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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보 바로가기 : 혁명의 광풍 속 민초 품은 영원한 2인자 저우언라이

혁명의 광풍 속 민초 품은 영원한 2인자 저우언라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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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화인민공화국의 탄생을 논할 때 마오쩌둥(毛澤東)은 거대한 산맥과 같다. 그는 대중을 선동하고 혁명의 깃발을 치켜든 상징적 지도자였다. 그러나 그 거대한 국가의 살림을 실제로 누가 꾸렸는가? 라는 질문을 던지면 역사는 단 한 사람의 이름을 가리킨다. 바로 저우언라이(周恩來)다. 그는 마오쩌둥보다 다섯 살 아래였으나, 세상을 보는 눈과 현실을 다루는 솜씨는 비교할 수 없을 만큼 정교했다. 마오쩌둥이 이상적인 공산주의 국가의 청사진을 그리는 선언가였다면, 저우언라이는 그 모호한 이상을 예산과 행정, 그리고 외교라는 현실의 언어로 번역해낸 실무가였다. 그는 권력의 정점보다는 그늘을 선택했고, 그곳에서 국가의 기틀을 닦았다.   1972년의 저우언라이(위키피디아) 혁명의 세례와 생존기술 저우언라이의 비범함은 그의 성장 배경에서 시작된다. 1910년대 후반 일본 유학을 거쳐 1920년대 초 프랑스 파리에서 공부했으며, 그는 공산주의 사상에 눈을 떴다. 당시 유럽은 1차 세계대전 직후의 격동기였고, 파리는 전 세계 혁명가들의 용광로였다. 이곳에서 그는 평생의 동지인 덩샤오핑을 만났고, 서구에 개방적인 자세와 국제 감각을 익혔다. 귀국 후 그의 삶은 곧 중국 현대사의 가시밭길이었다. 1927년 장개석의 4·12 쿠데타 라는 유혈 학살 속에서 기적적으로 살아남았으며, 1934년 전설의 대장정  시기에는 군사위원회 부주석으로 마오쩌둥의 곁을 지켰다. 1만 2천 리의 사선을 넘나드는 극한 상황에서도 그는 특유의 냉철함을 잃지 않았다. 피비린내 나는 당내 권력 투쟁 속에서도 그가 숙청되지 않고 살아남았다는 사실 자체가 그의 천부적인 균형감각과 정치적 생존술을 증명한다.   1912년의 저우언라이(위키피디아) 외교의 달인, 평화공존 으로 세계를 매료시키다 1949년 신중국 수립 이후, 저우언라이는 초대 총리이자 외교부장으로서 고립된 중국의 얼굴이 되었다. 그의 진가는 국제무대에서 폭발했다. 1954년 제네바 회담에 등장한 그는 서방외교관들이 상상하던 거친 공산주의자 란 선입견을 완전히 깨뜨렸다. 유창한 언변과 세련된 매너, 유연한 협상 태도는 그를 공산주의의 신사 로 각인시켰다. 특히 1955년 반둥회의에서 제시한 평화공존 5원칙 은 불후의 명작으로 평가받는다. 주권 존중과 영토 보전 상호 불침략 내정 불간섭 평등 호혜 평화 공존 이 원칙들은 당시 미·소 냉전 사이에서 신음하던 제3세계 국가들에게 강렬한 영감을 주었다. 그는 서로 다르지만 같은 처지에 있다 는 논리로 아시아와 아프리카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이후 1972년 리처드 닉슨 미국 대통령과의 역사적인 만남과 헨리 키신저와의 밀실협상은 냉전의 얼음을 깨는 결정적인 장면들이었다. 키신저는 훗날 그를 자신이 만난 가장 인상적인 외교가 로 꼽으며, 그의 지성과 인간적 품격에 경의를 표했다.   1919년의 저우언라이(위키피디아) 문화대혁명의 광풍, 굴복하며 지켜낸 소방관 저우언라이의 생애에서 가장 논쟁적인 대목은 1966년부터 10년간 이어진 문화대혁명 시기다. 마오쩌둥이 촉발한 이 광기어린 숙청의 시대에 수많은 지식인과 동료들이 스러졌다. 국가주석 류사오치는 비참하게 죽었고, 덩샤오핑은 하방(下放, 아래로 내려 보냄)되었다. 그러나 저우언라이는 마오쩌둥의 곁을 지키며 자리를 유지했다. 일각에서는 그를 마오의 충견 혹은 비겁한 방관자 라 비판하기도 한다. 하지만 역사의 이면을 들여다 보면 그는 폭주하는 기관차 앞을 막아선 유일한 사람이었다. 그는 마오의 권위에 정면으로 도전하는 대신, 그 권위를 빌려 홍위병의 파괴로부터 자금성(고궁)을 지키고, 숙청 위기에 처한 핵심인재들을 몰래 빼돌려 보호했다. 살아남아 조금이라도 더 구한다 는 것이 그의 고통스러운 선택이었다. 이것은 단순한 생존본능이 아닌, 국가의 멸망을 막기 위한 처절한 현실주의적 리더십 이었다.   1920년대 프랑스 유학시절의 저우언라이(위키피디아) 죽음으로 완성된 진정한 지도자의 상 1976년 1월 8일, 저우언라이는 방광암으로 숨을 거두었다. 그의 유언은 강렬했다. 자신의 재산을 남기지 않았으며, 유골을 중국의 대지와 강물에 뿌려 달라고 했다. 무덤조차 만들지 말라는 그의 지시는 사후에 자신의 권위가 성역화되는 것을 거부한 처사였다. 그의 죽음이 알려지자 베이징 시민들은 자발적으로 천안문광장에 모여 흰 꽃을 바쳤다. 당국이 이를 제지하자 곧 4·5 청명절 사건 이라는 민중봉기로 번졌다. 총칼로 억누를 수 없었던 그 눈물은 민심이 누구를 향하고 있는지를 보여준 결정적 증거였다. 백성들은 마오쩌둥의 공포보다 저우언라이의 헌신과 온기를 더 깊이 사랑했다.   저우언라이가 황푸군관학교 정치학과 학과장으로 재직하던 1924년의 모습(위키피디아) 오늘 대한민국에 던지는 질문 현재 대한민국은 계엄과 탄핵 후 극우세력의 횡포로 몸살을 앓고 있다. 이런 혼돈 속에서 저우언라이의 삶은 우리에게 몇 가지 묵직한 질문을 던진다. 첫째, 성숙한 2인자 가 있는가? 한국정치는 모두가 태양이 되려 한다. 1인자가 되지 못하면 배신하거나 사라지는 극단적인 문화다. 그러나 저우언라이는 평생 2인자의 자리를 지키며 실질적인 국정운영의 엔진 역할을 했다. 정치적 야망보다 실무적 헌신 을 앞세우는 지도자가 우리에겐 절실하다. 둘째, 외교의 원칙 과 유연성 을 갖췄는가? 미·중 갈등의 틈바구니에서 한국은 늘 선택을 강요받는다. 저우언라이는 강대국의 논리에 휩쓸리지 않고 평화공존 이라는 자신만의 원칙을 세워 국제적 존엄을 지켰다. 눈치보기 외교가 아닌, 우리의 가치가 무엇인지 먼저 정립하는 당당함이 필요하다. 셋째, 진짜로 지키는 자 는 누구인가? 비난을 무릅쓰고라도 파국을 막기 위해 버티는 리더십이 필요하다. 겉으로만 선명성을 강조하며 정의로운 척하다가 정작 공동체를 파탄 내는 정치인보다, 흙탕물에 발을 담가서라도 실질적인 피해를 최소화하는 저우언라이식 책임윤리 가 필요한 시점이다. 넷째, 떠날 때의 뒷모습 은 어떠한가? 퇴임 후 사법처리가 반복되는 우리 정치현실에서, 무덤도 남기지 말라 는 그의 유언은 큰 울림을 준다. 권력을 개인의 영달이나 가문의 영광으로 여기는 탐욕을 버리고, 오직 역사적 소임만을 다한 뒤 깨끗하게 사라지는 리더를 우리는 언제쯤 만날 수 있을 것인가.   1924년 장개석(가운데)과 저우언라이(왼쪽)가 황푸군관학교 생도들과 함께 있는 모습(1924년).(위키피디아) 완벽하지 않기에 더욱 그리운 이름 저우언라이는 성인군자가 아니었다. 그는 권력의 냉혹한 논리에 순응하기도 했고, 때로는 비판자들의 말처럼 비겁해 보일 만큼 침묵하기도 했다. 그러나 그는 자신이 선 자리가 어디든, 그곳에서 백성을 위해 할 수 있는 최선의 일을 찾아냈다. 그가 죽은 지 50년이 다 되어가는 지금도 중국인들이, 그리고 세계인이 그를 그리워하는 이유는 명확하다. 그는 권력을 휘두른 사람이 아니라, 권력이라는 도구로 세상을 고친 장인이었기 때문이다. 동상의 높이보다 국민의 가슴 속에 남은 그리움의 깊이가 진정한 지도자의 척도라면, 저우언라이는 인류역사상 가장 성공한 정치인 중 한 명으로 남을 것이다.   1935년 저우언라이(왼쪽부터)가 마오쩌둥, 한 사람 건너 보구와 함께 연안에서(위키피디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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