속에서 이루어지는 침묵과 반복을 신뢰했다. 걷는 동안 호흡은 고르게 정리되고, 생각은 차분해진다. 발걸음 하나하나에 의식을 두는 걷기는 몸과 마음을 현재에 묶어 두는 가장 단순한 수행이다. 소로에게 자연은 성전이었고, 걷기는 그 성전을 오가는 의식이었다.
현대 사회에서 걷기는 저항의 형태로 다시 등장한다. 과잉 생산과 과잉 소비, 끊임없는 경쟁 속에서 걷기는 아무것도 생산하지 않는 시간처럼 보인다. 그러나 바로 그 무용함이 걷기의 힘이다. 걷는 시간은 시장의 논리에서 벗어나 있으며, 효율로 평가되지 않는다. 스스로 속도를 정하고 방향을 선택하는 행위는 이미 하나의 자유 선언이다.
시민으로서의 걷기도 중요하다. 소로의 시민 불복종은 숲속 사유에서 탄생했다. 오늘날에도 걷기는 시민성을 회복하는 방법이 될 수 있다. 도로를 걷고, 마을을 걸으며, 삶의 현장을 몸으로 경험하는 사람은 추상적인 정책과 숫자에만 의존하지 않는다. 걷기는 삶의 구체성을 회복시키고, 그 구체성은 정치적 판단의 토대가 된다.
4. 기후 위기 시대, 소로의 걷기와 실천
기후 위기의 시대에 소로의 걷기는 더욱 절실하다. 기술은 문제를 완화할 수 있지만, 삶의 태도를 대신해 주지는 못한다. 걷기는 에너지 소비를 최소화하는 이동 방식이자, 자연의 한계를 몸으로 인식하게 만드는 경험이다. 더 중요한 것은 걷기를 통해 자연을 다시 가까이 두게 된다는 점이다. 멀리서 관리하는 자연이 아니라, 가까이에서 관계 맺는 자연만이 보호의 대상이 된다.
소로와 함께 한 산책 (Six Walks, 벤 새턱 지음 RH 코리아). 그의 발자취를 따라간 여섯 번의 여정을 담았다. 포스터샵
소로의 걷기는 결국 삶의 크기를 조정하는 작업이다. 더 크게, 더 빠르게 확장하려는 삶에서 벗어나, 감당 가능한 크기의 삶으로 돌아오게 한다. 걷는 사람은 자신의 몸이 허락하는 거리만큼만 나아갈 수 있다. 이 한계는 제약이 아니라 지혜다. 한계를 아는 삶은 무모하지 않고, 지속 가능하다.
오늘 우리가 소로를 다시 읽는 이유는 그의 답이 완성되어 있기 때문이 아니라 그의 질문이 여전히 유효하기 때문이다. 어떻게 살 것인가, 무엇을 포기하고 무엇을 지킬 것인가. 걷기는 그 질문을 몸으로 던지는 방식이다. 길 위에서 인간은 선택해야 한다. 속도를 줄일 것인가, 방향을 바꿀 것인가, 아니면 계속 서두를 것인가.
헨리 데이비드 소로의 걷기는 하나의 결론이 아니라, 하나의 초대다. 지금 여기서, 가능한 한 천천히, 그러나 분명한 방향으로 걸어보라는 초대다. 숲이 아니어도 좋고, 호수가 아니어도 좋다. 중요한 것은 발로 세계를 다시 느끼는 일이다. 그 순간 걷기는 다시 철학이 되고, 일상은 다시 사유의 장소가 된다.
소로의 걷기는 결국 인간다운 삶을 회복하기 위한 가장 단순하고도 급진적인 제안이다. 길 위에서 그는 우리에게 묻는다. 당신은 지금 걷고 있는가, 아니면 그저 이동하고 있는가.
걷기에 도움이 되는 책
프레데리크 그로의 걷기, 두 발로 사유하는 철학 : 이 책은 걷기를 하나의 철학적 행위로 복권시키는 사유의 에세이다. 이 책에서 걷기는 운동도, 취미도, 이동의 수단도 아니다. 그것은 속도와 효율, 성과를 숭배하는 현대 사회로부터 한 걸음 물러서는 가장 단순하면서도 급진적인 실천이다. 저자는 니체, 루소, 칸트, 랭보 등 사상가와 예술가들의 걷기를 따라가며, 그들이 왜 걷는 가운데 사유했고, 고독 속에서 사유가 깊어졌는지를 섬세하게 풀어낸다. 걷는 동안 생각은 목적을 강요받지 않고, 결론을 서두르지 않는다. 몸의 리듬에 맞춰 생각은 흩어지고, 다시 모이며, 뜻밖의 통찰에 이른다. 이 책은 독자에게 새로운 사상을 주입하기보다 생각이 스스로 숨 쉴 수 있는 조건을 상기시킨다. 바쁘게 서두르며 생각한다고 믿어온 우리에게 그로는 묻는다. 정말로 생각하고 있는가, 아니면 생각하는 척 달리고 있을 뿐인가. 걷기는 그 질문에 대한 가장 조용하지만 단단한 대답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