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국 한복판 구두의 도시 노샘프턴에서 배울 것들 [사회혁신] 노샘프턴이 말하는 것
영국 잉글랜드 한가운데, 런던에서 북쪽으로 기차로 한 시간 남짓 달리면 사람들이 잘 모르는 도시 하나가 나온다. 이름은 노샘프턴(Northampton). 인구 약 21만 명(2011년 기준)의 이 도시를 두고 영국인들은 흔히 거기가 어딘데? 라고 묻는다. 그러나 이 질문이야말로 노샘프턴의 가장 큰 매력을 건드리는 것이다. 세상에는 가장 조용하게 위대한 일들을 해낸 곳들이 있기 마련이다.
노샘프턴 길드홀은 세인트 자일스 광장에 위치한 건물이다. (위키피디아)
불꽃 속에서 태어난 도시
노샘프턴의 역사는 앵글로색슨 시대로 거슬러 올라간다. 914년 문헌기록이 처음 등장하며, 1189년에는 국왕 리처드 1세(재위 1189~1199)가 십자군 원정자금이 필요해지자 이 도시에 자치헌장을 팔아먹었다. 자유 를 돈 받고 판 셈인데, 국가가 돈 앞에 무릎을 꿇는 건 21세기만의 일이 아니었던 모양이다.
1460년에는 장미전쟁(붉은 장미의 랭커스터 가문과 흰 장미의 요크 가문이 벌인 내전)의 결정적 전투인 노샘프턴 전투가 벌어졌다. 들라프레 수도원(Delapré Abbey) 인근 들판에서 헨리 6세(재위 1422~1461)가 포로로 잡혔다. 헨리 6세는 왕좌를 두 번이나 빼앗긴 비운의 왕이었는데, 이 수도원은 그 역사적 현장으로 지금도 남아 있다.
그런데 노샘프턴은 1675년 대화재로 도시 대부분이 잿더미가 됐다. 1666년 런던 대화재 이후 9년 만에 덮친 비극이었다. 그러나 이 도시는 절망하기는커녕 더 넓은 광장, 더 탁 트인 거리로 도시를 다시 설계했다. 재난을 기회로 삼은 것이다. 덕분에 노샘프턴 중심부의 시장 광장(Market Square)은 지금도 영국에서 손꼽히는 넓은 광장으로 남아 있다. 불에 타 없어진 것이 오히려 공간을 열어준 셈이니, 때로는 잃어야 얻는다는 역설을 이 도시는 몸으로 가르쳐준다.
노샘프턴 중심부의 시장 광장 (위키피디아)
신발로 세상을 지배하다
노샘프턴 하면 떼놓을 수 없는 것이 구두산업이다. 12세기부터 구두를 만들어온 이 도시는, 단순히 신발을 만든 게 아니라 역사를 신겼다. 1213년 국왕 존(재위 1199~1216)이 이곳에 들러 장화 한 켤레를 샀다는 기록이 있으니, 노샘프턴은 왕실 납품업자의 원조였던 셈이다.
1642년 영국내전 때는 의회군에 구두 4000켤레와 기병 장화 600켤레를 납품했고, 얼마 후엔 올리버 크롬웰(1599~1658)의 군대에 2000켤레를 추가로 공급했다. 전쟁터도 신발 없인 돌아가지 않는 법. 노샘프턴은 칼이 아니라 바늘과 실로 역사에 참전한 것이다. 1차와 2차 세계대전을 합쳐 영국군에 총 5000만 켤레의 신발을 납품했다는 기록도 있다.
1841년 인구조사에 따르면 노샘프턴 성인 남성의 약 3분의 1이 구두장이였다. 당시 신문기록에는 노샘프턴 1마일 안에 들어오면 구두 만드는 소리가 들린다 고 적혀 있다. 오늘날 노샘프턴산 신발은 영국 첩보원 제임스 본드(가상 인물이지만)가 신는 구두로 유명한데, 피어스 브로스넌(1953~ )과 다니엘 크레이그(1968~ )가 007 역할을 할 때 실제로 노샘프턴산 구두를 신었다고 한다. 왕에서 스파이까지, 이것이 노샘프턴 구두의 이력서다.
한국에 대입해 보자. 한때 세계를 석권했던 한국의 섬유·신발 산업은 1980~90년대 값싼 노동력을 찾아 해외로 공장을 이전하며 급격히 쇠퇴했다. 노샘프턴도 20세기 중반 찰스 클로어(1904~1979)라는 금융업자가 공장들을 헐값에 사들여 해외로 이전하면서 충격을 받았다. 그러나 노샘프턴은 고급화와 장인정신 덕에 살아남았다. 장인의 기술과 축적된 지식은 결코 쉽게 복제되지 않는다는 것을 이 도시는 보여준다. 한국의 전통산업들, 가령 도자기·한복·한지 등이 노샘프턴 구두에서 배울 점이 여기 있다.
노샘프턴의 옛 배럿 장화와 구두 공장(위키피디아)
이 도시가 낳은 사람들
찰스 몽태규(1661~1715), 노샘프턴셔 호턴 출신의 이 인물은, 오늘날 우리가 쓰는 현대 금융 제도의 설계자다. 1694년 잉글랜드 은행(Bank of England)을 설립하고 재무장관을 지냈으며, 국채 제도를 처음으로 고안했다. 쉽게 말해 나라도 돈을 빌릴 수 있다 는 개념을 만든 사람이다. 지금 대한민국 기획재정부가 국채를 발행할 때마다, 먼 조상은 노샘프턴셔 출신 시골 귀족이었던 셈이다.
프랜시스 크릭(1916~2004), 노샘프턴 태생의 이 물리학자는 1953년 제임스 왓슨(1928~ )과 함께 DNA 이중나선 구조를 밝혀냈다. 둘의 발견은 1962년 노벨 생리의학상으로 이어졌다. 흥미롭게도 크릭의 아버지는 노샘프턴의 구두공장을 운영했다. 가죽을 꿰매던 집안에서 생명의 실을 해독한 아들이 나온 것이다. 크릭은 임종 직전까지 논문을 집필하고 있었다고 전해진다. 진정한 과학자의 삶이란 이런 것이다.
맷 스미스(1982~ ), 노샘프턴에서 태어난 이 배우는 영국 공상과학 드라마 닥터 후 의 열한 번째 박사(2010~2013) 역할로 세계적 명성을 얻었다. 원래 축구선수를 꿈꿨으나 허리 부상으로 포기, 연기로 전향해 역대 최연소 닥터 후 배우가 됐다. 이후 넷플릭스 드라마 더 크라운 에서 필립 공(1921~2021) 역을 맡아 에미상 후보에까지 올랐다. 인생에서 계획이 어긋나는 것이 오히려 더 큰 길을 열기도 한다는, 노샘프턴이 거듭 가르쳐주는 교훈이다.
찰스 몽태규(Charles Montagu (1661–1715), 1st Earl of Halifax, One of the Founders of the Bank of England | Art UK)
반드시 봐야 할 곳들
성묘교회(Church of the Holy Sepulchre, 1110년 건립), 예루살렘의 그것을 본떠 만든 원형교회로, 영국에서 원형교회는 손에 꼽는다. 십자군 전쟁(1096~1291)의 흔적이 영국 한복판에 남아 있다는 사실은 세상이 항상 서로 연결돼 있었음을 상기시킨다.
엘리노어 십자가(Eleanor Cross, 1290년경 건립), 국왕 에드워드 1세(재위 1272~1307)가 왕비 카스티야의 엘리노어(1241~1290)의 장례 행렬이 하룻밤 머문 곳마다 세운 열두 개의 십자가 중 하나다. 사랑하는 이를 잃은 왕이 나라곳곳에 기념비를 세운 것인데, 이 정도면 조선 왕들도 고개를 끄덕일 만한 추모사업 규모다. 현재 영국에 세 개만 남아 있으며 노샘프턴의 것은 원형이 가장 잘 보존돼 있다.
노샘프턴 박물관 및 미술관(Northampton Museum and Art Gallery), 세계에서 가장 큰 구두 소장품을 자랑한다. 빅토리아 여왕(1819~1901)의 슬리퍼부터 데이비드 베컴(1975~ )의 축구화까지 한자리에 있다. 구두 하나로 인류 문명을 읽는 공간이다.
노샘프턴 박물관 및 미술관(위키피디아)
한국에 주는 시사점, 구두 한 켤레의 철학
노샘프턴이 우리에게 건네는 메시지는 무엇일까. 첫째, 불에 타도 다시 짓되 더 잘 짓는 힘. 1675년 대화재 이후 노샘프턴은 더 넓은 광장으로 재건했다. 재난 앞에서 복구만 하는 것과, 재설계를 통해 더 나은 도시를 만드는 것은 차원이 다른 이야기다. 지금 한국에서 각종 재건축과 도시 재개발이 화두인 상황에서, 단순히 낡은 것을 새 것으로 교체하는 것이 아닌, 공동체를 위한 재설계가 필요하다는 노샘프턴의 교훈은 새겨 들을 만하다.
둘째, 장인정신의 고급화 전략. 세계화와 값싼 외국 노동력에 밀려 산업이 공동화되는 위기 앞에서 노샘프턴 구두 장인들이 선택한 길은 더 싸게 가 아닌 더 정교하게 였다. 대량생산이 흉내 낼 수 없는 품질, 수백 년 축적된 기술을 무기로 삼았다. 한국의 중소 제조업과 전통산업들도 이 길을 진지하게 고민할 때가 됐다.
셋째, 찰스 몽태규의 금융혁신. 국채 제도와 중앙은행은 당시에는 급진적인 발상이었다. 그러나 이것이 없었다면 근대국가 재정은 불가능했다. 지금 한국에서 벌어지는 여러 재정·통화 논쟁, 기준금리, 국가부채, 공공금융의 역할을 둘러싼 갈등을 볼 때, 300여 년 전 노샘프턴셔 출신 정치가가 국가재정을 어떻게 혁신했는지 기억하는 것도 나쁘지 않다.
마지막으로, 프랜시스 크릭의 삶이 보여주는 끈기. 전쟁으로 연구가 중단되고, 뒤늦게 생물학으로 전공을 바꾼 그가 결국 인류 역사상 가장 위대한 발견 중 하나를 해냈다. 지금 한국사회는 청년들에게 이른 성공, 빠른 취업, 안정적인 직장을 강요하고 있다. 하지만 크릭은 우리에게 묻는다. 당신은 죽는 날까지 논문을 쓸 수 있는 일을 하고 있습니까?
노샘프턴은 화려하지 않다. 유명 관광지도, 화제의 도시도 아니다. 그러나 이 도시는 조용히, 꾸준히, 신발 한 켤레의 무게만큼 묵직하게 세상에 기여해 왔다. ‘떠들썩하지 않은 것이 보잘것없는 것은 아니다’라고 노샘프턴은 묵묵하지만 단단하게 말한다. 구두 밑창처럼.
노샘프턴의 성묘교회(Church of the Holy Sepulchre, 1110년 건립).(위키피디아)
김성수 시민기자 wadans@empa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