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석의 한글철학 ㉞] 제나 (自我/Ego), 거짓 나 [카테고리 설정이 아직되어 있지 않습니다.] 몸나. 저밖에 모르는 외고집이다. 무얼 하고픈 ‘싶뜻’(欲望)에 사로잡힌 나다. 사로잡혔으니 굳어 뻣뻣해진 껍데기다. 그래서 ‘몸나’를 제 것밖에 모르는 ‘제나’라 한다. 이 ‘제나’는 텅 빈 ‘빈탕’(虛空)의 원수다. ‘빈탕’은 있는 그대로 둥글레 한 둥긂의 ‘참’(滿:眞)이니, 제나는 참의 거짓(假)이요, 거짓 나(僞我)다. 거짓 나를 끌어안고 사는 것이 삶의 깊은 슬픔이다. 이 슬픔은 삶의 구조다. 너나는 태어나면서부터, 이 껍데기를 ‘나’라 잘못 알고 하루하루 그 잘못 안 것을 굳혀 간다. 먹고, 자고, 차지하고, 이기려는 모든 몸짓은 제나를 살찌우는 의식이 된다. 그렇게 너나는 세상 속에 살아남으려 애쓰지만, 정작 자기 안에서는 가장 위험한 적과 타협한다. 이 삶은 생존이 아니라 연명이며, 활동이 아니라 소모다. 삶이 무거운 까닭은 세상이 험해서가 아니라, 거짓 나를 주인으로 섬기기 때문이다. 이 글은 그 오랜 착각을 거슬러, 제나를 떠나보내고 참나를 맞이하는 길을 묻는다. 나는 있는 그대로 참나다.
열쇳말 : 제나 - 몸나 - 싶뜻 - 굳음 – 원수
그림1) 상원사 동종의 비천상 탁본이다. 욕망의 중력을 벗어나 자유롭게 비상하는 영혼이다. 구름 사이를 자유롭게 떠다니는 비천의 모습은 ‘제나’의 껍데기를 벗어던지고 하느님의 생명(얼)을 입어 부활한 ‘얼나’의 경지를 상징한다고 볼 수 있으리라.
#1. 제나(自我): 저밖에 모르는
나를 모른다
너나는 눈만 뜨면 나”를 찾는다. 내가 밥 먹었어”, 내가 했어”, 내 돈이야.” 하루에도 수백 번씩 ‘나’를 부르짖는다. 그런데 정작 그 ‘나’가 누구냐고 물으면 꿀 먹은 벙어리다. 이름이나 직업을 대지만, 그것은 껍데기일 뿐 진짜 ‘나’는 아니다. 다석 류영모는 이 물음에 충격적인 답을 던진다. 이 몸나는 가짜 생명이라 우리는 참나를 찾아야 한다.”, 어머니 뱃속에서 나온 나는 참나가 아니다.”(다석어록) 다석은 이 가짜 나를 우리말로 ‘제나’라고 불렀다. ‘제나’는 ‘제(저)’와 ‘나’가 합쳐진 말이다. 저밖에 모르는 나”, 제 것이라고 우기는 나”라는 뜻이다. 한자로는 자아(自我)요, 영어로는 에고(Ego)다. 너나는 평생 이 ‘제나’가 진짜 주인인 줄 알고, 이놈에게 밥 주고 옷 입히고 비위를 맞추느라 등골을 뺀다. 하지만 다석은 단호하게 말한다. 내가 어쩌구저찌구하는 그런 제나(自我)는 멸망의 생명이라 쓸데없다.”(다석어록) 그놈은 결국 ‘너나’를 배신하고 흙으로 돌아갈 ‘멸망의 자식’이라고 말이다.
좁쌀만 한 감옥, 제나
‘제나’는 아주 작다. 그래서 ‘좀나’(小我)라고 한다. 다석이 그리 불렀다. 왜 작을까? 우주 한아(웬통: 전체)에서 떨어져 나와, 육신이라는 좁은 울타리 안에 갇혔기 때문이다. 제나는 세상을 너와 나”, 나와 남”으로 철저하게 가른다. 내 입에 들어가는 것만 중요하고, 내 가족, 내 나라만 챙긴다. 남이야 죽든 말든 나만 잘살면 그만이다. 이 철저한 ‘이기심’이 바로 제나의 본질이다. 다석은 사름은 있으면서 없다. 있긴 있는데 업신여긴다”(다석어록)라고 했다. ‘사름’이 곧 ‘사람’이다. 사람은 저절로 사르며 사라져 간다. 그러니 사람은 사름이다. 본이 우주 웬통을 다 품고 나온 ‘큰나’(大我)을 좁쌀보다 작은 ’좀나‘에 가두어 놓고, 그 안에서 아옹다옹 싸우며 괴로워한다. 제나는 만족을 모른다. 늘 남과 비교하고, 더 가지려 하고, 뺏길까 봐 불안해한다. 이 불안과 고통의 근원을 파고들면, 그 끝에는 항상 욕심쟁이 ‘제나’가 똬리를 틀고 앉아 있다. 붓다는 그걸 탐진치(貪瞋痴), 곧 탐하면서 눈 크게 부릅뜨고 성깔 부리는 어리석은 짓이라 했다.
껍데기는 가라
신동엽 시인은 껍데기는 가라”고 노래했지만, 다석은 이미 그 전에 사람의 몸뚱이라는 것은 벗어 버릴 허물 같은 옷이지 별것 아니다.”(다석어록)라고 꾸짖었다. 달걀을 보라. 겉을 감싸고 있는 딱딱한 석회질 껍데기, 이것이 제나다. 껍데기는 알맹이(노른자/자아의 본질)를 보호하기 위해 잠시 필요한 것이다. 하지만 때가 되면 깨져야 한다. 깨지지 않고 끝까지 나는 껍데기다!” 하고 고집을 부리면, 그 달걀은 병아리가 되지 못하고 썩어버린다(곤계란). 너나의 인생도 마찬가지다. 몸뚱이를 입고 태어난 이상 ‘제나’는 필요하다. 밥도 먹어야 하고 몸도 보살펴 돌봐야 한다. 그러나 그것은 어디까지나 ‘얼나(참나)’를 키우기 위한 임시 거처일 뿐이다. 그런데 너나는 주객이 뒤바뀌었다. 알맹이(얼)는 까맣게 잊어버리고, 껍데기(제나)를 닦고 광내느라 평생을 바친다. 얼굴에 바르고 바꾸고 고치고 씌워서 한껏 꾸미지만, 그래봐야 깨질 껍데기다. 다석은 우리는 이 껍질(몸)을 쓰기 전 또 벗어 버린 뒤에 어찌 될 줄은 모른다.”(다석어록)라고 알려주었다.
멸망해야 할 성질
제나는 본래 ‘짐승의 성질(수성, 獸性)’을 타고났다. 먹고 자고 짝짓기하고 싸우는 본능은 짐승과 다를 바 없다. 다석은 그런 몸뚱이를 몸나”라고 불렀다. 늙은이(老子)는 13월에서 나로서 큰 걱정이 있는 것은 내가 몸을 가진 때믄이여.”라고 꼬집었다. 몸이 있기에 배고프고, 아프고, 나이 들고, 병들어 죽는 두려움이 있다. 제나는 이 ‘죽음의 공포’를 이기지 못한다. 그래서 불끈 쥔 힘을 더 많이 가지려 매달리고 죽지 않는 약을 찾아 헤매며 발버둥 친다. 하지만 다석은 차갑게 호통을 친다. 이 몸나는 가짜 생명이라 우리는 참나를 찾아야 한다.”(다석어록) 몸의 차원을 넘어서지 못하면 사람은 허깨비보다 못한 존재가 된다. 제나는 타협하거나 뜯어 고쳐서 쓸 수 있는 물건이 아니다. 십자가에 못 박아야 할 껍데기다. 예수가 심지어 자기 목숨까지도 미워하지 않으면 내 제자가 될 수 없다”(눅14:26)라고 크게 꾸짖은 까닭이 여기 있다. 제나가 깨져야 얼나가 산다. 그런데 제나는 내가 깨고 싶다고 깨지는 게 아니다. 말씀으로 ‘말숨’을 쉬어야 한다. 줄탁동시(啐啄同時)의 숨이다. 안팎이 하나로 울고 쪼듯이, 안팎이 한가지로 숨 쉴 때 깨진다.
동거하는 비극
너나의 비극은 이 ‘원수’ 같은 제나를 ‘나’라고 착각하고, 평생 끌어안고 산다는 데 있다. 아침에 눈을 뜨면 제나가 속삭인다. 더 자, 일하기 싫어.” 밥을 먹으면 제나가 부추긴다. 더 먹어, 맛있는 거 더 내놔.” 남이 잘되면 제나가 질투한다. 저 꼴 보기 싫어.” 너나는 이 목소리가 내 목소리인 줄 안다. 그래서 제나가 시키는 대로 욕심내고 화내고 미워한다. 다석은 제나(自我)는 멸망의 생명이라 쓸데없다.”(다석어록)라고 했다. 내 영혼을 갉아먹고 결국 파멸로 이끌 놈을, 너나는 애지중지 떠받들고 있다. 이제 눈을 떠야 한다. 거울 속에 비친 저 얼굴, 저 욕심 덕지덕지 붙은 ‘제나’를 향해 손가락질해야 한다. 너는 내가 아니다! 너는 가짜다!” 이 선언이 터져 나올 때, 틈이 비로소 열린다. 제나와의 싸움, 그 피할 수 없는 싸움이 시작된 것이다. 죽어야 산다. 이것이 다석이 우리에게 던지는 지독한 역설이다.
그림2) 정선, 인곡유거(경교명승첩), 1740-1741, 종이에 수묵담채, 27.4 x 27.4 cm, 간송미술문화재단, 보물. 그림 속 수양버들을 보라. 굳은 것은 죽음이요, 부드러운 것은 삶이다. 바람에 몸을 맡기며 유연하게 휘어지는 버드나무는 부드러움은 삶의 짝”이라는 노자와 다석의 가르침을 잘 보여준다.
#2. 몸나: 큰 근심의 뿌리
몸뚱이가 나인가
거울을 보라. 눈 코 입이 달린 얼굴이 있고, 팔다리가 달린 몸통이 보인다. 너나는 의심 없이 이게 나야”라고 생각한다. 배가 고프면 내가 배고파”, 몸이 아프면 내가 아파”라고 말한다. 하지만 다석 류영모는 말한다. 어버이가 낳은 제나(自我)는 죽으면 흙 한 줌이요 재 한 줌이다.”(다석어록) 다석은 육신을 나라고 착각하는 것을 일러 ‘몸나’라고 불렀다. 몸(身)이 곧 나(我)라는 뜻이다. 하지만 이 몸나는 진짜 주인이 아니다. 너나가 입고 있는 옷이 내가 아니듯, 너나가 잠시 머무는 집이 내가 아니듯, 이 몸뚱이는 내 얼이 잠시 빌려 쓰는 ‘셋집’이요 가죽부대일 뿐이다. 그런데 너나는 주객이 전도되었다. 셋집을 주인이라 섬기고, 옷을 나라고 우긴다. 한평생 이 몸뚱이를 먹이고 입히고 꾸미느라 정신이 팔려, 정작 그 안에 사는 주인(얼)은 굶겨 죽이고 있다. 몸살이에 맘살이를 한가지로 돌리는 삶이라면 반드시 그 한 삶의 고갱이에 얼살이로 숨을 불어 넣어야 한다. 몸맘얼은 하나 한 꼴이다. 뫔(몸맘)에 얼 모심이 커야 얼빛이 환하다.
큰 근심은 몸
왜 인생은 괴로울까? 돈이 없어서? 사랑을 못 받아서? 아니다. 근본적인 원인은 ‘몸’이 있기 때문이다. 노자 늙은이는 13월에서 탄식하듯 말한다. 뭣을 일러 가장 큰 걱정이 아이 몸이아ㄴ고. 나로서 큰 걱정이 있는 것은 내가 몸을 가진 때믄이여. 내몸이 없는데 및으면 내 므슨 걱정이 있으리.” 정곡을 찌르는 말이다. 몸이 있으니 배고픔이 있고, 몸이 있으니 추위와 더위가 있고, 몸이 있으니 질병과 노화가 있다. 무엇보다 몸이 있으니 ‘죽음’이라는 절체절명의 공포가 있다. 누가 나를 욕하면 왜 화가 날까? 내 몸이 다칠까 봐 그렇다. 왜 돈을 모으려 할까? 이 몸을 편안하게 하려고 그렇다. 모든 걱정과 욕망은 이 ‘몸나’라는 뿌리에서 자라나는 독초들이다. 몸이 없다면 암에 걸릴 일도, 교통사고를 당할 일도, 늙어서 서러울 일도 없을 것이다. 그러니 몸은 축복이 아니라 ‘짐’이다. 그렇다고 몸을 함부로 해야 할까? 아니다. ‘몸성히’ 해야 한다. 몸이 성해야 맘이 놓인다. 맘이 놓여야 뜻을 태울 수 있다. ‘뜻태우’는 놓인 맘에 있고, ‘맘놓이’는 성한 몸에 있다. 그러니 ‘몸성히’가 가장 먼저다. 근심이 없어야 ‘몸성히’를 이룬다.
짐승의 성질, 몸나
‘몸나’의 본질은 짐승이다. 다석은 사람은 식색(食色)의 수성(獸性)을 지닌 제나(自我)를 넘어서야 한다.”(다석어록)라고 했다. 몸나의 관심사는 오직 식색(食色)이다. 맛있는 것을 배불리 먹고(食慾), 짝을 만나 쾌락을 즐기는 것(性慾), 그리고 편안하게 누워 쉬는 것(睡眠欲). 이것이 몸나가 원하는 전부다. ‘동물의 왕국’과 똑같다. 다석은 밥 먹고 똥 누고 하는 이 일을 얼마 더 해보자고 애쓰는 것은 참 우스운 일이다.”(다석어록)라고 했는데, 한 마디로 이 몸나는 밥통”이라는 것이다. 위로는 밥을 받아먹고 아래로는 똥을 싸는 기계라는 뜻이다. 고상한 척 점잔을 빼지만, 껍데기를 벗겨보면 그 속에는 똥오줌과 욕망이 가득 차 있다. 그런데도 사람들은 이 짐승을 ‘나’라고 떠받든다. 44월에서 늙은이(老子)는 묻는다. 이름과 몸을 더블ㄴ데 어떤쪽을 더앓고, 몸과 쓸몬을 더블ㄴ데 어떤쪽이 더많읋고, 얻음과 없앰을 더블ㄴ데 어떤쪽이 탈인고.”사람들은 ‘쓸몬’(財物)을 벌려고 몸을 혹사 한다. 어리석은 일이다. 하지만 더 어리석은 것은, 이 몸뚱이 하나 건사하겠다고 영혼을 팔아먹는 일이다. 몸나는 결국 흙으로 돌아갈 껍데기다. 껍데기에게 내 인생의 운전대를 맡기지 말아야 하리라.
똥 주머니 진 무덤
다석의 언어는 때로 서릿발처럼 차갑고 무섭다. 병든 곳을 꿰매어 삶을 연장하는 것은 찢어진 옷을 꿰매어 더 입는 것과 같다.”(다석어록) 몸나만 챙기는 사람은 걸어 다니는 송장이다. 입으로 들어가는 것들은 죄다 죽은 생명이다. 죽은 것들의 무덤이 몸이다. 그러니 너나의 몸은 똥 주머니”에 다름 아니다. 너나는 매일 씻고 향수를 뿌리며 이 몸을 가꾸지만, 사실 얇은 가죽 한 꺼풀만 벗겨내면 피고름과 오물이 가득하다. 아무리 비싼 음식을 먹어도 뱃속에 들어가면 똥이 된다. 다석은 몸의 욕망에 사로잡힌 사람은 못된 생각이 일어날 수밖에 없다.”(다석어록)라고 했다. 사람이 밥을 먹는 게 아니라, 밥이 사람을 먹어 치우는 꼴이다. 몸나를 위해 밥을 먹지만, 결국 그 밥심으로 죄짓고 욕심부리다 죽어버리기 때문이다. 몸나는 결국 ‘움직이는 무덤’이다. 얼이 빠져나간 몸은 시체다. 너나는 시체를 화장하고 매장하는 것은 두려워하면서, 정작 내 영혼이 죽어있는 이 ‘산 송장(몸나)’을 끌고 다니는 것은 두려워하지 않는다. 몸나가 주인 노릇을 하는 한, 너나는 무덤 속을 헤매는 귀신과 같다.
몸을 뒤에 둬야 먼저다
그렇다면 이 골치 아픈 몸을 없애버려야 할까? 아니다. 늙은이는 7월에서 기막힌 해법을 제시한다. 이래서 씻어 난 이, 몸을 뒤에 뒀는데 그 몸이 먼저고, 몸 밖에 섰었는데 그 몸이 계 있.” 이 말은 몸을 앞세우라는 말이 아니다. 몸을 ‘뒤에’ 두라는 말이다. 몸을 앞세워 모시지 말고, 뒤에 두고 크게 보라는 뜻이다. 몸나를 내 인생의 목적이 아니라, 얼나를 싣고 가는 ‘수레(도구)’로 쓰라는 것이다. 다석은 몸성히”를 강조했다. 몸을 성하게(건강하게) 관리해야 한다. 그러나 그것은 몸 자체가 소중해서가 아니라, 몸이 아프면 얼을 닦는 데 방해가 되기 때문이다. 내 몸을 나라고 생각하지 말고(外其身), 하늘이 주신 심부름꾼이라 생각해야 한다. 욕심껏 먹이지 말고, 일을 시킬 만큼만 먹여야 한다(小食). 쾌락을 좇지 말고, 무릎 꿇고 기도하는 도구로 써야 한다. 그때, 이 지긋지긋한 ‘몸나’는, 비로소 거룩한 얼을 담는 ‘성전’(聖殿)으로 바뀐다. 몸은 버리는 것이 아니라, 바르게 씀으로써 완성되는 것이다. 이것이 몸나를 이기는 유일한 길이다.
그림3) 불교의 ‘위태천(韋駄天)’이다. 내 안의 첩자인 제나와의 성전(聖戰)을 벌일 때는 위태천을 떠올려야 하리라. 불법을 수호하는 신장인 위태천은 칼을 들고 마군(魔軍)을 물리친다. 이는 내 안에서 솟구치는 미움을 베고 ‘제나’와 싸우는 ‘진짜 싸움’을 형상화하기에 적합하다.
#3. 싶뜻(欲望): 끝없이 ‘하고 싶다’는 고픔
‘싶다’는 병(病)
너나는 하루 종일 무언가를 원한다. 배가 부르면 눕고 싶고, 누우면 자고 싶고, 자고 나면 놀고 싶다. 돈을 벌고 싶고, 남보다 높아지고 싶고, 오래 살고 싶다. 이 끊임없이 ~하고 싶다”는 마음. 다석 류영모는 이것을 일러 ‘시픔’이라 했다. 시픔아 네 에민 시쁨 시름 손자 보더냐”[다석의 읊이(詩) 실컷 따위 말 조히 한 월줄”에서 가져옴] ‘시픔’은 ‘싶음’인데, 곧 ‘싶뜻’(欲望)에 다름 아니다. 그 말은 ‘싶다’와 ‘뜻’이 합쳐진 말이다. 그냥 스쳐 지나가는 생각이 아니라, 기어코 해내고야 말겠다는 끈질긴 의지가 되어버린 욕망이다. 이 ‘싶뜻’이 바로 제나(Ego)의 본질이다. 제나는 가만히 있지 못한다. 늘 무언가를 갈구한다. 다석은 이를 ‘하고잡’(欲望)이라고도 불렀다. 하고 싶어 잡다(잡히다)”는 뜻이다. 무엇인가를 하려고 안달이 나 있는 상태, 욕망에 사로잡혀 질질 끌려다니는 상태가 바로 ‘싶뜻’에 걸린 병이다.
죄는 ‘하고잡’에 있다
사람들은 살인이나 도둑질 같은 것을 큰 죄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노자 늙은이는 죄의 뿌리를 훨씬 더 깊은 곳에서 찾는다. 46월에서 그는 단언한다. 죄는 ᄒᆞ고자ᄒᆞᆯ만 ᄒᆞ단거보다 큰 것이 없고”라 했다. 여기서 ‘가욕’(可欲)을 다석은 ‘ᄒᆞ고자 ᄒᆞᆯ만’, 즉 ‘하고픈 마음이 끝없이 일어난다’로 풀었다. 다석은 외물(外物)에 끌려다닐 것 없고, 외물에 종노릇할 것 없다.”(다석어록)라고 딱 잘라 말했다. 왜 ‘하고잡’이 가장 큰 죄일까? 모든 범죄와 전쟁과 파괴가 바로 이 더 갖고 싶다, 더 하고 싶다”라는 마음에서 시작되기 때문이다. 히틀러의 ‘싶뜻’이 세계대전을 일으켰고, 인간의 탐욕스러운 ‘싶뜻’이 지구 환경을 파괴했다. 겉으로 드러난 행동은 결과일 뿐, 그 원흉은 너나의 마음속에서 입을 벌리고 있는 이 거대한 ‘싶뜻’이다. 그러니 감옥에 있는 죄수만 죄인이 아니다. 내 안에서 꿈틀거리는 ‘싶뜻’을 다스리지 못하는 한, 모두는 예비 죄인이다.
전쟁에 나가는 똥말(糞馬)
‘싶뜻’이 날뛰면 세상은 어떻게 될까? 노자 늙은이는 46월에서 아주 섬뜩한 그림을 보여줍니다. 셰상에 길이 있으면 달리는 말을 물려다가 똥거름 치는데 쓰고, 셰상에 길이 없으면 쌓ㅁ말이 드ᅟᅥᆯ에 나오니.” ‘싶뜻’을 다스려 길이 있는 세상에서는 달리는 말(馬)을 데려다가 똥거름 치는 데 쓴다. 말이 농사를 짓는다. 그러니 평화롭다. 그러나 지도자가 ‘싶뜻’에 눈이 멀어 길이 사라지면, 농사짓던 말이 전쟁터로 끌려간다(戎馬). 달리는 말이 싸움 말이 된다. 심지어 전쟁이 얼마나 급박한지 말들이 전쟁터 들판에서 새끼를 낳는 일이 벌어진다. 다석은 이를 보며 욕심은 똥이다”라고 일갈했다. 밭에 뿌리면 거름(糞)이 되지만, 머리에 이고 다니면 더러운 오물이 된다. ‘싶뜻’을 밭(生業)에 쓰면 풍요를 낳지만, 남을 짓밟는 데 쓰면 전쟁을 낳는다. 지금 내 마음의 말은 어디를 달리고 있는가? 밭인가, 아니면 전쟁터인가?
족함 모르는 아귀(餓鬼)
‘싶뜻’의 가장 무서운 점은 ‘만족이 없다’는 것이다. 늙은이는 이어 말한다. 화는 그만좋달줄 모름보다 큰 것이 없고, 허믈은 얻고잡(ᄒᆞ고자스리금) 함보다 큰 것이 없오라.” ‘싶뜻’은 밑 빠진 독이다. 아무리 부어도 채워지지 않는다. 백만 원을 가지면 천만 원을 갖고 싶고, 천만 원을 가지면 일억을 갖고 싶다. 이것은 갈증 난 사람이 바닷물을 마시는 것과 같다. 마실수록 더 목이 마르다. ‘그만하면 좋다’를 모르기 때문이다. 사람은 더, 더, 더욱”을 좋아한다. 다석은 나눔(分)이 있으면 웬통 하나는 모르게 된다.”(다석어록)라고 소리쳤다. ‘싶뜻’의 본질은 분수를 잃는 것이다. 나눔과 분별이 생기는 순간, 사람은 ‘웬통’(全體)를 보지 못한다. 입은 바늘구멍만 한데 배는 태산만 해서, 아무리 먹어도 배고픔이 가시지 않는 아귀처럼, ‘싶뜻’에 사로잡힌 제나는 평생을 헐떡거리다 죽는다. 만족(知足)할 줄 모르는 것, 그것이 바로 지옥이다. 이미 충분한데도 더, 더!”를 소리치는 그 목소리가 파멸로 이끄는 악마의 속삭임이다.
제 뜻 태우고 님 뜻 받으라
어떻게 해야 이 끈질긴 ‘싶뜻’을 끊을 수 있을까? 다석은 ‘뜻태우’를 해법으로 제시한다. 뜻(싶뜻)을 불태워 없애는 것이다. 너나의 의지 자체는 나쁜 것이 아니다. 문제는 그 방향이다. 그 뜻이 ‘제나’를 향하면 더러운 욕망(싶뜻)이 되지만, ‘얼나(하느님)’를 향하면 거룩한 ‘하늘 뜻’(天命)이 된다. 예수는 겟세마네 동산에서 제 뜻대로 마시고 아버지 뜻대로 하소서”(마태26:39)라고 기도했다. 이것이 ‘싶뜻’을 죽이는 결정적인 순간이다. 내가 하고 싶은 것(私欲)을 내려놓고, 하늘이 내게 원하시는 것(天命)을 따르는 것. 하고 싶어서 하는 일은 욕심이요, 해야 해서 하는 일은 사명이다.” 다석은 평생 자신의 ‘싶뜻’과 싸웠다. 맛있는 것을 먹고 싶은 뜻을 꺾으려 하루 한 끼를 먹었고, 편안하고 싶은 뜻을 꺾으려 널빤지 위에서 잤다. 그렇게 제나의 ‘싶뜻’을 죽였기에, 그의 영혼은 욕망의 중력에서 벗어나 자유롭게 비상할 수 있었다. 너나를 괴롭히는 것은 세상이 아니다. 안에서 이걸 내놔라, 저걸 내놔라” 보채는 ‘싶뜻’이다. 그 징징거리는 아이(제나)의 입을 틀어막아야 한다.
그림4) 팔상도(八상도) 중 ‘설산수도상(雪山修道相)’이다. 제나와 몸나를 이기는 유일한 길은 몸맘얼 닦이(修行)에 있다. 석가모니가 몸의 안락을 포기하고 뼈만 남을 정도로 수행하는 모습은 껍데기를 깨고 얼을 닦는 치열함을 상징한다.
#4. 굳음(剛强): 죽음의 무리
죽은 것은 굳다
갓난아기를 안아보았는가? 살결이 비단처럼 보드랍고, 팔다리는 문어처럼 흐물흐물하다. 생명력이 충만하기 때문이다. 반대로 시체를 보았는가? 차갑게 식어 있고, 나무토막처럼 딱딱하게 굳어 있다. 생명이 떠났기 때문이다. 노자 늙은이는 76월에서 생과 사의 기준을 명쾌하게 가른다. 사람이 살아서는 브들믈정 그 죽으며는 굳어뻐뻣. 푸나무가 살아서는 브더러 여린데, 그 죽어서는 말라 빠진다.” 너나는 ‘강한 것’이 좋고 ‘약한 것’은 나쁘다고 생각한다. 센 것과 므른 것의 차이를 알지 못한다. 근육을 단단하게 키우고, 의지를 강철처럼 다지려 한다. 하지만 생명의 이치는 정반대다. 브드럽고 므른 것, 브들므릇한”(다석이 입술소리를 적을 때는 ‘므브프’로 썼다) 것이 산 것이요, 굳은 것은 죽은 것이다. 한마디로 굳음은 죽음의 짝이요, 부드러움은 삶의 짝”이다. 제나(Ego)가 위험한 까닭은, 그것이 자꾸만 나를 ‘굳음’의 세계로 끌고 가기 때문이다.
마음의 동맥경화
제나의 특징은 ‘굳어 있음’이다. 생각이 굳어 있고, 마음이 굳어 있고, 표정이 굳어 있다. 이를 우리는 ‘고집(固執)’이라 부른다. 내 말이 맞아!”, 절대로 양보 못 해!” 제나는 자기 생각이라는 감옥에 갇혀, 남의 말을 듣지 않는다. 소통의 혈관이 막혀버린 ‘마음의 동맥경화’다. 물은 흐르면서 모양을 바꾸지만, 얼음은 딱딱하게 굳어 흐르지 못한다. 제나는 꽁꽁 언 얼음이다. 얼음은 주변을 차갑게 만들고, 부딪치면 깨진다. 다석은 몸 하나 가졌으니 편할 수 없다. 몸 없는데 가서야 무슨 걱정이냐”(다석어록)라고 했다. 나이 든 사람을 ‘꼰대’라 부르며 기피하는 이유도, 육체가 늙어서가 아니라 그 생각의 유연성이 사라지고 콘크리트처럼 굳어버렸기 때문이다. 뻣뻣한 목, 굳은 얼굴, 닫힌 마음. 이것이 바로 죽어가고 있다는 증거다.
산 것이 세다
세상은 강한 자가 살아남는다고 가르친다(適者生存). 그러나 노자 늙은이는 비웃는다. 셰고 큰것이 밑에 들고, 브들업고 므른것이 위로 간다.”(76월) 태풍이 불 때를 보라. 도시의 아름드리 큰 나무는 뻣뻣하게 버티다 ‘우지끈’ 부러지거나 뿌리째 뽑힌다. 하지만 가냘픈 갈대나 풀은 바람 부는 대로 납작 엎드려 춤을 춘다. 태풍이 지나가고 나면, 큰 나무는 부러져 죽어있고 갈대는 누웠다가도 다시 일어난다. 누가 진짜 센 것일까? 치아와 혀를 보라. 치아는 딱딱하고 강하지만 나이가 들면 다 빠져버린다. 그러나 혀는 부드럽고 약해 보이지만 죽을 때까지 남아 있다. 다석은 사람이 누릴 수 있는 자유는 기껏해야 좁디좁은 의지의 자유뿐이다.”(다석어록)라고 했다. 제나는 강한 척 허세를 부리지만 실은 약해서 부러지기 쉽다. 얼나는 부드러워서 꺾이지 않는다. 지는 것이 이기는 것임을 아는 유연함, 그것이 진짜 생명력이다.
껍데기를 깨라
제나는 자신을 보호하기 위해 껍데기를 만든다. 지위의 껍데기, 학식의 껍데기, 체면의 껍데기를 두껍게 두른다. 그리고 그 안에서 안전하다고 착각한다. 하지만 그 껍데기는 감옥이다. 알 속의 병아리가 껍데기를 깨지 못하면 그 안에서 질식해 죽는다. 딱딱한 껍데기(굳음)를 깨야 생명(부드러움)이 나온다. 다석은 제나가 죽어야 얼나가 산다”라고 했다. 이 말은 내 고집을 꺾고, 내 자존심을 무너뜨리라는 뜻이다. 딱딱하게 굳은 아집의 벽을 허물어야, 그 틈으로 하느님의 생명수(얼)가 흘러들어온다. 기도란 무엇일까? 뻣뻣한 무릎을 꿇는 것이다. 뻣뻣한 고개를 숙이는 것이다. 나는 아무것도 아닙니다”라고 고백하며 바짝 엎드리는 순간, 굳었던 마음이 녹아내리며 비로소 숨통이 트인다. 회개는 마음의 해빙(解氷)이다.
부들무릇하게
너나는 너무 긴장하고 산다. 어깨에 힘이 잔뜩 들어가 있고, 주먹을 꽉 쥐고 있다. 싸울 준비가 된 전사의 모습이다. 이것이 제나의 모습이다. 이제 힘을 빼야 하리라. 다석은 맘놓이”를 강조했다. 마음을 푹 놓아버리면 몸도 마음도 부드러워진다. 늙은이는 썩잘은 물과 같고나(上善若水)”(8월)라고 했다. 물은 네모난 그릇에 담기면 네모가 되고, 둥근 그릇에 담기면 둥글게 된다. 자기를 고집하지 않기에 무엇이든 될 수 있다. 얼음장 같은 제나로 살지 말고, 따뜻한 봄 햇살 같은 얼나로 녹아내려야 하리라. 녹아서 물이 되어 흘러야 하리라. 남의 허물도 덮어주고, 내 주장도 굽혀주어야 하리라. 셰상의 가장 브드럼이, 셰상의 가장 굳은데 달리여 뜀이여”(43월) 이 역설의 진리를 믿어야 한다. 너나가 부드러워질 때, 너나는 가장 세진다. 굳으면 죽어갈 터이고, 브들 므릇하면 살아갈 터이다.
그림5) 아귀(餓鬼)다. ‘싶뜻(욕망)’에 사로잡혀 만족을 모르는 ‘제나’의 본질을 가장 극명하게 보여주는 그림이다. 목구멍이 가늘어 먹지 못하고 늘 굶주린 아귀의 모습은 ‘시픔(욕망)’이라는 병을 가장 극명하게 보여준다.
#5. 원수(怨讐): 숨어 사는 첩자
원수는 속에 있다
너나는 늘 밖에서 적을 찾는다. 나를 괴롭히는 상사, 돈을 떼어먹은 사기꾼, 경쟁 회사, 혹은 적대적인 나라를 원수라고 부르며 이를 간다. 그러나 다석 류영모는 단호하게 고개를 젓는다. 제나(自我)가 제나의 수성(獸性)을 다스려 수성에서 해탈해야 자유인이 된다.”(다석어록) 수성이 바로 ‘제나(Ego)’다. 다석은 늘 하느님에게 짐승 노릇(獸性)을 내버리도록 해 달라는 것이다.”(다석어록)라고 기도했다. 왜일까? 밖에 있는 적은 기껏해야 내 돈을 뺏거나 내 몸을 다치게 할 뿐이지만, 내 안에 있는 이 ‘제나’는 내 영혼을 병들게 하고 나를 영원한 멸망의 구렁텅이로 끌고 가기 때문이다. 가장 무서운 적은 마음 밖에 있는 적군이 아니라, 마음 안에서 몰래 성문을 열어주는 ‘내부의 첩자’다. 제나는 바로 내 몸이라는 성에 숨어 살면서, 끊임없이 탐욕과 거짓을 불러들이는 멸망의 첩자다.
못 박힐 놈
예수는 누구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마태16:42)고 했다. 또 제 목숨(제나)을 사랑하는 자는 잃을 것이요, 미워하는 자는 영생하도록 보존하리라”(요한12:25)고 했다. 다석은 이 말씀을 뼈저리게 새겼다. 예수가 십자가에 못 박은 것은 육신이 아니라, 바로 인류의 제나였다. 너나가 미워해야 할 대상은 이웃이 아니다. 나 자신, 정확히는 ‘거짓 나’인 제나다. 제나는 타협의 대상이 아니다. 훈계해서 고쳐 쓸 수 있는 물건이 아니다. 제나는 깨져야 끝난다. 그래서 다석은 제나는 멸망의 자식”이라 했고, 반드시 깨고 나와야 할 ‘껍질’로 규정했다. 너나는 자기를 너무 사랑해서 탈이다(自己愛). 그러나 그 사랑은 제나를 살찌우는 독이다. 진정한 사랑은 제나를 놓고 얼나를 살리는 ‘거룩한 사랑’이다.
사랑하는 법
그렇다면 원수를 사랑하라”는 말씀은 무슨 뜻일까? 다석은 이를 기막힌 역설로 풀어낸다. 제나(自我)가 죽어야 참나인 얼나로 살 수 있다.”(다석어록) 아이가 사탕만 달라고 떼를 쓸 때, 사탕을 주는 것은 사랑이 아니다. 아이를 망치는 길이다. 사탕을 뺏고 울리는 것이 진짜 사랑이다. 제나는 끊임없이 쾌락과 욕망이라는 사탕을 달라고 보챈다. 이때 제나의 요구를 들어주는 것은 원수에게 굴복하는 것이다. 오히려 제나의 뜻(싶뜻)을 꺾고, 제나를 십자가에 매달아 죽이는 것. 그리하여 그 껍데기 속에서 신음하던 참생명(얼나)을 해방시키는 것. 이것이 원수를 진짜로 사랑하는 최고의 방법이다. 다석은 평생 자신의 몸(제나)을 절제했다. 그것은 몸이 미워서가 아니라, 몸속에 갇힌 얼을 너무나 사랑했기 때문이다.
나와 싸워라
너나는 이렇게 산다. 남하고는 터지게 싸우면서(戰爭), 나 자신하고는 너무나 사이좋게 지낸다(妥協). 제나가 시키는 대로 먹고, 자고, 욕심부리며 짝짜꿍이 맞는다. 이것이 멸망으로 가는 지름길이다. 다석은 거꾸로 살았다. 세상과는 다투지 말고(不爭), 제나와는 치열하게 싸워라(克己).” 남이 내 뺨을 때리면 그냥 맞아야 하리라. 그것은 내 껍데기가 맞는 것이니 상관없다. 그러나 내 안에서 저놈을 때려줘!”라는 미움이 솟구치면, 그때는 칼을 뽑아 그 마음을 베어야 한다. 그것이 진짜 싸움터다. 이 내면의 전쟁(성전, 聖戰)에서 승리한 사람만이 세상에 진정한 평화를 가져올 수 있다. 자기를 이긴 사람(克己復禮)은 남을 이기려 하지 않기 때문이다. 영웅은 천하를 정복한 사람이 아니라, 자기 안의 원수(제나)를 정복한 사람이다. 한잠 푹 잤으면 깨야 한다.”(다석어록)
제나의 장례
다석은 아침에 일어나면 제나(自我)가 온전히 없어져야 참나인 얼나가 드러난다.”(다석어록)는 생각으로 기도했다. 이것은 오늘도 제나가 죽고 얼나가 살게 하소서”라는 기도에 다름 아니다. 그는 하루하루를 제나의 장례식으로 삼았다. 원수와 동거하지 말아야 한다. 그놈은 너나의 밥상머리에 앉아 밥을 축내고, 너나의 잠자리에서 음란한 꿈을 꾸게 하며, 당신의 인생을 송두리째 삼키려 한다. 이제 선전포고를 해야 한다. 너, 제나야! 너는 나다. 너는 나의 거짓 나다. 나는 오늘 너를 사르고 빈탕에 든다. 웬통이 하나다. 하나가 곧 참나다.” 이 비장한 선언과 함께 제나를 떠나보낼 때, 너나는 비로소 눈부신 ‘얼나’의 솟구침을 맞이할 수 있다. 이 글월은 죽음의 장(章)이지만, 그 죽음은 생명을 위한 통과의례다. 제나가 죽어야 님이 오신다. 그러면 제나가 먼저일까? 아니다. 사르는 빛이 먼저다. 그 빛이 얼빛을 키운다. 얼빛이 터지면 제나는 저절로 빈탕이 된다. 이제 ‘뜻태우’를 피우라.
그림6) 법고대(法鼓臺)이다. 소리 공양을 베풀어 속세의 모든 축생을 제도하는 상징적 용구다. 마음에 이 법고의 북을 넣고 쳐 울리도록 해야 하리라.
[부록] 다석 류영모의 우리말 철학 용어 풀이
1. 몸나
뜻: 밥을 먹고 숨을 쉬며 욕망에 반응하는 생물적 나.
풀이: 몸나는 ‘나’의 전부가 아니라, 얼나가 잠시 쓰고 있는 껍데기다. 다석에게 몸나는 살아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은 연명에 매달린 가짜 생명이며, 밥과 잠과 욕망이 끊기면 곧 사라질 조건적 존재다.
2. 제나(自我)
뜻: ‘제(저) 것’만을 붙들고 우기는 거짓 나.
풀이: 제나는 ‘저밖에 모르는 나’라는 뜻으로, 다석이 자아(Ego)를 번역한 말이다. 제나는 끊임없이 더 갖고, 더 하고, 더 이기려 하며, 이 욕망의 작동이 모든 죄와 불행의 뿌리가 된다.
3. 얼나
뜻: 참으로 ‘나’라 부를 수 있는 근원적 생명.
풀이: 얼나는 몸나·제나를 넘어 있는 참나로, 죽고 사는 조건에 매이지 않는 생명이다. 다석에게 수행이란 얼나를 새로 만드는 일이 아니라, 제나가 물러나 얼나가 드러나게 하는 일이다.
4. 빈탕(虛空)
뜻: 텅 비어 있으되 가장 충만한 자리.
풀이: 빈탕은 아무것도 없는 공허가 아니라, 이미 가득 차 있어 더 채울 수 없는 ‘참의 자리’다. 다석은 이를 ‘둥글레 한 둥긂’으로 표현하며, 모든 분별과 욕망이 사라진 근원적 충만으로 본다.
5. 하고잡(可欲)
뜻: 하고 싶어 하는 마음, 욕망의 첫 싹.
풀이: 다석은 노자 46장의 ‘가욕’을 ‘하고잡’이라 풀었다. 이는 단순한 욕심이 아니라, 마음이 외물에 끌려가 주인 자리를 내주는 순간을 가리키며, 모든 죄의 씨앗이 여기서 싹튼다.
6. 싶뜻
뜻: 마음속에서 끊임없이 일어나는 ‘하고 싶다’는 방향성.
풀이: 싶뜻은 욕망의 생각 이전 단계로, 마음의 기울기다. 다석에게 수행이란 이 싶뜻을 억누르는 것이 아니라, 그 방향을 알아차려 주인 노릇을 하지 못하게 하는 일이다.
7. 수성(獸性)
뜻: 먹고, 자고, 차지하려는 짐승의 성질.
풀이: 수성은 인간 안에 자연스럽게 들어 있는 생물적 성향이다. 다석은 이것을 악으로 보지 않되, 얼나가 다스리지 못할 때 인간을 짐승의 삶으로 되돌리는 힘이라고 보았다.
8. 맘놓이
뜻: 마음이 붙잡힘에서 풀려난 상태.
풀이: 맘놓이는 체념이나 포기가 아니라, 제나의 집착이 풀린 자유의 상태다. 다석에게 맘놓이는 수승화강처럼 마음과 삶의 기운이 제자리를 찾은 평형의 징표다.
9. 멸망의 생명
뜻: 결국 사라질 수밖에 없는 조건적 생명.
풀이: 다석은 제나와 몸나에 매인 삶을 ‘멸망의 생명’이라 불렀다. 이는 저주가 아니라 판정으로, 사라질 것에 삶을 걸면 삶 전체가 소모로 끝난다는 뜻이다.
10. 참(眞)
뜻: 더하거나 뺄 것 없는 그대로의 온전함.
풀이: 참은 거짓의 반대 개념이 아니라, 이미 완결된 상태다. 다석에게 참은 ‘빈탕’과 통하며, 제나가 꾸며 낸 모든 가짜를 벗겨낼 때 저절로 드러난다.