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두환 정권 고문 맞서다 산화 한희철 열사의 기억 [카테고리 설정이 아직되어 있지 않습니다.] 참으로 기가 막히고 서러운 세월이었다. 지난 2019년 전두환이 12·12 군사반란 40주년을 맞아 서울 강남의 호화 식당에서 측근들과 함께 1인당 20만 원짜리 코스 요리를 즐기며 승전 축배를 들던 그날, 나는 가슴속에 깊이 박힌 한 청년의 이름을 다시 떠올렸다. 나와 같은 해에 대학에 입학했고, 같은 철도학교 동문이었던 친구, 한희철이다.
그가 세상을 떠난 지 40년이 흐른 지금, 그를 기리는 추모 문집 광야에서 외치는 목소리 가 세상에 나왔다. 이 책은 그 시절 국가라는 이름의 괴물에게 짓밟혔던 한 청년의 순결한 영혼에 바치는 기록이자, 여전히 청산되지 않은 역사를 향한 준엄한 고발장이다. 나는 한희철의 동문이자 현대사를 기록하는 사람으로서 끓어오르는 통한을 담아 이 글을 쓴다.
추모문집 표지
멈춰버린 철도장학생의 꿈
1983년 12월 11일 새벽 4시 25분. 최전방 소초 경계호에서 울려 퍼진 세 발의 총성은 한 수재 청년의 삶을 영원히 멈춰 세웠다. 국립 철도고를 수석으로 졸업하고 철도청 장학생으로 서울대 공대에 입학했던 한희철. 가난한 시골 학생들에게 철도고는 유학 의 상징이었고, 서울공대 합격은 가문의 영광이자 동문들의 부러움이었다. 나 역시 철도대 재학 시절인 지난 1979년부터 1981년까지 철도고와 서울공대 출신인 오화석 학장님을 통해 공부벌레 한희철의 전설을 수시로 들으며 대학 생활을 했기에 그의 비보는 남의 일 같지 않았다.
이번에 발간된 추모 문집 광야에서 외치는 목소리 는 40년 동안 흩어져 있던 희철이의 일기, 편지, 그리고 그를 기억하는 서울대 가톨릭학생회(졸톨릭) 동문들과 유가족의 피맺힌 증언을 한데 모았다. 책장을 넘길 때마다 그 시절 우리가 겪었던 서슬 퍼런 공포와 그보다 더 뜨거웠던 청년들의 고뇌가 되살아나 숨이 막힌다.
대학 시절의 한희철: 그의 뒤로 그가 연주하던 통기타가 보인다. 바쁜 일상에도 시간이 허락하면, 집에서 ‘사노라면’ ‘친구’ 못생긴 내얼굴’ 등의 민중가요를 기타 연주에 맞추어 부르며 녹음하기를 좋아했다 ⓒ 이은희
독재의 어둠 속에서 피어난 노동 사제의 소명
문집 속의 한희철은 단순히 박제된 열사가 아니다. 1979년 입학 당시만 해도 그는 철도청 연구원이나 교수를 꿈꾸던 평범한 수재였다. 그러나 1980년 5월, 서울대 정문에서 계엄군이 택시 운전사의 얼굴을 소총 개머리판으로 내리찍는 참혹한 광경을 목격한 이후 그의 영혼은 요동치기 시작했다.
그는 성남 YMCA 탄천클럽 을 주도하고 노동자 야학 샘터교양교실 에서 교사로 활동하며 소외된 이들의 곁을 지켰다. 교회에서 쫓겨나고 있는 그리스도를 민중 속에서 찾으려 한다 던 그의 고백처럼, 그는 군 전역 후 노동사제가 되어 민주주의를 실천하려 했다. 고인이 남긴 일기에는 어머니에 대한 지극한 사랑과,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느님이 가르쳐준 이 땅에서 해야 할 일 사이에서 갈등하며 스스로를 던졌던 숭고한 소명이 고스란히 담겨 있다.
7주기를 맞은 1990년 추모행사에서는 그동안 한희철의 유골을 한탄강에 뿌린 관계로 묘소 없이 진행되어온 추모행사의 장소적 한계를 넘어서고자, 한희철의 혼을 부르는 초혼의 예식을 통해 경기도 마석 모란공원에 묘소를 설치하였고, 이후 한희철의 묘역에서는 매년 추도식이 열리고 있다. ⓒ 이은희
국가폭력의 정점, ‘녹화사업’이라는 야만
희철이를 죽음으로 몰아넣은 것은 전두환 정권의 야만적인 녹화사업(강제징집자 순화공작) 이었다. 1982년 12월 입대해 행정병으로 성실하게 복무하던 그는 1983년 12월, 영장도 없이 보안사에 의해 불법연행되었다. 80㎝ 곤봉으로 온몸이 시커멓게 피멍이 들도록 무차별적인 폭행을 당하며, 그는 함께 활동했던 동료들과 조직 체계도를 자백하라는 강요를 받았다.
다시 오라고 하면 죽어버리겠다. 차라리 죽는 것이 낫다.
보안사 조사를 마치고 복귀한 희철이가 동료 병사들에게 남긴 이 처절한 말은, 양심을 팔아 생존하라는 국가의 협박에 온몸으로 저항한 청년의 마지막 절규였다. 그는 자신이 소중히 여기던 동료들을 위험에 빠뜨렸다는 죄책감과 인간적 좌절감을 견디지 못했다. 결국 그는 유서 말미에 전두환 보안사령관 귀하 라고 명시함으로써 자신을 죽음으로 몰아넣은 몸통이 누구인지를 분명히 지목하고 스스로 목숨을 버렸다.
두 번째 줄 오른쪽에서 두번째가 한희철의 모친 ⓒ 이은희
가해자의 당당함과 피해자의 잊혀가는 눈물
사건 발생 당시 군 당국은 보안사와의 관련성을 은폐하기 위해 유서에서 전두환 이라는 이름을 임의로 잘라냈고, 고문의 흔적을 무시하며 수사를 축소했다. 40년이 흐른 2019년, 학살범 전두환을 포함한 12·12 군사반란의 주역들이 강남 한복판에서 1인당 20만 원짜리 코스 요리를 즐기며 승전을 자축하던 그 소름 끼치는 광경은 우리사회의 정의가 어디에 와 있는지를 묻게 한다.
다행히 2002년 내가 몸담았던 대통령소속 의문사진상규명위원회를 통해 그의 죽음은 공권력에 의한 인권유린과 그에 항거한 민주화운동 으로 인정받았다. 2015년 서울대 교정에는 그를 기리는 염원의 나무 가 심어졌다. 하지만 전두환을 포함한 가해자들은 단 한 번의 진심 어린 사과도 없이 역사 뒤로 숨어버렸고, 피해 가족들의 통한은 여전히 현재진행형이다.
지난 2019년 12월 12일 전두환 씨가 12.12 쿠데타 주역들과 함께 서울 강남의 고급 중식당에서 1인당 20만 원 상당의 코스 요리를 즐기고 있다. ⓒ 정의당제공
우리는 무엇을 기억해야 하는가
광야에서 외치는 목소리 는 80년대라는 암흑의 광야에서 희철이가 외쳤던 진실의 파동이다. 이 책은 한 개인의 비극을 슬퍼하는 것을 넘어, 국가권력이 개인의 양심과 영혼을 어떻게 파괴하려 했는지, 그리고 그 파괴에 맞서 한 청년이 어떻게 인간의 존엄을 지켜냈는지를 증언한다.
네가 하고자 하는 일이 이 에미보다도 더 귀중한 것이냐 던 어머니의 눈물 섞인 질문에 희철이는 일기를 통해 대답했다. 사랑하는 어머니, 어쩔 수 없었습니다. 저는 그것을 위해 태어났고, 그것을 위해 바쳐지게 되어 있었습니다.
밤이 깊으면 새벽이 머지 않으리 라는 그의 묘비명은 아직 온전히 완성되지 않았다. 전두환의 호화 오찬보다 더 찬란하게 빛나는 한 청년의 순결한 영혼을 기억하는 일, 그리고 다시는 이 땅에 국가라는 이름의 폭력이 발붙이지 못하게 하는 일. 그것이 오늘을 사는 우리에게 남겨진 무거운 과제다. 한희철의 이름은 사라지지 않고 이 책 속에, 그리고 정의를 열망하는 우리의 기억 속에 영원히 살아있을 것이다.
녹화사업 의문사 6인 ① 한양대학교 기계과 81학번 한영현 ② 고려대학교 정경계열 80학번 김두황 ③ 연세대학교 영독불계열 81학번 정성희 ④ 성균관대학교 사학과 81학번 이윤성 ⑤ 서울대 기계설계과 79학번한희철 ⑥ 동국대학교 사대 수학교육과 81학번 최온순 ⓒ 민청련동지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