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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인 반열에 오른 희귀한 고위 법조인, 토머스 모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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변호사가 성인이 된다고? 토머스 모어(Thomas More, 1478~1535)라는 이름을 들으면 대부분 아, 유토피아 쓴 사람? 이라고 반응한다. 맞다. 하지만 이 사람의 진면모는 따로 있다. 바로 변호사 출신으로 가톨릭 성인 반열에 오른 거의 유일한 인물이라는 점이다. 동서고금 따질 것 없이 법조인이 성인이 되기가 얼마나 어려운가? 조희대나 지귀연을 생각해 보라! 낙타가 바늘구멍 통과하는 것보다 어렵다는 그 유명한 성경 구절이 떠오른다. 1478년 런던에서 태어난 모어는 옥스퍼드 대학교에서 고전을 공부하고 법률가가 됐다. 당시 영국은 헨리 7세(Henry VII, 1457~1509)가 장미전쟁의 혼란을 수습하고 튜더 왕조를 세운 직후였다. 모어는 똑똑하고, 재치 있고, 무엇보다 원칙이 있었다. 이 세 가지가 합쳐지면 정치인으로서는 최악의 조합 이다.   한스 홀바인이 그린 젊은 시절의 토머스 모어. 1527년. (위키피디아) 존재하지 않는 곳, 유토피아 1516년 모어는 〈유토피아〉라는 책을 펴냈다. 제목부터가 말장난이다. 그리스어로 어디에도 없는 곳(ou-topos) 이라는 뜻이다. 책에서 그는 가상의 섬나라를 묘사하며 당시 영국 사회를 신랄하게 비판했다. 유토피아에서는 사유재산이 없고, 모두가 평등하며, 하루 6시간만 일한다. 21세기 한국인들이 들으면 눈물 날 이야기다. 반면 당시 영국에서는 귀족들이 양을 방목하려고 농민들을 쫓아내는 인클로저 운동 이 한창이었다. 모어는 이를 두고 양이 사람을 잡아먹는다 는 명언을 남겼다. 자본이 사람을 잡아먹는 건 16세기나 21세기나 마찬가지다. 흥미로운 건 모어 자신이 부유한 법률가이자 나중에는 대법관까지 오른 기득권층이었다는 점이다. 요즘으로 치면 강남 아파트를 몇 채나 가진 판사가 부동산 투기를 비판하는 격이다. 위선일까, 양심일까? 아마 둘 다일 것이다. 인간은 모순 덩어리니까.   토머스 모어의 서명. (위키피디아) 왕의 이혼 변호사가 되기를 거부한 대법관 모어의 진짜 시험은 헨리 8세(Henry VIII, 1491~1547) 시대에 찾아왔다. 헨리 8세는 여섯 번 결혼한 것으로 유명한데, 그 첫 번째 고비가 바로 캐서린 왕비(Catherine of Aragon, 1485~1536)와의 이혼이었다. 왕은 아들을 낳지 못하는 캐서린을 버리고 앤 불린(Anne Boleyn, 1501~1536)과 결혼하고 싶었다. 문제는 가톨릭 교회가 이혼을 인정하지 않는다는 것. 헨리 8세가 낸 해결책? 교황과 싸워서 이기면 된다. 그래서 탄생한 게 영국 국교회인 성공회다. 니들이 내 이혼을 허락하지 않으면, 내가 교회 만들면 되지 뭐. 이게 무슨 어린이 소꿉놀이도 아니고… 하지만 왕은 실제로 그렇게 했고, 영국은 가톨릭에서 분리되었다. 모어는 1529년 대법관이 되었지만, 왕의 이혼과 국교회 설립을 지지하라는 압박을 거부했다. 원칙을 지키기로 한 것이다. 1532년 대법관직을 사임하고, 1534년에는 왕을 영국 교회의 수장으로 인정하는 수장령 에 서명하기를 거부해 런던탑에 갇혔다.   로랜드 로크, 토머스 모어 경의 가족, 1594년경.(위키피디아) 단두대에서도 잃지 않은 유머 1535년 7월 6일 모어는 반역죄로 사형을 선고받았다. 단두대에 오르는 그 순간까지도 그의 재치는 빛났다. 형리에게 내 수염만은 자르지 마시게. 수염은 반역죄를 짓지 않았으니. 라고 말하며, 목을 베기 쉽게 수염을 단정하게 정리했다고 한다. 사형집행인에게는 이렇게 말했다. 용기를 내게, 친구. 자네 임무를 다하게. 내 목은 짧으니 빗나가지 않도록 조심하게. 죽음 앞에서도 상대방을 배려하는 농담이라니. 이런 걸 진짜 영국식 유머라고 해야 할까, 아니면 성인의 경지라고 해야 할까.   토머스 모어의 가족, 1527년경, 한스 홀바인 더 영거 작품.(위키피디아) 영국사에 남긴 유산, 원칙과 양심의 아이콘 토머스 모어는 1935년 가톨릭 성인으로 시성되었다. 그가 영국 사회와 역사에 미친 영향은 세 가지로 정리할 수 있다. 첫째, 권력 앞에서도 굽히지 않는 지식인의 표본이 되었다. 모어는 왕의 친구였고, 최고 권력자 바로 아래에 있던 사람이었다. 그러나 양심과 신념을 저버리지 않았다. 오늘날 한국 사회에서도 권력에 아부하지 않고 소신을 지키는 법조인, 공직자가 얼마나 귀한 존재인지 생각해보면 모어의 선택이 얼마나 대단한지 알 수 있다. 둘째, 사회비판과 개혁 담론의 선구자가 되었다. 〈유토피아〉는 단순한 공상소설이 아니라 당대 사회의 부조리를 폭로하는 날카로운 풍자였다. 양이 사람을 잡아먹는다 는 그의 지적은 500년이 지난 지금도 유효하다. 자본과 권력이 약자를 억압하는 구조는 형태만 바뀌었을 뿐 본질은 그대로다. 셋째, 종교개혁 시대의 복잡한 인물로서 역사적 논쟁거리를 제공했다. 모어는 가톨릭 신앙을 지키다 순교했지만, 그 자신도 이단을 탄압한 기록이 있다. 개혁 신교도들을 화형에 처하는 데 관여했다는 비판이 있다. 완벽한 성인은 없다. 모어 역시 시대의 한계를 벗어나지 못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의 용기와 원칙이 퇴색되는 건 아니다.   토머스 모어 경은 19세기 후반 런던의 케리 스트리트에 있는 자신의 집에 조각상으로 기념된다. 이 집은 왕립법원 맞은편에 있다.(위키피디아) 우리 시대의 토머스 모어는 어디에 토머스 모어의 이야기는 21세기를 사는 우리에게 묻는다. 당신은 무엇을 위해 목숨을 걸 수 있는가? 권력 앞에서 원칙을 지킬 수 있는가? 아니, 애초에 지킬 원칙이라도 있는가? 모어는 완벽한 사람이 아니었다. 모순투성이였고, 때로는 가혹했으며, 자기 확신이 지나쳤을 수도 있다. 하지만 적어도 그는 자기 신념을 목숨으로 증명한 사람이다. 요즘 정치인들처럼 또는 법조인들처럼, 말 바꾸기를 밥 먹듯 하지 않았다. 유토피아는 어디에도 없는 곳이다. 하지만 그곳을 꿈꾸는 사람들이 있는 한, 세상은 조금씩 나아진다. 토머스 모어가 단두대에서 보여준 것은 죽음에 대한 두려움 없는 농담이 아니라, 이상을 포기하지 않는 인간의 존엄이었다. 그가 마지막으로 남긴 말은 이랬다. 나는 왕의 충실한 하인이지만, 먼저 신의 하인이다. 권력보다 양심을, 출세보다 원칙을 선택한 한 법률가의 최후였다. 변호사가 성인이 될 수 있다는 사실, 그것만으로도 우리에게 희망은 있다.   윌리엄 프레드릭 예임스의 그림, 사형 선고 후 딸을 만난 토머스 모어 경, 1872년.(위키피디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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