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잊힌 항일독립 여전사 이화림을 다시 기억할 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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항일전쟁 시기 샛별처럼 빛나는 항일 독립지사들이 있습니다. 님 웨일즈의 『아리랑』의 주인공 김산(본명 장지락)이 그렇습니다. 1930년대 초 혁명적 노동운동을 이끈 김찬도 있습니다. 두 분 모두 항일전쟁 시기 코뮤니스트 독립투사이자 중국 공산당에 의해 처형된 인물들입니다. 오늘 소개할 이화림(본명 이춘실) 역시 코뮤니스트 항일여전사로서 남과 북 모두에서 외면당한 인물입니다. 전문연구자나 역사 교사가 아니면 이화림을 아는 시민은 거의 없습니다.   2026년 3월 1일 재출간한 이화림 회고록 책 표지(출처: 마르코폴로 출판사) 해방 70주년을 맞은 2015년에 박경철, 이선경 연구자가 번역한 『이화림 회고록』이 출간되면서 세상이 조금씩 이화림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3·1혁명 107주년을 맞은 날 『이화림 회고록』(마르코폴로, 2026)이 재출간되었습니다. 여기엔 이화림 지사의 자필 이력서와 윤봉길 의사 상하이 의거, 그리고 자필 공적서가 새롭게 수록돼 있습니다. 항일 독립지사 이화림은 김산과 마찬가지로 1905년생입니다. 평양 출신이고 어린 시절부터 이춘성, 이춘식 두 오빠의 영향으로 항일 민족의식이 투철했습니다. 열네 살 어린 나이에 3·1 만세 운동에 참여했으니까요. 두 오빠는 중국으로 망명해 군관학교 졸업 후 독립군이 되는데 이후 평생 연락이 끊깁니다. 이화림의 본명은 이춘실이었습니다. 평양 유치원 교원학교 재학 시절 평양지역 고등학생들이 만든 지하조직인 역사문학연구회를 통해 사회주의 사상을 접합니다. 그리고 유아학교 교사로 살면서 1927년 조선공산당에 가입합니다. 그러나 조선공산당의 분파 투쟁에 염증을 느끼고 1930년 상해로 망명합니다. 망명 직후 김두봉의 주선으로 김구의 한인애국단에 가입합니다.   효창 공원에 있는 3의사 이봉창, 윤봉길, 백정기 묘. 제일 왼쪽에 있는 묘는 안중근 가묘이다. 아직 유해를 찾지 못해 임시로 묘를 조성해 놓았다. 하성환 시민기자 한인애국단 시절 3인방이 바로 이화림, 이봉창, 윤봉길입니다.1) 상해 망명 시절 이화림은 이동해로 이름을 바꿉니다. 사격과 무술 훈련을 마치고 백범 김구의 비서가 되어 한인애국단에서 주어진 임무를 수행합니다. 1932년 1월 8일 이봉창 의사의 일왕 투탄 당시 유명한 일화가 있습니다. 수류탄을 일본으로 반입하기 위해 김구, 이화림, 이봉창은 밤새 고민하고 논의합니다. 어느 순간 이봉창 의사가 사타구니를 가리키며 자신의 팬티에 수류탄을 넣어가면 된다고 이야기하자 이화림은 순간 부끄러움으로 당황했습니다. 그렇지만 거사를 위해 이봉창의 팬티에 수류탄 비밀주머니를 달아준 이가 이화림입니다.2) 이화림은 이봉창 의사가 처형됐다는 소식을 듣고 주저앉아 오열합니다. 윤봉길의 훙커우 공원(루쉰 공원) 거사에도 이화림은 함께합니다. 거사 당일 1932년 4월 29일 이화림은 양장 정장 차림으로, 윤봉길은 스프링코트 차림으로, 둘은 부부로 위장한 채 잠입합니다. 윤봉길이 기념식장 잠입에 성공하자 이화림은 김구의 지시대로 빠져나옵니다. 윤봉길 의사는 거사 전날 이화림과 함께 사전 답사한 그대로 기념식장 주석대 뒤편으로 이동합니다. 그리고 나뭇가지에 보온물병 폭탄(공격폭살용)과 도시락 폭탄(자결용)을 걸어두고 기회를 엿봅니다. 기념식 무대 위에 상해 파견군 사령관 시라카와 대장, 제3함대 노무라 중장, 제9사단장 우에다 중장, 시게미츠 주중 공사, 상해 일본인 거류민단장이 들어서자 윤봉길은 주저 없이 보온물병 폭탄을 투척합니다. 기념식장은 한순간 아수라장이 되면서 시라카와 대장과 거류민단장을 현장에서 폭살시키고 노무라 중장과 우에다 중장, 그리고 시게미츠 주중 공사를 불구로 만들어 버립니다. 거사 직전 김구와 윤봉길, 이화림 셋은 다음과 같이 이야기를 나누는데 김구가 웃으며 윤봉길, 이화림을 향해 이런 말을 합니다. 너희들이 한국인의 진정한 영웅이다. 너희들이 한국인의 자랑이다. 너희들이 한국인의 희망이다.(중략) 당초 나는 너(이화림)를 공산주의자로 알고 한인애국단에 받아들이려고 하지 않았다. 더욱이 네가 여성이기도 하고 그런데 지금 보니 내가 받아들인 게 옳았다. 본디 너는 대단한 여자 호걸임에 틀림없다. 앞으로 우리 역사에서 걸출한 한 명의 여걸이 추가될 것 같다.”3)   윤봉길 의사가 오사카로 압송된 뒤 1932년 12월 19일 가나자와 육군형무소 공병 작업장에서 일본 군인들에 의해 십자가 형틀에 묶이는 위 사진과 처형 직후 모습을 담은 사진이 서울 서초구 양재동 매헌 윤봉길 기념관에 전시돼 있다. 하성환 시민기자 윤봉길 의사가 사형 선고를 받고 오사카로 압송돼 육군형무소에서 처형돼 쓰레기 하치장에 버려집니다. 죽음 앞에서도 당당했던 윤봉길 의사 처형 소식에 이화림은 또다시 몸을 가누지 못할 정도로 오열합니다. 한인애국단 시절, 이화림은 일제의 주구가 된 밀정들을 처단하는 데 김구와 합심합니다. 일제의 개를 처음 처단할 당시 크게 놀라는 이화림을 향해 김구는 차분하게 조언합니다. 사람에게 가장 소중한 것은 의기가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중략) 비록 내 얼굴은 검지만 내 마음은 결코 검지 않다. 나는 결코 살인을 원하지 않는다. 하지만 조국을 위해서는 어쩔 수 없다. 앞으로 우리의 일에서 상호 신뢰만 있으면 살아갈 수 있다. (중략) 친구들에게는 정성을 다하고 적들에게는 절대 준엄해야 한다. 이것이 사람됨의 고귀한 도리이다.”4) 이화림은 애인이란 소문이 돌 만큼 김구와 매우 가까운 사이였습니다. 그만큼 김구의 비서로 둘은 깊은 동지적 신뢰를 간직했습니다. 일제 밀정들의 첩보는 이화림을 김구의 정부(情婦)로 묘사할 정도였다고 합니다. 실제로 일제 밀정을 처단하는 장면에서 밀정이 그런 언사를 내뱉는 장면이 나오기도 합니다. 그러면 이화림은 분노와 함께 치욕을 느꼈습니다. 그렇지만 임무를 완수하기 위해 인내하며 김구의 시중을 들었습니다.5) 당시 상해 임시정부는 극도로 궁핍한 시절이라 이화림은 직접 재정난을 해결하고자 나물 장사를 하며 자립했습니다. 틈틈이 자수를 놓고 삯빨래를 하여 돈을 모아 임정에 독립운동 자금을 기부했습니다. 투철한 민족의식과 항일의식으로 일제와 맞서 싸운 이화림은 윤봉길 순국 이후 끝내 김구와 결별합니다. 결별 배경은 30년대 파시즘의 대두와 독립운동 노선상의 차이이기도 했지만 결국 코뮤니스트 신분 때문이었습니다. 그런 탓에 한인애국단 3인방임에도 『백범일지』엔 이화림에 대한 언급이 전혀 없습니다. 윤봉길, 이봉창 의사는 20쪽 넘게 자세히 다루었지만 이화림 세 글자는 찾을 수 없습니다.   밀양 의열기념관 전경. 경남 밀양은 경북 안동과 함께 항일독립운동의 메카이다. 경북 안동은 이육사, 김동삼, 김시현, 이상룡을 배출했고 밀양은 김원봉, 윤세주, 한봉인, 최수봉 의열단원들을 비롯해 3대 대종교 교주 윤세복, 의열단의 정신적 지도자 황상규 등 70명이 넘는 항일독립지사들을 배출했다. 하성환 시민기자 이화림은 윤봉길 거사 이후 의열단의 추천으로 광저우로 가서 중산대학에서 의학을 공부합니다. 중산대학은 중국 최초의 공화국을 건설한 신해혁명의 대부 쑨원(손문)의 호 중산을 따서 설립한 혁명 인재 양성대학입니다. 중산대학 시절 이 대학 유학생 김창국과 결혼해 아들 김우성을 낳습니다.   경남 밀양 의열거리에 조성된 석정 윤세주 벽화. 석정 윤세주는 최연소 의열단원이자 조선의용대 화북지대를 이끈 조선의용대의 영혼이자 정신적 지도자였다. 하성환 시민기자 그러다 평소 흠모했던 석정 윤세주가 1935년 창립한 조선민족혁명당(약칭 민혁당) 조직 확대 차 광저우를 방문했을 당시 석정의 연설에 크게 감명받습니다. 의열단 후신 민혁당에 가입하고 1936년 1월 민혁당 지시로 혁명을 위해 가족과 헤어져 난징(남경)에서 활동합니다.   이화림과 이혼한 조선의용대 총무조장 리집중(본명 이종희). 리집중은 의열단원으로 북경에서 김창숙, 류자명의 지시를 받고 밀정 김달하(이대 총장 김활란의 형부)를 처단한 인물이다. 독립기념관 인용 1936년 이 시기 난징에서 이화림은 조선의용대(군) 출신 최후의 분대장 김학철과 중국인민해방군 군가를 작곡한 정율성을 만납니다. 남경 시절 윤세주의 소개로 의열단 출신 리집중(본명 이종희)을 만나 재혼했지만 첫 번째 이혼처럼 성격 갈등으로 결별하게 됩니다. 가부장적인 남편 리집중이 이화림의 연안 행을 반대하면서 혼인 생활을 지속할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1938년 10월 10일 중국 임시수도 한구에서 중국 관내 최초로 창설된 군대인 조선의용대 창립 기념 사진. 조선의용대는 임정의 한국광복군보다 2년 앞서 창설되었다. 조선의용대 주력부대(조선의용대 화북지대)는 화북지역 태항산으로 이동하고 조선의용대 본대는 한국광복군 제1지대로 편입된다. 독립기념관 인용 연안에서 조선의용대(군) 시절 이화림은 적진 깊숙이 침투해 무장 선전 활동에 앞장섭니다. 체구는 작았지만 전투가 시작되면 그 누구보다 용맹스럽게 싸웠습니다. 연안 시절 ‘공산당원은 두 발자국 앞으로!’ 명령이 떨어지면 조선의용대 대원들 중 공산당원은 전투 대열 맨 앞줄에 서서 용맹스럽게 싸웠습니다.6) 당시 이화림은 중국공산당원은 아니었으나 전투 상황이든 병참 문제든 열정적으로 투쟁했습니다. 연안 시절 조악한 식량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이화림은 부녀 대원들을 이끌고 태항산 돌미나리를 캐어 미나리 김치를 담그곤 했습니다. 당시 부녀대장 이화림이 부녀 대원들에게 들려준 미나리 타령은 도라지 타령에다 가사를 바꿔 부른 노래로 대원들 흥을 돋우기에 충분했습니다. 미나리, 미나리, 돌미나리/태항산 골짜기의 돌미나리/한두 뿌리만 뜯어도/대바구니가 찰찰 넘치누나/에헤야 데헤야 좋구나/어여라 뜯어라 지화자자 캐어라/이것도 우리의 혁명이란다.” 해방 직전인 1945년 1월 이화림은 조선의용군 사령관 무정 장군의 당부로 의학 공부를 정식으로 하게 됩니다. 의과대학에 다니면서 해방을 맞고 1946년 11월 21일 중국공산당에 가입합니다. 의대 졸업 후 연변 조선족 자치주 위생국 부국장으로 보건 의료 활동에 열정을 쏟습니다. 그녀는 검소한 생활로 절약한 돈을 조선족 어린이 문학가들을 위해 기부하고 1999년 2월 10일 임종 직전엔 자신의 전 재산을 조선족 학교에 전액 기부합니다. 이화림 지사는 생의 마지막까지 민족을 사랑하는 마음을 잃지 않았습니다.   이화림 지사가 작성한 자필공적서(국가보훈처 제공, 이화림 회고록 수록) 1994년 이화림 지사는 주변 사람들의 권유로 자필 공적서를 작성해 대한민국 국가보훈처에 독립유공자 서훈을 신청합니다. 그러나 김영삼 정부는 이화림 지사의 독립유공자 서훈을 거부합니다. 이유인즉 이화림 지사가 한국전쟁 당시 조선인민군 제6군단 위생소 소장으로 복무하다가 미군 폭격으로 부상을 당한 채 중국으로 돌아간 사실을 문제 삼은 것입니다. 반공 이념으로 덧칠된 20세기 냉전 시대가 끝나고 21세기도 벌써 사반세기가 지났습니다. 항일전쟁시기 독립 유공의 서훈 유무는 항일독립운동의 유무로 판단해야 마땅합니다. 박물관에 들어갈 낡은 이념을 앞세워 항일전쟁 시기 목숨 바쳐 독립투쟁에 매진한 이화림 지사를 내친다는 것은 보훈의 근본정신에도 어긋납니다. 더구나 이화림 지사는 해방 후 의료인으로서 휴머니즘을 실천했으며 평생에 걸쳐 민족 사랑을 실천했던 분입니다. 이화림 항일지사는 조선인민군 군의관으로 참전했다는 이유로 남쪽에서 독립유공자 서훈을 거부당하고 북쪽에서는 50년대 후반 김일성에 의해 연안파(조선의용군)가 숙청되면서 남북 모두에서 외면당한 비운의 인물입니다. 다가올 한반도 평화와 통일을 준비하기 위해서라도 대한민국이 먼저 나서서 이화림 항일지사를 기억해야 합니다. 이재명 국민주권 정부에서 독립유공자로 즉시 서훈을 추서하여 자라나는 아이들 역사책에 기록해야 합니다. 그리하여 이화림 지사를 유관순만큼 유명한 항일 독립투사로 대중의 기억 속에 자리잡게 해야 합니다. 1. 김학준(1992), 『매헌 윤봉길 평전』, 민음사, 367쪽. 2. 하성환(2021), 「코뮤니스트 항일여전사 이화림」, 『우리역사에서 왜곡되고 사라진 근현대 인물한국사』, 75쪽. 3. 이화림 구술·장촨제·순정리 엮음 박경철·이선경 옮김(2026), 『이화림 회고록』, 마르코폴로, 161쪽. 4. 이화림(2026), 위의 책, 103~104쪽. 5. 이화림(2026), 위의 책, 102쪽. 6. 김학철(1989), 『태항산록』, 대륙연구소, 167~168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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