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500억 달러 요구’의 험난한 파고 어떻게 넘을 것인가 [카테고리 설정이 아직되어 있지 않습니다.] 장정수 편집위원
3500억 달러 규모의 대미 투자를 둘러싼 한미 양국의 강경 대치가 지속되고 있다.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은 다른 대안은 없다 며 3500억 달러의 현금 일시불 지불을 요구하고 있다. 이에 맞서 이재명 대통령은 수용 불가 입장을 견지하고 있다. 표면적으로는 두 열차가 서로를 향해 달려가는 형국이다.
대미 투자 타협 가능성 보인 환율 정책 협상 타결
그러나 물밑에서는 협상 타결을 위한 절충안 모색도 병행되고 있는 듯하다. 김용범 대통령실 정책실장은 1일 와의 인터뷰에서 미국 정부가 보내온 대미 투자 관련 양해각서(MOU)의 수정안을 작성해 미국 측에 전달했다고 밝혔다. 한국은 이 수정안에서 3500억 달러의 대미 투자를 일시불 현금 직접 투자 대신 10~15년 장기 계획에 따른 분할 방식으로 전환하고, 투자 방식도 현금 투자, 대출, 보증 등 다양한 형태를 혼합한 방안을 제시한 것으로 알려졌다.
이와 관련해 한미 양국이 지난 1일, 5개월에 걸친 환율 정책 협상을 마무리하고 합의안을 발표했다는 점은 주목할 만하다. 이번 합의에서 한국은 수출 경쟁력 확보나 대미 무역 흑자 강화를 위한 인위적 원화가치 절하를 하지 않기로 확약했고, 미국은 한국을 환율조작국 목록에 포함시키지 않기로 했다.
물론 이 합의가 관세 협상과 직접 연계된 것은 아니다. 그러나 미국이 한국과의 전면적 파국을 피하고 절충안 모색에 나서고 있다는 해석을 가능하게 한다. 완전한 결렬보다는 상호 양보를 통한 타협점 모색이 현실적 선택이라는 인식이 양국 실무진 사이에 형성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아카자와 경제상 실토가 한일 공동전선 구축까지 이어질까?
이런 상황에서 미일 관세협상 담당자였던 아카자와 료세이 일본 경제재생상이 트럼프 대통령의 주장을 부정하는 내용을 공개해 관심이 집중되고 있다. 2일 AFP통신은 아카자와 경제재생상이 도쿄 외국 특파원 협회 강연에서 일본의 5500억 달러 대미 투자 계획과 관련해, 실제 현금 투자 비중이 총액의 1~2%에 불과하며 나머지 금액은 대출과 보증으로 구성된다고 밝혔다고 보도했다. 또한 일본이 서명한 양해각서에는 선불 이라는 표현이 포함되지 않았으며, 지급 방식은 수시로 로 명시됐다고 전했다. 아울러 이 양해각서는 조약이 아니며 법적 구속력도 없는 행정 문서 라는 설명도 덧붙였다.
아카자와 료세이 일본 경제재생상이 1일 도쿄 외국인기자클럽(FCCJ)에서 기자회견을 하고 있다. (AFP / 연합뉴스)
이 보도가 사실이라면 트럼프 대통령이 일본으로부터 5500억 달러의 계약금을 받았으며 이는 우리(미국) 돈이며, 대출 같은 것이 아니라 서명 보너스 라고 선전해온 주장이 거짓이었음을 의미한다. 트럼프의 주장과는 정반대로 일본의 투자는 현금이 극히 일부에 불과하고 대부분 대출과 보증으로 구성됐다는 사실이 드러났다. 일본 아카자와 경제재생상의 이번 발언으로 일본 사례를 활용해 한국으로부터 3500억 달러를 받아내려던 트럼프의 전략은 더 이상 추진하기 어렵게 됐다. 일본이 서명한 대미 투자 내역이 한국이 제시한 방식과 대동소이하기 때문이다.
오히려 이재명 대통령의 주장이 힘을 얻게 됐다. 나아가 아카자와 일본 경제재생상의 이번 발언이 일본의 근본적인 입장 전환을 의미하는 것이라면 한일 양국의 공동전선 구축으로 이어질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일본의 새 총리가 선출되고 새 내각이 출범할 경우 한일 양국이 협력해 미국의 과도한 요구에 공동 대응할 수 있는 여건이 조성됐다는 의미로 해석할 수도 있다는 말이다. 이는 1997년 외환위기 당시 일본이 미국과 협조해 한국에 대한 지원을 거부했던 것과 극명한 대조를 이룬다. 한일 양국의 공동 대응은 미국으로서는 최악의 시나리오다.
무기 구매, 대북 지원 부담, 지정학적 카드… 한국의 다양한 계책들
이같은 예상치 못한 국면의 전개 속에서 한국은 다양한 전략적 카드를 검토하고 있다. 우선 미국산 무기 구매 확대다. 한국은 이미 F-35 전투기 등을 꾸준히 도입해 왔으며, 이를 더욱 확대해 트럼프 대통령의 안보 우선주의 명분을 충족시킬 수 있다. 예컨대 100억 달러 규모의 추가 무기 구매 제안은 군산복합체와 보수 지지층에 가시적 성과로 어필될 만하다.
또한 국정원과 통일부가 구체적으로 검토 중인 북미 관계 개선 과정에서의 적극적 역할이다. 북미 관계 정상화가 가시화될 경우 미국이 북한에 제시할 대규모 경제 지원의 상당 부분을 한국이 부담하는 방안이다. 이재명 대통령은 지난 8월 초 트럼프 대통령과 백악관에서 회동했을 때 북미 정상회담 성사를 위해 페이스 메이커 역할을 맡겠다고 밝힌 바 있다. 트럼프 대통령이 김정은 국무위원장과의 정상회담 및 북미 관계 정상화에 큰 관심을 두고 있다는 점을 고려할 때 이 카드는 큰 힘을 발휘할 수 있다.
한국이 대북 경제 지원을 실질적으로 뒷받침하는 방식은 지난 1994년 제네바 북미 핵 합의 당시 한반도에너지개발기구(KEDO)를 통해 한국이 40억 달러에 달하는 경수로 건설 비용의 약 75%를 부담했던 것과 유사하다. 일본도 당시 약 20%를 부담했다.
뿐만 아니라 한국은 지정학적 카드를 활용할 수도 있다. 미국은 한국을 인도-태평양 전략에서 대중국 포위망의 핵심 축으로 설정하고 있다. 미국이 무리한 대한 경제 압박을 강행할 경우 한국 내 반미 정서가 고조되고, 나아가 한국이 안보적 대안을 모색하게 된다면 이는 트럼프 행정부의 최우선 전략 목표인 중국 봉쇄 전략에 큰 타격을 입힐 것이라는 점을 강조할 필요가 있다.
이재명 대통령과 도널드 트럼프 미 대통령.
진짜 미국의 이익은 무엇인가” 미국 내 합리적 목소리 활용
트럼프 행정부 내부에서도 한국 압박을 둘러싼 양론이 존재한다. 국방부와 국무부는 동맹 유지와 강화를 우선시하는 반면, 재무부와 상무부 등 경제 부처는 직접적 투자 방식을 선호한다. 전문가들은 트럼프 대통령의 일방적 관세 정책이 한미 동맹의 기초를 훼손할 뿐만 아니라 반도체, 배터리 등 미국 경제 및 국방의 핵심 공급망을 교란시킬 수 있다고 경고한다. 한국 경제의 불안정은 결국 미국 기업과 소비자에게 부메랑으로 되돌아온다는 뜻이다.
이러한 미국 내 합리적 목소리는 이재명 정부의 협상에 유리한 환경을 제공한다. 한국 정부는 이들과 적극적으로 소통해 트럼프 대통령의 일방적 요구가 궁극적으로 미국의 국익에 부합하지 않는다는 점을 설득할 필요가 있다.
뿐만 아니라 한국은 지정학적 카드를 활용할 수도 있다. 미국은 한국을 인도-태평양 전략에서 대중국 포위망의 핵심 축으로 설정하고 있다. 미국이 무리한 경제 압박을 강행할 경우 한국 내 반미 정서가 고조되고, 나아가 한국이 안보적 대안을 모색하게 된다면 이는 트럼프 행정부의 최우선 전략 목표인 중국 봉쇄 전략에 큰 타격을 입힐 것이라는 점을 강조할 필요가 있다.
한미 동맹은 80년 가까이 이어져 온 양국 관계의 핵심 근간이자 동북아시아 안정의 결정적 축이다. 단기적 정치적 이익이나 경제적 압박을 위해 이 역사적이고 전략적인 기반을 훼손하는 것은 양국 모두에게 불행한 결과를 초래할 뿐임을 분명히 해야 한다.
상호 존중 기반한 ‘윈윈(Win-Win)’의 지혜로운 타협을
현재의 첨예한 대립을 극복하는 유일한 길은 냉정한 전략적 계산과 상호 존중에 기반한 윈-윈(Win-Win) 해법을 도출하는 것이다. 특히 미국은 동맹국의 경제 주권을 존중하고, 한국은 경제 전반에 미치는 타격을 최소화하면서도 최대 무역 대상국인 미국과 지속 가능한 무역 관계를 유지할 방안을 다각적으로 모색해야 한다. 이러한 지혜로운 타협이야말로 진정한 동맹 관계를 더욱 굳건히 하는 길이다.
다가오는 APEC 정상회의가 양국 정상이 만나 일방적 강요가 아닌 상호 합의에 의한 타협을 이루어냄으로써 한미 관계의 미래를 재정립하는 뜻깊은 장이 되기를 기대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